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38화 (38/196)

신입사원 입문 연수 (2)

오후에 드디어 연수과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강의, 실습, 토론, 발표, 미션을 포함한 야외 활동이 적절하게 믹스된, 40일간의 긴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분은 40일 동안 이 칩을 최대한 많이 모으셔야 합니다.”

인사팀장의 설명이었다.

“강의 과정에서 진행되는 퀴즈! 토론 및 발표자세, 과제의 우수성 등을 평가해 매 과정 칩이 제공됩니다.”

한 마디로 칩을 많이 얻는 순서대로 연수 성적이 결정된다는 얘기였다.

‘너무 압도적이면 황성호 같은 놈들이 시기질투 하니까, 무난하게 1위할 정도만 유지하면 되겠지?’

신입사원 입문연수를 받아본 적 없지만 자신감은 충만했다.

‘20년 회사 밥을 공으로 먹은 게 아니니까!’

◈          ◈          ◈

오후 첫 번째 시간은 외부 강사의 강의가 3시간 동안 이어졌다.

‘좋은 기업의 위대한 직장인’ 이라는 주제로 HRD 전문회사에서 외주로 진행하는 교육이었다.

대부분의 교육들처럼 ‘칩’을 걸고 몸풀기 퀴즈가 나왔다.

손자병법의 손자의 후예로 알려진 손빈의 운주론에 대한 질문이었다.

“여러분이 손빈이라면 전기장군의 고민에 뭐라고 컨설팅 하겠습니까?”

3판 2승으로 승자를 가리는 마차경주에서 왕에게 매번 패하는 전기장군.

왕의 말 세 마리가 모두 전기장군의 말 세 마리보다 강한 상태에서 장군은 어찌하면 왕과의 승부에서 이길 수 있냐는 문제였다.

“말에게 O2 그룹에서 나오는 종합 비타민 링거를 놔주겠습니다.”

신입사원들 사이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가장 먼저 답했고, 용기가 가상하신 사원이니까 칩 하나 드리겠습니다. 신입답게 참신한 생각이 돋보였어요.”

누군가의 답변에 강사가 말했고 다시 한 번 웃음이 터졌다.

“몰래 자객을 보내 왕의 말을 절단 내는 건 어떨까요?”

황성호의 대답이었는데, 강사는 질겁했다.

“당시 그렇게 했다면, 황성호씨는 3족이 멸문지화 당했을 겁니다.”

다시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황성호는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인물도 가문도 어디가서 빠지는 편은 아닌데, 황성호는 어딘가 잔인한 구석이 있었다.

“저도 답변했는데 칩 안 주시나요?”

“망답에는 칩 없습니다.”

다시 황성호는 똥 씹는 표정을 지었고, 강의장에는 웃음이 넘쳤다.

정적이 흐르는 동안 누구도 손을 들지 못했다. 아무도 답을 모르는 것 모양이었다.

조용히 구경만 하던 윤재가 손을 번쩍 들며 일어났다.

“네. 인물이 훤하신 신입사원이시군요. 김윤재씨 답변 한 번 들어볼까요?”

“왕의 가장 쌘 말에 전기 장군의 가장 약한 말을 붙여 1패를 당합니다. 그리고 왕의 2번 마에 장군의 1번 말이, 왕의 3번 마에 장군의 2번 말이 경주를 하게 합니다. 이렇게 하면 종합전적 2승 1패로 전기 장군이 이길 수 있습니다.”

“아!”

순간 강의실에 탄성이 흘러 나왔다.

“김윤재씨 정답입니다. 정답자에게는 칩 3개를 드립니다.”

부러운 시선으로 윤재를 바라보는 동기들.

“김윤재씨는 이 문제를 알고 있었나요?”

“네. 손빈의 운주론에 관련된 일화로 알고 있습니다.”

윤재가 꾸벅 목례를 한 뒤 자리에 앉았다.

강사는 손빈의 운주론이 갖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고, 다른 동기들은 칩 3개를 확보한 윤재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단 한명! 황성호의 눈빛은 부러움의 눈빛이 아니었다.

◈          ◈          ◈

예상대로 였다.

총 6주간의 일정에서 조 편성은 1주가 지나고 한다고 했다.

윤재는 나서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적절히 조절했고, 칩 숫자를 아슬아슬하게 1위하는 수준에서 유지하고 있었다.

윤재의 뒤를 한송이가 추격하고 있었다.

한송이는 발표, 토론, 차트 작성 등 매사에 열성적이었다. 특히 발표할 내용과 스크립트를 통째로 외워서 진행하는 프레젠테이션이 인상적이었다.

그런 식으로 매일 강의, 토론, 과제 연구가 밤 8시 30분까지 이어졌다.

굉장한 강행군이었다.

연수 4일 차 목요일 밤.

밤 8시 반까지 진행된 하루 일과가 모두 끝났을 때의 일이었다.

