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32화 (32/196)

Pour some sugar on me! (2)

“이 밤중에 웬 일이냐? 무슨 일 있니?”

장팀장의 제법 놀란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팀장님! 내일 팀원 전원 7시까지 소집시켜 주십시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해외 뉴스 봤는데, 허리케인 엘리나가 중남미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든 모양입니다. 사탕수수 값이 치솟으면, 국내 설탕 품귀현상이 올 겁니다.”

장동석은 윤재가 한 말의 의미를 쉽게 이해했다.

“보통 큰 일이 아니구나! 알았다.”

“저도 형님들께 전화할 테니 팀장님은 내일 7시 전까지 모이라고 문자만 보내주십시오.”

윤재는 장동석과 전화를 끊은 뒤 부랴부랴 팀원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전화를 돌리며 윤재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전생에서는 허리케인 엘리나의 후폭풍을 앉아서 맞았지만, 이번엔 조금 다를 것이다!’

저녁 8시가 넘었지만 윤재는 창진과 헤어진 뒤, 사무실로 돌아왔다.

대리점 별 전년도 실적을 다운 받아, 동기간 주문량 수준에 맞춰 설탕주문을 일단 찍었다.

‘어차피 설탕 값은 오른다. 주문시점 가격적용을 받으려면, 미리 오더를 해야 해!’

◈          ◈          ◈

다음날 아침 긴장한 표정의 영업3팀원들은 팀장실에 집결해 있었다.

3팀을 제외하면, 호남부문의 그 어떤 직원도 출근하기 전이었다.

설탕의 가장 중요한 원료인 사탕수수!

브라질, 인도에 이어 사탕수수 주요 생산국인 카리브해 연안국들은 몇 달 동안 생산차질을 겪을게 뻔했다.

당장 어제부터 국제상품거래소에서 원당 값이 치솟고 있었다.

장동석이 긴박하게 오더를 내리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 물량 뽑아내느냐가 관건입니다. 서둘러 챙겨야 할 대리점부터 컨펌 받아 주세요. 어제 밤늦게 윤재가 사무실로 돌아와 일단 거래처별로 주문은 해 놨다고 합니다.”

팀원들은 윤재의 헌신과, 한 수 앞을 내다보는 행동에 감탄했다.

“거래처별로 배차까지 직접 챙기는 것 잊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팀장님!”

식품영업 8개월 만에 O2 푸드의 도사가 된 장동석!

윤재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장동석은 전광석화처럼 지시를 내렸다.

수많은 직장인들이 누구나 한 번씩 들어봤을 법한 얘기들이 있다.

“일 잘 하는 것은 다 거기서 거기야. 누가 의전 더 잘 하고, 술 한 번 더 먹고, 경조사 더 챙기느냐가 중요해! 아니면 라인을 잘 타거나!”

하지만 윤재는 전생에서도, 회귀 이후에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호남부문 90여명 직원 중 어제 허리케인 엘리나 사태를 보고, 설탕을 밀어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 몇이나 있을까? 단 한명도 없을 것이다.’

실제로 그랬다.

그 시간에 다들 술 마시고, 골프 연습장 가고, 가요주점에 있으면 있었지, 뉴스 볼 사람은 없을 테니까!

설령 뉴스를 봤다고 치자!

영업기획부서나, 시장분석팀 등에서 설탕 값 올릴 생각이나 하지, 개별 거래처까지 챙길 사람은 드물었다.

하지만 영업3팀은 달랐다.

뉴스에서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는 윤재!

윤재의 직언을 이해하고, 직원들에게 적기에 오더를 내릴 수 있는 리더.

팀장의 지시를 받고, 아침 7시 전까지 전원 출근하는 일사분란함.

덕분에 영업3팀 거래처들은 모두 원하는 수준의 설탕을, 인상 전 가격으로 받게 될 것이었다.

반면 8시 반 정도에나 출근하고, 오전 11시 정도나 본사 회의를 거쳐 하달된 설탕가격 정책을 받아 든, 대부분의 영업조직들은 당장 비상이 떨어질 것이었다.

원하는 물량도 확보하지 못할 것이고, 물량을 공급하더라도 인상된 가격으로 공급해야 할 것이었다.

일을 잘 하는 직원은 이런 디테일한 업무 처리에서 갈리는 법이었다.

그리고 이런 티끌만한 성공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어느새 태산 같은 차이를 만들어 내게 되는 법이었다.

“회사가 웬 일이래? 설탕 값 안 올리고 공급한다고? 정말이여?”

“딱 보니까 설탕대란 나게 생겼던데, 용케 설탕 준다고 그러네. 오과장 고맙네. 고마워!”

