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37화 (37/196)

신입사원 입문 연수 (1)

2001년 6월1일자로 정규직으로 전환된 윤재.

계약직 입사, 만 9개월만의 쾌거였다.

여의도 본사에서 3일간의 오리엔테이션을 소화했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나면 2개월가량, 경기도 가평에서 입문연수가 예정돼 있었다.

오리엔테이션 마지막 날!

신입사원 전원과 오재준 회장의 오찬이 마련됐다.

윤재는 만찬을 기다리며 지난 한 달 동안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동안 O2 그룹의 라벨을 부착한 지리산 꿀 시제품이 출시됐다.

소비자 반응도 호의적인 편이었다.

그리고 2억의 예산이 배정돼, 20개 양봉 조합에 설탕 공급기와 말벌 트랩을 지원하기 위한 절차가 진행 중이었다.

설탕 공급기도, 말벌 트랩도 모두 윤재의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회사의 협력업체가 생산키로 했다.

산동물산 김동현 사장은 재벌이라도 된 듯 엄청 좋아했다.

“내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네.”

김동현 사장은 가끔 통화라도 하면 입버릇처럼 은혜 타령을 했다.

무엇보다 다행인 점은 장동석 팀장이 어떤 페널티도 받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다른 일들도 순조롭게 풀리고 있었다.

백화점 동료였던 남창진은 혈당을 낮추는데 성공해, 윤재의 투자금 1억을 받을 수 있었다.

‘So far, So good!’

윤재는 강당 입구에 기대선 채 최근의 일들을 회상했다.

그 때 인사팀 대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2001년 신입사원 여러분 카밀리야 홀로 입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회장님 도착 30분 전입니다.”

◈          ◈          ◈

본사 지하1층 강당 카밀리야 홀!

주말에는 예식장으로 이용되기도 하고, 거래처 사장단 초청 행사에는 오찬장으로 사용되는 다목적 홀이었다.

바로 윤재가 O2 C.I에 대한 발표를 한 장소이기도 했다.

서양식 정찬으로 준비된 신입사원 축하 오찬.

헤드테이블에 배정된 자리는 다섯 자리.

오재준 회장. 인사실장. 인사팀장. 김윤재 그리고 신입사원 한송이가 그 주인공이었다.

9개월 차 계약직이라고는 믿기 힘든 활약을 펼쳤던 윤재!

헤드테이블에 앉을 권리가 차고 넘쳤다.

한송이 역시 당연한 자리 배정이었다.

제각기 한 가닥 한다는 30명의 동기 중에서 당당하게 1위로 입사한 여자였다.

오재준 회장 입장까지는 20분 정도 남아 있었다.

인사팀장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인사팀원들과 함께 주변 정리를 하고 있었다.

오리엔테이션 기간 3일.

30명의 동기들과 인사를 나누고 술자리까지 했다.

하지만 윤재에 대한 동기들의 반응이 좋을 리 만무했다.

서류전형. 그룹 직무평가. 1차 면접과 2차 면접까지 합격한 동기들!

그들은 윤재를 마치 낙하산 정도로 생각했다.

“축하드립니다. 계약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되셨다면서요?”

한송이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3일 동안 아이스브레이킹 정도는 한 사이!

같은 조가 아닌 탓에 한송이와 대화를 나눈 시간은 길지 않았다.

“네. 한송이씨도 축하드립니다. 정규직 전환은 운이 좋았습니다.”

“요즘 세상에 운이 좋아서 정규직 되시는 분이 어디 흔한가요? 모르긴 몰라도 엄청난 노력을 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지적으로 보이면서도 부족하지 않은 미모!

곤색 자켓에 흰색 블라우스가 그녀를 더욱 세련돼 보이게 했다.

하나 흠이라면 지나치게 말랐다는 점이었다.

‘한송이! 20대의 한송이는 풋풋한 매력까지 갖췄었구나!’

윤재는 헤드테이블에 함께 앉은 한송이를 보며, 전생의 기억을 떠 올렸다.