수영장 옆으로 난 길을 돌아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는 윤재.

윤재의 앞을 고양이가 재빨리 스쳐 지나갔다.

‘고양이!’

윤재는 난데없는 고양이의 출연에 흠칫했다.

회귀 후 고양이는 윤재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돌이켜 보면 고양이가 출몰할 때면 뭔가 상서로운 일들이 일어나곤 했던 것이다.

‘이밤! 숙소에서?’

윤재는 재빨리 도망가는 고양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숙소동으로 들어섰다.

◈          ◈          ◈

어딜 가나 1등 또는 상위권을 노리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기 마련.

‘이기는 데 의의가 있지 않고 참여하는데 의의가 있다!’

근대 올림픽 정신으로 무장한 동기들도 제법 있었다.

황성호를 따르는 일련의 무리들 중에 그런 친구들이 몇 명 있었다.

윤재가 자신의 숙소 복도를 지날 때였다.

올림픽 정신으로 무장한 몇 명의 녀석들이, 손에 검은 봉지를 들고 황성호의 방으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누가 봐도 술과 안주 등이 분명했다.

연수원 내 매점은 오후 6시면 문을 닫는다. 외부로 몰래 나가 사온 것이 분명했다.

“야! 김윤재! 너도 한 잔 할래?”

동기 한명이 물었다.

“야! 윤재 불렀다 황성호가 화낼라!”

웃기는 녀석들이었다. 자기들끼리 북 치고 장구치고!

윤재는 어깨를 한번 들어주는 것으로, 함께 할 의사가 없음을 표했다.

그리고 자신의 방문을 열고 숙소로 들어갔다.

방으로 돌아 온 윤재는 샤워를 마치고 전화통화를 했다.

창진이, 장식이 형! 작은 집에도 전화를 올렸다.

그리고 장동석 팀장을 포함한 팀 선배들에게 전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차명수 대리와 통화할 때였다.

옆방에서 ‘한송이’라는 단어가 들렸다.

한송이라는 이름을 크게 얘기한 게 아니라, 은밀하게 속삭이듯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윤재의 귀에는 너무 또렷하게 들렸다.

청각 업그레이드 덕분이었다.

“대리님! 잘 계십시오. 주말에 내려가니까 술이나 한 번 사주세요.”

“그래. 내려 와서 보자! 며칠 안됐는데 윤재 니가 왜 이리 보고 싶냐?”

“명수형! 끊어요. 형은 내 스타일 아니라니까!”

“와하하. 미친놈. 건강해라!”

차명수와 전화를 서둘러 끊은 윤재.

옆방의 얘기에 정신을 모았다. 그러자 술기운이 적당히 오른 녀석들의 은밀한 얘기가, 마치 옆에서 듣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그러니까 이 약이 최음제란 말이지?”

“그래. 이거 한 방울이면 한송이, 그 년도 나가떨어질 거다.”

잔인한 음색의 황성호의 목소리였다.

“ㅋㅋㅋ. 고 앙큼한 것을! ㅋㅋㅋㅋㅋ. 생각만 해도 꼴린다야.”

“이번 주말 집에 갈 때, 한 잔 하자고 꼬신 다음에 조져버릴 거야!”

녀석들이 어떤 모의를 하고 있는지 그림이 그려졌다.

그 더러운 작당모의를 황성호가 주도하고 있었다.

‘쓰레기 같은 새끼!’

분노와 함께 전생의 기억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황성호!

전생에서 그는 한송이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끝없는 바람기! 그리고 연이은 황성호의 투자 실패와 가정불화! 결국은 이혼까지...

전생에서도 한송이와 꽤 친하게 지냈는데, 황성호와 이혼 후 회사 일로 가끔 만났던 한송이는, 끔찍했던 결혼생활과 남편의 폭행에 대해 얘길 하곤 했었다.

나름 준수한 외모와 3선 국회의원이라는 집안 배경 때문에 결혼했을 것이라 생각해 왔는데, 황성호의 작당모의를 듣고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황성호에게 겁탈 당하고 결혼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          ◈          ◈

다음날 아침 식사 시간.

식사를 마친 윤재가 식기를 퇴식구에 반납하고 돌아섰다.

윤재의 뒤에 하필이면 황성호가 있었다.

옆의 동기와 무슨 작당모의를 계속 했을까?

키득거리던 황성호는 윤재에게 너무 다가서 있었다.

“아이쿠!”

윤재와 황성호의 식판이 부딪혔고, 국물이 황성호의 손에 쏟아졌다.

반면 윤재는 피해가 없었다.

“뭐야 씨바?”

황성호가 눈을 부라리다 자신의 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씨바 내 롤렉스! 내 롤렉스에 이런 싸구려 국물이 튀다니! 아침부터 재수 없네 씨발.”

