홍콩과 닭갈비
8월5일 일요일 새벽 1시 터키 행 비행기!
인천국제공항을 떠난 지 30분 된 비행기 안에 남자 2명과 여자 2명이 눈에 띄었다.
이코노미석 중앙에 나란히 앉아 있는 사람들은 윤재, 신장식, 혜진과 선희였다.
“창진이도 같이 오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
“그러게 말이다. 그런데 선희 네가 제일 아쉬워하는 것 같다?”
“장식이 오빠! 알면서 왜 그래! 나랑 창진이랑 물과 기름인거!”
창진과 선희는 만나기만 하면 말다툼을 하긴 했었다.
“그러다 정 든다. 으하하하.”
“창진이랑 정 드는 일은 없을 거네. 회사에서 휴가를 안준다니 불쌍해서 그런 거야.”
“그러게 말이다.”
장기 휴가의 필요충분조건은 돈과 시간!
창진은 결국 함께 하지 못했다.
돈도 돈이지만 쌍팔년도 마인드로 사는 지점장이 문제였다.
“뭐 휴가? 뭐 보름?”
“에헤헤!”
“암. 휴가 가야지, 가서 리프레시도 하고 푹 쉬어!”
“에헷! 정말요? 정말요? 지점장님!”
창진은 눈치가 없는 건지, 그 때 까지도 지점장의 말이 진심인지 알았다고 했다.
“응! 푸욱 쉬라고. 휴가 끝나면 회사 나오지 말고, 아주 그냥 푹 쉬어~ 쭈욱~ 영원히!”
트루 드 몽블랑 건에 대해 보고했을 때 지점장의 얘기라 했다.
호실적과 윤재의 예탁금 덕에 분위기가 좋았지만, 2001년의 꼰대 지점장에게 보름 휴가는 용납이 안되는 모양이었다.
“말도 마! 형. 휴가 얘기 꺼냈다 하마터면 짤릴 뻔 했어!”
15일간의 휴가와 인생을 바꿀 수는 없는 법!
가장 아쉬워 할 사람이 창진이라는 걸 알기에, 누구도 더는 권유하지 못했다.
장식과 선희의 대화는 계속됐다.
“나도 혜진이 아니면 못갈 뻔 했어.”
“언니!”
혜진이 선희의 옆구리를 찔렀다.
“왜 그래? 뭔 일 있었어?”
“아냐. 일은....”
“솔직히 말해 봐! 우리 사이에 못할 얘기가 뭐 있다고.”
얼버무리는 걸 봐서 무슨 일이 있긴 있었던 모양이었다.
“사실은 내 여행경비를 혜진이가.....”
“혜진이가 내 줬다어?”
“그게 절반만.... 혜진이는 주인공이고 나는 조연이잖아. 그래서 내가 안가면 자기도 안가겠다고 하면서....”
“언니 말하지 말라니까!”
혜진은 선희의 입이라도 틀어 막을 기세였다.
“미안해. 혜진아! 엉겁결에 말해 버렸네. 그래도 나쁜 얘기 아니니까 너무 뭐라 하지 마.”
장식과 선희의 얘길 조용히 듣고 있던 윤재는 혜진을 슬쩍 바라봤다.
‘생각한 것보다 괜찮은 애네!’
◈ ◈ ◈
터키를 경유해 제네바로 가는 비행일정.
비행기만 최소 18시간 이상을 타야 하는 강행군이다.
어느새 혜진, 선희, 장식까지 자고 있었다.
창진과 지점장을 생각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장동석 팀장이 얘기가 생각났다.
“네가 받은 포상휴가니까 당연히 가야겠지만 꼭 가야겠니?”
2001년!
당시만 해도 직장인들이 마음껏 휴가를 쓰지 못했다.
회사 생활 포기한 간 큰 직원이나, 눈치 없이 휴가를 가던 시절이었다.
“요즘 왠지 양상무님이 너를 대하는 게 달라진 것 같은데, 이번 휴가가 치명타가 될 수도 있어!”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미 잡은 일정입니다.”
“그래. 네 뜻이 그렇다면 더는 반대하지 않으마. 개인적으로 휴가 사용은 권장할 일이라 생각한다. 내 맘 알지?”
“감사합니다. 팀장님!”
“여기 걱정은 하지 마라. 명수도 있고 오과장님도 있으니까!”
새삼 장동석의 마음이 고마웠다.
최근 양광수의 변화를 눈치 챈 것도 그렇고, 자신을 배려해 준 것도 모두 고마운 일이었다.
특히, 꼰대 마인드 때문이 아니라, 윤재의 미래를 걱정해 휴가를 만류한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휴가 문제를 종지부 찍고 장팀장과 대화를 조금 더 했었다.
“팀장님!”
