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처럼 날아서
성공적으로 보고를 마친 윤재는 오석진과 함께 임원실을 나왔다.
오석진이 윤재를 계단으로 이끌었다.
“윤재 너 진짜 놀랐다. 그 짧은 시간에 이런 생각을 해낸 것도 놀랍고. 그 짧은 시간에 저렇게 훌륭한 장표를 만든다는 것도 놀랍고.”
“과찬이십니다.”
“정말이야. 위기를 기회로 바꾼다더니! 대단하다. 대단해. 내 인정하마.”
오석진은 처음 투서를 덮자고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일개 계약직 사원도 이런 생각을 해내는데, 자신은 팀의 비위를 어떻게든 덮어볼 생각만 했으니까!
같은 시각!
임원실에는 양광수와 장동석이 독대하고 있었다.
“장팀장! 다 좋은데 말이야. 최동식이는 어떻게 할 건가? 그 자식 일단 직무배제하고 대기발령 낼까 하는데?”
“그 부분도 생각해 둔 게 있습니다.”
“그래? 무슨 생각인데?”
“촌지를 받았다는 건 분명한 것 같은데, 금액이 관건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과장과 윤재씨를 보내서 확인한 뒤에 거취를 결정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괜히 산동물산에서 본사 윤리제보라인에 올리는 것 아냐?”
양광수는 어떻게든 자신에게 불똥이 튀는걸 막고 싶은 모양이었다.
“상무님! 3팀 안은 이렇습니다. 지속적으로 상납을 받았거나 금액이 30만원을 넘는다면 인사위에 회부하는 방향으로 하겠습니다. 다만..”
“다만 뭐?”
“일회성이고 금액이 소액이라면 희퇴를 유도할까 합니다.”
“희퇴? 동식이가 순순히 나갈까?”
“그냥 나가라면 당연히 반발할 겁니다. 그래서 관내 직영대리점 용역권을 주는 거죠.”
“용역권? 어디를 주자는 거야?”
“신진리테일 사장님이 곧 정년입니다.”
“그래. 그 자리로 최동식이를 보내면 되겠군.”
“허락해 주시면 그 방향으로 최과장 설득해 보겠습니다.”
“오케이. 스무스하게 잘 처리해야 하네. 괜히 자네한테도 불똥 튀길 수 있는 일이니까. 명심하게!”
“알겠습니다. 상무님!”
“내 입으로 말하기 그렇지만 나한테 불똥 튀면 알지? A안이든 B안이든 빨리 결정하라고! 무슨 얘긴지 알지?”
“네.”
장동석은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런데 장팀장! 김윤재 저 친구, 회사 들어오기 전 백화점에서 주차 알바 했다는 게 사실이야?”
“네. 그렇습니다. 제가 데리고 있었으니까요.”
“그 친구 볼 때 마다 놀라게 돼. 머리가 아주 비상한 친구라는 생각이 든다니까! 발표도 잘 하고!”
“칭찬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잘 키워 보라고. 3팀에 분명 큰 도움이 될 거야.”
양광수는 이 멘트를 하며 속으로 웃었다.
‘내가 왕이 되는데 도움이 될 놈이지. 흐흐흐.’
장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상무님!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래. 차질 없이 진행하고... 특히 최동식이 건은 소문 안 나게 조심하고.”
양광수 상무 방을 나온 장팀장!
오랜 만에 담배가 땡겼다.
옥상에 올라온 장동석은 담배를 피우며, 윤재의 얘기를 떠올렸다.
‘생각할수록 놀라운 놈이다. 양광수 상무도, 동식이도 마치 자신의 손바닥에 올려놓고 내려다보는 것 같지 않은가!’
최동식 과장의 거취를 두고 장팀장과 윤재의 의견이 갈렸었다.
장과장은 한식구인 만큼 배려를 해주자는 입장, 윤재는 죄의 경중을 따지는 게 우선이라는 입장이었다.
윤재는 자신의 의견을 이렇게 밝혔다.
“무작정 최과장 케어하자는 방향으로 나가면, 양상무님 반대에 부딪힐 겁니다. 죄질이 납득할 수준이면 용역권 부여로, 인정범위를 벗어났다면 원칙대로 가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장동석 팀장과 양광수 상무의 사이에서 나름 절충안을 제시한 것이 윤재안이었다.
전생에서 똑같은 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윤재는 풋내기라 사건의 실체에 완벽하게 접근하지는 못했었다.
다만, 산동물산 투서건이 최동식 과장의 비위보다는, 설탕을 적기에 싸게 공급받고 싶은 대리점 사장의 마음이 더 크게 작용했다는 게 어렴풋한 기억이었던 것이다.
더 이상 올라갈 자리가 없어 포기해 버린 최동식 과장.
능력에 비해 너무 높은 자리를 원하는 양광수 상무.
