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ur some sugar on me! (1)
이래저래 야근이 많은 윤재!
하지만 웬일로 정시 칼 퇴근을 했다.
약속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무실 1층에서 백화점 알바 동생, 남창진을 기다렸다.
며칠 전 생일을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한사코 저녁을 사겠다는 것이었다.
‘하여튼 이 놈 자식! 약속시간을 지키는 법이 없다니까!’
이미 약속시간이 10분 넘게 지나 있었다.
“이게 누구야? 3팀 에이스 김윤재씨 아냐?”
“아. 네 팀장님! 퇴근 하세요?”
윤재 덕에 심장수술을 성공리에 마치고,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미친개 팀장! 아니 신광군 팀장이었다.
“여자친구 기다리나?”
“아닙니다. 그냥 후배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자 후배!”
“아네요. 그냥 후배에요....”
“애인 없어? 말만해 내가 소개시켜 줄 테니까. 회사 안에도 자네를 탐내는 여자들이 많은 것 같던데 말이야.”
“하하하. 말씀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 가지라고. 나도 약속이 있어서 가네. 소개팅 건 있으니까 다음에 내 자리로 한 번 와!”
신광군에 이어 회사 직원들이 알은체를 하며 지나갔다.
10명이 넘는 직원들이 저녁인사를 하고 지나가는 동안에도, 창진은 나타날 기미가 없었다.
윤재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오후에 있었던 장동석 팀장의 얘기를 떠올렸다.
“방 문 좀 닫아라!”
“네. 팀장님!”
장동석은 기분이 좋아보였다.
“지난주 회의 갔다가 굿 뉴스를 하나 들었다.”
“좋은 소식이요?”
“그래. 지난주에는 사람들이 많아서 얘기 못했는데.... 문 좀 닫을래?”
장동석은 보이지도 않는 밖을, 곁눈질로 한 번 더 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회장님께서 니 동기들을 만들어 줄 계획인가 보더라!”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6월1일자 신입 공채들 뽑는데, 너를 6월1일자로 정규직 전환할 계획이라고 하더라고.”
“정말입니까?”
장동석은 매사 신중한 사람이었다. 해야 할 얘기와 하지 말아야 할 얘기를 잘 구분하는 사람.
한 달도 넘게 남은 얘기를 쉽게 떠벌일 스타일은 아녔다.
그만큼 장동석도 기뻐했다는 방증이었고, 소스가 확실하단 얘기였다.
“인사팀장이 내 동기야. 허튼 소리는 아닐 거다.”
“감사합니다.”
당연히 정규직 전환은 기쁜 일이다.
전생에서 이미 별을 달아 본 윤재에게 정규직 전환은 그리 큰일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목표 달성을 위해, 정규직 전환은 반드시 넘어야 할 통과의례였다.
“거의 99.9% 결정된 일이니까... 남은 두 달은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네. 팀장님! 명심하겠습니다.”
“너는 정규직 되고도 남을 사람이니까, 정규직 되도 초심 잊지 말고.”
“네.”
“이번에는 짬뽕 말고, 짬뽕에다 탕수육도 사는 거다?”
“하하하. 빼갈도 한 병 사겠습니다.”
“그래. 좋은 하루 돼라!”
장동석 팀장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고 있는데 경적소리가 들렸다.
“에이요 형님? 뭐 해? 얼른 타!”
윤재는 창진의 자동차에 올라탔다.
“왜 이리 늦었냐?”
“크학! 미안해! 차가 꽉 막혀서 말이야. 정말 미안해. 대신 내가 진짜 맛있는 거 살게.”
“차만 비싼 거 타고 다니면 뭐하냐? 막혀서 늦는데...”
“에헷! 그게 그렇더라구요. BMW도 차 막히니까 별 수 없네.”
올해 1월에 대진증권에 입사한 남창진.
그는 매달 100만원 가까이 내고 할부로 BMW를 타고 다녔다.
“인생 뭐 있어요? 폼 나게 살아야지. 그리고 이 정도 타고 다녀야 고객들도 먹어 준다 구요.”
윤재의 핀잔에 창진은 그렇게 대답했었다.
“에이요. 형님! 라디오라도 들을까? 비싼 차라 그런지 스피커가 남다르다니까!”
창진은 신이 난 얼굴로 라디오를 틀었다.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Def Leppard라는 그룹의 ‘Pour some sugar on me!’라는 곡이 흘러 나왔다.
Harman 오디오라 그런지 현장감 넘치는 소리를 뽑아냈다.
“창진이 너 이 노래 아냐?”
“몰라요. 왠지 몰라도 신나긴 하네.”
“데프 레파드라는 밴드의 ‘설탕 더 줘’ 라는 곡이야.”
“설탕 더 줘?”
“그래. 여기서 설탕이 마약을 뜻 한다는 얘기도 있지. 어쨌든 이 밴드 히트곡 중 하나야.”
“데헷! 형이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볼륨 좀 키울까?”
