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라밸과 버킷리스트
“뭐라구요? 이미 매각하셨다 구요?”
“응. 가격도 괜찮고 나도 돈이 좀 급해서...”
“사장님! 제게 파시기로 하셨잖습니까?”
윤재는 어이가 없었다. 계약서를 쓰진 않았지만 그래도 약속을 했었던 사람이 이럴 수 있나 싶었던 것이다.
“그렇긴 했지. 근데 자네가 언제 올지 알고, 마냥 기다린단 말인가?”
“.....”
윤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부모님이 운영하셨던 신국제서점!
이미 다른 사람에게 매각했다는 소식이었다.
‘현금성 자산이 51억 8천만원이 있건만! 3억짜리 서점을 살 수 없다니....’
손님은 한명도 없었지만, 서점 사장님은 매각을 준비하는지 바쁜 모습이었다.
“새로운 매수자 정보 좀 알려주세요. 계약서 있으실 거 아닙니까?”
“계약서가 집에 있어서 말이야. 옆에 행복 부동산 가 보게! 거기 통해 계약했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윤재가 서점에서 나오려 하자, 사장님이 매수자에 대한 정보랍시고 들려준 얘기였다.
“50대 초반이나 됐을까? 살면서 그렇게 예쁜 아줌마는 처음 보네. 꾸미시기만 하면 연예인 뺨치겠더군....”
그 새를 참지 못하고 홀라당 서점을 판 사장이 야속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네. 그만 가보겠습니다. 번창 하십시오.”
윤재는 서점을 나왔다.
부동산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뒤에서 사장님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장사도 안 되는 요놈의 서점을 다들 왜 사겠다고 난리인지!”
◈ ◈ ◈
부동산에서도 별 다른 소득이 없었다.
“팔 생각이 없다는데?”
“4억에도 안 파신대요?”
“자네도 통화하는 거 들었잖나?”
“.....”
“연락처하고 성함이라도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직접 만나보겠습니다.”
“그 쪽에서 싫다고 하면 내가 알려주기 곤란하지.”
윤재의 심정을 모르는 부동산 사장의 사무적인 말투가 서운할 따름이었다.
“9월1일자로 소유권 바뀐다니까, 그 때 직접 서점을 찾아오면 되지 않을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원래부터 멘탈이 강했던 윤재는 회귀 후, 위기나 멘붕을 극복하는 능력이 더 커졌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럼에도 첫 번째 목표가 기약 없이 연기됐단 사실에,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마냥 그 일에 매달려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차분히 다시 구입하면 된다. 50억이 넘는 종자돈이 생겼는데 걱정할 게 뭐 있어?’
바쁜 하루였다.
일요일 저녁의 마지막 약속을 위해, 다음 약속장소로 이동했다.
◈ ◈ ◈
“윤재 형님! 대체 이게 얼마만이야? 100만년 만 아닌가?”
“자식. 오버 하기는! 장식이 형은?”
“아직 안 왔어요. 그 양반이 보통 바쁜 몸인가? 요즘 중국이다, 동남아다 해외여행이 붐이니까. 나도 간신히 모임 때나 보고 살아요. 형이랑 별로 다를 게 없어!”
“그나저나 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말도 마. 형! 형하고 약속 지키려고 혹독하게 다이어트 했어. 쵸콜렛 안 먹은 지 두 달 넘었고 일주일에 50km씩 뛰고 있다구.”
“그래? 어째 슬림해 졌다 했더니.... 으이구. 이 장한놈!”
윤재는 창진의 볼살을 꼬집었다.
아기처럼 통통한 창진의 볼은 꼬집을 때 제 맛이 났다.
“형! 이거 봐. 검진표랑 검진센터 소견서야. 합격이지? 합격?”
“알았어. 약속 지킬 테니 걱정 마라. 화요일에 사무실 한번 찾아 가마. 돈 보따리 싸들고.”