임원 진급 심사를 앞두고 자신과 경쟁했던 한송이.

그녀는 윤재를 알지 못해도 윤재는 그녀를 너무 잘 알았다.

“다른 건 몰라도 헤드테이블에 배석된 걸 봐도, 보통 분은 아니란 생각이에요.”

“한송이씨도 헤드테이블입니다만.”

“호호호.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건가요?”

쑥스럽게 웃는 한송이!

뭐랄까? 구김살이 없는 미모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그런 한심한 놈팽이를 만나서....’

윤재는 한송이를 보며 다시 전생을 떠올렸다.

집안도 좋았고, 학벌도 좋고 미모도 좋은 한송이가 최악의 남편을 골랐었다.

악질 남편에 결혼생활 내내 시달렸던 한송이는 결국 이혼을 했고, 육아와 회사 생활을 병행하며 힘들어 했던 기억이 났다.

윤재의 상념을 한송이는 수시로 방해했다.

“내일 부터 40일 정도의 신입사원 연수가 진행될 텐데. 어떻게 걱정되지는 않으세요?”

“저야 뭐 익숙한 일들이라서!”

“그러세요? 저는 이렇게 길게 부모님과 떨어지는 게 처음이라서. 살짝 걱정이 앞서기도 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 회사에서 하는 일입니다. 잡아먹을 괴물이 나오는 곳도 아니고!”

“마지막에는 20Km 지옥행군도 있다던데.....”

벌써 5년째 입문연수 마지막 과정으로 20km 행군을 이어오고 있는 회사.

다른 여자 동기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행군을 걱정했다.

오대양의 입문연수 마지막 과정!

산악행군 20Km 코스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들 치 떨려 했다.

한송이가 대화를 이어나갔다.

“회장님께서 무슨 질문을 하실지,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그것도 걱정입니다.”

“하하하. 한송이씨는 걱정이 많은 분이신가 보내요.”

“어머. 그럼 윤재씨는 전혀 걱정이 안 된단 말에요?”

“회장님도 세끼 식사 하시고, 화장실도 다니시는 사람입니다. 대기업 오너라고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기라도 한 답니까?”

“호호호. 말씀 참 재미있게 하신다. 저는 진지하신 분인지 알았어요.”

“진지는 회장님께서 드시는 거구요.”

한송이가 소리를 내지 않으려 입을 틀어막고 웃었다.

단아하면서도 고운 미소였다.

그 때!

인사실장을 앞세운 오재준 회장이 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          ◈          ◈

“한송이 씨는 식품영양학을 전공했다고?”

“네. 회장님. 부전공으로 생명공학부 과정을 이수했습니다.”

“우리 회사와 여러 모로 관련 있는 과정을 주로 이수했군.”

“호호호. 그러게요. 아마도 O2 그룹에 입사할 운명이었나 봅니다.”

‘뭐야? 걱정 투성이더니 말만 잘하네.’

오재준 회장 앞에서 전혀 떨지 않고, 대답만 잘하는 한송이였다.

윤재는 한송이가 연약한 몸과 달리, 당찬 구석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긴 동기들 중 전체1위라고 했으니. 보통 내기가 아니었던 거야.’

한송이와 대충 말을 섞었다고 생각했는지, 오회장이 윤재에게 시간을 할애했다.

“정규직이 되고 보니 기분이 어떤가?”

“회사 생활을 좀 더 열심히 해서, 회사와 회장님의 배려에 조금이라도 누가 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넨 예쁜 말을 골라서 할 줄 아는군.”

“영업3팀과 호남의 선배들께 자연스럽게 배운 것 같습니다.”

“허허허. 허허허. 허허허허!”

오회장이 말끔하게 면도된 턱을 쓸었고, 인사실장과 인사팀장이 동그란 눈으로 윤재를 쳐다봤다.

한송이도 마찬가지였다.

