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행군 (2)
마침내 행군 당일 아침이 밝았다.
“무척 덥고 햇빛은 뜨거울 겁니다. 다들 사전 안내드린 대로 모자들 쓰고 오셨죠?”
“네!”
막상 행군 당일이 되니 신입들의 목소리에 힘이 있었다.
“간식 주머니와 물 잘들 챙기셨죠?”
“네!”
“혹시 모르니까 회사에서 지급한 비옷과, 자켓 등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그럼 조장들 인솔 하에 12km 트래킹 시작 합니다!”
“와아!”
신입 사원들의 함성소리가 연수원 광장을 달궜다.
공식 일정 중 마지막 조별 미션인, 행군이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출발 직전!
황성호는 대열에서 잠시 이탈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노 메이커! 국방색 카우보이 모자! 이 사람이 작업 대상입니다. 사진 참고하세요. 실수하지 않도록!’
황성호는 집안의 가신들에게 직접 찍은 윤재 사진을 전송했다.
‘고졸에 근본 없는 놈은 어쩔 수 없어! 메이커도 없는 모자를 쓰고 왔군! 어휴 모자 꼬라지 하고는!’
황성호는 혼자 킥킥 거렸다.
초록색에 빨간색이 배색된 구찌 모자를 쓴 황성호의 얼굴은 유독 탐욕스럽게 보였다.
그는 흡족한 표정으로 조원들에게 돌아갔다.
“자! 이제 너희들이 루이비통 값을 할 차례다. 단번에 역전해 버리자!”
전원 남자로 구성된 황성호의 조!
황성호를 선두로 촌놈 마라톤 하듯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 ◈ ◈
출발 준비를 마친 윤재네 조가 막 출발하려 할 때였다.
“형님!”
전날 윤재에게 존경심을 표한 정명철이 다가왔다.
“명철씨? 어쩐 일이에요?”
“헉. 헉. 윤재 형님! 부탁이 있습니다.”
행군 시작도 전에 헉헉 대는 정명철이 안쓰러웠다.
“부탁이요?”
“네, 저는 오늘 행군 마치자마자 다음 교육 일정 때문에 본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뭔가 눈치를 보는 듯 머뭇거리는 정명철.
“편하게 얘기해 보세요. 전 괜찮으니까!”
“다름이 아니라, 형님과 모자 교환하고 싶습니다.”
“제 모자요? 제 거 모자는 메이커도 없는 시장표인데....”
눈 앞의 명철의 모자는 딱 봐도 괜찮은 모자였다.
“윤재 형님! 존경하는 선배님과 모자를 바꿔 쓰는데 메이커가 대수입니까?”
“정말 괜찮겠어요? 명철씨 모자는 좋은 것 같은데...”
“아닙니다. 윤재 형님! 형님 모자 주시면 진심 가보로 간직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까지는 없는데.... 뭐, 바꿔 씁시다!”
“고맙습니다. 형님! 고맙습니다.”
정명철이 계속 머리를 조아렸다. 진심 좋은 모양이었다.
“하하하. 별것도 아닌 모자를 가지고...”
“형님. 죄송한데 이왕이면 모자에 사인도 하나 해주십시오.”
정명철은 네임펜을 내밀었다.
“하하하. 내가 뭐 유명인도 아니고....”
윤재는 흔쾌히 모자에 사인을 했다.
그리고 정명철과 모자를 바꿔 썼다.
명철이 쓰고 있던 노스페이스 모자는 윤재에게 잘 어울렸다.
그리고 윤재의 국방무늬 모자도 정명철에게 나름 잘 어울렸다.
명철은 교환한 모자를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푹 눌러썼다.
“야! 나 윤재형 모자 득템했다!”
정명철은 인사팀 소속 계약직 동료에게 달려가, 호들갑을 떨며 자랑하고 있었다.
◈ ◈ ◈
“송이씨! 괜찮아?”
“네, 괜찮아요. 오빠 얘기처럼 조치했더니 생각보다 편안하네요.”
한송이는 애써 해맑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맞다. 윤재야! 나도 군대에서 행군해 봤지만, 이런 방법은 몰랐는데 편하고 좋다.”
“다들 다행이네요. 자 그럼 좀 더 속도를 올려 볼까요?”