“1억 정도 더 가지고 오는 거야?”
“하하하. 모레 보면 알거다!”
“형! 진짜 재벌 되는 거 아냐? 연수원 있는 동안에 매매한 것도 모두 익절했어! 승률 100%야! 백퍼센트라고!”
창진이 거품을 무는 사이 나머지 멤버들이 속속 도착했다.
백화점 알바 동료들 정기 모임이었다.
신장식. 남창진. 조혜진. 김선희. 그리고 김윤재!
이렇게 다섯 명이 주기적으로 모이는 멤버였다.
나머지 멤버들은 어쩌다 한 번 올까 말까 했다.
모임이란 게 그런 것이다.
뭔가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사람은, 출석율이 떨어지게 돼 있었다.
오늘 모인 다섯 명은 나름 잘 나간다는 의미였다.
◈ ◈ ◈
“근데, 선희야? 혜진이는 왜 안 오는 거야?”
“창진아! 곧 올 거니까 좀 기다려라. 너는 어떻게 된 게, 나는 안중에도 없고 맨날 혜진이 타령이니?”
창진과 선희가 혜진을 두고 옥신각신 하는 중이다.
“야! 선희야. 내가 언제 혜진이 타령했다고 그래?”
“됐어. 그나저나 윤재 오빠!”
선희가 윤재를 불렀다.
“응. 왜?”
“혜진이 있잖아. 강민우 감독의 시네마테크랑 계약했어! 벌써 한 달도 넘었다!”
“정말?”
제법 놀랄만한 소식이었다.
충무로 카페 KINO에서 만난 게 엊그제 같은데 그게 벌써 한 달 전의 일이었다.
“흥행의 보증수표 강민우 감독. 오빠도 알잖아?”
“알지. 축하한다.”
“오빠는! 혜진이 일인데 되게 심드렁하네?”
“심드렁하긴 내가 뭘! 축하한다고 했잖아.”
선희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붉은 립스틱과 새침한 표정이 제법 잘 어울렸다.
“피~ 아무것도 모르면서. 혜진이가 강민우 감독 다음 작품, 여주인공으로 계약했다니까!”
진짜 놀란 사람은 창진과 장식이었다.
강민우와 계약했고, 여주인공이라면 혜진은 신데렐라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윤재는 호들갑을 떠는 창진과 장식이형을 본 뒤, 선희에게 물었다.
“분명 잘 된 일이긴 한데, 왜 선희 네가 더 좋아하냐?”
“혜진이 일에 좋아하면 안 돼? 그리고 나도 시네마테크랑 계약했다고.”
혜진에 이어 선희도 강감독의 작품에 출연한다는 얘기였다.
실로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정말? 나는 이게 더 놀라운 걸?”
“피~ 혜진이는 여주인공이고, 나는 그냥 껌 좀 씹는 애로 캐스팅 됐어.”
순간 윤재, 창진, 장식이 동시에 빵 터졌다.
껌 좀 씹는 캐릭터는 선희와 너무나 잘 어울렸던 것이다.
“껌 씹는 애? 야! 니 이미지랑 딱 이다. 딱 이야! 연기하고 자실 필요도 없겠네. 하하하하.”
윤재의 한 마디에, 장식과 창진도 배꼽을 잡고 웃었다.
선희는 전부터 표정이 풍부했는데, 그 중에서도 껌 씹는 표정은 은하계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그 때 조혜진이 헐레벌떡 호프집으로 들어왔다.
“오빠들! 좀 늦었지? 미안!”
혜진의 얼굴은 말 그대로 미안한 표정의 얼굴이었다.
연기도 저렇게 자연스럽게 잘 할 것 같은, 그런 얼굴이 혜진의 페이스였다.
“야! 가시내야. 일찍 좀 다녀. 10분도 넘게 늦었다!”
“윤재오빠! 장래의 슈퍼스타에게 너무 하는 거 아냐?”
