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행군 (1)
신입사원 연수 종료 마지막 주간이 드디어 밝았다.
벌써 6주간의 일정이 끝을 보이고 있었다.
그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각종 미션을 휩쓸었고, 조원들과 과제를 수행하는 중간중간 술자리를 가지며 제법 친해져 있었다.
이제 2001년 상반기 신입들은, 마지막 조별 미션을 앞두고 있었다.
7월4일 수요일! 강의장!
“내일 있을 대망의 피날레! 12Km 트래킹 행군에 대해 안내드리겠습니다.”
다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웅성거림은 쉬 가라앉지 않았다.
“개인1등에게 칩 50개가 지급됩니다. 그리고 팀 종합 성적 1등조, 전원에게도 칩 50개가 지급됩니다.”
익히 알고 있는 내용들!
그럼에도 탄식과 웅성거림은 계속됐다.
현재까지 칩 보유 1위는 김윤재.
190개의 칩을 보유중이다.
2위 한송이가 칩 150개로 2위를 달리고 있었다.
1위 윤재와 4위의 차이는 100개가 넘게 나고 있어 역전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회사 창립이래 1위와 중위권의 차이가 이 정도로 벌어진 전례가 없었다.
그만큼 윤재는 동기들을 압도하는 실력을 보여줬다.
“교육팀장님! 건의사항이 있습니다.”
신입들의 시선이 머문 곳에 황성호가 일어나 있었다.
“성호씨? 왜 무슨 할 얘기라도?”
황성호는 비열함과 자신감이 공존하는 괴상한 웃음을 흘렸다.
그가 인사팀장에게 불쑥 제안을 했다.
“개인 1등, 조 우승해 봐야 칩 100개 아닙니까? 동기들 사이에 어우김이라는 얘기가 퍼진지 오래입니다.”
“어우김?”
“어차피 우승은 김윤재 사원 아니냐 이거죠.”
다시 동기들이 술렁거렸다.
실제 그런 소문이 퍼진지 이미 오래전의 얘기이긴 했다.
“그래서요?”
“이대로는 긴장도 재미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빙빙 돌리지 말고 본론을 얘기해 보세요.”
그렇지 않아도 황성호를 곱지 않게 보는 교육팀장이 살짝 역정을 냈다.
“이제 곧 수료인데, 긴장감을 위해서라도 칩을 더블로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
“개인 1등에 칩스 100 개, 조 우승팀에 각기 100개의 칩스를 지급해 달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여기 있는 대부분이 역전 우승을 노려 볼 수 있습니다.”
실로 터무니없는 요구였지만, 신입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자신들 입장에서는 손해볼 것 없는 제안이었던 것이다.
황성호의 승부수에 동기들의 시선이 윤재에게 쏠렸다.
교육팀장도 마찬가지였다.
“어떻습니까? 윤재씨! 황성호씨의 제안 괜찮겠어요?”
윤재의 압도적 성적 때문에, 이미 긴장감이 사라진 연수원 레이스가 조금 허탈한 건 교육팀장도 마찬가지였다.
윤재만큼 열심히 노력한 2~30%의 동기들은 물론, 별로 한 것도 없는 나머지 신입들의 눈빛에도 갈망이 반짝거렸다.
“서른 명 동기들의 간절한 눈빛을 도저히 외면하지 못하겠군요. 좋습니다. 콜 하겠습니다.”
“현재 압도적 1위 윤재 사원이 오케이 했습니다. 2위인 한송이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이번에는 시선이 한송이에게 쏠렸다.
한송이는 뭔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1등이 콜 했는데, 제가 거부할 명분이 없군요....”
한송이도 마지못해 오케이 해 버렸다.
그녀는 윤재를 바라봤다.
‘왜 그랬어요? 그러다 황성호 따위의 저질 인간이 1등하면 어떻게 하려고?’
한송이의 눈빛은 분명 그렇게 묻고 있었다.
‘송이 너는 모를 거다. 나는 네가 황성호를 인간 말종으로 직시하게 된 것만 해도 만족한다. 그리고 이변이 없다면 어차피 우승은 내가 하게 될 거야! 그 정도 자신은 있다고.’
윤재는 뿔난 얼굴을 하고 있는 송이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런 윤재를 보며 한송이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고 말았다.
60개의 칩을 보유중인 황성호!
행군에서 종합 1위를 하면 260개로 전체 1등이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60개인 황성호 보다 더 많은 칩을 갖고 있는 사람만 10명 가까이 된다.
윤재네 조원은 모두 황성호보다 칩이 많았다.
즉, 황성호에게 반드시 유리한 제안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황성호가 남들 좋으라고 이런 제안을 했을까?
결코 그럴 리 없었다.
한송이에 대한 집착과 윤재에 대한 질투에, 눈이 먼 황성호.
그는 지난 주말에 자신이 세워 놓은, 모종의 계획을 믿고 있었다.
◈ ◈ ◈
지난 주말!
