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조선의 용가리 통뼈다
킬링필드 급 학살을 일삼았던 장수말벌 3부대를, 역으로 작살내 버린 것도 벌써 3주전의 일이 됐다.
그동안 영업3팀은 두 가지 품의서를 동시에 결재 받고, 하나의 품의서를 회람 받았다.
하나는 김동현 사장을 곡성, 구례, 광양권 일부까지 커버하는 광역 대리점으로 육성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또 하나는 지리산 벌꿀 시장에 대한 시제품 생산에 대한 품의서였다. 시제품 생산에 대한 사내 선호도 조사와, 서비스 팀을 이용한 시장 테스트가 끝나면 정식출시로 이어질 것이었다.
OEM 방식으로 라벨만 부착하는 것이라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끝으로 회람 받은 품의서는 최동식 과장의 거취에 대한 것이었다.
인사지원팀에서 결재 받은 내용에 의하면, 최과장은 희망퇴직을 신청하고 신진 리테일 용역사장으로 가는 것으로 돼 있었다.
6월1일자 정규직 전환을 확정지은 윤재!
약 30명의 공채가 결정됐고, 최과장의 빈자리는 윤재의 동기 중 누군가가 메꾸게 될 예정이었다.
2001년 5월 15일 스승의 날 오전 11시.
구례 산동면 김동현 사장 양봉장 입구.
O2로고가 새겨진 5톤 탑차가 양봉장 입구에 주차돼 있었다.
김동현 사장의 양봉장에 설탕을 내려 주고, 인근 양봉장 몇 개를 순환하며 설탕을 하역하는 차량이었다.
무게가 많이 나가고 마진은 박한 설탕을 대리점들은 기피했다.
비슷한 가격인데 마진도 좋고, 무게는 10분의 1 밖에 나가지 않는 맛다시다를 사장들은 설탕에 비해 10배는 더 선호했다.
그래서 김동현 사장 같이 힘이 좋고, 카리스마까지 겸비한 사람은 시골지역 대리점으로 육성하기에 딱 좋은 스타일이었다.
양봉장 입구에 곰 같은 남자 한명. 호리호리하면서도 건장한 사내 한명. 그리고 중년인 한명이 설탕을 나르고 있었다.
설탕 15kg 한 포대 5팔레트, 낱개로 405개의 설탕을 까대기 하는 일은 상당히 고된 노동이다.
회사의 차량이 창고 가까이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 이동 거리마저 생겨 비지땀을 흘려야 할 만큼 힘든 일이었다.
안타깝게도 김동현 사장의 창고가 주차 공간과의 거리가 제법 멀었다.
‘윤재 저 자식! 꼭 미니 장동석 팀장님 같다니까!’
오과장은 설탕 15kg을 어깨에 지고 나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작년 명절 때 장팀장과 시내 대리점들을 돌다가, 명절 선물셋트 까대기를 했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녀석! 힘은 좋네.’
자신은 15kg 설탕 한 포대를 나르는데, 눈앞에는 윤재와 김동현 사장이 양쪽 어깨에 15kg 한 포대씩을 지고 나르고 있었다.
‘이 판국에 설탕 보내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굳이 여기까지 와서 설탕 까대기를 하자고 하니....’
나이 40이 넘은 오과장에게는 힘든 일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일하는 내내 웃고 있었다.
어느새 훌쩍 커버린 윤재가 거인처럼 보였던 것이다.
2시간 조금 넘게 죽어라 일했더니, 5팔레트의 설탕을 나르는 일이 끝났다.
다른 곳으로 배송가기 위해 회사 트럭이 떠나버린 자리에, 오석진 과장이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당분간 장수말벌 공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꿀벌들 몇 마리가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일하고 피우니까 담배 맛 꿀맛이죠? 과장님!”
김동현 사장이 오석진 과장 옆에 와서 앉았다.
어느새 세수를 하고 온 윤재도 옆으로 다가왔다.
“아따! 마누라가 딱 시간 맞춰서 오는 구만요.”