‘불가능에 가까운 정규직 전환을 했다더니, 역시 보통내기는 아니구나!’

그때 오재준이 한송이에게 물었다.

“한송이씨는 알고 있나?”

영문을 모르는 한송이는 눈만 끔벅 거렸다.

“우리 회사 New C.I 말일세. O2 그룹과, O2 F&B 라는 사명을 김윤재 이 친구가 제안했다네.”

“어머. 정말이에요?”

“그게 벌써 5개월 전이라니. 정말 세월이 빠르군. 빨라.”

오재준은 그날의 현장을 회상하는 것 같았다.

“회장님. 그날 윤재씨 프레젠테이션은 제가 본 발표 중 다섯 손가락에는 들었던 것 같습니다.”

인사실장이 회장의 기분에 맞춰 적당히 추임새를 넣어줬다.

“윤재 이 친구 아녔다면 한송이씨가 입사한 회사의 이름은 지금도 오대양 푸드였을 걸세.”

순간 오회장의 표정에 짜증이 스쳐지나갔다.

장동근을 모델로 세웠다 낭패를 보고 있는 회사 광고 때문이었다.

홍보와 마케팅에서 대안이라고 가지고 온 것들도 하나같이 맘에 들지 않아, 더욱 애가 타는 상황!

하지만 오재준은 화를 가라앉히며 다시 온화한 미소를 되찾았다.

신입사원들 앞에서 표정관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회장님! 저를 헤드테이블에 앉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엄청난 동기와 식사도 하게 됐으니까요.”

“그런가? 우리가 영광이지. 2001년 1등 입사자인 한송이 양과, 김윤재군이 함께하는 식사를 하게 됐으니 말이네.”

헤드테이블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나저나 벌꿀은 어떨 것 같은가?”

오재준 회장이 테스트 상품으로 출시된 지리산 시리즈에 대해 물었다.

“반응 나쁘지 않습니다. 대기업이 개런티 하는 품질과 지리산이라는 지역명소가 시너지를 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런가? 허허허. 좋은 일이지. 좋은 일이고말고!”

시종일관 분위기가 좋은 헤드테이블과 달리, 나머지 테이블은 눈칫밥들을 먹고 있었다.

옆 테이블에 흩어져 있던 동기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저 자리에 나도 끼고 싶다는 부류!

그리고 내가 저 자리에 앉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는 부류로.

◈          ◈          ◈

다음날. 경기도 청평에 있는 그룹 연수원에서 약 40일간의 대장정이 시작됐다.

윤재를 포함해 남자가 25명. 여자 동기가 6명이었다.

오전에는 2인 1실로 방 배정을 하고, 숙소에 짐을 부리고 정비 시간을 가졌다.

6월이라 조금은 뜨거운 햇살!

풋살장. 족구장. 테니스장이 훤히 보이는 자리에서, 윤재는 연수원이 준비한 아이스커피를 마셨다.

‘전생에서는 입문연수를 받지 못했다. 상위 10%에게만 주어진다는 HIP 자격을 취득해야 한다.’

윤재는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생각했다.

High Individual Potential의 약자인 HIP를 운영하는 대기업들은 꽤 많다.

소위 말하는 떡잎부터 다른 인재를 점찍어 두고 지켜보는 것이다.

HIP라고 해서 모두 임원이 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HIP가 된다는 것은, 더 나은 출발선상에 설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프로 스포츠의 신인상처럼, HIP는 신입사원 입문연수에서만 받을 수 있는 영예.

커피를 반쯤 마셔 가는데 한송이가 다가왔다.

“뜨거운데 왜 거기 서 계세요?”

“하하하. 광합성 좀 했습니다.”

“저희도 같이 광합성 좀 할까요?”

한송이는 일군의 사람들을 몰고 다녔다. 입사성적 1위의 후광효과 같은 것이었다.

“5명 1개조를 구성해 끝까지 가는 거 알고 계시나요?”

“아뇨. 조 편성 하는 줄도 몰랐습니다.”

