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약속
어느새 봄이 도래한 O2 푸드의 호남부문 영업3팀장실.
창으로 비치는 따스한 햇살이 봄의 신호를 퍼뜨리고 있었다.
“금방 갈 건데, 그렇게 급하냐?”
“네. 팀장님! 지금 당장 발주를 해야 해서요. 죄송합니다.”
“알았어. 니가 내 자리에 가서 수정한 다음 진행시켜라.”
“네. 감사합니다. 팀장님!”
차명수는 장동석과 통화를 끝내고 장팀장 방으로 들어갔다.
웬만해선 대리결재를 허락지 않는 장동석이었다.
하지만 별 내용 아니었고 거래처에 제품이 소진됐기에, 수정과 대리 결재를 차명수에게 맡긴 것이다.
반려라도 해서 다시 품의를 진행하다 보면 그만큼 시간이 지체될 상황도 고려한 것이었다.
차명수는 오타와 외상한도 금액, 그리고 거래처 기본 정보를 수정했다.
수정이 거의 끝나갈 무렵 장동석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진지한 얼굴로 품의서를 수정하고 있는 차명수! 그런 명수를 보며 장동석이 말했다.
“명수 대리! 너한테 그 자리 잘 어울린다야. 나중에 꼭 그 자리에 앉아라!”
“팀장님!”
차명수는 진심으로 감동했다.
입사이래 고문관 역할을 해 온 덕에 욕받이 무녀로 살아온 차명수!
그에게 팀장 진급을 해서 팀장 자리에 앉게 될 거라는 얘기보다 더한 축복은 없었다.
“눌렀냐?”
“아직 안 눌렀습니다. 그런데 수정은 다 해놨습니다.”
“그럼 눈치 보지 말고 눌러!”
“네?”
“거래처 출하 급하다며? 결재 진행하라고! 니가 다시 고쳤으면 나는 잘 고쳤을 거라 믿는다.”
“감사합니다. 급해서 누르겠습니다.”
차명수는 품의서 결재를 누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동석에게 폴더 인사를 한 뒤 팀장방을 나가려는데 장팀장이 그를 불렀다.
“이번 주에 윤재랑 골프 친다고?”
“네. 윤재가 저희 아버지랑 함께 운동하고 싶다고 해서요.”
“그래?”
“평소에 아버지를 존경해 왔다고 합니다. 내기에서 제가 지기도 했고요.”
“잘 쳐라. 내가 뭐 찬조 안 해줘도 되니?”
“찬조요?”
“그래. 너랑 윤재랑 운동한다는데 찬조라도 해줄까 싶다. 이건 어때?”
장동석은 차명수에게 골프공 한 다스를 건네줬다.
회사로고가 찍힌 타이틀리스트 Pro V1 볼 이였다.
“팀장님! 이 귀한 것을!”
“골프공이 다 거기서 거기지. 나야 뭐 상무님하고 공치는 것 외에는 운동할 일 없으니까. 너랑 윤재랑 써라. 아버님도 회사 로고 찍힌 볼로 운동하시면 좋아할 것 아니냐?”
“감사합니다.”
자신의 아들이 다니고 있는 회사의 로고가 찍힌 볼로 운동한다면, 아버지가 좋아하실 게 분명했다.
차명수는 장동석의 그런 배려에 깊게 감동받았다.
이미 장동석의 리더십에 여러 차례 감복한 차명수였지만, 이날따라 더욱 감동을 받은 얼굴이었다.
‘내가 이 분께는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한다!’
차명수는 마치 세례라도 받은 것처럼, 감복 받은 얼굴로 팀장실을 나왔다.
◈ ◈ ◈
2001년 3월24일. 화순 클럽 900!
작년 회사 골프행사에서 차명수 대리를 꺽으며 전리품으로 획득한 것이, 차대리의 부친 차태영 부회장과의 라운드였다.
차명수. 차명수 부인. 그리고 차태영 부회장이 멤버였다.