김동현 사장의 부인이 구형 RV차량을 타고 언덕길을 올라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동안 도와주신 게 고마워서 점심이나 대접하려고 했더니만, 이렇게 오셔서 설탕 까대기 도와주실줄 몰랐습니다. 정말 고마워서 말이 안 나오구만요.”
김동현 사장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오석진 과장은 땀이 마르는 걸 느끼며, 담배를 묵묵히 빨았다.
피로감이 몰려왔다!
옆에 있는 윤재와 김동현 사장은 가쁜 숨조차, 내쉬지 않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구례읍에 가서 소고기 사드릴라 했드만....”
어느새 RV차량이 양봉장으로 들어왔다.
사모님의 손에 검은 봉다리가 들려 있었고, 그 안에 삼겹살과 채소들이 가득했다.
“야외에서 고기 구워 먹으면 그 맛이 또 별미 아니겠습니까? 오늘은 여기서 배 터지게 드시고, 요 밑에 계곡에서 발 좀 담그다 퇴근하시면 딱 맞겠구만요?”
“하하하. 그렇게 하시죠. 오과장님! 운전은 제가 할 테니까, 반주도 좀 하세요.”
윤재가 사모님의 일손을 거들며 말 했다.
“헐헐헐. 그럴까?”
오석진은 입맛을 다시며 장동석 팀장의 얘기를 떠올렸다.
“산동물산은 이제 구례, 곡성권의 빅 딜러가 될 사람입니다. 이왕 가시는 거 하루 휴가 냈다 생각하시고 최대한 도와드리고 오세요.”
이런 일이 벌어질 걸 예상이라도 한 듯, 배려해 주는 장동석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 ◈ ◈
정말 김동현 사장의 얘기대로 야외에서 먹는 삼겹살 맛은 꿀맛이었다.
저 멀리 노고단 정상이 보이는 지리산 자락에서 구워먹는 삼겹살 맛! 조금 과장하면 윤재가 먹어 본 최고의 삼겹살이었다.
양봉하는 집 아니랄까 봐, 식사를 마치자 사모님이 꿀통을 가지고 나왔다.
“설탕 안 넣은 매실효소입니다. 시원한 물에 꿀 좀 타서 드시면 소화도 잘 되고 좋을 겁니다.”
사모님은 그렇게 얘기하면서 유리로 된 꿀단지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숟가락으로 꿀을 듬뿍 퍼서 매실 잔에 넣은 뒤 휘저었다.
꿀단지에서 매실 잔까지 이동하는 사이 꿀이 평상위에 스르륵 떨어졌다.
‘이거다!’
윤재는 순간 깨달은 바가 있었다.
도시의 사람들이 꿀을 잘 안 먹게 되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설탕에 비해 가격이 비싸다는 것이었다.
소매가 기준으로 같은 무게의 설탕과 꿀은 대략 10배 정도의 가격 차이가 났다.
꿀이 아무리 몸에 좋다지만, 비싼 꿀을 설탕 소비하듯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두 번째는 꿀이 설탕 덩어리라는 잘못된 상식.
꽃이 피지 않아 꿀벌들이 먹고 살 게 없는 장마철과 겨울철에는, 꿀벌이 죽지 않게 하기 위해 설탕물을 꿀벌들에게 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꽃이 만발한 계절에 일부러 설탕을 먹이는 미친 양봉업자는 대한민국에 단 한명도 없다.
들판에 널린 꽃의 꿀은 공짜인데, 어느 정신 나간 인간이 돈 주고 설탕을 사다가 벌들에게 먹인단 말인가?
이 편견은 회사가 벌꿀을 본격 취급하게 되면, 앞장서서 캠페인을 벌이든 뭔가 해야 할 과제중의 하나였다.
세 번째는 꿀이 번거롭다는 점이었다.
방금 전 본 것처럼 단지나 용기에서 옮기는 과정에서 흐르기 일쑤였고, 그렇게 흘린 꿀은 끈적거리다 보니 손에 묻기라도 하면 찝찝하고 번거로웠다.
‘용기를 개선해 질질 흐르지 않게 한다면?’
윤재는 김동현 사장의 사모가 꿀을 흘리는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고 이내 새로운 구상으로 이어졌다.
