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억 원의 가치
6월 15일 금요일 오전!
전 날 버스폭행 소동이 있었고, 그로 인해 상품 팔기 미션에 대한 정리가 제대로 안됐었다.
인사팀장이 연단에 올랐다.
“일정에 조금 차질이 생겼는데, 어제 상품 팔기에 대한 정리를 하겠습니다.”
웅성거리던 실내의 이목이 인사팀장에 집중됐다.
“2001년 신입사원 상품 팔기 미션 1등은 ‘O2하다’ 조입니다. 매출 83만 4천원의 매출로 1등을 차지했습니다. 2등은 디카 1개를 판매한 ‘뉴밀레니엄조’입니다.”
동기들 대다수가 놀란 얼굴로 웅성거렸다.
단 하나의 물건도 팔지 못한 동기들이 수두룩했기 때문이었다.
“1등조 누가 나와서 성공사례 발표할 겁니까?”
조장인 윤재가 손을 번쩍 들었다.
“자! 1등한 O2하다 조의 김윤재씨를 박수로 맞아 줍시다.”
윤재가 사례 발표를 위해 앞으로 나가려 할 때였다.
“뭔가 문제 있는 거 아닙니까?”
황성호가 손을 번쩍 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성호씨!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당연하죠. 어제 저희 팀은 분명 300만원 어치 디지털 카메라를 팔았습니다. 판매대금도 인사팀에 넘겼구요. 그런데 어떻게 83만원이 1등이란 말입니까?”
이건 대체 무슨 소리인가?
전날 상품 팔기 미션에서 황성호팀이 300만원의 판매대금을 인사팀에 넘긴 건 사실이었다.
“아! 그 말씀이군요.”
순간 인사팀장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눈가에 주름이 많이 잡히는 눈웃음이 친근했던 인사팀장!
어디서 저런 차가운 표정이 나왔을까 싶을 정도로 무서운 얼굴이었다.
곧 냉정을 되찾은 인사팀장이 침착하게 말했다.
“황성호씨 팀에서 건넨 300만원에는 문제가 많아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말도 안 됩니다. 무슨 문제가 있단 말입니까?”
“그건 황성호씨가 더 잘 알 텐데요?”
다시 한 번 숨 막힐 것 같은 표정으로 황성호를 노려보는 인사팀장.
황성호는 순간, 간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성호씨! 성호씨네 팀원들을 생각해서, 단 하나의 근거만 말씀드리겠습니다.”
“.....”
마른 침을 삼키는 황성호의 표정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황성호씨 조에서 건넨 300만원 중, 10,000원 권 200장이 연속된 일련번호를 갖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모두 신권이었죠.”
“!!”
대체 이게 무슨 소리들인가?
신입사원들은 모두 놀란 눈으로 인사팀장과 황성호를 번갈아 쳐다봤다.
‘쯧쯧. 어딜 가나 새는 바가지구만!’
꾸부정하게 서있는 황성호를 보며 윤재는 혀를 찼다.
안 봐도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성호씨는 분명 6명의 다른 사람들에게 디지털 카메라를 팔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10,000원 권 일련번호가 연속될 수 있는 겁니까?”
강의장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룰을 위반했나 봐?”
“세상에, 어떻게 하지 말란 짓을 버젓이... 뻔뻔하지 않냐?”
동기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얼굴이 창백해진 황성호는 유구무언이었다.
“더 이의 없으면 김윤재씨의 성공사례 발표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옆집 아저씨처럼 친근해 보이던 인사팀장!
그의 단호하고도 일처리에 강의장에 정적이 찾아왔다.
황성호는 고개를 떨군 채 자리에 앉았다. 황성호네 팀원들은 황성호가 발품 팔아 디카를 판 걸로 알았기에, 그들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사건의 진실을 단순한 것이었다.
이틀 전!
황성호는 상품 팔기 미션에서 1등을 하기 위해 부친의 힘을 빌리기로 작정했다.
국회의원 3선에 빛나는 황성호의 아버지.
황성호는 아버지의 비서에게 연락을 했던 것이다.
“오후 2시 정각에 청평 읍사무소 화장실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면 내가 갈 테니까. 그 때 내게 삼백만원 건네주면 됩니다.”
황성호가 비서에게 한 얘기였다.
오전에는 마치 물건을 팔러 다니는 사람처럼 읍내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약속된 시간이 가까워지자 화장실에서 비서를 만난 것이다.
그 뒤 조원들과 인사팀에는 자신이 현란한 상술로 디카 6대를 팔았노라고 자랑했던 것이다.
하지만 O2 그룹 인사팀과 인재개발팀은 그렇게 허술하지 않았다.
인사실 직원과 알바생을 동원해, 여섯 개의 조에 대한 현장 활동을 지속적으로 체크하고 있었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는 디카 여섯 대를 가지고 간 황성호!
나올 때는 쇼핑백을 들고 나왔었다.
