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소는 사랑입니다 (1)
입문 첫 주 교육 며칠 만에, 동기 30여 명 사이에서 선두권 몇 명이 확실히 부각됐다.
윤재, 한송이가 2강을 이뤘고, 그 뒤를 대 여섯 명이 추격하는 형국이었다.
금요일에는 집으로 돌아갔다가, 일요일에 본사에 재집결해 청평으로 오는 스케줄이 5주 더 진행될 예정이었다.
앞으로 5주가 본격적인 경쟁의 시작이었다.
회사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오는 길.
한송이는 굳이 윤재 옆에 안겠다고 쫒아오더니, 지금은 창문에 기대 졸고 있었다.
‘저렇게 체력이 약해서야!’
잠마저 단아하게 자고 있는 한송이를 보며, 윤재는 그녀의 체력을 걱정했다.
‘혜진이! 안수애! 한송이!’
윤재는 혼자 3명의 후보들을 평가하다, 이내 생각을 고쳐 먹었다. 여전히 그는 부모님의 서점도 되찾지 못한 상태였다.
버스 안을 둘러보니, 타이트한 일정과 성적에 대한 압박감으로 다들 피곤했는지 의자에 몸을 맡긴 채 자고 있었다.
‘인세와 신동화건설로 1억은 만들었고, 빨리 3억을 만들어 일단 부모님 서점을 다시 사들이자!’
연수원은 일정 자체도 너무 타이트했고, 외부 인터넷을 막아 놓은 바람에 주식은 해 볼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광주 내려가서 창진이를 만나서, 일단 까먹지는 못하게 단도리를 좀 해야겠어!’
다들 곯아 떨어져 있었지만, 윤재는 강철 체력인지라 혼자 이런 저런 구상을 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발신 국가가 일본인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여보세요?”
“헬로? 미스터 욘재. 아이 엠 샤티마 아델라! 나이스 투 미트 유!”
독특한 발음의 영어를 구사하는 외국인의 전화였다.
자고 있는 동기들을 생각해, 조용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I’m not Yon Jae! My name is Yun Jae. Who are you?”
“반갑습니다. 욘재! 나는 매크로소프트 인도아시아태평양 본부의 매니저다. 보스의 지시로 당신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샤티마 아델라는 태생적으로 ‘윤재’ 발음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미스터 욘재! 6월 13일에 만나보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It’s not OK. 나는 현재 회사 교육중입니다. 만나고 싶으면 내일 아니면 모레 나를 찾아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주일 뒤, 주말이 돼야 만날 수 있습니다.”
“알았습니다. 나는 도쿄에 근무하고 있는데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편을 즉시 알아보겠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나를 만나고 싶으면 꼭 일요일까지 와야 합니다.”
“오케이. 서울로 가면 됩니까?”
“원래 나는 지방에 삽니다. 하지만 당신이 오겠다면 지방에 내려갔다가 일요일에 시간 맞춰 올라오겠습니다.”
아델라는 스케줄을 조회하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미안합니다. 내일은 가능한데 일요일에는 내가 일정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방에 내려가지 않고 이번 주는 서울에 있겠습니다. 내일 한국에 올 수 있는지 확인 바랍니다.”
한 참 동안 얘기가 없더니, 아델라가 드디어 답변을 했다.
“OK. 내일 서울로 날아가겠다!”
매크로 소프트에서 근무한다는 샤티마 아델라와의 약속이 그렇게 잡혀버렸다.
‘MS에서 나를 찾아온다면, 왠지 나쁜 일은 아닐 것 같다!’
근거는 없었지만 왠지 그런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다.
◈ ◈ ◈
시끄럽게 코까지 골며 자는 동기들!
그 속에서 한송이는 끝까지 단아함을 유지했다.
물론 그녀도 시체처럼 줄곧 잠만 자긴 했다.
을지로 본사 앞에 버스가 도착했다.
벌써 저녁 8시가 넘어 있었다.
“어떻게 광주로 내려가시나요?”
버스에서 내린 한송이가 물었다.
“그럴 계획이었는데 누가 찾아오겠다고 해서 못 갈 것 같네요.”
“혹시 여자친구?”
“하하하. 아닙니다. 그냥 누가 좀 보자고 하는 군요.”
한송이가 긴 한 숨을 내쉬었다.
왠지 안도의 한숨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은 어떻게 하실래요? 광주 안 가시면 함께 할래요? 저희는 저녁 먹기로 했는데!”
“저희요?”
혹시 황성호 일당과 저녁을 하는지 걱정이 돼 물었다.
“네. 맘에 드는 친구들과 저희끼리 나름 조를 만들었습니다.”
“조를 만들어요?”
“네. 공식 조 편성과 별개로 같이 스터디도 하구.....”
평소 똑 부러지는 성격의 한송이가, 왠지 윤재 앞에만 서면 말꼬리가 흐려졌다.
“뭐. 그럽시다. 어차피 순대도 채워야 하는데!”
“순대를 채워요?”
곱게 자라서일까?
한송이는 이런 대화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렇게 곱게만 커 왔으니! 황성호 같은 망나니한테 시집갔지!’