그동안 엑셀-파워포인트-워드에 이르기까지 오피스 시리즈 집필에 매진해왔던 윤재!
‘신입사원 연수 다녀와서 본격적으로 고민해 봐야겠어!’
매실 꿀물을 마시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김동현 사장이 윤재의 어깨를 툭 쳤다.
“윤재씨! 힘이 장사던데?”
“장사는요. 아닙니다.”
“이거 왜 이래? 내 눈은 못 속여. 내가 추석 구례 씨름대회 나가면 항상 1등 하는 사람이네. 어때? 나하고 팔씨름 한 번 할 텐가?”
오석진 과장이 김동현 사장을 말렸다.
“곰 같은 사장님한테 윤재가 되겠습니까? 우리 윤재는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할 때니까 관두십시오.”
“으하하. 오과장님!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법입니다. 윤재 저 친구 딱 봐도 힘깨나 쓰게 생겼단 말이죠. 어때 내기 걸고 한판?”
김동현 사장은 당장이라도 팔씨름을 시작할 기세로, 셔츠를 벗어 던졌다.
메리아스만 입은 김동현 사장의 팔뚝이 오석진 과장 허벅지만큼 두꺼웠다.
“내기라구요?”
“그래. 내기. 내가 이기면 5월 한 달도 설탕 15% 깍아서 주고, 윤재씨가 이기면 음... 뭐가 좋을까? 진다는 생각은 안 해 봐서. 떠 오르는 게 없네?”
딱 봐도 구례 씨름장사 같이 보이는 김동현!
반면에 윤재는 다부진 체격에 훤칠하긴 했지만, 누가 봐도 김사장에 힘으로는 밀려 보였다.
윤재의 입에서 팔씨름 수용과 함께 내기로 걸 조건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혹시라도 제가 이기면, 나중에 회사가 어려울 때 한 번 도와주십시오. 그 일이 뭐가 됐든지 간에!”
“어려운 일? 룸살롱 가자거나, 촌지 주라는 것 아니고?”
“네. 그냥 조건 없이 나중에 한 번 도와주시면 됩니다.”
“헛 참! 최동식 과장하고는 아무리 봐도 결이 다른 친구란 말이야. 알았네. 어차피 내가 이길 텐데 뭘.”
그러더니 김동현 사장이 평상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본격적인 팔씨름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윤재도 김사장 맞은편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오과장님! 과장님이 심판 봐 주십시오. 공평하게! 알았제라?”
평상 위에서 윤재와 김동현 사장이 손을 맞잡았다.
“하나. 둘. 셋!”
오과장이 팔씨름의 스타트를 알렸다.
“뭐시여? 솔찬히 짱짱헌디? 완전 통뼈구만. 그래도 나한테는 안 될 것이여. 혹시라도 내가 지면 윤재 자네 룸도 데려가지!”
초반에 여유를 부리며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던 김동현 사장!
갈수록 말수가 급격히 줄어 들었다.
어느새 김동현 사장도, 윤재도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차이점을 알 수 있었다.
김동현 사장의 얼굴이 시뻘건 사과 정도의 붉은 빛이라면, 윤재의 얼굴은 잘 익은 홍시 정도의 빛깔!
3분 정도 지나자 팽팽하게 수직을 유지하던 기울기가 한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김동현 사장의 팔목이 바깥쪽으로 20도 가량 꺽여 있었다.
“끄응!”
김동현 사장은 어느새 땀을 뻘뻘 흘리며, 비지땀을 쏟아내고 있었다.
설탕 15kg 150 포대를 나를 때도 흘리지 않던 땀방울이었다.
그 상태로 김동현 사장은 3분을 더 버텼다.
김동현 사장의 눈빛에 패배의 그림자가 스쳐지나가는 순간!
“사장님! 최과장 그래서 회사 관두는데, 룸살롱 이라니요! 그런 것 저흰 필요 없단 말입니다.”
윤재는 자신의 몸을 왼쪽으로 비틀며, 체중을 온 몸에 실었다.
그리고 그걸로 승부는 결판나 버렸다.