알바생을 풀었기에, 황성호는 자신의 활동이 체크되고 있음을 끝까지 몰랐다.
‘맘 같아서는 모가지를 꺽어 버리고 싶다만, 니 아버지 체면을 생각해 참는 거다.’
외유내강형 인사팀장!
이를 깨물며 황성호에 대한 악감정을 애써 억눌렀다.
발표하러 나오는 윤재를 볼 때의 눈빛은 다시금 인자한 눈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윤재씨! 발표 기대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박수 주세요!”
동기들의 박수가 울려퍼졌다.
◈ ◈ ◈
“50만원 리미트 때문에 다들 비싼 상품을 팔고 싶었을 겁니다. 저희 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공사례를 발표하고 있는 윤재.
윤재의 얘기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저희는 발상을 바꿔 본 것입니다. 50만원 짜리 하나 파는 거나 1,000 짜리 500개 파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이미 1등 매출로 자신의 생각이 옳음을 입증했다.
30명 동기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디카 1개를 판매한 조도 인맥으로 간신히 팔았고, 사기꾼 황성호를 포함해 그 누구도 10시간 동안 단 한 개의 물건도 팔지 못했다.
모두들 돈 벌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깨달은 것이다.
한송이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윤재를 보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주어진 물품을 단순히 파는 게 아니라, 부가가치를 창출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부가가치라는 말에 인사팀장의 초승달 같던 눈이 반달만큼 커졌다.
“상품을 주어진 상태 그대로 팔아야 한다는 규칙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스팸을 부침개로 조리해 팔기로 했습니다. 청평 시장의 상인이나 어른들이 주 고객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원자재를 가공해 판매하면서 부가가치를 만들어냈습니다.”
“와!”
윤재의 발표에 동기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왜 자신들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하는 탄성이었다.
“이 자리를 빌어, 청평읍이라는 시장의 특성에 대해 환기 시켜주고, 스스로 호객행위까지 앞장서 준 한송이 씨에게 감사하단 말씀 전합니다.”
“와!”
동기들이 일제히 한송이를 바라봤고, 한송이는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정확한 계산을 해준 백현민 사원. 더운 날 마트를 오가며 재료를 공급해 준 남군 사원. 그리고 이 뜨거운 날 땀을 뻘뻘 흘리며 부침개를 부쳐준 영식사원, 동호 사원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꽤 멋진 프레젠테이션이었다.
규칙에 대한 정확한 이해.
자신들이 노리고 있는 타겟 시장에 대한 고민.
타겟 고객층인 소비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방법과, 소구할 상품에 대한 준비까지.
해프닝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시장과 마케팅에 대한 A부터 Z가 모두 포함돼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함께 한 동료들에게 공을 돌리며, 고마움을 표하는 솜씨까지!
발표가 모두 끝나자 동기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화답했다.
윤재의 발표에 이어 인사팀장이 연단으로 올라왔다.
“제가 6년째 신입사원 입문연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 기억에 가장 신선했던 판매방식이었고, 완벽한 발표였다 생각합니다. 회사에서도 신입사원들의 이런 패기를 기대하고 이 미션을 진행하고 있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윤재씨와 O2하다 팀원들에게 박수 보내주십시오.”
윤재가 자리에 앉을 때 까지 박수는 계속됐다.
‘이로서 칩 55개를 확보했구나!’
윤재는 흐뭇한 표정으로 조원들과 주먹악수를 나눴다.
상품팔기 미션의 칩스는 인당 20개.
현재 스코어 기준! 확보한 칩만 놓고 봤을 때, 윤재네 조원들이 1등부터 6등까지 모두 독식하게 됐다.
점심식사를 먹으러 가는데 인사팀장이 윤재에게 다가왔다.
“윤재씨 덕분에 내년 신입사원들은 윤재씨의 판매방식에 대한 족보를 주고받게 될 것 같군요. 우리 팀도 고민거리가 생겼구요! 그래도 이런 고민은 기분 좋은 고민입니다. 하하!”
◈ ◈ ◈
금요일 저녁!
O2 그룹 신입사원들은 회사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해가 서산너머로 넘어가기 시작하는 시간.
회사 버스 TV에서는 7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반은 자고, 반은 TV를 보고 있었다.
“다음 뉴스입니다. 요즘 보기 드문 의로운 청년이 화제입니다. 가평군에 나가 있는 양일권 기자 불러 보겠습니다. 양일권 기자!”
여자 아나운서의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이어 기자가 등장했다.
“경기도 가평군! 젊은 남자 한 명이 버스에 올라타더니 버스 기사를 무차별 폭행합니다.”
TV화면은 윤재가 잘 알고 있는 그 화면이었다.
“이윽고 승객들에게도 해코지를 하러 다가가는 괴한!”
화면 밖으로 들려오는 기자의 목소리가 긴박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 때 한 젊은이가 괴한을 제압합니다. 영상을 한 번 보시죠!”
이윽고 영상이 나왔다.
