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추의 순정
서울 중구 충무로는 한국 영화산업의 메카이다.
윤재는 한송이 일행과 약속 시간에 맞춰 충무로를 찾았다.
O2 그룹은 90년대 후반부터 영화 및 문화산업을 새로운 먹거리로 밀고 있었다.
“그룹 복지카드 테스트도 할 겸 충무로 어때요?”
전날 한송이는 그룹사 극장과 베이커리가 있는 충무로에서 만날 것을 제안했다.
16~7년 뒤의 충무로의 모습을 알고 있는 윤재는, 자신이 마치 영화 세트장을 걷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길거리에 입점해 있는 대형 서점들을 지나치며 윤재는 부모님의 서점을 떠올렸다.
‘어서 빨리 서점을 되찾아야 하는데! 마소 아델라가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와야 할 텐데!’
윤재는 약속시간에 맞추기 위해 몸을 빨리 움직였다.
같은 시각 O2 멀티플렉스 내 카페 Kino.
한송이는 조원들 4명과 함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이게 선배들한테 받은 족보입니다.”
최근 5년 동안의 연수프로그램과 과제 등을 가지고 있는, 한송이가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열띤 논의를 펼치던 중 조원 누군가가 한눈을 팔았다.
“그런데 송이씨 저기 저 사람! 강민우 감독님 아네요?”
강민우 감독이라는 얘기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다.
강민우 감독이 누구인가?
한국 영화감독 2세대 중 가장 잘 나가는 감독이 강민우였다.
‘굿캅스’ 시리즈와 ‘와이프 죽이기’ 등을 연이어 히트시킨 당대 최고 스타 감독중의 한 명이었다.
한송이는 자신의 얘기보다 연예가에 관심을 갖는 동기들이 한심스러웠다.
하지만 나머지 조원들이 모두 강민우를 보고 있는 터라, 그녀도 어쩔 수 없이 시선을 돌려야 했다.
정말 강민우 감독이 조연출 같은 사내와, 다른 여자 2명과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딱 봐도 눈에 띄는 굉장한 미녀가 한 명! 그리고 개성파 조연으로 보이는 여자도 한 명 있었다.
특이하게 예쁜 여자는 껌을 짝짝 씹고 있었는데, 강민우라는 스타 감독 앞에서도 당찬 그녀를 보자니 왠지 웃음이 나왔다.
“누구지? 되게 이쁘네!”
“신인 배우인가?”
동기들이 수근 거렸다.
그 중 남자 팀원 한명이 객쩍은 작업 멘트를 날렸다.
“한송이 씨도 한 미모 하는데, 강민우 감독이 길거리 캐스팅 하는 거 아닌가요?”
“송이씨는 예쁘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요?”
다른 여자 팀원도 송이의 미모를 띄웠다.
“어맛! 저기 봐요. 강민우 감독이 송이씨 보는 거 아네요?”
“뭐야 정말? 진짜 이 쪽을 보내?”
강민우 감독이 몇 초 동안 자신들을 바라보자, 한송이 일행들은 덩달아 술렁거렸다.
강민우 감독이 다시 하던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을 때가 돼서야, 한송이 일행은 강민우 시선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동기들 앞에 윤재가 나타난 것이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아네요. 김윤재씨는 정각에 오셨는데, 저희가 너무 빨리 온 것이니까!”
이틀 만에 만났는데 한송이는 오랜만이라는 듯 손을 내밀었고, 윤재는 동기들과 악수를 하고 나서야 자리에 앉았다.
◈ ◈ ◈
한송이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은 윤재를 견제했다.
아직 자신들의 편이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동기들과 향후 미션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논의하는 사이, 같은 카페에서 용무를 보고 있던 강민우 감독이 자리를 떠났다.
“강민우 감독 나간다!”
“어라? 송이씨한테 결국 안 오고 마네?”
뭔지 모를 얘기를 속삭이며 아쉬워하는 동기들!
46년의 생을 이미 살아 본 윤재에게, 동기들의 그런 모습은 왠지 어리게 느껴졌다.
동기들은 다시 한 번 강민우의 영화와 배우들에 대한 얘기를 떠들기 시작했다.
그 때 강민우와 함께 있었던 남자가 윤재 일행에게 다가왔다.
동기들의 시선이 일제히 낯선 남자와 한송이에게 쏠렸다.
“저기 실례입니다만 대표님 명함과 제 명함입니다.”
이게 말로만 듣던 길거리 캐스팅이라는 건가?
그런데 캐스팅의 대상이 문제였다.
낯선 사내가 명함을 건넨 대상은 한송이가 아니라 윤재였다.
“시네서비스의 나홍식이라고 합니다. 저희 대표님이 강민우 감독님 이시구요.”