4주차 스케줄은 조별로 공장 투어를 하는 것이었다.
생산 현장 방문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황성호는 집으로 가지 않고 청평으로 향했다.
행군 코스가 공개된 유명산 입구.
그곳에서 황성호는 몇 명의 사람들을 만났다.
집안에서 집사로 부리거나 경호원으로 부리는 사람들이었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일군의 무리가 황성호에게 90도로 절을 했다.
“그래요. 코스는 일러준 대로 답사하셨죠?”
“네. 도련님!”
“괜찮은 후보지가 있던가요?”
“네. 마침 적당한 곳을 물색해 뒀습니다.”
“어디 한 번 가볼까요?”
황성호는 자신에게 쩔쩔매는 몇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유명산 트래킹을 시작했다.
두 시간 반 정도 걸었을 무렵이었다.
“도련님! 이곳입니다.”
앞장서던 사내가 나무다리에서 멈춰 섰다.
“그렇지. 이거지. 이거야!”
눈앞에 펼쳐진 모습에 흡족해 하는 황성호.
“이 난간 밑으로 밀어 버리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래. 딱 좋네. 습지라 죽지는 않을 거고, 자갈도 적당히 있고 딱이야. 딱 좋아!”
질투와 증오심이 사람을 망친 것인지, 원래 황성호가 그 정도 인간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그는 행군을 앞두고 위험한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행군 당일 새벽 일찍 이곳에 와서 난간을 적당히 썰어 놓으세요.”
“네. 도련님!”
“그리고 제가 알려준 모자를 쓴 사람이 지나갈 때, 실수인 척 어깨로 밀어버리는 겁니다. 망원경으로 보고 있다가, 알았죠?”
“네. 도련님!”
“이번 일에 여러분들의 향후 20년이 걸려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죠?”
“네. 도련님!”
황태준에 이어 2대째 자신들이 모시게 될 황성호.
주인 앞에 쩔쩔매는 가신들의 모습은 조금 처량하기도 했다.
황성호는 자신의 천재적인 지략을 흡족해 하며 웃었다.
‘크하하. 김윤재 니가 아무리 잘 났어도 이번 함정을 피해가진 못할 거다. 크하하.’
그는 다시 가신들을 불러 모은 뒤, 이런 저런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황성호는 대역전을 위한 나름의 준비를 해 뒀던 것이다.
자신의 그런 비열한 준비를 믿고, 역전을 위한 터무니없는 제안을 했던 것이었다.
◈ ◈ ◈
7월4일 밤.
백현민의 방에 ‘O2하다’ 조원들 모두가 집결했다.
윤재네 조가 항상 모이는 방이, 팀 내 연장자인 백현민의 방이었다.
윤재네 조 외에 추가로 교육팀에서 지원 나온 직원들 2명이 함께했다.
“6주간의 연수기간! 공식적인 술은 금지해 왔으나 오늘은 쫑파티나 다름없습니다. 내일 산행이 있으므로 술을 많이 마시면 안 됩니다. 하지만 쫑파티인 만큼 저희 팀에서 소정의 술과 안주를 지원하겠습니다.”
해마다 행군 전날 쫑파티가 있었고, 교육팀에서는 술과 안주를 지원해 줬다.
교육기간에 대한 의견도 청취하고, 조별 활동에 대해 모니터링도 하기 위함이었다.
행군을 앞두고 술을 절제케 한다는 나름의 교육적 의미도 담겨 있다고 했다.
7월5일은 행군, 6일에는 회장이 참석하는 만찬이 예정돼 있었다.
“윤재오빠! 왜 그랬어요?”
“뭘?”
“왜 황성호 그 인간의 말도 안 되는 딜을 받았냐구요?”
“얘기했잖아! 동기들의 애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윤재의 너무 무덤덤한 대답에 다들 벙 찐 표정들이었다.
“맞아. 윤재 너 대체 왜 그랬어? 가만히 있으면 1등은 정해져 있는 건데... 괜히 사람들 기대감만 키워 버렸잖아.”
백현민도 윤재를 힐책했다.
“게다가 솔직히 저 내일 행군 자신 없다구요. 저 때문에... 혹시라도 윤재오빠나 우리 팀이 피해를 입지나 않을지....”
한송이가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말과 표정에서, 한송이가 얼마나 윤재를 위하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안전과 건강이 먼저고, 성적은 그 다음이죠. 지금껏 해 온 것처럼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기다리면 됩니다.”
지나칠 만큼 평정심을 잃지 않는 윤재의 모습에, 조원들과 교육팀 직원들 모두 조금은 감동받은 표정이었다.
“오빠! 우리는 괜찮으니 개인 1등을 노려서, 1등자리를 지키는 게 맞지 않을까요?”
한송이는 여전히 윤재의 1등자리가 걱정인 모양이었다.
전체 1등을 하는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자고 했던, 그 한송이는 이제 보이지 않았다.