“왜?”
“엊그제 공문게시판 보셨죠?”
“공문?”
“네. 건강검진 안 받으면 인사 상 불이익 준다는 내용이요.”
“아! 맞다! 예약한다는 게 깜박했네.”
연수원 1등을 차지한 윤재의 건의 중 하나였던 건강검진 의무화.
인사 쪽에서 제도화 해 공지를 한 게 몇일 전의 일이었다.
“미루지 마시고 오늘 꼭 예약하세요. 인사 상 불이익 받으시면 어떻게 하시려고?”
“녀석. 내 걱정 말고~ 휴가 준비 잘 해라. 인수인계는 오과장께 하고...”
몽블랑 트래킹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면 장동석 팀장의 검진 결과가 나와 있을 것이었다.
‘무작정 놀러만 가는 게 아니니까, 장팀장님을 포함해 내 휴가로 불이익을 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실제 윤재는 휴가를 계획하며 나름의 복안을 마련해 둔 상태였다.
휴가 다녀와서 할 일을 다시 정리한 뒤, 윤재도 여정을 고려해 잠을 자려고 했다.
그때 스튜어디스 한 명이 윤재 일행 쪽으로 다가왔다.
입을 헤벌쭉 벌리고 침을 흘리며 자고 있는 선희.
선희의 자리 밑으로 담요가 뒹굴고 있었다.
조심히 다가온 스튜어디스.
무릎을 살포시 꿇고 담요를 들어 선희에게 덮어줬다.
“음냐. 음냐! 야 너 좀 놀다 왔냐? 껌 좀 씹었냐고? 음냐.”
선희가 잠꼬대를 하며 몸을 뒤척였다.
고등학교 때 껌 좀 씹은 게 확실한 선희 다운 잠꼬대였다.
“킥킥!”
눈웃음이 귀여운 스튜어디스는 처음에 깜작 놀랐다가, 선희의 잠꼬대란 걸 알고는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윤재와 눈이 마주치자, 윤재에게 눈웃음을 지어 보인 뒤 자기 자리로 보이는 보조석에 앉았다.
다시 잠을 청하려는데 앞 사람들의 얘기가 들렸다.
오성그룹의 배지를 달고 있는 것으로 봐, 출장 가는 직장인들인 모양이었다.
“지금쯤이면 홍콩 근처를 지나고 있겠군.”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해외 출장을 많이 다녀서 그런지, 비행이 익숙한 모습이었다.
“응. 터키 가서도 현지처들 홍콩이나 보냈으면 좋겠다.”
“크흐흐. 출장 가는 맛이 그런 거지 뭐!”
두 명의 사내들의 개드립을 무시하고 잠을 자려고 했다.
하지만 신경이 거슬려 그런지 잠이 오지 않았다.
“야! 앞에 오봉 어때? 깔쌈하지 않냐?”
“오봉이 뭐야?”
“날으는 오봉이 스튜어디스 아니냐고?”
“크크크 미친 새끼. 그나저나 깔쌈하네. 귀엽고 키도 크고....”
두 명은 노골적으로 눈앞에 앉아 있는 스튜어디스를 품평하기 시작했다.
“쟤는 홍콩 몇 번이나 가봤을까?”
“조용해! 들려 이 미친 새끼야! 크크크.”
듣고 있는 윤재가 쪽팔릴 지경의 얘기들이었다.
‘저런 미친 소리를 다들 자고 있는 비행기 안에서 하고 있다니. 쯧쯧!’
윤재는 못 본 척 넘어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결국 그들이 선을 넘고 말았다.
눈웃음 스튜어디스를 놓고 음담패설 중인 놈들과 스튜어디스의 눈이 마주친 것이다.
영문을 모르던 스튜어디스는 놈들과 눈이 마주치자, 예의 그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가씨! 왜 웃어?”
자고 있는 사람들을 의식해 그나마 조용히 얘기하는 게 다행이었다.
“네?”
“왜 웃냐고?”
“아닙니다. 고객님께서 웃으시길래. 좋은 비행되시라는 의미에서 웃었습니다.”
“그래? 아가씨 홍콩 가 봤어?”
“네?”
“홍콩 가 봤냐고?”
직업이 직업인지라 진짜 홍콩을 가 봤냐는 의미로 알아들은 눈웃음 스튜어디스.
“여러 번 가 봤습니다.”
“크크크. 야! 여러 번 가봤단다. 여러 번!”
“크하하. 젊은 아가씨가 어찌 홍콩을 가봤을까?”
그제 서야 그들이 성희롱을 일삼고 있다는 걸 깨달은 스튜어디스.