윤재는 대답 대신 아랫배를 가리켜 보였다.
“아! 호호호. 나는 또.... 알았어요. 함께 가요.”
◈ ◈ ◈
이튿날 아침!
서울 신화 호텔.
윤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식당을 찾았다.
어제 밤 저녁자리를 생각했다.
‘목표가 뚜렷한 여자 같긴 한데!’
윤재는 한송이를 떠 올렸다.
그녀는 전공을 살려 회사에서 최대한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 보겠다는 의지를 서슴없이 밝혔다.
31명 동기 중 확실한 선두권 중 한 명인 한송이.
자신을 따르는 조원을 소집하는 리더십도 있었다.
‘유일한 흠은 빈약한 체력! 그리고 남자 보는 안목이란 말인가?’
회귀 직전까지 한송이는 임원 진급엔 실패했고, 연구소의 팀장을 맡고 있었다.
‘한송이와 몇몇은 확실히 괜찮은 친구들 같다.’
어느새 아침 식사를 마친 윤재.
여유 있게 커피를 마시며 휴일의 여유를 즐겼다.
오후에는 미래 출판사 도충식을 만나기로 했고, 저녁 시간에는 샤티마 아델라 라는 외국인을 만나야 했다.
엑셀. 파워포인트 까지 모두 분야 베스트셀러가 돼 있었고, 미국에서도 본격적으로 책이 팔리고 있었다.
한 달에 들어오는 인세만 계약직 시절 월급의 3~4배를 넘나들고 있었다.
전생에 비해 훨씬 빨리, 더욱 풍요로워진 윤재!
덕분에 고급 호텔에서 잠을 잘 수 있었고, 비싼 커피도 마실 수 있었다.
충분히 휴식과 구상을 마치고 나서야 호텔에서 나왔다.
◈ ◈ ◈
“김선생님! 너무 너무 반갑습니다.”
반복해서 말하는 버릇이 있는 도충식의 말투가 정겨웠다.
“서울에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O2 그룹 정규직이 됐습니다. 교육중이라 서울에 있어야 되고 겸사겸사 과장님도 뵐 겸....”
“예? 정규직이 되셨다 구요?”
도충식은 축하한다고 말했지만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정규직이 되면 저술 활동이 뜸해질 것을 걱정하는 게 분명했다.
“그럼 이제 바빠서 책은 못 내시겠군요!”
“도 과장님은 역시 눈치가 보통 아니시군요.”
도충식은 사실 눈치가 꽝인 스타일이다.
하지만 대놓고 그의 눈치 없음을 탓하진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차기작 출판 얘기 좀 할까 해서 뵙자고 했습니다.”
윤재의 얘기에 도충식은 엄청 반색했다.
“선생님 책이라면 회사에서도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겁니다.”
“하하하. 말씀이라도 고맙습니다.”
“이번에는 어떤 책을 고려하고 계세요? 어도비? 자바?”
“아닙니다. 워드 영어출판까지 끝내는 대로, 거스 히딩크 감독에 대한 책을 쓸 까 합니다만!”
“거스 히딩크 감독이요?”
도충식이 다시 시무룩한 표정이 됐다.
윤재가 잘하는 IT관련 서적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5월 30일에 프랑스와 졸전 끝에 5:0으로 지는 바람에 거취 문제가 불거진 감독에 대해 책을 쓴다니, 조금 당황스럽네요.”
“쉬어간다는 생각으로 써 볼까 합니다. 제목도 생각해 뒀습니다.”
“.....”
역시 내켜하는 분위기는 아녔다.
“히딩크 감독의 리더십에서 배우는 경영! 어떻습니까?”
“글쎄요.”
역시 도충식 과장은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쉬어 간다는 생각으로 해 주세요. 네? 출판해 주실 거죠?”
“다른 분도 아니고 선생님께서 하자는데 해야지요.”
“하하하. 그 책도 아마 잘 팔릴 겁니다. 그리고 과장님은 아마 오늘 저와 나눈 대화를 분명 다시 떠올리실 겁니다.”
미국 쪽 판매 관련 얘기와 히딩크 관련 얘기를 좀 더 나누고 도과장과 헤어졌다.
◈ ◈ ◈
공항 근처 카페.
저녁 8시가 넘어 MS 매니저를 공항에서 만나, 카페로 이동했다.
“감사합니다. 제 동선을 고려해 이쪽으로 자리를 잡아 주시다니.”
“별 말씀을요.”
외국인이 명함을 건넸다.
샤티마 나라나 아델라!
그의 풀 네임이었다.
‘가만 이 사람 왠지 낯이 익은데. 이름도 그렇고!’
윤재는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외국인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뜯어봤다.
머리숱이 많고, 안경을 쓰고 있지 않은 샤티마.
저 얼굴에서 머리를 빡빡 밀고, 안경을 씌운다면?
마침내 윤재가 그가 누군지를 알아챘다.
‘너무 젊고 머리숱도 많아서 내가 헷갈렸다!’
훗날 MS의 CEO가 되는 인도출신의 샤티마 아델라였다.
‘오 마이 갓! 그런데 이 친구가 왜 나를 찾아 온 거지?’
