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ur some sugar on me! (3)
회의실에서 오과장과 얘기를 나누는 사이 직원들이 모두 출근했다. 그리고 장동석 팀장이 윤재를 찾았다.
투서 사건을 오과장과 논의하느라, 매트릭스 실적 브리핑을 포함해 루틴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뭔 일 있어? 너답지 않게 왜 그래?”
윤재는 오석진이 나서기 전에 전광석화처럼 일을 처리해 버릴 생각이었다.
“팀장님! 오늘 출근길에 저희 팀을 대상으로 한 투서를 발견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다른 준비를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야 임마. 너!”
윤재를 따라 들어 온 오석진 과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투서라는 얘기에 깜작 놀란 장동석!
윤재와 오석진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감을 잡았다는 듯 얘기했다.
“윤재 나가 있고, 오과장님 문 닫고 자리에 앉으세요.”
윤재가 장팀장 방을 나간 뒤, 장동석은 오석진 과장과 한 참 동안 얘기를 나눴다.
오석진 과장의 주장은 산동물산 김동현 사장을 구워삶아, 투서 사건을 덮게 하자는 것이었다.
오과장의 방안을 따를 경우 산동물산에 질질 끌려 다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문제였다.
오과장에 뒤이어 윤재가 호출됐다.
“오과장님께 대충 얘기는 들었다. 그 투서 한 번 보자!”
“네. 팀장님. 여기 있습니다.”
장동석은 윤재가 건네 준 편지를 정독하기 시작했다.
글을 읽어가는 동안 장동석의 인상은 조금씩 구겨졌다.
◈ ◈ ◈
편지를 다 읽은 장동석의 팀장은 어두웠다.
부임 후 줄곧 승승장구를 해왔다.
하지만 이번 일 때문에, 팀의 총 책임자로서 자신도 페널티를 받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턱을 만지며 생각중인 장동석.
그런 그에게 윤재가 자신의 구상을 신속하게 쏟아냈다.
“최동식 과장은 어떤 식으로든 징계가 불가피 해 보입니다.”
“동식이 이 친구. 거래처 관리를 대체.... 어휴~”
장동석의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파졌다.
“문제는 사건 해결입니다. 오석진 과장과 아침에 얘기하다, 제가 생각한 방안이 있습니다.”
“방안?”
“네. 먼저 오과장님과 제가 산동물산을 찾아가겠습니다.”
“....”
“편지를 내용증명으로 보내지 않고 직접 투서한 걸로 봤을 때, 여지가 남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도 비슷한 느낌을 가졌는데, 윤재 너는 나이에 비해 확실히 통찰력이 있어.”
“접대와 촌지에 대한 응징에 방점이 찍힌 게 아니라, 설탕 물량 확보가 목적인 것 같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비위 당사자인 최과장을 배제하고, 오과장님 모시고 제가 함께 가서 산동물산 설득하겠습니다.”
“방법은?”
장동석은 왠지 윤재가 잘 해낼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들기 시작했다. 말투에 자신감이 있었고, 지난 세월 보여준 윤재의 활약 때문이었다.
“무턱대고 산동물산 요구사항만 들어주는 것은 저희가 택할 수단으로는 하수라 생각합니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단 말이냐?”
사실 장동석도 비슷하게 생각했지만, 해결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깔아뭉개자니 자칫 사건이 더 커질 것이고, 요구사항을 무조건 들어주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설탕은 지금 전국적으로 품귀현상을 보이고 있어 더 문제였다.
“한 시간만 주시면 보고서 작성해 오겠습니다.”
“상무님께 보고할 보고서인데 한 시간 만에 가능해?”
“네. 팀장님. 가능합니다.”
윤재는 일단 장동석의 올바른 결정에 만족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얘기가 있다.
하지만 장동석을 보고 있으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자리를 차지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장이기 때문이 아니라, 본디 장동석은 그릇이 큰 사람이었다.
일단 숨기고 해결하자는 오석진 과장.
상무님께 보고하자는 장동석 팀장.
둘이 동기였지만 이 차이가, 팀장과 팀원의 지위를 결정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재야! 정공법으로 가자! 90분 줄 테니 보고서 잘 만들어 와.”
“네. 팀장님!”
‘정공법으로 가자!’
전생에서 장동석에게 가장 많이들은 얘기 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윤재가 가장 좋아하는 장동석의 멘트이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말이다.
◈ ◈ ◈
“이런 미친!!!! 이걸 40분 만에 만들었다고?”
“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대체, 니 머리에는 뭐가 들어 있는 거냐?”
“아마 우동사리는 아닐 겁니다.”
“하하. 이 미친 자식! 얼른 자켓 챙겨 입고 와. 상무님 방으로 가자.”
“네.”