윤재는 한 시간 전에 골프장에 도착해 차명수 대리의 가족을 기다렸다.
20분 정도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푸는 사이 BMW 5시리즈가 클럽하우스로 들어왔다.
차명수의 안내가 운전하는 BMW였다.
캐디백을 모두 내리고, 형수님이 차를 주차장으로 몰고 갔다.
차태영 전 부회장과, 차명수 대리가 보스턴백을 들고 클럽하우스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헛헛! 윤재씨도 잘 지냈습니까?”
“필드에서 뵙게 돼 영광입니다. 마치 은사님 모시고 운동하는 기분이네요.”
“헛헛! 이미 은퇴해 이빨 빠진 노인이 뭐가 대단하다고. 어쨌든 노인을 생각해 줘서 고맙소!”
윤재는 이미 환복을 마쳤지만, 차명수 대리 일가는 환복 전이었다.
라카룸 앞까지 차대리 부자를 따라갔다.
“대리님! 그나저나 대리님 차 실물로 보니 멋지네요.”
“누구 차라고?”
차태영 부회장의 놀란 질문!
차명수가 느닷없이 윤재에게 손짓발짓을 하기 시작했다.
차태영 전 행장이 윤재를 뒤돌아봤다.
“네? BMW가 차대리님 차라고 하시 길래...”
순간 차태영이 차명수를 싸늘하게 바라봤다.
“너! 아직 그 버릇 못 고친 게냐? 못난 놈 같으니라고!”
차태영이 앞장서 라카룸으로 들어갔고, 차명수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뒤를 따랐다.
‘그 얼어 죽을 허세는 집에서나 회사에서나 한결같은 모양이구나!’
차명수 대리가 집에 BMW가 있다고 큰소리를 쳤었는데, 그 차는 아무리 봐도 아버님 차인 모양이었다.
곧이어 명수대리의 부인이 클럽하우스로 들어왔다.
이제는 맹장염에서 벗어나 완벽하게 건강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형수님! 안녕하세요? 대리님 후배 김윤재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호호호. 반가워요. 저는 나애리라고 합니다. 지난 번 김장 일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오빠한테 듣던 것 보다는 훨씬 미남이시네요. 키도 크시고!”
“하하하. 감사합니다.”
“좀 있다 봐요~”
나애리 여사도 라카룸으로 사라졌다.
성품도 외모도 뒤태도 나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차대리님이 집안에서 불량감자 캐릭터인 것 같단 말이야!’
◈ ◈ ◈
“굿샷!”
윤재의 티샷에 동반자들부터 캐디까지 굿샷을 연발했다.
세컨지점으로 이동하는 동안 윤재의 자세에 대한 칭찬이 줄을 이었다.
“교과서적인 스윙이군! 힘을 빼고 헤드 무게로 스윙하며, 허리가 회전하는! 최소 5년은 배워야 가능한 자세인데?”
윤재는 이럴 때가 난감하긴 했다.
전생에서 골프를 10년 가까이 쳤는데, 현생에는 뭐라 해야 할지...
“배운 대로 치려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다들 그게 어려워서 안 되는 거죠. 여자인 제가 봐도 부드럽게 스윙하면서도 임팩이 제대로 실리는 멋진 스윙이었습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동시에 윤재의 스윙을 칭찬했다.
차태영 부회장은 아들 부부와 골프를 칠 만큼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꼰대 같지 않고 열린 분이시구나!’
김장 때도 느꼈지만, 차태영 부회장이 더 멋지게 보였다
◈ ◈ ◈
골프의 장점은 여러 가지이다.
그 중에 조직생활이나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제일 좋은 것은, 4~5시간을 함께 하며 다양한 얘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차태영 부회장은 야심차게 계획하고 있는 사업에 꼭 필요한 사람.
윤재는 미리 준비해 온 이야기 거리를 하나 둘 풀어내기 시작했다.
“행장님! 롤렉스 데이토나가 러버 스트랩과도 잘 어울리는 군요.”