“역시 차대리 밖에 없어. 역시 유능한 영업사원 이라니까!”

9시가 되기 전 영업3팀은 거래처의 칭찬을 받으며, 원하는 설탕주문을 대략 마무리할 수 있었다.

윤재가 찍어놓은 전일자 주문에, 신속한 확인과 배차까지!

광주와 전주의 물류센터에 가장 먼저 출하될 설탕은 모조리 영업3팀 소속 차량들 차지였다.

그 시각! 다른 팀들은 사태파악 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급한 일이 마무리 되자 장동석이 윤재를 불렀다.

“윤재 니 덕에 한시름 덜었다. 그나저나 그 뉴스 보고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측하는 실력에 그저 놀랄 뿐이다.”

“하하하. 아닙니다. 팀장님! 운이 좋았습니다.”

“그나저나 본사에서 오더 취소하라고 전화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대리점이나 수요처에 적기 공급은 뒷전이고, 설탕 값을 올려서 마진 챙기는 게 회사에 이익이라고 생각할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었다.

“팀장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략 15% 전후 인상될 설탕 값보다, 저희 거래처들의 신뢰를 사는 일이 장기적으로 더 이익이라 생각됩니다.”

“음. 그건 그래. 나도 동감이다.”

“팀장님 부임이래 저희는 충분히 잘 해왔습니다. 이번 일로 거래처들은 영업3팀의 일이라면 더욱 믿고 따라 줄 것입니다. 회사에도 장기적으로 그게 더 이익일 것이라 믿습니다.”

“장기적 신뢰관계라! 좋은 말이다.”

◈          ◈          ◈

허리케인 엘리나 여파로 사탕수수 값이 치솟았고, 원당 값이 덩달아 올랐다.

국내 설탕 메이커들도 설탕 값을 15% 기습 인상했다.

O2푸드도 마찬가지였다.

기습적인 가격 인상에 전국 설탕 취급 대리점들의 원성이 빗발쳤다.

“원당 값이 오른 거야 그렇다 칩시다. 기존 재고는 있을 거 아닙니까? 새로 들어오는 원당부터 가격을 올려야지, 기존 재고도 올리면 어떻게 합니까?”

“죄송합니다. 본사 지침이라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

“대기업이 무슨 동네 구멍가게도 아니고, 너무 치사한 조치 아닙니까?”

“사장님! 너무 그러지 마세요. 지금 설탕 공급도 못해주는 회사도 있고, 우리 회사 거래처 중에서도 물량 부족 때문에 공급 못 받는 대리점들도 있습니다.”

“뭐요? 신차장! 지금 나 협박하는 거요?”

“제가 언제 협박했습니까? 현실이 그렇다는 거죠!”

영업3팀을 제외한 전국의 수많은 영업조직은 이런 종류의 전화를 받으며 하루 종일 시달려야 했다.

윤재의 신속한 조치 덕에 영업3팀은 고초 없이 넘어갔지만, 시간이 흘러 초기 물량이 떨어지면 비슷한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위기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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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 수요처 중 가장 큰 곳은 과자회사, 빵 회사!

이런 대형 거래처는 본사 직판 팀에서 직접 거래를 했다.

그 다음으로 가장 설탕을 많이 소비하는 곳은 공교롭게도 전라도에 많이 몰려 있었다.

음식과 관련해 자부심도 강하고, 다양한 음식문화를 발달시킨 전라도에서 설탕을 대량 소비하는 곳이 두 군데 있었다.

하나는 광양 일대의 매실 청 제조 공장이나 농가들.

다른 하나는 고흥 유자청을 만드는 곳이었다.

10월 이후 유자가 익은 뒤 시작되는 유자청은 아직 여유가 있었지만, 5월부터 본격 시작하는 광양의 매실 청 제작은 당장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광양의 매실 영농조합이나 소규모 매실청과 음료 제조 공장에서, 설탕을 원하는 만큼 공급받기 위해 대란이 일어났다.

“아따! 내가 언제 100원, 200원 가지고 따졌다고 그래? 가격은 달라는 대로 줄 테니까, 40 팔레트만 보내주소!”

읍소형 사장님들의 멘트는 이런 식이었다.

“대기업이 이럴 때 우리 같은 중소기업 도와 줘야제. 큰 집에서 인심 나는 법 아니여? 좀 도와 줘 봐! 박과장 그 정도 힘 있잖아?”

곳간에서 인심난다며 큰 집의 의무를 부각시키는 멘트를 하는 사장님들도 있다.

“이번에 잘 도와주면, 내 박과장 은혜! 절대 잊지 않겠네. 우리 집 매실 청 못 담그면 내년에 한국제당으로 거래선 옮길 테니 그리 알게!”