“오과장님도 모시고.”
“네.”
윤재의 보고서를 본 장동석은 파안대소했다.
70점 정도의 보고서를 기대했는데 200점짜리 보고서를 들고 왔기 때문이었다.
윤재가 보고서를 작성하는 동안, 오석진과 시나리오 플랜을 협의했던 장동석.
자신의 플랜을 훌쩍 뛰어넘는 내용이 윤재의 보고서에 담겨 있었다.
◈ ◈ ◈
호남부문장 양광수 상무실!
윤재는 임원실에서 말없이 양광수와 장동석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자신이 나설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마치 사자가 임팔라를 사냥하기 위해 몸을 낮추고 있는 것처럼!
“팀의 기둥이 돼야 할 녀석이 거래처에 룸살롱 접대나 처 받고, 돈 봉투나 받고! 그 새끼 당장 짤라!”
예상대로 양광수 상무는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윤재 눈에는 그런 양광수가 그저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임팔라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상무님 최과장은 규정과 절차에 입각한 징계를 하겠습니다. 부디 고정해 주십시오.”
“고정은 개뿔! 장팀장! 누구 인생 조질 일 있어? 거래처 관리도 못하는 놈이 무슨 과장은 과장이야?”
“죄송합니다. 상무님!”
양광수를 보며 윤재는 쓴웃음을 참았다.
자신의 기억에 최동식을 찜 쪄 먹을 만큼, 못된 직장인이 양광수였다.
‘뭐, 입으로는 항상 성인군자시니까....’
윤재는 양광수의 그럴싸한 얘기를 들으며 자신의 타이밍을 기다렸다.
“그래서 해결 방법이 뭔데?”
마침내 윤재의 시간이 다가 오고 있었다.
장동석이 답했다.
“해결방안에 대해서는 저희 팀 윤재씨가 직접 브리핑 하겠습니다.”
“음? 김윤재가 보고를 한다고?”
“네. 상무님!”
“어디 루키 에이스 얘기 한 번 들어볼까?”
양광수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여러모로 윤재에게는 호감을 갖고 있는 양상무였다.
윤재가 PPT장표를 띄운 뒤 브리핑을 시작했다.
“첫째, 산동물산을 설득해 본사 제보를 막겠습니다.”
“가능성은 어떻게 보나?”
아직까지 짜증이 묻어 있는 양상무의 질문.
장동석이 대신 답했다.
“시도해 볼 가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양상무가 계속해 보라며 턱짓을 했고, 윤재는 다시 브리핑을 재개했다.
“허리케인 엘리나 영향으로 오른 설탕 값이 현재 15%입니다. 이번 달 산동물산 물량만 인상 전 가격으로 공급할 계획입니다. 회사가 부담할 금액은 대략 2,000만원 수준일 것 같습니다.”
“2,000이면 설득할 수 있을 거란 말인가? 2,000만원 까주면 우리 마진은?”
“저희 마진도 2,000 정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산동물산 막을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딜이군!”
“네. 이번 설탕 값 급등으로 다들 동요하고 있습니다. 가격보다는 안정적 공급에 방점이 찍혀 있다고 봅니다.”
“오케이. 거기까지는 내가 부사장님 결재를 받아 주지.”
일단 첫 번째 관문은 무난하게 넘었다.
“두 번째는 회사와 산동물산, 그리고 구례~하동 지역의 양봉업자를 동시에 설득하는 일입니다.”
윤재의 아이디어 중에서 핵심이 되는 내용이 시작됐다.
“구례 산동물산을 정점으로 지역 양봉업자들을 수직계열화 하는 겁니다. 산동물산을 더 키워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저희도 함께 외연을 넓힐 수 있습니다.”
“불을 더 큰 불로 꺼 버리자는 전략입니다.”
“호오! 계속해 봐!”
양광수는 턱짓으로 계속해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저희는 국내 1위의 종합식품 회사입니다. 산동물산과 손을 잡고 제품 포트폴리오를 넓혀가는 겁니다.”
국내 1위, 종합식품 회사!
이런 단어들은 높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멘트다.
윤재는 거침없이 자신의 구상을 밝혀 나갔다.
“산동물산을 중심으로 지리산 꿀을 출시하는 거죠. 겨울 산수유! 봄 벚꽃! 여름 개망초! 가을 코스모스! 이런 식으로 가는 겁니다.”
“음....”
양광수는 어느새 윤재의 프레젠테이션에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묘한 마력이 있단 말이야!’
윤재의 브리핑은 계속됐다.
“구례 산동면은 우리나라 최대의 산수유 재배지입니다. 특이하게 겨울에도 꽃이 피는 대단위 산수유 군락을 보유하고 있죠.”
“.....”