창진은 신이 난 얼굴로 볼륨을 키웠다. 베이스 음이 고막과 동시에 심장까지 울려댔다.
“아냐. 됐다. 아이고 시끄럽다. 소리 좀 줄여.”
“네. 형님!”
“설탕얘기 나온 김에, 너 설탕 좀 줄여라. 콜라. 아이스크림부터 쵸콜렛까지 설탕 좀 줄이라니까.”
“데헷! 나는 단 거 먹는 재미로 사는데. 왜 그러세요?”
전생에서 40대 중반이 된, 창진은 몸이 자꾸만 비대해졌다.
그리고 당뇨부터 혈관질환까지 성인병을 달고 살았었다.
BMW 안에도 콜라 컵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설탕이 니 혈액순환부터 시작해 건강을 크게 해친다는 것 명심해라.”
“에헷! 형님은 설탕 파는 사람이 설탕 먹지 말라고 하면 어떡해요?”
“그러니까 더더욱 이러는 거야! 나는 너랑 장식이 형 오랫동안 건강하게 보고 싶다.”
“에헷! 제 걱정은 접어두시고, 같이 떼창이나 부릅시다. 곡 좋네!”
넉살 좋기로 유명한 남창진.
볼륨을 키우더니 ‘Pour Some sugar on me.’ 후렴구를 후창하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너를 어떻게 말리겠냐?”
윤재는 만세동작을 한 뒤 손을 흔들며 ‘설탕 더 줘’를 떼창했다.
◈ ◈ ◈
“형님!”
갈비살을 구워 윤재 앞 접시에 올리기를 반복하던, 창진이 진지하게 윤재를 불렀다.
장난기가 많고 넉살 좋은 창진이 저렇게 부를 때는 좋지 않은 일이 많았다.
“형님 책 대박 나서 라디오 광고에도 나오던데....”
“?”
“으헷! 나 부탁이 있는데 좀 들어주면 안 될까? 에헤헤....”
“너. 설마 내 생일 축하가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는 거 아니지?”
“아니, 아니, 아니죠. 진짜 순수하게 축하하는 맘으로다가.”
“?”
“장식이 형도 같이 오려고 했는데, 형도 아시다 시피 장식이 형은 지금 외국 출장중이니까...”
창진이 말꼬리를 뱅뱅 돌렸다. 양쪽 검지손가락도 서로 마주한 채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그런데 부탁이란 게 뭐냐?”
“요즘 지점장이 약정고 못 채운다고 난리도,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습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약정 못 채우면 월급도 제대로 안 나올 텐데, BMW가 가당키나 하냐?”
“에헷. 형님은 또 자동차 얘기야? 그러지 말고 나한테 돈 좀 맡겨 줘요! 얼마나 가능 하시려나?”
창진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니네 회사에 계좌 만드는 거야 가능하지만, 나는 조건이 까다로워.”
“아니, 형님! 조건이라니요. 에헷! 이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씀이십니까?”
“조건 들어보고 돈 받을래? 아님 조건 안 듣고 빈손으로 돌아갈래?”
“일단 들어나 보십시다.”
“첫째, 일임매매는 불가하다는 거야.”
“아니, 아니 형님! 수수료 때문에 그러는데 일임매매가 안되면 무슨 소용이에요? 아니 이 형님 자꾸 청천벽력이시네.”
“나 그냥 갈까?”
“아니, 아니 형님! 그런 건 아니고....”
“두 번째, 조건은 니가 설탕 섭취를 지금보다 3분의 1로 줄이는 거야. 이 두 가지 조건에 오케이 하면 내가 1억을 맡기마.”
“일. 일억이라구요? 그 돈이 있어요?”
“아니 없어. 그렇지만 곧 가능할 것 같다.”
4월 월급이 들어오며, 드디어 윤재의 통장 잔고는 1억을 찍었다.
“지. 진짜요?”
2~3,000만 원정도 유치해 일임매매로 수수료 약정 채울 생각이었던 창진.
1억이라는 소리에 창진의 양쪽 눈썹이 모두 올라갔고, 눈알은 튀어 나오기 직전이었다.
불판에 구워지고 있는 화고버섯과 창진의 눈알이 같이 굴러다니지 않을까 걱정될 지경이었다.
“나한테 1억 유치하고 싶으면 다음 달까지 건강검진 받아와! 니 혈당 수치 확인하고 1억 계좌 열어 주마.”
“아니, 아니 형님. 그러지 말고 2~3천만 일임계좌로 해줘요. 내가 절대 손해는 안 끼칠게. 그리고 혹시라도 손해나면 내 돈으로 물어주면 될 거 아네요?”
전생에서 창진에게 비슷하게 투자했지만 별 재미를 보지 못했던 윤재다.
창진도 전생에서 나이 40이 넘도록 전세방을 전전하는 신세였었다.
“너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내 투자원칙은 우량주에만 투자 한다는 거야.”