혜진의 경호실장 같은 선희가 껌을 씹으며 말했다.
“슈퍼스타가 되려면 시간약속을 잘 지켜야지! 아무나 슈퍼스타 되는 줄 아냐?”
윤재와 투닥거리는 선희를, 혜진이 말렸다.
“됐어. 언니! 왜 윤재오빠랑 싸우는 거야? 오빠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 구만. 오빠! 충고 잘 듣고 시간 약속 칼 같이 지킬게. 오늘은 오는 길에 사고가 나는 바람에 늦었어. 미안해.”
혜진이 양손을 합장해 일행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으이구! 저 맹추!”
여태껏 주로 듣기만 하던 신장식이 혜진에게 넌지시 물었다.
“근데, 혜진이 너 계약했으면 계약금 받았을 거 아냐?”
“예. 받았죠.”
“얼마나 받았어? 물어봐도 되지?”
“1억 받았어요.”
조금은 수줍은 듯한 혜진의 답변이었다.
“1억??”
장식과 창진이 숟가락을 떨어뜨릴 정도로 놀랐다.
여행사를 다니는 장식의 연봉은 이천만원이 안됐고, 증권사 신입인 창진의 연봉도 삼천만원 언저리였다.
선희가 끼어들었다.
“에이. 그까짓 1억 가지고. 일억은 그냥 계약금이야. 촬영 끝나면 출연료에 러닝 개런티까지 받을 거야!”
“러닝 개런티?”
“창진이 너는 러닝 개런티도 모르냐? 흥행하면 성적에 따라 추가로 인센티브를 받는 거야.”
“레알?”
“레알이고 말고!”
창진과 장식은 계속되는 놀라운 소식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미 수십억 부자가 된, 윤재만이 담담하게 얘기를 듣고 있었다.
“돈 많이 벌었으니, 오늘 저녁은 혜진이 니가 사라!”
윤재의 얘기에 선희가 발끈했다.
진짜 선희는 혜진이의 경호실장이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오빠! 혜진이 돈 없어. 벌써 1억 다 써 버렸다니까!”
“1억을 그 새 다 썼다고? 얘가 이거 큰일 낼 여자네!”
“그런 게 있어. 창진이 너는 모르면 가만히 있어.”
선희는 남자들의 공격을 막아내며, 끝내 저녁 값을 회비로 처리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경호실장 실력이 제법이었다.
◈ ◈ ◈
“윤재야, 휴가 일정을 논의 하자고? 지금 7월 초인데?”
“네. 형! 그러니까 지금 논의해야지요.”
“염두에 두고 있는 곳이라도 있나 본데?”
“투르 드 몽블랑!”
여행사를 다니고 있는 신장식을 빼면, 투르 드 몽블랑이 뭔지 모르는 눈치였다.
“신입사원 연수에서 전체 1위 먹었습니다. 그랬더니 회장님께서 10일짜리 포상휴가를 줬습니다.”
혜진의 1억 만큼은 아니지만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1년도 안 돼 정규직이 된 것도 놀라운데, 명문대를 나온 동기들 사이에서 전체 1위를 했다니!
“진짜! 오빠 대단하다. 우리 동기들 인물이 많이 나오네. 영화 주인공 하게 될 혜진이! O2 그룹 전체 1위 먹는 윤재오빠!”
“선희야! 원투어 다니는 장식이형과 대진증권맨 창진이 빼면 서운하지!”
“그런가?”
선희가 미안한 표정으로 장식과, 창진을 바라봤다.
“창진아! 나 뿔나서 집에 갈 뻔 했다.”
“에헷~ 장식이형! 참아. 형 이번에 들어가면 무기징역이라니까!”
“하하하하.”
한창 젊었던 이십대 초중반의 시절!
그 시절에 고락을 함께 해서인지 이들과의 만남은 항상 유쾌했다.