“태평이시네요. 남들은 벌써부터 유리한 조원을 규합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데!”

“그런가요? 그런데 31명인데 다섯 명씩 나누면 나머지 한 명은 어떻게 되나요?”

“글쎄요.”

“꽁다리 안 맞으면 제가 아무데나 들어가면 되겠군요.”

윤재는 그까짓 조편성이 뭐 얼마나 대단한 일이냐는 표정이었다.

“그러지 말고 저희 조에 들어오시는 거 어떠세요? 마침 한자리 남습니다.”

“초대해 주신다면 영광입니다만.....”

“?”

“인사팀에서 우리 맘대로 조 편성하게 놔두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정말인가요?”

“신입사원들도 제각각이고 남/여 성비도 다릅니다. 여자들 6명이 한 조 이룰 수도 있고. 특정 학교 출신끼리 뭉칠 수도 있는 거죠. 그런데 인사팀이 그런 그림을 원하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한송이와 함께 윤재에게 접근해 왔던 사람들은 한 방 먹은 표정이 됐다. 윤재의 얘기가 지극히 일리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한송이가 나랑 같은 편을 먹고 싶다는 생각인 것은 확인했네.’

윤재는 한송이와 그녀의 추종자들의 얼굴을 뇌리에 담았다.

“점심시간이군요.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밥 먹는 거야 저희끼리 모여 먹는다고 누가 뭐라 할 사람 없으니까.”

윤재는 남은 커피를 가볍게 비우고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청평호수에 반사된 초여름 햇살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          ◈          ◈

윤재의 인기는 상당했다.

사회 초년생인 건 다들 마찬가지인 상황!

하지만 윤재는 영업3팀에서 9개월의 실전 경험이 있었다.

좋은 대학을 나온 우수 인재들인 것은 맞지만, 윤재의 현장 경험은 그들에게 없는 것이었다.

그들이 윤재의 20년 내공을 모른다는 건 덤이었다.

윤재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윤재의 경험담을 즐겁게 들었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법.

윤재와 두 칸 떨어진 테이블에도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남자로만 구성된 녀석들은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식사를 했다.

“저 새끼 봐라. 고졸 계약직 주제에 지가 뭐라도 되는지 아나봐?”

입사 동기가 되는 황성호!

명문대 경영학을 전공한 인재.

하지만 두뇌와 학벌에 비해 인성은 한참 미치지 못하는 놈이었다.

“야. 성호야 들리겠다!”

“지 까짓게 들리면 어떻게 할 거야?”

“그래도. 인사팀에서 밥 먹는 것 까지 다 체크한다는 소문이던데?”

“야. 오대양이 별거냐? 우리 아버지가 있는 한 아무도 날 못 건드려.”

“니 아부지 뭐 하시노?”

누군가가 영화 ‘친구’ 대사를 흉내 냈고,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웃어댔다.

“국회의원이라 아이가. 그것도 3선 국회의원이라 아이가!”

“와. 3선 국회의원!”

녀석들은 3선 국회의원이란 말에 호들갑을 떨었다.

“저런 좆도 아닌 새끼가, 내가 점찍은 한송이 관심을 받고 있다니! 밥 맛 떨어지네.”

“내가 보기엔 한송이 저 요사스러운 것이 김윤재에게 먼저 접근하는 것 같던데.”

“저것도 사람 보는 눈이 삐었지. 나 황성호를 놔두고....”

제법 큰 눈을 갖고 있는 황성호가, 눈을 좌우로 길쭉하게 떴다.

“야. 황성호. 그래도 윤잰가 저 친구 인물은 훤칠하잖아. 기럭지도 쓸만하고.”

“지금 니가 내 앞에서 김윤재 저새끼 편 드는 거냐?”

“아니. 내가 뭐 누굴 감싸는 게 아니고. 팩트를 말 한 거야.”

“닥쳐!”

윤재와 한송이를 노려보는 황성호의 눈에서 불꽃이 튀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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