“그런데 왜 이걸 제게?”
어리둥절한 윤재와 더욱 어리둥절한 동기들!
얼굴이 새빨개진 한송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혹시 배우나 모델 관심 있으면 연락 주십시오. 그럼 좋은 시간들 가지세요.”
강민우 감독 밑에서 조연출을 하고 있다는 사내는 윤재와 일행에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 카페를 나섰다.
능력이 더 좋아졌는지 집중력을 발휘한 것도 아닌데, 밖에서 얘기를 나누는 강감독과 조연출의 얘기를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어때? 전달했어?”
“네. 잘 전달했습니다.”
“어떨 것 같니?”
“글쎄요. 반응은 좀 심드렁한 것 같던데요!”
“내 얘기 안 했어?”
“했습니다.”
“그래? 그런데도 심드렁했다고?”
“네. 저도 너무 덤덤해서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그런데, 감독님! 옆에 괜찮은 여자애도 하나 있던데 걔도 명함 하나 주고 올까요?”
“됐어. 오늘은 주연감 하나 건졌으니 이만 가자.”
강민우 감독은 카페 안을 슬쩍 돌아보더니 조연출과 함께 사라져갔다.
강민우와 조연출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카페 안이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우와! 윤재씨! 인물 좋은지 알았지만 길거리 캐스팅이라니!”
“대박 사건! 대박 사건! 상대는 한국 최고의 히트 제조기 강민우 감독이라구요.”
다들 호들갑을 떨고 난리인 가운데, 유독 한송이만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그런 능력도 없지만 의지도 없어요! 연기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우리 신입사원 연수 얘기나 합시다.”
윤재는 연기 얘기를 하다 자연스럽게 조혜진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선희가 이번 달에 CS서비스 면접 본다고 했는데, 어떻게 잘 봤나 모르겠다!’
상념에서 돌아온 윤재는 동기들과 다시 신입사원 연수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연예 얘기에서 간신히 회사 얘기로 물줄기를 돌렸나 싶은 순간!
“윤재 오빠! 여긴 웬 일이야?”
윤재도 사람들도 모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머문 곳에 백화점 알바 동료 김선희가 껌을 씹고 서 있었다. 그 뒤로 조혜진의 부끄러워하는 표정이 들어왔다.
윤재가 도착하기 전, 강민우 감독과 얘기를 나눴던 2명의 여자가 바로 조혜진과 김선희였던 것이다.
◈ ◈ ◈
윤재는 동기들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뒤, 혜진과 선희를 데리고 카페 밖으로 나왔다.
“축하해! 오빠! 이제는 진짜 샐러리맨처럼 보인다!”
선희가 호들갑을 떨었다.
“창진이한테 오빠 정규직 됐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여기서 보게 될지는 몰랐네.”
혜진도 반가움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혜진은 자꾸만 카페 안을 의식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한송이가 이쪽을 보고 앉아 있었다.
“그나저나 너희들은 여기 웬 일이야?”
“금요일에 오빠네 자회사 서비스팀 면접 보러 왔었거든. 올라온 김에 내가 혜진이랑 충무로 구경이나 하고 가자고 했지! 그랬는데 세상에 무슨 일 있었는지 알아? 대에에에에에바아아아악!”
선희는 두 주먹을 흔들고 발을 구르며 흥분했다.
“오빠! 오빠! 대박 연속이다. 오빠는 정규직 되고! 응? 진짜 대박의 연속이야!”
“왜? 로또라도 당첨됐어?”
“뭐래? 그게 아니고!”
선희는 여전히 흥분을 멈추지 못했다. 그녀가 말했다.
“혜진이가 오늘 누구 만났는지 알아? 강민우 감독을 만났어? 오빠도 강민우 감독 알지? 알지?”
윤재가 카페에 들어올 때는 혜진과 선희가 등지고 앉아 있었고, 강민우가 나갈 때는 혜진과 선희가 화장실에 갔었다.
그래서 영문을 몰랐던 윤재.
오늘 KINO 카페에서 강민우를 만나 신작 오디션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는 것이었다.
윤재에 앞서 길거리 캐스팅을 당한 사람이 혜진이었고, 선희는 혜진의 보호자 역할로 함께 있었다는 얘기였다.
“강감독이 꼭 오디션에 참가해 달라며 혜진이한테 구애를 했다니까! 오빠 진짜 대박이지 않아?”
“혜진이가 원래 예쁜데다 연기도 잘 했으니까!”
작년 여름! 혜진의 얼굴과 표정들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돌이켜 보니 혜진은 얼굴도 예뻤지만, 목소리와 톤이 아주 좋아서 연기에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언니는 왜 그래? 오디션 합격 한 것도 아니고. 부끄럽게 그러지 좀 마.”