차태영 부회장은 굉장히 소박한 사람이지만, 유일하게 사치를 부리는 분야가 바로 남성용 시계였다.
특히 그의 롤렉스에 대한 집착은 신문에 여러 차례 나올 정도로 유명했다.
“헛헛! 데이토나를 알아보다니! 젊은이는 식견이 남다르군. 1,000만원 조금 더 주고 산 모델이라네. 어디 가서 명함 내밀 가격은 아니지. 나는 롤렉스 라인업 중에서 데이토나를 가장 좋아 한다네!”
“영화배우 폴 뉴먼도 데이토나를 즐겨 찼다고 들었습니다만.”
“헛헛! 이 친구 아는 것도 많군. 내 평생소원이 데이토나 폴 뉴먼 에디션을 손목에 감아보는 것일세!”
“하하하. 행장님 말씀 듣고 보니 폴 뉴먼 닮으신 것 같습니다.”
“예끼! 이 사람. 늙은이를 놀리면 쓰나?”
“아닙니다. 아직 청춘이신데요.”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차명수의 외모와 달리, 차태영은 반백의 머리칼이 중후한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게다가 푹 꺼진 눈자위와 우뚝 솟은 콧매가, 진짜 폴 뉴먼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지난 번 김장 사건에 이어 이젠 제법 차부회장과 친해진 느낌이 들었다.
윤재는 세컨샷을 날렸다.
멋지게 아치를 그리며 날아간 공이 정확하게 깃대 옆에 떨어졌다.
“나이스 샷! 원더풀!”
차대리 가족들이 또 다시 나이스 샷을 연발하고 있었다.
◈ ◈ ◈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클럽 900에서의 라운드가 잘 끝났다.
차태영 부행장이 80타로 1위, 차명수가 82타로 2위, 윤재가 83타로 3위를 차지했고, 나애리 형수는 87타를 기록했다.
골프를 잘 치는 가족인 것은 분명했다.
‘오늘도 제대로 된 접대 골프를 했군!’
윤재는 스스로 만족했다.
전생의 골프 실력에 젊은 몸이 결합하며, 원한다면 이븐 파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윤재는 어르신과 차명수 대리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방향으로 골프를 쳤던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에게 잘 해주는 사람을 좋아할 것이었다.
샤워를 마친 일행들은 클럽하우스 내 식당에서 점심을 함께했다.
나애리 형수가 말했다.
“여보! 당신이 말한 것 보다 훨씬 멋진 청년인데요. 매너도 골프 실력도 아주 훌륭해요!”
“박식하고, 예의바르고, 운동도 잘 하고, 센스 있고! 오랜만에 괜찮은 친구를 만났군. 명수야! 회사 생활 하면서 이런 동료를 만난다는 건 굉장한 복이란다. 잘 지내라!”
며느리와 시아버지는 하루종일 윤재를 칭찬하고 있었다.
“와하하. 아빠! 걱정 말아요. 윤재는 제 말 한 마디면 끔벅 죽는다니까요.”
나애리와 차태영은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차대리는 이번에도 윤재에게 눈짓으로 사인을 보냈다.
“하하하. 그럼요. 회사에서 차대리께서 죽어라고 하면 죽는 시늉까지 하고 있습니다. 회사에서 대리님께 많은 걸 배우고 있습니다.”
자기 자식, 자기 남편을 모를까?
그럼에도 윤재의 오버액션에 흐뭇한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가족이란 그런 것이니까.
“그나저나 그냥 골프 치자고 나를 보자고 한 건 아닐 것 같은데, 자네가 이 노인을 골프장으로 끌어낸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드디어 본격적인 게임을 시작해야 할 순간이었다.
상고를 졸업하고 조은은행 평사원으로 입사해, 30년 넘게 회사생활을 하며 은행 No.2 까지 올랐던 차태영.
외모도 골프도 내공도, 아들인 차명수와는 레벨이 달랐다.