아침 일찍 윤재는 조원들에게 발바닥 테이핑과, 무릎 등에 X자 테이핑을 해줬다.
모두 주말 복귀 시 윤재가 자비로 준비해 온 물품들이었다.
등산화 또한 발과 틈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대한 조여 매도록 시켰다.
모두 특수부대 시절 익힌 노하우였다.
“우리가 많이 뒤쳐지진 않았죠?”
“응! 선두가 황성호네 조 같은데 저기 앞에 보이지? 얼마 차이 안 나. 반환점 돈 이후에 따라 잡을 수 있을 거야.”
“알겠어요. 저도 이 악물고 걸어 보겠습니다.”
한송이는 진짜 이를 악물었다.
“하하하. 송이야! 너무 무리하지 마. 안전이 최우선이다!”
군 생활 하면서 두 번의 천리행군을 했던 윤재.
12Km 정도의 행군은 그에게는 껌 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대열의 선두에서 조원들을 돌아보며 윤재는 생각했다.
‘다른 조들도 1~2명 정도는 걷는 게 익숙하지 않을 거다. 한송이만 힘을 내주면 우리 팀에게도 분명 기회가 온다!’
◈ ◈ ◈
반환점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황성호 조는 5분 전 이미 반환점을 돌았다.
나머지 네 개조는 아직도 반환점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한 조에 한 명씩 있는 여사원들이 문제였다.
그에 비하면 한송이는 비교적 씩씩하게 6km를 소화했다.
“자! 남은 6km에서 승부를 봐야겠죠?”
힘들어 하는 한송이와 조원들을 일일이 불러 모았다.
“송이야! 너 배낭 내게 다오. 그리고 현민이 형도 배낭 제게 주십시오.”
윤재는 한송이와 백현민의 배낭을 빼앗다 시피 낚아챘다.
“오빠! 이러지 않으셔도 돼요!”
“그래 윤재야! 이럼 내가 너무 미안하잖니.”
한송이와 백현민이 민망해 어쩔 줄 몰랐다.
“하하하. 괜찮습니다. 군대에서는 20kg 군장에 소총까지 들고 천리를 걸었습니다.”
“천리행군을 했다고?”
“네. 그러니 걱정마세요. 아까 보니 송이씨랑 현민 형님 페이스가 눈에 띄게 떨어졌어요. 우리 조 1등 하는 것 보고 싶다면 제 뜻에 따라 주세요!”
“.....”
“다른 사람들은 괜찮지?”
“응. 우리는 괜찮다.”
“자! 그럼 역전에 나서 볼까요?”
윤재는 익숙한 동작으로 한송이와 백현민의 배낭을 재정리했다.
“자! 마지막 3시간! 힘을 냅시다. 출발!”
전반과 달리 후반에 윤재는 대열의 끝에 섰다.
특수부대 시절의 기억이 저절로 떠올랐다.
“윤재! 니가 진정한 분대장이다! 듬직하다. 듬직해!”
군 시절 소대장의 얘기였다.
“진정한 리더는 먼저 돌격하고 나중에 퇴각한다. 난코스에 항상 앞장서고, 행군의 끝에는 항상 후미에서 분대원들 챙기는 모습. 진정한 군인의 표상이다.”
윤재는 군시절 이런 얘기를 많이 들었었다.
그의 눈앞에 군대에서 본 것처럼, 앞에 있는 조원들이 고군분투하며 걷고 있었다.
사람이 모여 조직이 되는 지라, 조직의 원리는 어디나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쉽지는 않겠지만 충분히 역전할 수 있다!’
배낭이 없다면 한송이도 백현민도 속도를 올릴 수 있었다.
제법 무거워진 배낭.
윤재는 발걸음에 힘을 주며 배낭을 고쳐 멨다.
◈ ◈ ◈
반환점을 돌아 한 시간 가량 행군했을 무렵.
15미터 길이의 다리가 눈앞에 나타났다.
다리 바로 건너편에 황성호의 조가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10분 정도면 역전할 수 있는 페이스다! 정 안되면 내가 한송이를 들고 뛰지 뭐!’
그런데 다리보다 더 눈에 띄는 게 있었다.
다리 앞에 몰려 있는 사람들과 그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였다.
‘무슨 일이지?’
한송이를 비롯한 윤재네 팀원들도 모두 행군을 멈춰야 했다.