“야 이 맹추야! 아까 강민우 감독 표정 안 봤어? 너한테 완전 빠졌더라 빠졌어.”
선희는 아직도 주먹과 발을 굴렀는데, 탈진할까 걱정될 지경이었다.
“뭐라더라? 수수함 속에 건강미와 섹시미를 갖고 있다던가? 맹추야? 내 말 맞지?”
“몰라. 됐어! 언니. 그만 좀 해. 그나저나 윤재 오빠. 회사 동기들한테 가봐야 하는 것 아네요?”
“응? 가야지. 하여튼 좋은 결과 있길 빌게. 진심이다. 다음 모임에 보자!”
“고마워요.”
윤재는 혜진, 선희와 작별 인사를 하고 일행들에게 돌아 왔다.
1시간 동안 벌어진 일들에 동기들은 충격과 공포를 느낀 모양이었다.
인기 감독 강민우 감독의 조연출에게 길거리 캐스팅을 당하질 않나? TV에나 나올 것 같은 미녀와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누질 않나?
동기들이 보기에 윤재는 딴나라에서 온 사람으로 보였던 것이다.
특히 한송이는 얼굴색이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 ◈ ◈
“저 여자 누구에요? 신인 여배우 같은데?”
“혹시 윤재씨 여자친구 아네요?”
“같이 있던 여성분도 매력적인데, 윤재씨는 어떻게 저런 미녀들을 알고 지내는 겁니까?”
동기들은 이제 신입사원 연수나, 퀴즈 등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쏟아지는 질문 세례를 듣다 보니, 자신이 기자회견이라도 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우리 연예 비즈니스 말고, 회사 얘기 하자고 모인 거 아닌가요?”
“윤재씨는 우리가 지금 그런 얘기가 귀에 들어오겠어요?”
동기들의 기세는 윤재가 거짓으로라도 스캔들을 얘기해 줘야 할 판이었다.
대충 둘러대던 윤재는 무심코 창밖을 바라봤다.
밖에는 혜진과 선희가 여전히 카페 안을 주시하고 있었다.
몇 달 전 안수애 아나운서를 만났을 때처럼!
둘이서 뭐라고 떠들고 있었는데, 집중력을 조금 끌어 올리자 선희와 혜진의 대사가 영화대사처럼 또렷하게 들렸다.
“야. 이 것아. 저기 봐. 저기!”
“언니 보긴 뭘 보라는 거 에요?”
“저기 윤재 오빠 옆에 저 여자 안 보여?”
“누구? 얼굴 하얀 여자?”
“그래 이것아. 너는 딱 보고도 모르겠어? 저 여자가 윤재 오빠 좋아하는 게 분명해. 내 눈은 못 속인다니까!”
혜진도 아까부터 한송이가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뭐 윤재 오빠야 워낙 남자답고, 인물도 좋고....”
“이 맹추야! 그러다 저 여자가 오빠 낚아 채 가면 어떡하려고 그래?”
“.....”
선희는 여전히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조금 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쟤 봐라! 보통 내기가 아냐. 얼굴도 좀 귀티 나게 생겼고. 명문대도 나왔을 거 아냐?”
“.....”
“오디션 준비하는 셈 치고, 얼른 가서 저 여자한테 냉수라도 끼얹으란 말이야. 윤재 오빠는 내 거야. 뭐 그러면서.”
“언니 미쳤어?”
“이 맹추 같은 것.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라고!”
“언니. 됐어. 대체 왜 그래? 막장 드라마 너무 많이 본 거 아냐? 됐으니까 그만 가자. 기차 시간 늦을라?”
“으이구. 맹추. 으이구. 맹추!”
선희는 앞서가는 혜진을 따라 가다가도 자꾸 윤재를 돌아 봤다.
“야. 혜진아! 저기 봐라. 저기 봐. 저 얼굴 하얀 백여시가 윤재 오빠한테 꼬리 친다. 옴마마. 옴마마. 저 백여시! 저 백여시!”
혜진과 선희가 마침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동기들의 집요한 추궁도 대충 잦아들고 있었다.
“O2 그룹이 영화 비즈니스도 하지만, 우리는 어디 까지나 푸드 소속입니다. 이제 영화 타령 그만하고 회사 얘기 합시다. 연수원 안 갈 거요?”
얘기는 그렇게 했지만, 마음이 콩 밭에 가 있는 동기들과 마찬가지로 윤재도 더 이상 신입사원 연수에 집중하는 게 힘들었다.
‘혜진과 한송이라? 묘한 인연이다! 모태 솔로에게 이런 과부하가 걸리는 날이 올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