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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54화 (54/196)

리니언시

7월9일 월요일 영업3팀 회의실!

오랜만에 출근한 윤재를 환영해 주는 자리가 마련됐다.

“야! 우리 1등 사원께 박수 한번 쳐 줍시다.”

“유휴~”

“와~”

“야호~”

윤재에 대한 박수와 갈채가 쏟아졌다.

2001년 신입사원들 중에서 윤재가 전체 1위를 먹었다는 사실은, 이미 지난 금요일에 호남본부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한 참 동안 계속된 윤재의 칭찬이 끝나자, 오석진 과장님이 불쑥 말했다.

“야! 차대리! 너는 연수원 때 몇 등 했니?”

“예?”

“뭘 놀래? 연수원 때 몇 등 했냐고?”

“험. 험. 저도 프라이버시가 있습니다.”

차명수가 직원들의 눈길을 피했다.

“됐다. 말 안 해도 된다. 보나 마나 뻔하지. 토익 점수는 신발 치수고, 신입사원 연수 성적은... 뭐 보나마나 뻔하지.”

“참 나. 과장님은 왜 저만 못살게 굽니까? 그리고 저 꼴등은 아니었어요.”

꼴지는 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는 차명수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나름의 자부심까지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너 때는 신입사원도 많이 뽑았을 때인데, 한 100명 뽑았었지 아마?”

“딱 100명 뽑았는데, 제 뒤에도 1명 있었습니다.”

“뭐야 그럼 99등이었다는 얘기야? 이놈 완전 고문관이네. 너는 하여튼 3팀 와서 장팀장님 만난 덕에 용 된 줄 알아라!”

“하하하하하.”

사람들이 한참을 웃고 떠들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영업3팀 특유의 정겨운 분위기였다.

“그...”

차명수가 뭔가 한 마디 더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별로 도움 될 게 없음을 자신이 더 잘 알았다.

‘내 뒤에 있었던 1명이 중도 퇴사하는 바람에 99명중에 99등이었다고는 차마 말 못하겠다.’

잘 나가는 3팀의 수장 장동석이 분위기를 일신했다.

“자! 다들 그만들 하시고. 오늘은 윤재 오랜만에 출근했으니, 점심 같이 합시다. 윤재 네가 신락원 예약 좀 해 놔라.”

“네. 팀장님!”

“그리고 중요한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중요한 소식이라는 장동석의 말에 이목이 쏠렸다.

“지난주에 양상무님과 논의했는데, 최동식 과장 빈자리는 목포에서 주재윤 대리를 올려서 보강하기로 했습니다.”

일종의 3각 트레이드가 된다는 얘기였다.

과장 진급을 목전에 둔 주재윤이, 소위 잘 나가는 3팀으로 온다.

그리고 올해 진급한 광주의 영업1팀 직원이 목포로 내려간다는 것.

“그럼 영업1팀 빈자리는 누가 채우나요?”

인사문제에 유난히 관심 많은 차명수 대리가 물었다.

임금인상, 복지, 발령, 승진 소문 등 온갖 인사문제에 안테나를 세우며 사는 차명수 대리.

오죽 했으면 차명수의 별명 중 하나가 인사부실장이었다.

실제로는 있지도 않은 자리인 부실장 타이틀을 붙여줄 정도로, 그의 안테나는 초광대역 커버리지를 자랑했다.

“신입사원이 한 명 내려온다고 하더군요. 이름이 황성호라고 그랬던 것 같은데!”

“.....”

“황.성.호 요?”

윤재가 자기도 모르게 씹어 뱉듯 황성호의 이름을 말했다.

차명수가 고양이 눈을 뜨고 말했다.

“윤재 대답이 영 껄적지근 한 대요. 영업1팀은 형편없는 놈 받는 것 아닌가 몰라요?”

“하하하. 그런 것 아닙니다. 31명 중에서 공로상도 받은 재원입니다.”

윤재는 서둘러 얼버무렸다.

같은 팀도 아니고, 옆 부서에 발령 받아 오게 된 황성호.

어쨌든 지근거리에서 놈을 잘근잘근 씹어줄 수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황성호! 너는 광주에 오면 죽었다고 복창해야 할 거다!’

◈          ◈          ◈

회사 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누구나 고향 같은 팀이나 부서가 하나씩 있게 마련이다.

고향이란 꼭 좋은 기억만 있어서 좋은 게 아니다.

죽을 때 고향을 보고 죽는다는 여우와, 수만km를 거슬러 회귀하는 연어가 고향이 무작정 좋아서 그렇게 하겠는가?

윤재에게 호남본부의 영업3팀은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장동석, 오석진, 차명수 등...

직원들도, 거래처도 유독 정이 가는 사람들이 많은 곳!

그곳이 바로 영업3팀이었다.

3팀 직원들과 오랜만에 점심을 맛있게 먹고, 회의실로 돌아온 윤재.