직업이 직업인지라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어색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옅은 화장 너머에 붉어진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이런 화상 같은 새끼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돌려차기로 아구창을 날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참자! 참아!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 ◈ ◈
결국 잠을 자지 못한 상태에서 기내식 서비스가 시작됐다.
‘저 개자식들 때문에 잠도 못자고!’
윤재는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걸 느꼈다.
윤재의 등 뒤에서부터 이어오는 기내식 서비스.
마침내 윤재의 차례가 됐다.
“닭갈비 밥과 곤드레 밥이 있습니다. 손님!”
아까 그 눈웃음 아가씨였다.
가까이서 보니 주름이 2~3개 잡히는 눈웃음이 매력적이었다.
“닭갈비 밥 하나 주세요.”
윤재는 별 생각 없이 닭갈비 밥을 택했다.
눈웃음 그녀는 윤재네 라인에 대한 서비스를 마치고, 문제의 앞좌석으로 갔다.
“닭갈비 밥 없어요?”
“네. 고객님! 죄송합니다. 닭갈비 밥이 다 떨어졌습니다.”
“나는 닭갈비 밥이 먹고 싶단 말입니다. 닭갈비 밥 구해 오세요.”
오성맨 중에서도 음담패설을 주도했던 자식이었다.
닭갈비가 먹고 싶어 저러는 건지, 그냥 스튜어디스와 말을 섞고 싶은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아가씨! 100만원 가까이 주고 탄 비행기에, 먹고 싶은 밥도 못 먹는다는 게 말이 돼?”
“죄송합니다. 고객님!”
“됐어. 나는 닭갈비 밥이 먹고 싶으니까, 없으면 홍콩이라도 가서 가져와!”
“미친 새끼. 크크크.”
남들이 영문을 모른다고 생각하는 오성맨들.
둘이서 한참동안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가씨!”
윤재가 초승달을 불렀다.
“네. 고객님!”
“이거 손 안 댔으니까 곤드레 밥과 바꿔 주세요. 이건 닭갈비 밥 드신다는 분 드리시면 되겠네요.”
“네. 고객님! 감사합니다.”
눈웃음 그녀는 윤재에게 다가와 여러 번 고맙다고 한 뒤, 기내식을 바꿔갔다.
닭갈비를 처먹으며 오성맨 자식들이 키득거리고 있었다.
◈ ◈ ◈
비행시간만 11시간이 넘는 강행군.
마침내 이스탄불 공항에 착륙했다.
이제 여기서 다시 제네바로 가야했다.
“장식이형! 먼저 가서 기다리고 계세요.”
“왜? 무슨 일 있어?”
“화장실 좀 들렸다 가야겠어요.”
“내려서 가지 그래?”
“제가 좀 급해서요. 이미그레이션 마치고 만나요.”
“그래. 알았다.”
혜진, 선희를 데리고 장식이형이 먼저 비행기 복도를 빠져나갔다.
‘개새끼들. 고생 좀 해 봐라!’
앞자리의 오성맨들은 느긋하게 승객들이 빠져나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기내식을 먹고 얼마 안 돼 화장실을 갔던 윤재.
갤리에서 울고 있는 스튜어디스를 봤다.
사무장으로 보이는 스튜어디스가 그녀를 위로하고 있었다.
어지간하면 넘어가려 했던 윤재는 그 때 결정했다.
저 놈들을 골탕 좀 먹여야겠다고.
◈ ◈ ◈
비행기를 빠져나온 윤재는 놈들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곧 있으면 출국심사장으로 가는 놈들과 환승 게이트로 나가는 윤재의 길이 갈릴 터였다.
‘딱 좋네!’
비즈니스맨들답게 서류가방과 트렁크, 자켓을 들고 있느라 놈들이 여권을 바지 뒷주머니에 꽂아 두고 있었다.
‘덤 앤 더머 처럼 사이좋게 두 놈 다 고생 좀 시켜야지!’
윤재는 집중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놈들의 뒷주머니에서 여권을 빼냈다.
실로 감쪽같은 솜씨였다.
그걸 모르는 놈들은 앞만 보며 걷고 있었다.
윤재는 벽에 붙어서 여유 있게 놈들을 지켜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당황한 놈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내 여권 봤냐?”
“여권? 뭐야? 내 여권 어디 갔어?”
녀석들은 공항 통로에서 서류가방과 트렁크를 모드 열어 제치고, 여권을 찾느라 법석을 떨고 있었다.
‘그래! 고생 좀 해라. 닭고기 밥 먹은 값은 해야지. 정 못 찾겠으면 홍콩가서 찾아보시든가!’
윤재는 화장실 휴지통에 놈들의 여권을 버리고, 일행들과 합류했다.
3명이서 눈을 부릅뜨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하하. 미안! 내가 변비가 좀 있어서....”
“나는 또 여권이라도 잃어버렸나 식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