회사 홍보용 조끼를 입고 있는 윤재가 포르쉐 일행을 제압했던 바로 그 영상이었다.
버스 안의 동기들은 어느새 죄다 깨어나 뉴스를 보고 있었다.
어제 윤재가 활약한 버스 안에 타고 있던 여대생이 자신의 촬영분을 방송사에 제보한 것이었다.
“오늘 가평경찰서는 버스 기사 폭행죄로 두 명의 젊은이를 검찰로 넘겼습니다. 다행히 버스 기사님은 건강에 큰 이상은 없다고 합니다. 이상 가평에서 NBC 뉴스 양일권이었습니다.”
다시 화면에 등장한 여 아나운서!
“이 영상이 오늘 하루 내내 인터넷을 달궜습니다. 가평군은 영상 속의 젊은이에게 가평 의인상을 수여키로 했다고 합니다.”
윤재에 대한 뉴스가 그렇게 끝이 났다.
30명의 동기들의 시선이 일제히 윤재에게 쏠렸다.
“자랑스러운 우리 동기! 김윤재에게 박수 한번 보내줍시다.”
백현민의 얘기였다. 그러면서 백현민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이내 버스 안에는 박수와 함께 김윤재를 연호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박수는 한참동안 버스를 달궜다.
‘김윤재! 이 개새끼!’
환호하는 사람들 속에 오직 황성호만이 이를 갈며 윤재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고, 황성호의 졸개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를 보고 있었다.
◈ ◈ ◈
밤 8시 반. O2 F&B 회장실!
홍보부문장과 마케팅부문장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퇴근 시간이 훨씬 지난 시간.
그럼에도 2명의 임원들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재준 회장은 자리에 앉아 27인치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이미 영상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 본 오재준이었다.
그의 입꼬리가 귀 밑에까지 찢어져 있었다.
영상을 다 본 오회장이 소파로 와서 앉았다.
“그러니까 이 영상의 주인공이 김윤재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회장님!”
“내가 얘기 했잖아. 보통 녀석이 아니라고. 딱 보고 떡잎이 다른 놈인 줄 알았다니까.”
“그러게나 말입니다. 정말 못하는 게 없는 친구입니다.”
홍보부문장이 손바닥을 비비며 말했다.
“영상을 봐! 우리 회사 로고가 찍힌 조끼를 떡하니 입고 있잖아!”
오재준이 다시 한 번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회사가 김윤재 사원 덕에 공짜로 홍보한 거죠. 방송3사 7시, 8시에 나왔고 9시 뉴스에도 방송된다고 합니다.”
“껄껄껄. 이거 완전 횡재 아닌가?”
“회장님 이것도 한번 보시겠습니까?”
홍보부문장은 오회장에 몇 장의 보고서를 건넸다.
“이게 뭔가?”
“넵. 오늘 김윤재 사원 뉴스에 대한 인터넷 댓글들입니다.”
“어디 보자!”
오회장이 읽는 보고서에는 윤재의 의로운 행동을 칭찬하는 댓글 일색이었다.
- 앞으로 O2 식품만 사먹을 거다!
-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의인이다!
- 산소 같은 남자! 장동근이 나오는 병맛 광고보다 저 영상의 O2 직원이 백배는 낫다.
- 진짜 산소 같은 남자는 장동근이 아니라 O2의 직원이었다.
- 헐! 영화의 한 장면인 줄!
뭐 그런 종류의 댓글들이 요약돼 있는 보고서였다.
“껄껄걸. 김윤재 그 친구가 자네와 마케팅 부문장이 못한걸 해냈군.”
“네? 무슨 말씀이신지...?”
2명의 부문장이 놀라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무슨 말은 무슨 말! 홍보와 마케팅이 100억 들이고도 망쳐놓은, New CI 홍보를 김윤재 그 친구가 해냈단 얘기지.”
오재준 회장이 지난 몇 달간 굴욕을 겪고 있는 회사 광고 얘기를 꺼냈다.
최초 60억에 추가 40억을 집행했지만, 산소처럼 사는 남자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면목 없습니다. 회장님!”
“껄껄걸. 내가 그 동안 우리 광고 때문에 스트레스 좀 받았는데, 스트레스가 눈 녹듯 사라졌네. 껄껄껄.”
“송구합니다. 회장님!”
“아냐. 괜찮아. 그나저나 김윤재 그 친구! 참 명물이야. 명물이고 말고.”
오재준 회장은 껄껄 웃으며 턱수염을 쓸었다.
“회장님 그래서 말인데요....”
“뭔가?”
“지금 김윤재 사원이 동기들과 입문연수 중입니다. 회장님 명의로 오후 시간에 피자라도 열판 정도 보내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음. 그거 좋은 생각이군. 그렇게 하게나!”
“네. 월요일 오후에 보내겠습니다.”
“오케이. 수고들 했어. 나가 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오재준 회장!
그는 흐뭇한 얼굴로 윤재가 등장하는 영상을 다시 돌려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