“어? 저기 봐요? 저 사람 정명철씨 아네요?”
“잠깐만요. 어디 좀 봅시다.”
한송이와 사람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간 윤재.
부러진 나무 난간 밑으로 2명의 사람이 보였다.
한명은 분명 교육팀 계약직 사원 정명철이었다.
그 옆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앉아있는 교육팀 과장이 보였다.
“어떻게 된 일이죠?”
어느새 윤재 곁으로 다가온 한송이가 물었다.
“다리를 건너던 중 어떤 사람과 부딪쳐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제가 봤어요.”
옆에서 구경하던 등산객이 말했다.
“난간이 있는데 어떻게 밑으로 떨어졌단 말이죠?”
한송이의 말에 윤재는 난간을 봤다.
절반 정도 톱질이 돼 있는 난간!
‘어떤 놈이 등산로 다리에 톱질을 했단 말인가?’
석연찮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건 나중의 문제였다.
지금은 눈앞에 쓰러져 있는 정명철을 구하는 게 급했다.
“윤재야! 여기서 이러고 있을게 아니라 얼른 출발해야 하는 거 아니냐? 여기서 더 지체하면 황성호를 영영 역전할 수 없어!”
팀 내 최연장자 백현민의 얘기였다.
“그럴 순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정명철씨도 우리 회사 직원입니다. 위기에 처한 직원을 모른 척 하고 우리만 행군을 계속할 수는 없습니다.”
“하. 하지만.... 명철씨 구하다가 다 잡은 1등 놓칠 수 있어.”
백현민의 표정도 어제 밤 한송이 표정처럼 절박해 보였다.
모두 자신이 아니라 윤재의 1등을 바라고 있다는 점이, 윤재의 마음을 뜨겁게 했다.
“맞아요. 윤재오빠! 우리야 그렇다 쳐도 오빠는 개인 1등이라도 할 수 있어요. 명철씨는 우리가 어떻게 해 볼 테니 오빠라도 가세요!”
윤재는 한송이와 백현민의 얘기를 귓등으로 넘겼다.
‘나를 존경한다는 명철을 버릴 수 없다. 그것도 같은 계약직 아닌가?’
윤재는 재빠르게 배낭에서 쟈켓을 꺼냈다.
마음을 굳힌 윤재가 비호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기념으로 나눠준 바람막이 자켓과 비옷 등이 나왔다.
다른 조원들의 자켓 팔과 팔을 묶어 밧줄처럼 늘어뜨렸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윤재는 자켓 하나를 들고 절벽을 다람쥐처럼 뛰어 내려갔다.
◈ ◈ ◈
“명철씨! 어때요? 괜찮아요?”
“모르겠습니다. 어디 부러진 것 같진 않은데 일어설 수 없네요.”
“어디 좀 볼까요?”
윤재는 정명철의 몸을 살폈다.
발목이 심하게 부은 데다 바깥쪽으로 굽어 있었다.
골절 아니면 인대를 다친 것 같았다.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 코스 중간 중간 배치돼 있던 교육팀.
다행히 교육팀 과장님은 의료킷을 가지고 있었다.
“명철씨 핸드폰 좀 줘 봐요.”
윤재는 명철과 자신의 핸드폰을 발목 사이에 놓은 뒤, 의료킷의 붕대로 칭칭 감았다.
그랬더니 제법 괜찮은 부목역할을 하게 됐다.
“과장님! 명철씨 업을 수 있게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응. 그. 그런데 어떻게 하시려고?”
“업고 올라가야죠.”
“뭐? 이 절벽을 올라간다고?”
교육팀 과장이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윤재를 봤다.
윤재는 말없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119 불렀으니 기다리는 게 좋지 않을까?”
“여기는 국립공원도 아니라 119 도착까지 한 참 걸릴 겁니다. 자칫 해라도 지면 일이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자 됐습니다. 뒤에서 좀 밀어주세요.”
윤재는 명철을 업고, 가기고 온 자켓으로 명철의 엉덩이를 감싸 맸다.
몸무게가 70kg이 훌쩍 넘는 정명철!
하지만 윤재에게는 아이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회귀 후 스피드 뿐 아니라 파워까지 몰라보게 좋아져 있었다.
윤재는 명철을 업고 재빨리 습지를 건너 다리 밑으로 이동했다.