그 둘의 성향을 고려한 방안이 윤재의 안이었던 셈이다.
‘결국 윤재안이 최선책인가?’
장동석은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두 개째 피운 담배를 비벼 끄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하여튼 대단한 녀석이야!’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장동석은 불현듯 생각나는 게 있었다.
왜 그런 생각이 났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윤재 그 녀석 성장해 나가는 것 지켜보려면, 담배부터 끊어야 겠어.’
장동석은 아직 4~5개는 남아있는 담뱃갑을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 ◈ ◈
이튿날 오전 영업3팀 회의실!
오석진 과장이 주관한 구례-하동 지역 꿀벌 대책회의가 열렸다.
“가뜩이나 허리케인 때문에 설탕이 난리입니다. 그런데 산동물산만 물량을 보장해 주자는 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아직 최동식 과장의 비위 건을 모르는 팀원들!
오과장의 얘기에 반발했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산동물산 무작정 커버해 주자는 게 아냐. 이번 달 물량만 15% 인상 전 가격으로 주자는 거라고.”
“물류센터 설탕이 동나게 생겼는데,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안정적인 공급이 문제 아닌가요?”
직원들의 반발에 오석진이 맞섰다.
“허리케인 여파가 당분간 계속되겠지만, 2주 정도면 안정화 될 거다. 우리가 중남미 허리케인 한두 번 겪었니?”
오석진 과장 말이 틀린 것도 아녔다.
이번 허리케인 엘리나가 초특급인건 맞다.
하지만 자연재해 이벤트는 언제나 그렇듯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었다.
허리케인의 강도에 따라 안정화에 걸리는 시간은 다른 법.
엘리나도 5~6개월이면 안정을 찾게 될 것이었다.
“과장님 그러면 이제 저희 꿀도 팔아야 하는 거에요?”
“꿀 그거 얼마나 산다고.... 대기업에 맞는 품목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도 지리산 시리즈는 왠지 있어 보이긴 한다야.”
“저 장표를 윤재가 만들었다 구요?”
직원들이 돌아가며 한 마디씩 했다.
“진짜 우리 엑셀, 파워포인트 선생님 실력은 혀를 내두를 지경이네요.”
차명수 대리의 얘기를 끝으로, 직원들의 투덜거림이 멈췄다.
먼 훗날이 돼야 출시될 꿀이었기에, 꿀 시장 개척에 대한 팀원들의 생각은 조금씩 긍정적인 분위기로 변해 있었다.
산수유-벚꽃-개망초-코스모스 꽃과 꿀벌이 녹아든 이미지가 팀원들의 시각을 강렬하게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회의 말미에 차명수 대리가 돌발 질문을 했다.
다들 궁금해 하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최과장님은 왜 회의에 안 들어오신 겁니까?”
팀 내 최고참 오석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다들 모여 봐라. 해줄 얘기가 있어....”
오석진의 표정에 다들 걱정과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모여들었다.
◈ ◈ ◈
같은 시각!
장동석 팀장의 방에는 찬 공기가 두 사람을 짓누르고 있었다.
한 명은 장동석! 다른 한 명은 최동식 과장이었다.
장동석과 최과장 사이에 볼펜으로 갈겨쓴 투서가 놓여 있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상태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최동식.
표정으로 보니 분노보다는 쪽팔림이 먼저인 것 같았다.
그의 비위가, 대략 사실이었음을 웅변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승진을 통한 보상은 이미 포기한 최동식.
거래처에서 받는 작은 향응으로 허전함을 채우고 살았다.
나름 재미도 있었고, 거래처 사장들과 함께 즐긴다고 생각했다.
품의서를 통해 적게나마 거래처에 보상도 해줬으니까!
그러던 중 누구도 예기치 못한 초특급 허리케인 엘리나가 몰아쳤고, 그 나비효과가 산동물산으로 튀었던 것!
장동석이 입을 열었다.
“인사위에 회부되면 해고까지는 아니더라도, 징계가 불가피 할 거다. 양상무님 스타일 잘 알지?”
“네.”
자신의 승진가도에 걸림돌이 되면 가차 없이 밟아버리고, 도움이 되는 사람은 어떻게든 키워주는 게 양광수 스타일!
“해고까지는 아니더라도 앞날이 어찌 될지는 너도 잘 알거다. 강원도나 포항 같은 곳으로 발령 내고, 1년도 안 돼 강릉 같은 곳으로 발령 내고. 나도 너한테 이런 얘기 하는 게 힘들다.”
최동식이라고 왜 그걸 모르겠는가?
공식처럼 뻔히 예상되는 일이었다.
1년 만에 강원도 강릉. 그 다음엔 6개월 만에 울산.
조직은 이런 식으로 눈 밖에 난 사람을 뺑뺑이 시켜왔다.