“여태껏 팀웤을 위해 애썼다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한 조가 된 것도 인연인데 끝까지 함께하는 길을 택하겠습니다.”
입문연수 내내 꼼수와 반칙, 악행을 일삼았던 황성호.
그런 황성호에게 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전생에서도 악당이었고, 지금도 악당인 황성호!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게 철저히 이겨야 한다. 그런 부류의 인간들은 승복도 쉽게 안하니까!’
윤재는 조용히 술잔을 넘겼다.
‘산행이라면 이골이 날 만큼 해 봤다. 황성호 따위에게 질 리가 없어.’
윤재는 내심 자신이 있었기에 걱정하지 않았다.
“좋아요! 내일 저도 이 악물고 걸어 볼게요. 1등은 어려울 것 같지만 꼴찌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걸을 게요. 그게 차라리 도움이 될 것 같군요.”
“오! 송이 투지가 빛나네. 하여튼 안전이 우선이야! 우리 조원 모두가 무사히 결승선을 통과하도록 힘을 합치시죠!”
“좋습니다.”
O2하다 조원들은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으며 건배를 했다.
◈ ◈ ◈
쫑파티를 시작한지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교육팀에서 지원 나온 정명철 사원이 윤재 옆으로 다가왔다.
정명철은 교육팀 막내로 고졸 계약직이었다.
술이 약한 걸까?
정명철의 얼굴은 이미 벌겋게 익어 있었다.
게다가 술에 취한건지 반쯤 눈이 풀어져 보였다.
“김윤재 형님! 제가 형님으로 불러도 되겠습니까?”
“네? 갑자기....”
취중진담일까?
아니면 알콜의 힘을 빌린 용기일까?
정명철은 진심어린 목소리로 계속 얘기했다.
“형님은 저희 계약직과 고졸 사원들에게는, 영웅 같은 존재이십니다.”
“영웅이라뇨? 당치 않습니다.”
“아닙니다. 형님! 저도 죽도록 노력해 반드시 O2인이 되겠습니다. 형님! 존경합니다.”
정명철이 윤재의 손을 잡고, 무릎을 꿇었다.
“명철씨! 꼭 그렇게 되실 겁니다. 저도 함께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윤재 형님!”
술이 약한 편인 정명철은 하품을 하더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곧이라도 방바닥에 쓰러질 것만 같았다.
“자! 다들 내일 행군도 있는데 오늘은 이쯤에서 정리하시죠. 푹 자고 내일 건강한 얼굴로 봅시다.”
“네. 좋습니다.”
백현민의 정리 멘트로 쫑파티가 끝났다.
◈ ◈ ◈
윤재는 정명철을 그의 방으로 바래다주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고졸에 계약직인 정명철!
그리고 한송이와 황성호까지....
몇몇의 사람들 생각에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
옆방에서는 황성호와 일당들이 여전히 술판을 이어가고 있었다.
인사팀원들이 돌아간 뒤에 따로 다시 뭉친 것이었다.
듣고 싶지 않은 그들의 얘기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능력이 더 개선된 건가?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얘기가 잘 만 들린다!’
윤재는 황성호 일당들의 헛소리를 들으며,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윤재가 계약직으로 영업3팀에서 박박 기고 있던 2001년.
신입사원 연수에서 전체 1위를 했다는, 황성호의 기사를 사보에서 본 기억이 났다.
‘재수 없는 낙하산 놈이 신입연수에서 1등을 했다!’
당시에 사내에서 돌았던 소문의 요지는 그런 것이었다.
그 뒤 10년 정도 지나 한송이를 알게 됐고, 황성호가 그녀의 남편이란 사실도 알게 됐었다.
몇 년 뒤 황성호는 회사를 떠났고, 한송이와 이혼했으며 그녀에게 이래저래 아픔만 남겨줬던 것이다.
다시 옆방의 얘기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성호야! 우리도 내일 생각해서 이만 정리해야지.”
“그럴까? 잠깐만 기다려 볼래?”
“왜?”
“응. 줄 게 있어서 말이야. 별 거 아냐!”
황성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뭔가를 꺼내왔다.
“이게 뭐야?”
“응. 장지갑!”
“장지갑?”
황성호 일당들의 목소리에 설레임이 느껴졌다.
“그래. 내일 다 같이 힘내서 전체 1등 먹자고 내가 준비했다. 사실 뭐 우리 아빠가 준비한 거지만...”
황성호 일당들은 열심히 포장을 뜯었다.
“세상에! 루이비통 이잖아!”
“그거 짝퉁 아냐. 진퉁이다.”
“우리도 알지. 고맙다. 황성호!”
“야! 성호야! 나도 고맙다. 내일 죽도록 한 번 걸어볼게.”
“그래. 니들! 장지갑하고 시계 값 꼭 해야 한다. 크하하하!”
황성호와 그 일당들의 웃음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다리가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황성호 너는 기필코 이긴다!’
윤재는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었다.
중간중간 명상과 요가동작을 했더니, 마음이 가라앉았고 이내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