“사실은 어르신께 부탁을 드리고자 뵙기를 청했습니다.”
“부탁이라고?”
“네. 부행장님!”
차명수도 나애리도 예기치 못한 전개였다.
그들은 당황하면서도 윤재의 얘기를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윤재의 눈빛을 확인한 차태영이 아들 내외를 물렸다.
차명수는 윤재와 차태영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아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 ◈ ◈
윤재는 시종일관 진지하게 자신의 부탁과, 차태영 부행장에게 기대하는 바를 얘기했다.
처음에는 가당치도 않는 소리라고 생각했던 차태영.
윤재의 설명과 의견을 들을수록, 예상과 달리 은행산업과 한국 은행업의 현실에 대해 윤재가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뿐만 아니라 마치 미래를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은 윤재의 혜안에도 감탄했다.
다만 실현 가능성이 문제였다.
차태영 부회장 역시 그 지점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젊은이는 여러 모로 나를 놀라게 하는군. 그런데 말이네. 다 좋은데 그 천문학적인 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자네 비전이 제 아무리 좋아도 돈이 있어야 할 텐데. 내가 허명을 떨치긴 했네만, 재산이라고는 다 털어도 30억 수준밖에 안되네!”
“아직 2년 넘게 시간이 있습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중간 중간 찾아 뵙고 상의 드리고 싶습니다.”
“헛헛! 실없는 친구일세. 1~2백억도 아니고 그 많은 돈을. 워렌 버핀이라고 해도 그 돈을 2년 만에 벌수는 없을 걸세.”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주변의 도움도 필요할 것이구요.”
“그래. 모처럼 자네를 만나 얘기를 듣다보니 나도 피가 철철 끓어 오르는 것을 느꼈네. 이 기분이 대체 얼마 만인지. 헛헛! 젊었을 적 생각도 나고 말일세. 어쨌든 즐거운 하루였네.”
“저도 즐거웠습니다. 아버님! 제가 좋은 소식으로 다시 찾아 뵐 테니, 건강하십시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미친 소리라며 들어주지도 않았을 텐데, 묘하게 자네 말은 1%일망정 가능성이 있어 보여. 그래서 오히려 내가 미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네.”
“하하하. 감사합니다. 또 모실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윤재는 차명수 대리의 가족과 골프장에서 헤어졌다.
◈ ◈ ◈
집으로 돌아가는 차명수 대리, 아니 차태영 부회장의 BMW.
나애리가 운전을 하는 사이, 차태영과 차명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미안해요. 아빠! 윤재 그 자식이 그렇게 정신 나간 놈이 아닌데. 낮술 먹고 취한 것도 아니고. 불편하진 않았죠?”
“괜찮다.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그래요? 근데 그 놈이 무슨 부탁을 한 거에요?”
“차차 알게 될 것이다. 윤재 그 친구! 정말 멋진 녀석이다. 40년 전 상고를 막 졸업하던 당시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더구나!”
“어머! 아버님. 그렇게 윤재씨가 마음에 들었어요?”
“헛헛. 명수의 좋은 후배 정도로 생각했는데 훨씬 큰 인물이야!”
차태영은 골프 후의 피로가 밀려옴을 느꼈다.
“명수야. 피곤하구나. 좀 자야겠다. 도착하면 깨우거라.”
“네. 아버지!”
59세의 중노인에게 4시간이 넘는 골프는 피곤한 운동이었다.
차태영은 이내 곯아 떨어졌다.
그는 꿈속에서 스무 살, 혈기 왕성하던 은행원이 돼 있었다.
왠지 젊은 날의 자신이 윤재와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그는 꿈속에서도 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윤재 역시 집으로 향했다.
‘나 혼자라면 모를까? 차태영 부회장께서 도와주신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앞으로 2년! 충분히 승부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 때까지 총알을 모아야 한다.’
그간 공을 들인 차명수 집안과의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은 차명수 집안의 패밀리 비즈니스임과 동시에 윤재 집안의 패밀리 비즈니스가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