“지리산의 춘하추동을 담은 꿀을 회사의 레이블을 달고 출시하는 겁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 판을 더욱 키워 버리는 겁니다.”
“판을 키워 산동물산과 회사 동시에 매출을 늘리자는 것이군!”
“네. 지리산 시리즈에서 한발 더 나아가서 한라산 시리즈, 속리산 시리즈, 이런 식으로 전국의 벌꿀을 O2 브랜드의 하위 상품으로 확장해 나가는 겁니다.”
“음....”
“회사에 불만인 김동현 사장에게 더 큰 이익을 주는 대신, 우리도 벌꿀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음....”
같은 ‘음’이지만 확실히 뉘앙스가 우호적으로 변해가는 게 느껴졌다.
“양봉과 설탕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입니다.”
“그건 그렇지.”
“산동물산과 지역 양봉업자들에 제시할 패도 많습니다.”
“패라고?”
“꿀벌들에 설탕을 주는 것 때문에 가짜 꿀 논란이 있는데 회사가 나서서 여론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양봉시설 현대화에 회사가 투자할 수도 있고, 영세한 수준인 국내 꿀 산업에 대기업 브랜드를 달게 할 수 있는 거죠.”
“양봉업에 OEM(Original Equipment Manufacturing)방식을 도입하자는 의미인가?”
OEM! 윤재네 회사가 원하는 스펙으로, 양봉업자들이 꿀을 만들어 공급하면, O2 브랜드를 달고 꿀을 판매하는 방식이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방식, OEM이었다.
“장마철과 겨울철에 벌들에게 설탕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꿀벌에 설탕 공급하는 설비를 현대화 해 회사가 양봉업자들에 제공하는 겁니다.”
“너무 번거롭게 가는 것 아니냐?”
“상생이라는 방식의 투자입니다. 협력업체를 단순히 물건 공급하는 벤더로만 보는 게 아니라, 현대화를 지원해 함께 성장해 나가는 거죠.”
상생이란 말에 양광수의 물음표가 느낌표로 변했다.
“설비지원을 하면 장비임대차 계약이 동반되고, 그렇게 되면 양봉업자나 조합들을 저희 쪽으로 Lock In 할 수 있습니다.”
“기브 앤 테이크로군!”
“그렇습니다.”
윤재는 꿀벌들에게 설탕을 공급하는 장치의 개념도를 띄웠다.
“회사는 제약, 바이오 사업도 영유하고 있습니다. 꿀벌 영양제도 저희 제품에 있으니 수직 계열화하기에 딱 좋습니다.”
“우리 쪽으로 몰리면 경쟁사들도 견제에 나설 건데....”
“양봉업자와 대리점 중에 희망하는 사람들만 선발해 진행하면 됩니다. 그리고 경쟁사 의식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음.....”
양광수가 자신의 앞머리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고민할 때 나오는 그의 버릇이었다.
보통 그 버릇은 긍정적 결정을 내릴 때 나타나는 것이란 걸 윤재는 알고 있었다.
“전국화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영업조직인 저희 부문 힘만으로 되는 일도 아니구요. 하지만 본사 제휴사업팀, 시설팀 등 역량을 동원하면 못 할 일도 아닙니다. 일단 호남부문에서 파일럿으로 산동물산과 스타트를 끊어 보겠습니다.”
윤재는 이 한마디로 쐐기를 박으며 브리핑을 마쳤다.
실로 입이 떡 벌어질 브리핑이었다.
일개 계약직의 머리에서 나왔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내용.
양광수가 앞머리 만지기를 중단했다. 결단이 섰다는 표시였다.
그가 말했다.
“그건 그렇고 윤재씨는 어떻게 양봉업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아나?”
“회사 다니면서 이 자리에 계시는 오과장, 장팀장 등 선배들께 배운 겁니다.”
아주 허튼 소리는 아니었다. 전생에서 선배들에게 배웠으니까!
“허허. 허허허. 허허허허. 어허허허허!”
양상무가 아주 흡족하다는 듯 파안대소 했다.
옆에 있던 장동석이 클로징 멘트를 날렸다.
“상무님께서 오케이 하신 걸로 알고 후속조치 진행하겠습니다. 중간 중간 진행경과 보고 드리겠습니다.”
“오케이. 한 번 해 보자고. 오과장! 윤재씨! 수고했어. 둘이는 나가도 되고 장팀장은 잠깐 남아 봐.”
이로서 부문차원에서 진행할 수준의 Mega Project 가 자연스레 시작돼 버렸다.
‘영업은 창의력이 부족하다. 영업은 기존의 사업영역에 안주하려 한다. 뭐 그런 편견을 보기 좋게 부셔버리겠다!’
윤재는 머릿속으로 벌꿀 신규 라인업 출시에 대한 로드맵을 구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