어느새 다리 주변에는 신입사원 동기들 4팀을 포함한, 교육팀과 인사팀의 직원들까지 모두 도착해 있었다.
“현민형! 제가 연결해 놓은 자켓을 다리 기둥에 묶은 뒤 내려 보내 주세요.”
“아! 이걸 밧줄처럼 이용하려고 그랬던 거구나! 알았다.”
“명철씨! 꽉 잡아요!”
“네. 형님!”
“다리는 좀 어때요?”
“아프긴 한데 참을 만 합니다. 형님이 해 주신 부목 덕분인 것 같습니다.”
“자 올라갑니다.”
윤재는 현민이 내려준 자켓 밧줄을 잡고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익숙한 동작으로 6미터 정도 되는 절벽을 올랐다.
숙련된 조교 같은 동작이었다.
회사 직원들과 등산객들이 신기에 가까운 윤재의 동작을 지켜보고 있었다.
윤재의 뒤에는 교육팀 과장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혼자 오르는 과장의 모습이, 정명철을 엎고 오르는 윤재 보다 더 힘들어 보였다.
◈ ◈ ◈
“잠시만 기다리세요.”
윤재는 명철을 바닥에 눕혀 놓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우지끈!”
“콰직!”
윤재가 발로 나무를 찼다.
어른 팔뚝만한 나뭇가지가 맥없이 부러지는 게 보였다.
“세상에! 어떻게 저럴 수가!”
윤재를 지켜보는 회사 직원들은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놀라운 괴력에 다들 넋을 잃고 바라볼 뿐이었다.
윤재가 잔가지를 정리하는데 벌들이 몇 마리 윙윙거렸다.
나무를 부러뜨리다 벌집이라도 건든 모양이었다.
‘하필! 이럴 때에.’
윤재 주변을 윙윙 거리던 벌 몇 마리는 갑자기 사라졌다.
‘휴~ 다행이다.’
짧은 시간에 윤재는 2.5미터 길이에 팔뚝만한 두께의, 나무 막대 두 개를 만들어왔다.
“윤재야! 그걸로 뭐 하게?”
“어떻게 저 굵은 나무를 나무젓가락 분지르듯 하는 거죠?”
“윤재씨 어떻게 된 거에요? 손은 괜찮아요?”
윤재를 둘러싸고 다들 한마디씩 던졌다.
“들것을 만들 겁니다.”
대답을 하며 윤재는 회사에서 지급받은 비옷과 자켓을 이리 저리 뒤집고 포갰다.
익숙한 동작으로 소매에 나무막대를 끼우니 그럴싸한 들것이 만들어졌다.
정명철을 부축해 들것에 눕게 했다.
“자 다시 출발해 볼까요?”
윤재가 앞에서 백현민이 뒤에서 들것을 들었다.
다행히 임시 들것 덕에 정명철을 쉽게 들 수 있었다.
이젠 윤재의 배낭과, 현민의 배낭을 송이와 나머지 조원들이 나눠 매야 했다.
“윤재형님!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명철씨! 죄송할 게 뭐 있어! 괜찮아.”
“형님. 1등 하셔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형님!”
정명철의 넓적한 옆얼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뒤를 따르던 한송이와 다른 조원들도 목이 메이는지 자꾸 허공을 바라봤다.
“그러지 말고 푹 쉬어. 다리도 아플 텐데....”
이젠 도저히 황성호를 역전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윤재의 표정은 밝았다.
그런 윤재를 바라보는 회사 직원들의 표정도 덩달아 밝아 보였다.
윤재의 오늘 행동을 지켜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윤재를 진정한 1등이라고 생각할 것이었다.
정명철을 119에 맡기고 자신의 길을 갔으면, 개인1위와 팀1위도 가능했을 윤재!
그 상황에서 윤재는 계약직 동료를 구하는 걸 택했다.
구조 과정에서 보여준 결단력과, 구조대원 못지않은 솜씨. 그리고 엄청난 스피드와 괴력!
한송이를 포함한 모두가 조용히 윤재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김윤재에 대한 진심어린 신뢰와 존경이 빛이 번져 나갔다.
그들은 앞으로 모두 윤재를 믿고 따르는 우군이 될 것이었다.
‘신입사원 연수 전체 1등보다, 이런 동기들이 내게 더 큰 포상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