“네가 너무 붙어서 그런 거지만, 안됐다고 생각한다. 어디 다치진 않았지?”

윤재는 점잖게 말을 하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

“뭐야. 씨바! 남의 손과 옷, 시계 망쳐 놓고 내빼? 이 시계가 얼마나 비싼 건지 알아?”

황성호가 윤재의 어깨를 잡아챘다.

순간 황성호는 엉덩방아를 찧을 뻔 했다.

윤재의 눈빛에서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뭐야? 저게 사람새끼 눈빛이야? 놀래라! 씨발.’

황성호가 주춤하는 사이 윤재가 유유히 식당을 나가 버렸다.

“뭐야? 황성호! 너 윤재 저 새끼한테 쫄았냐?”

“쫄긴 개뿔. 내가 누군지 알아? 나 3선 국회의원 황태준 아들 황성호야. 황성호라고!”

◈          ◈          ◈

매주 금요일 오후에는 체력단련 일과가 진행됐다.

월요일 아침 8시 반부터 밤 8시 반까지 진행되는 빡 쌘 일정.

주말에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회사는 금요일 오후에는 간단한 체육행사를 끝내고 집으로 보내주고 있었다.

“오늘 오후에는 임의로 조 편성을 해서 팀별 대항전 족구를 하겠습니다. 물론 우승팀에게 칩이 주어집니다.”

여자 한명이 들어간 조 편성.

여자는 손으로 잡아 던질 수 있는 족구였다.

‘족구라! 좋은 운동이지!’

윤재는 알 듯 모를 듯 묘한 웃음을 지으며 ‘족구’를 되 뇌였다.

◈          ◈          ◈

‘마침 조 편성도 내가 원하는 그림대로 됐구나!’

어제 밤 황성호의 방에서 작당모의를 했던 녀석들.

그 중 3명이 황성호와 한 조가 돼 있었다.

‘끼리끼리 논 다더니! 이 개새끼들 어디 한번 맛 좀 봐라.’

윤재는 특수부대 생활 내내 모범병사였고, 여가시간에 즐기는 족구를 특히 잘했다.

‘그렇지 않아도 총알 스파이크인데 내 스피드까지 겹친다면?’

마침 내 윤재 조와 황성호 조의 족구가 시작됐다.

황성호는 몸치에 가까웠는데, 바득바득 우겨서 팀의 스트라이커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너무 티내면 곤란하니까, 적당한 시점에...’

1세트 윤재의 팀이 14대 9로 여유 있게 리드를 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어제 저녁 황성호의 작당 멤버 중 2명은 모두 코에 휴지를 꼽고 있었다.

윤재의 스파이크가 그들의 코를 강타해 버렸던 것이다.

14대 9에서 윤재 편으로 넘어온 공!

세터 역할을 하고 있는 한송이가 볼을 잡아 원 바운드로 윤재에게 토스 했다.

‘토스 좋고!’

순간 윤재의 시야에 황성호의 무방비 상태의 사타구니 들어왔다.

‘요거 한 방 받아라. 일명 Egg Breaking 이라는 거다.’

윤재가 한 손으로 땅을 짚고, 몸을 뒤집어 네트 위에서 족구공을 정확하게 가격했다.

“뿌각!”

뭔가 깨진 것 같은 파열음이 족구장을 울렸다.

“끄아아악!”

단발마의 비명소리를 토해내고, 황성호가 사타구니를 부여잡고 고꾸라졌다.

사람들이 황성호 주변으로 몰려 들었고, 인사팀원들도 몰려왔다.

윤재도 잔뜩 걱정된 얼굴을 하고 황성호에게 다가갔다.

“사타구니에 볼을 맞은 것 같은데, 이럴 때는 허리를 잡고 털어주는 게 제일 좋습니다.”

윤재는 미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인 뒤 황성호의 뒤로 갔다.

그 때 까지도 황성호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고통으로 침을 질질 흘리며 흐느끼고 있는 황성호!

윤재가 황성호의 허리춤을 뒤에서 잡아 탈탈 털기 시작했다.

“아악! 아악! 아파 그만. 그마안~”

“괜찮아. 성호야! 사내자식이 이 정도 가지고. 다 나으려고 그러는 거니까 조금만 참아라.”

윤재는 다시 한 번 황성호의 허리춤을 들어 올려 허공에서 몇 번 털어줬다.

그 때 마다 황성호는 괴성을 지르며 아파했다.

금요일 체육행사는 황성호의 예기치 못한, 아니 예견된 부상으로 종결됐다.

잠시 쉬었다가 청평호 주변을 한 바퀴 돌고 해산하는 프로그램으로 대체된 것이다.

다들 호수를 산책하는 사이.

황성호는 인사팀 직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호수 옆 벤치에 누워 있었다.

윤재의 털기 덕분인지 이제 고통은 가시고 없었다.

황성호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고자라니! 내가 고자라니이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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