고향에 돌아와 지역 어른과 만나듯, 장동석 팀장실에서 잠시 담화를 나눴다.

“하하. 우리 영업3팀이 연수원 1등 수상자를 2명 보유하고 있구나!”

“예?”

“17년 전에 나도 연수원에서 1등 먹은 적이 있다.”

“정말요?”

부끄러워할 일은 아닌데 장동석은 굉장히 멋쩍어 했다.

“1등 하면 HR에 올라가는 것 알지? 왠지 윤재 너 때문에 HR 포상란을 키우는 작업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예?”

“현재 HR시스템은 포상란이 비좁거든. 벌써 니가 받은 포상이 2개야. 오픈 이노베이션, 이노베이션 챌린지, 모범사원, 청년중역 등등! 1년에 2개씩 쓸어버리면 IT지원팀에서, HR 시스템 다시 손봐야 한다는 얘기가 나올 것 같다!”

장동석은 그런 덕담을 들려줬다.

‘사람들을 참 기분 좋게 해주는 능력이 탁월한 분이야!’

백화점부터 이어져 오는 장팀장과의 인연에, 마음이 포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장동석이 테이블에서 일어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모니터를 켰다. 이제 다시 업무 모드로 돌아가자는 신호였다.

“밀린 일은 오과장께 인계 받고!”

“네.”

“이번 주 일정 공유 좀 하자. 내일은 양상무님 저녁자리 있는데 네가 같이 가야할 것 같고, 모레는 광식협 모임 있어서 내가 가야 하니까...”

“광식협이요? 거기 나가기로 하셨어요?”

광.식.협은 광주식품유통협회 모임을 말했는데, 국내 식품관련 메이저 회사들이 모여서 저녁을 먹는 일종의 친목회였다.

문제는 단순 친목회였지만, 가끔은 공정거래법에 위반이 될 활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협회에 참석한 어느 회원사가 ‘밀가루 가격을 싸게 파는 대리점이 있어서 골치 아픕니다.’ 라고 말했다는 것만으로 공정거래법상 ‘담합!’이 될 수 있었다.

‘왜 장팀장님이 협회 나간다니까 불안하지? 가만 생각을 더듬어 보자!’

윤재는 2001년도에 있었던 일을 돌이켜 생각했다.

그는 광주유통협회 멤버들을 떠올렸다.

한국제분. 태상. 옹심. 갓뚜기......

‘유레카! 옹심이다. 옹심!’

왜 불안했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정확히 몇 월인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2001년 하반기에 옹심이 리니언시 제도를 이용했었다.

불공정 거래 행위를 자진신고하면, 신고자에게는 과징금을 부과하지 않는 제도가 리니언시 제도였다.

‘맞아! 옹심이 리니언시로 빠져나가고, 회사가 담합에 엮여 과징금을 냈었어!’

옹심의 라면가격 담합에 대한 신고로, 라면 제품이 있지도 않은 O2는 생생우동이라는 듣보잡 우동류를 보유 및 유통했다는 이유로, 과징금을 20억이나 납부해야 했었다.

본사 쪽 협회가 규모가 훨씬 컸지만, 과징금 액수를 줄이기 위해 시장이 작은 호남을 택해 자진신고를 했었던 것이다.

라면시장 절대 강자인 옹심이 리니언시로 면제받은 금액만 80억이 넘었다.

이대로 간다면 장동석이 면류 시장 가격담합을 뒤집어 쓸 가능성이 높았다.

시장점유율 1%도 안 되는 생생우동을 팔았다는 이유로!

그리고 협회에 참석했다는 이유만으로!

“왜 그래? 하하. 갑자기 회사 나오니까 적응이 안 되니?”

장동석이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윤재를 깨웠다.

“아닙니다. 그런데 팀장님! 상무님께 협회 나가겠다고 보고하셨어요?”

“아직 안했는데. 원래 1팀장님 나가실 차례인데, 팀장님이 요즘 3팀이 잘 나가니까 나보고 이번 달부터 나가라고 하시더군.”

“아! 잘 됐네요.”

윤재는 자기도 모르게 손뼉을 치고 말았다.

양광수 상무에게 보고를 했으면, 말을 뒤집어야 하니까 모양새가 좀 빠지게 되지만, 원래 순번대로 하자고 주장하면 큰 문제될 게 없었다.

육체적인 스피드뿐만 아니라, 두뇌 회전 스피드도 업그레이드 된 윤재의 머리가 초고속 회전하기 시작했다.

“팀장님! 21세기에 어울릴 법한 생각이 있는데 말씀드릴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갑자기 왜 이리 거창해지는 거니?”

“그게 있잖아요?”

◈          ◈          ◈

오전에 전라북도 쪽 일정을 마치고 광주로 복귀한 양광수 상무.

양상무에게 교육 후 복귀 신고도 할 겸 양상무 방을 찾았다.

유통협회 모임에 대한 보고를 겸해 장동석팀장과 지원팀장도 함께 했다.