신동화건설로 600%의 수익을 내긴 했지만, 잡주는 신동화건설이 마지막이라 다짐했던 윤재!
일임매매 금지. 우량주 중심 투자라는 말에 창진이 펄쩍 뛰었다.
“에헷! 형님 우량주에 투자해서 어느 세월에 돈을 벌어요?”
“.....”
외제차를 수시로 바꾸고, 해외여행, 골프, 캠핑 등 남들 하는 건 다하고 살았던 창진.
진짜 해야 할 일은 안하고 남들 하는 일 어설프게 따라하면,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살 수 밖에 없는 법이었다.
윤재는 또박또박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나도 주식을 잘 알지 못하지만, 지나 놓고 보니 은행이자 보다 못한 게 주식이더라.”
“아니, 아니 아네요. 그건 아니죠. 형님!”
“아니긴 뭐가 아냐 임마! 당장 자동차 할부금 걱정하는 주제에.”
“.....”
1년 365일 쾌활한 창진이 자동차 할부금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딸 때도 있지만 풀 때도 있고, 지나놓고 보면 간신히 본전치기 하거나 마이너스 나는 게 주식이더라.”
“....”
전생에서 윤재가 그랬다. 창진의 꾐에 넘어가 20년 가까이 주식투자를 했건만 누적 수익은 간신히 본전치기였다.
“너 내 조언 받아들여서 대진증권 취직했잖아. 이번에도 내 말 믿어봐. 너도 증권사 CEO 정도는 꿈 꿔 봐야지?”
“크핫! 형님! CEO라니요? 누가 지방대 나온 저를...”
“됐고, 내 조건 지켜라. 두 가지 분명히 말했다. 투자 받고 싶으면 다음 달까지 조건 이행해!”
“에헷......”
창진은 알았다는 건지 모르겠다는 건지 애매한 ‘에헷’으로 말을 마쳤다.
◈ ◈ ◈
어느새 갈비살 3인분을 모두 비웠다.
후식 냉면을 기다리며 창진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런데 형님! 혜진이 얘기 못 들었지?”
“혜진이?”
“그래. 형님! 혜진이가 길거리 캐스팅 당했다고 하던데?”
“길거리 캐스팅?”
“그래. 형님! 걔가 보통 미모인가? 어디 프로덕션인가 뭔가 하는 곳에서 명함주고 갔다고 하대요.”
“지금도 혜진이랑 활발하게 연락하고 사냐?”
“일주일에 한두 번은 통화해요.....”
“그런데 길거리 캐스팅에 응하겠다는 거냐?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거냐?”
“명함만 받고 연락은 안했다는데, 혜진이가 한 미모 하니까! 우리 절친이 진짜 유명 배우 되는 거 아닌가 몰라?”
조막막한 얼굴에 윤곽이 뚜렷한 눈코입! 따지고 보면 혜진이 만한 미모가 드물긴 했다.
“그냥 해프닝이겠지 뭐.”
“에효~”
갑자기 창진이 한숨을 푹 쉬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냐?”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혜진이는 지금도 통화하면 절반이 형님 안부에요.”
“.....”
“엊그제도 다음 모임이 기다려진다나 어쩐다나.... 형님 보고 싶어 그러는 것 같습디다.”
“너는? 너는 어떤 거야?”
“나야. 이제 뭐 혜진이를 그냥 친구로 생각하지만.... 그래도 너무 형님만 좋아하는 거 같아서 좀 서운하긴 하지.”
“알았다. 냉면이나 먹자!”
냉면을 열심히 먹는 창진을 보며 생각했다.
‘창진이 녀석. 내 말만 잘 들으면 남부럽지 않은 인생을 살게 될 텐데.... 과연 그 좋아하는 설탕을 줄일 수 있을까?’
혜진과 창진을 생각하며 냉면을 먹던 윤재의 시선이 TV에 꽂혔다.
해외 토픽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중남미를 덮친 허리케인 엘리나의 영향으로, 도미니카 공화국이나 자마이카의 사탕수수 농장들이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는 뉴스였다.
“에헷! 형님은 이 맛있는 냉면을 남기고 그래요? 안 먹을 거면 내가 먹는다.”
“....”
창진이 윤재의 시선을 따라 TV를 바라봤다.
“왜 그래? 에이요! 형님? 무슨 일 있어? 뭐야? 왜 그래?”
“미안한데, 창진아! 밥만 먹고 헤어져야겠다.”
“아니, 형님! 오늘 간만에 스타크나 한판 하자니까?”
“미안하다. 얼른 냉면부터 먹어. 가봐야겠다!”
허리케인이라니!
냉면의 와사비 맛보다 100만 배는 강렬한 소식이었다.
‘우선 장팀장님께 전화부터 해야겠다.’
허리케인 엘리나!
카리브해 연안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초토화시키고, 북상한 엘리나는 미국 오클라호마 쿠싱지역의 원유저장시설까지 초토화시키며 천문학적 피해를 가져온 초특급 허리케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