“내친 김에 최대한 빨리 서둘러 봅시다. 8월에는 가야 현지가 춥지 않을 거 아네요?”
“그렇게 빨리 비행기 표랑 구할 수 있을까?”
“그래서 차기 원투어 대표감인, 형님께 부탁드리는 것 아닙니까?”
“짜식! 비행기 태우기는....”
장식이 손사레를 쳤다.
“형님! 형님은 꼭 원투어 대표하실 겁니다. 그리고 우리를 몽블랑으로 가는 비행기에 태워주실 거라 믿습니다.”
“다른 사람 얘기도 아니고 네 얘기니까, 내가 급히 한번 알아보마.”
장식의 표정에 묘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꼭 메이드 되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왜 투르 드 몽블랑이냐? 비용도 만만치 않을 텐데?”
“그냥. 버킷 리스트 중 하나에요.”
장식에게 투르 드 몽블랑에 대한 설명을 듣는 멤버들.
윤재는 그들을 보며 전생을 회상했다.
전생에서 결혼은 물론이고 변변한 연애도 못해 본 윤재.
오로지 워커홀릭으로 지냈던 삶이었다.
‘워라밸!’
회귀해 워라밸 삶을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이 몽블랑과 네팔이었다.
‘혹시라도 여자들이 갈수도 있는데, 히말라야는 너무 험하고 힘들어서 안 돼!’
윤재는 회귀여정의 워라밸 1호로 몽블랑을 낙점했었다.
뜻밖의 10일을 받은 포상휴가. 여름휴가를 더하면 보름정도를 뺄 수 있었다.
게다가 중소형 여행사를 차릴 수준의 돈까지 벌게 됐다.
놀러만 가는 게 아니라, 회사에도 멋지게 포장할 수 있는 복안을 준비해 둔 상태였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전생에서 해 보지 못한 경험을 하는 것.
이번 생 윤재의 목적 중 하나였다.
눈앞에는 장식형이 열심히 몽블랑의 역사와 트래킹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몽블랑은 스위스, 프랑스, 이태리부터 오스트리아까지 그 산세와 규모가 엄청나지. 몽블랑 정상은 4000미터가 훨씬 넘으니까!”
“뭐? 오빠? 진짜 4000미터가 넘는다고? 나는 그런데 못가네. 한국에서 껌이나 씹고 있을게.”
“하하. 선희야! 정상에 오르는 게 아니고 몽블랑 주변을 도는 거야.”
선희와 창진을 구박해 가며 대화를 리드하는 신장식.
윤재는 장식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전생에서 장식이형은 평사원에서 시작해, 원투어라는 한국 3대 여행사의 부사장 자리에까지 올랐었지.’
윤재는 장식과의 전생의 기억을 떠 올렸다.
장식의 설명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회사 지분도 꽤 많이 갖고 있었는데, 코로나 19로 절망적 상황에 처했던 장식형의 모습이 생각난다.’
윤재는 자신의 새로운 인생은 물론, 장식형의 인생까지 재설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멤버들의 인생도.
한참 장식의 설명을 들은 멤버들이 입장을 속속 정리했다.
“나도 함께 가고 싶어요!”
“나도.”
“나도!”
“좋아. 그럼 다 함께 가는 걸로 알고 일정 한번 잡아 본다.”
“오빠! 9월에는 혜진이랑 나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 꼭 그 전에 다녀오자 구요.”
“그럼 다들 오케이 한 것으로 알겠습니다. 콜?”
윤재의 얘기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경비는 N분의 일. 콜?”
선희가 껌으로 풍선을 불고나서 한 얘기였다.
그렇게 몽블랑 트래킹을 약속했다.
1년 전 혜진의 고백을 듣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전생과 다른 삶이 전개돼 왔었다. 일종의 나비효과였던 것이다.
버킷리스트 정도로 생각했던 몽블랑트래킹!
또 다른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키게 되는데, 5명 모두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