결국에는 지쳐서 회사를 그만두게 만드는 수법이었다.
최동식은 어느새 중학생이 된 두 애들을 떠올렸다.
쪽팔림과 산동물산에 대한 배신감, 아내와 애들에 대한 걱정까지!
오만 감정이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고 있었다.
장동석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신진 리테일 사장님이 3개월 뒤에는 58세가 된다. 어때? 두 달 정도 쉬다가 신진 리테일로 가는 거야!”
순간 최동식의 눈이 번쩍 했다.
원격지로 1년에 한 번씩 뺑뺑이 돌며 왕따를 당하는 것보다 나은 조건임에 분명했다.
게다가 직영대리점 용역 사장으로 나가는 일은 자신의 플랜 중의 하나가 아닌가?
원격지 발령으로 가족과 떨어져 사는 것보다 100배는 나은 조건이었다.
“너도 알겠지만 복리후생은 회사만 못해도, 수입은 회사 수준은 될 거다.”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래? 상무님까지는 대략 설득했다만.”
“저야 팀장님께서 직영대리점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할 일이죠.”
“알았어. 니가 오케이 한 걸로 알고 진행한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힘내 임마.”
“죄송합니다.”
“제수씨한테는 어떻게 말 할래?”
“아내는 좋아할 겁니다.”
애들이 벌써 중학생이 되면서, 엄마 품을 떠나 버린 아들과 딸.
신진 리테일을 인수 받으면, 부인에게 경리나 총무 일을 시키면 된다.
그러면 인건비 하나를 세이브할 수 있고, 그렇게 하면 회사 연봉과 비슷하거나 좀 더 벌 수 있는 게 보통이었다.
물론 매년 적립되는 퇴직금. 매년 조금이나마 나오는 보너스. 자녀들 대학 공부 때 나오는 학자금. 병원비 보조. 회사 콘도 이용 등 따져보면 회사 다니는 게 훨씬 이익이었지만, 지금 그런걸 따질 때가 아녔다.
최동식 과장 입장에서는 장팀장의 제안이 최상의 패였다.
막연한 환상에만 빠지지 않도록 장동석이 주의를 주는 걸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 직영대리점 나가면 우리 거래처 되는 건데, 거기 나가서는 잘 해야 한다.”
“.....”
자존심이 상하는 얘기임에 분명했다.
산동물산 같은 곳에 접대 받고, 촌지 받는 일 따위를 더 이상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으니까!
하지만 돌이켜 보면 문제의 시발점은 자신이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종일관 무거운 분위기였지만, 최동식의 말투에 어떤 결의가 담겨 있는 게 느껴졌다.
◈ ◈ ◈
최동식이 팀장실을 나가자 장동석은 담배가 땡긴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랄! 회사 그만두는 사람도 있는 판국에!’
장동석은 다시 한 번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내선전화로 윤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들 내 방으로 들어오라고 해! 최과장 자리에 있니?”
“아니요. 안 계십니다.”
“그럼 최과장 빼고 나머지 사람들만 5분 뒤에 보자!”
장동석의 지시에 모두 팀장실에 집결했다.
장팀장의 입에서 추상같은 오더가 하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과장님과 윤재!”
“네. 팀장님!”
“내일 당장 산동물산에 가서 준비한 오퍼 제시하세요. 만약 거절하면 동식이를 자르고, 산동물산에 위약금을 주는 한이 있더라고 대리점 계약 해지한다고 하십시오. 저 공갈포 날리는 사람 아닙니다. 아시겠죠?”
“알겠습니다. 팀장님!”
장동석의 눈빛에서 인광이 튀고 있었다.
잘했건 못했건 최동식은 장팀장의 팀원이었다.
미우나 고우나 자기 새끼를 내치며, 진행하는 딜이 좋기야 하겠는가? 하지만 그런 일도 팀장의 몫이라는 걸 장동석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들 잘 들어요. 대리점 사장들께 바늘 하나 실 한 올이라도 부당한 접대 받지 마십시오. 만약 그런 비위를 저지르다 내 눈에 띄는 날에는 가만 두지 않을 겁니다.”
회사에서 인정하는 거래처의 선물을 3만원 이하!
그 금액을 초과하는 향응이나 접대를 받았다가는 당장 모가지가 날아갈 것 같은 눈빛이었다.
서늘한 기분으로 목을 어루만지는 팀원들이 보이는 가운데, 장동석의 추상같은 호령이 다시 떨어졌다.
“우리가 왜 영업3팀인지! 실적 뿐 아니라 도덕성으로도 전국에, 그 명성을 휘날립시다. 알겠습니까?”
“네. 팀장님!”
만약 누군가 장동석의 지령과 팀원들의 대답을 봤다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 같았다.
당분간은 영업3팀의 천하가 계속 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