윤재의 생각에 답이라도 하듯 아델라가 입을 열었다.
“말씀 드렸다 시피 나는 인도 아시아 본부의 매니저입니다. 보스께서 저를 보낸 이유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보스요?”
“네. 저희 보스 설마 모르진 않겠죠?”
“MS 보스라면 스티브 팔머?”
당시 빌게이트가 일선에서 물러나고, 그의 친구인 스티브 팔머가 회사를 이끌고 있었다.
“아닙니다. 그 분이 CEO이긴 하지만, 저를 보낸 사람은 빌 게이트입니다. 보스가 내게 최대한 빨리 미스터 욘재를 찾아가 협상을 하고 올 것을 지시했습니다.”
“빌 게이트가요?”
원래 간이 큰데, 회귀 후 간댕이가 더 커진 윤재였다.
그럼에도 빌 게이트라는 이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빌 게이트는 거물이었다.
“빌 게이트가 보낸 이유가 대체 뭐요?”
“당신의 책 때문입니다.”
“내 책?”
“그렇습니다. 당신의 책 중에서 특히 [MS에 바란다] 코너 때문입니다.”
순간 윤재는 감이 왔다.
미국은 소송의 천국이라 불릴 정도로 소송이 많은 나라다.
그리고 지적재산권에 대해 아주 엄격한 나라였다.
윤재가 머리를 굴리는 사이, 아델라가 묻지도 않은 얘기를 술술 늘어놨다.
“보스는 당신의 [MS에 바란다] 코너에 굉장히 탄복했습니다.”
“호!”
그럴 수 있었다.
최소한 10년을 내다 본 미래의 오피스 환경에 대한 얘기들을 적어 뒀으니까!
“그래서 나중에 미스터 욘재와 에이전트에게 소송 당하지 않도록, 저작권에 대한 포괄적인 협상을 지시했습니다.”
“!!??”
말 그대로 물음표와 느낌표 100만 개가 머릿속에서 왔다 갔다 했다.
윤재의 머리가 더욱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빌이 얘기했습니다. 실습 사례로 올라온 법무관련 지원서식과 MS에 바란다는 코너를 봤을 때, 오피스 새 버전이 나올 때 마다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하하하. 이것 봐라? 결국 돈으로 내 아이디어를 사겠다는 얘기아냐?’
윤재는 앞에 앉아 있는 샤티마 아델라를 다시 한 번 바라봤다.
샤티마 아델라가 어떤 사람인가?
빌 게이트의 친구 스티브 팔머가 말아먹은 MS를 기사회생 시킨 인물이다.
2014년에 MS의 CEO가 된 아델라!
크라우드에 집중해 오피스의 생산성을 높였다.
그리고 자사의 서비스를 구독형으로 전환해 MS에 떼돈을 벌어준 사람이었다.
‘그래! MS가 MP3로 날려먹은 돈이 얼마인데! 그 뿐인가? 나중에 노키아로 날려먹은 돈은 또 얼마인가? 그에 비하면 내 저작권료 정도야 껌이지!’
생각을 정리한 윤재가 포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빌 게이트의 지시를 받고, 내 책과 아이디어에 대한 저작권을 사고 싶다는 얘기인 겁니까?”
“정확히 그렇습니다.”
“그럼 나도 단도직입적으로 액수를 말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윤재는 손가락 열 개를 펴 보였다.
샤티마 나라나 아델라의 왕방울만한 눈이 더 커졌다.
“손가락 하나당 100만 달러! 나는 1,000만 달러를 원한다.”
“천만 달러??”
윤재가 보기에 아델라의 표정은 1,000만 달러가 너무 크다는 인상같았다.
이내 윤재는 손가락 다섯 개를 순차적으로 접었다.
“What?”
무슨 의미냐고 아델라가 묻고 있었다.
“당신의 보스 빌 게이트는 자선사업이나 기부를 많이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
“당신 보스의 선행을 생각해 나도 손가락 다섯 개, 즉 500만 불을 깍아 주겠습니다. 500만 불을 주면, 포괄적인 권리에 대한 어떤 문제도 삼지 않겠습니다.”
“......”
‘아무 말도 없는 것으로 봐 아델라는 갈등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내 요구가 터무니없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윤재는 공격을 계속했다.
“아! 하나 얘기 안 한 게 있습니다!”
“?”
샤티마 아델라가 침을 꼴깍 삼키는 게 보였다.
“세후로 5백만 달러! 더 이상의 에누리는 없습니다.”
“알았다. 보스께 보고하고 결과를 알려주겠다.”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협상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아델라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윤재에게 책에 대한 질문들을 계속했다.
그는 노트에 윤재의 얘기를 받아 적는 열성을 보였다.
40분 정도 [MS에 바란다!] 와 관련된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야 대화는 끝이 났다.
아델라는 윤재의 손을 힘차게 흔든 뒤, 카페를 나갔다.
찰나의 순간!
윤재는 문을 열고 나가던 아델라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문에 아델라의 표정이 반사된 것이었다.
그는 분명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이런 씨... 손가락 다섯 개 괜히 접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