“야! 우리 1등 사원 김윤재씨. 그래 연수원에서 1등 했다는 얘기는 들었다.”

“감사합니다. 상무님.”

“1등 상금이 얼마라고 했지?”

축하는 짧게 하더니, 포상금에 관심을 보이는 양광수.

전형적인 양광수 상무 스타일이라는 걸 윤재는 잘 알고 있었다.

“50만원입니다. 날 잡아주시면 제가 상무님, 팀장님들 모시고 소주라도 한 잔 모시겠습니다.”

“아니 아니야. 누가 들으면 그런 뜻으로 상금 물어봤다 오해하겠어. 나는 내가 1등한 적이 없어서 그냥 궁금해서 그런 거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은 이미 윤재가 살 술자리에 가 있는 표정이었다.

성인군자 같은 언변을 가졌지만, 행동은 말을 따라가지 못하는 표리부동한 인간이었다.

거래처에 자금지원이나 고가의 장비를 지원해 주는 경우에는, 거래처 사장이 술을 사거나 선물을 하지 않으면 결재를 지연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호남본부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런 루머가 있었다.

‘테이블 의자에 앉아서 보고 받으면 OK라는 신호고, 앉으라는 얘기 없어서 일어서서 보고 하는 경우는 NO라는 신호다!’

실제 앉으라는 얘기가 없어 스탠딩 보고를 30분 하다 퇴짜 맞았던 직원이, 거래처에서 양주를 접대한 뒤에는 앉아서 보고 했고, 그 자리에서 보고와 결재가 끝났다는 루머도 많았다.

어쨌든 양광수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건 그렇고 장팀장, 최팀장은 왜 들어왔어? 뭐 보고할 건이라도 있나?”

“네. 간단한 보고입니다. 유통협회 관련된 안건인데요...”

“그래? 우선 앉아서 얘기하지!”

지금 앉으라는 이유는 윤재가 50만원 포상금으로 술을 사겠다고 해서일까? 아니면 안건이 사소한 일이라 그런 걸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윤재는 인사를 올리고 임원실을 나왔다.

이제는 장팀장이 양광수를 요리할 차례였다.

◈          ◈          ◈

“협회를 나가지 말자고?”

양광수 상무의 오른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별로 맘에 들지 않는다는 신호였다.

“협회 모임이란 게 술 마시고 친목 도모하는 것도 있지만, 21세기는 투명함을 추구하는 세상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공정거래 위원회에서 이런 종류의 친목모임에 도끼눈을 뜨고 있다는 것 이구요.”

장동석이 슬슬 시동을 걸었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나? Risk가 있긴 하지만 협회 모임을 나가야 경쟁사 정보도 얻고, 또 필요할 때는 써먹기도 할 수 있어. 장팀장 괜히 술 먹기 싫어서 그러는 것 아냐?”

주량이 약하다!

양광수가 장동석을 99% 신뢰하고 좋아했지만, 1% 아쉽게 생각하는 게 주량문제였다.

“그런 건 아닙니다. 공정위 이슈가 워낙 큰 이슈고 과징금도 크고 해서...”

“됐어. 가만? 원래 7월부터 협회 참가할 사람이 1팀장 아냐? 맞지? 최팀장!”

번쩍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양광수가 지원팀장을 끌어 들였다. 완벽하게 윤재의 시나리오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원래 1팀장 차례인데, 1팀장이 3팀에 먼저 나가주라고 한 모양입니다. 상무님!”

양광수가 양쪽 눈썹을 순차적으로 꿈틀거렸다.

뭔가 문제가 해결됐다고 느낄 때 나오는 그의 버릇이었다.

“그럼 됐네. 1팀장에게 모임 나가라고 해. 3팀은 내년 7월이 순번이니까 그 때부터 나가고! 그럼 된 거지?”

“예. 그럼 그렇게 알고 나가보겠습니다.”

장동석과 최희갑 팀장이 임원실을 나왔다.

윤재는 임원실 앞에서 장팀장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어쩜! 윤재 너 시나리오대로 딱 맞춰 흘러가니? 참 놀랍다. 놀라워! 하하....”

장동석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팀장님은 순진하셔서 모를 겁니다. 양상무가 왜 협회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지....’

보통 팀장이 협회에 나가지만, 간혹 양상무도 협회를 나갈 때가 있다. 공짜 술을 회원사 법인카드로 원 없이 먹을 수 있는데, 그걸 마다할 양상무가 아니었다.

모임 지속을 위해 순번대로 하라고 할 것 같았는데, 역시나 예상대로 움직인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양상무는 물처럼 투명한 사람이라니까!’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리로 돌아와 잠자기 모드인 PC를 켰다.

‘팟!’

순간 잠자기 모드에서 깨어난 PC처럼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이거 잘 하면 좋은 카드가 될 수 있겠는데?’

아직 라면가격 담합 사건이 터지려면 시간이 좀 남아 있었고, 그 사이 설계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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