◈ ◈ ◈
오후 2시 반.
윤재와 오과장은 김동현 사장이 내준 반바지와 면티를 입고, 지리산 자락 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겼다.
5월이라 아직 물이 제법 차가웠지만, 물놀이를 하는데 지장은 없었다.
“와하하. 윤재 자네 완전 통뼈구만! 용가리 통뼈야! 내가 내일 모레면 나이 50인디, 팔씨름에 져 보기는 살다 살다 처음이네. 윤재 자네 완전 물건이구만! 물건!”
“아닙니다. 사장님! 사장님께서 10살만 젊으셨어도 저는 게임도 안 됐을 겁니다.”
“워메! 이 친구 겸손허기까지. 맘에 들구만. 맘에 들어!”
김동현 사장은 배꼽까지 잠기는 물속에 들어가 연신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오늘 내가 피라미도 잡아서 피라미 매운탕 끼려 줄랑께! 저녁까지 먹고 가붑시다. 알았제라?”
김동현 사장은 뭐가 그리 좋은지 콧노래를 부르며, 피리통에 먹다 남은 쌈장을 바르고 있었다.
일행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계곡으로 가더니, 피리통을 설치하고 다시 윤재에게 다가왔다.
설탕 까대기부터 팔씨름 까지! 윤재 역시 몸이 꿉꿉했다.
몸을 좀 씻기 위해 윤재는 물속으로 잠수를 했다.
지리산 자락의 계곡물은 너무 맑아, 맨 눈으로 수영을 해도 될 만큼 깨끗했다.
저만치 앞에 김동현 사장이 설치해 놓은 피리통 주변에 물고기들이 몰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유. 레. 카!’
윤재는 물속에서 피리통을 보다가 유레카를 외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덕분에 윤재가 있는 자리에서 기포가 솟아올랐다.
“윤재야! 뭐 하니? 깨끗한 계곡물에 방귀 뀌는 것 아니다.”
오과장님의 실없는 농담을 들으며, 윤재는 물 밖으로 나왔다.
피리통을 본 순간!
윤재는 꿀 용기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묘안이 떠 오른 것이었다.
◈ ◈ ◈
윤재와 오과장은 저녁 먹고 가라는 김사장의 만류를 뒤로 하고, 광주로 복귀하는 중이었다.
“야! 네 덕분에 모처럼 재미나게 놀다 간다야.”
“저도 재밌고 뜻 깊은 날이었습니다.”
삼겹살도 맛있게 먹고, 깨끗한 계곡에서 물놀이도 즐기고!
게다가 꿀 용기 문제를 해결할 해법까지 깨달았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그나저나 너는 복싱도 엄청나고, 힘도 천하장사 급이고! K1 선수해도 다 씹어 먹겠다. 응? 씹어 먹겠어?”
“하하하. 과장님! 그냥 저는 설탕이나 밀가루 팔면서 살겠습니다.”
“헐헐. 녀석 하고는...”
그 때 장동석 팀장의 전화가 걸려왔다.
“네. 팀장님! 광주로 복귀하는 길입니다.”
“그래. 고생 많았다. 오과장님께도 고생하셨다고 전해 드리고.”
“네. 알겠습니다.”
오늘 일정을 알고 있는 장동석이 이유 없이 전화를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역시 예상대로였다.
“전국 6대 도시에서 지리산 꿀 시제품 테스트를 했는데, 반응이 아주 좋았다고 한다.”
“정말요?”
“그래. 이 페이스면 올해 안에 정식 출시할 수 있을 것 같다. 모두 네 재치 덕분이라고 상무님 칭찬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그래. 조심히 올라오고. 사무실 들리지 말고 바로 현장퇴근 해라. 알았지?”
“알겠습니다. 팀장님!”
허리케인 엘리나에서부터 시작된 한 달 넘은 설탕전쟁!
이해관계자들 모두가 만족스런 답을 얻은 채 막을 내리고 있었다.
‘이제 홀가분하게 신입사원 입문연수를 떠나면 되겠구나!’
옆에서는 오석진 과장의 코고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