협박형 멘트를 날리는 사장님들까지!

작년 이맘때만 해도 만원 조금 넘는 설탕 한 포대 값을 100원, 200원 깍겠다며, 여기저기 전화를 하던 사람들의 태도가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말 그대로 설탕대란이 남도를 휩쓸고 있었다.

도매는 도매대로, 소매는 소매대로 설탕대란의 소용돌이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영업3팀의 위기는 광양 매실 청 농가가 아닌, 엉뚱한 곳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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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케인이 카리브해를 휩쓸고 간 지 벌써 3일.

여전히 사무실에 1등으로 출근한 윤재는 보안 경비를 해제하다 바닥에서 흰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이게 뭐지?”

윤재는 봉투를 집어 들었다.

‘양광수 상무님. 장동석 팀장님 귀하!’

우표도 붙어 있지 않은 편지.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안 되는 일이지만 윤재는 편지를 열어 봤다.

전생의 기억이 맞다면 이 편지는 투서일 것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법!

윤재의 예상대로 거래처에서 날아온 투서였다.

영업3팀에는 최동식 과장이 근무하고 있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스타일.

실적도 무난했고 뭐든지 무난한 그런 직원.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이 미미한 그런 평범한 직장인!

그 최동식 과장의 비리를 폭로하고, 인정에 호소하는 내용의 편지였다.

비뚤한 글씨는 이런 내용을 담고 있었다.

‘존경하는 상무님!

저는 전남 구례에서 대리점을 하고 있는 김동현이란 사람입니다.

[중략]

어제 아침에는 최동식 과장이 설탕 값이 올랐다고 통보하더니, 오후에는 설탕을 줄 수 없다고 합니다.

첫 날에는 웬일로 설탕을 2팔레트 줬는데, 이미 재고는 동나버렸습니다. 그런데 설탕을 안 준다니요?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O2 만 믿고 양봉업자들에게 철썩 같이 약속을 한 저는 어떻게 합니까?

저는 이번에 설탕 좀 팔아볼 생각으로 구례, 하동 일대의 양봉업자들에게 선수금까지 받은 상황입니다.

최동식 과장에게 잘 보이려고 룸살롱 가서 술 사주고, 촌지까지 줬는데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제발 부탁이오니 최동식 과장이 약속한 물량을 배정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제가 신용을 잃어 이 바닥을 떠야 할 판입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과자회사, 빵 회사를 제외하면 설탕의 Big 수요처 중 하나가 바로 양봉업자들이었다.

매실청, 유자청이 단기간에 설탕을 쓸어간다면, 양봉업은 장마철과 동절기에 설탕을 제법 쓸어갔다.

‘촌지’와 ‘룸살롱’이라는 대목을 읽을 때 윤재는 아차 싶었다.

룸살롱, 촌지는 제보자의 의중에 따라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최동식 과장보 한 명의 문제가 아녔다.

직속상사인 장동석 팀장과 양광수 상무에게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양광수야 어차피 살(殺)부에 오른 사람이니 그렇다 쳐도....’

윤재가 어찌할까 잠시 고민하는 사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뭐 보냐? 연애편지라도 보고 있냐?”

목소리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항상 2등으로 출근하는 오석진 과장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미쳤어? 이걸 상무님께 보고하면 우리 팀 풍비박산이다!”

회의실에서 오과장과 함께 투서를 읽었다.

최동식에 화가 난 오과장의 분풀이가, 죄없는 윤재를 향했다.

“그렇지만, 투서를 상무님께 보고하지 않으면....”

“윤재야! 니가 아직 회사 생활 많이 안 해서 그러는 거야.”

‘회사 생활 올해로 22년차인데!’

전생에서 20년, 현생에서 2년차!

윤재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다 쓴웃음을 지었다.

“동식이 징계 먹거나 짤리고, 팀장님까지 스크라치 난다. 상무님도 마찬가지고!”

“....”

“내가 동식이랑 찾아가서 이 양반 설득할 테니 못 본 것으로 하자.”

“....”

“너도 마찬가지야! 다음 달이면 정규직 된다고 들었다. 괜히 이런 일 들쑤시다 너도 생채기 날 수 있어.”

윤재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살짝 놀랐다.

하나는 오석진 과장도 자신의 정규직 전환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사내에 어느 정도 소문이 나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둘째는, 오과장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항상 묵묵히 도와주는 오과장님이 고마웠다.

하지만 22년 내공의 윤재는 오과장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오과장님! 이렇게 행동하셔서는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윤재는 오과장이 제시한 길을 따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 대신 가장 멀고 험난하지만, 가장 가깝고 빠른 길이 보였다.

그것은 ‘정도(正道)’ 라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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