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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27화 (27/196)

눈 폭탄

2001년 1월19일 금요일 오후 6시 30분.

윤재는 차명수 대리와 함께 광주로 복귀하는 중이다.

정읍~광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에는 눈발이 제법 날리고 있었다.

“대리님! 아 맞다. 폭스바겐 형님이니까, 폭바 형님이라고 불러야겠네.”

“야! 또 뭔 소리가 하고 싶은 거냐?”

“주식 잘 되면 자동차 사준다고 했잖아요. 골프 회원권 플러스 자동차니까. 자동차는 폭스바겐, 골프는 골프! 그니까 폭바 형님 맞잖아요?”

“내가 니 앞에 서면 할 말이 없다.”

신동화건설의 보물선은 결국 희대의 사기극으로 결론이 났고, 1월5일부터 연속 하한가 3일을 맞더니 줄곧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차대리가 1월초에 2주짜리 교육을 다녀오느라 주식투자를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만약 사무실에서 자식의 PC를 이용했다면 분명 재차 매수를 했을 사람이었다.

“하여튼 내 덕에 마이너스 통장 3000만원 홀라당 날릴 뻔 했는데, 두 배 넘게 돈 번겁니다.”

“그게 니 덕이냐? 내가 잘 사서 그런 거지?”

“과연 그랬을까요? 다시 잘 생각해 보세요.”

“끙~”

차명수가 앓는 소리를 냈다. 돌이켜 보면 윤재의 얘기가 다 옳은 소리였다.

“폭바 형님! 폭망하기 싫으면 나한테 잘 좀 하세요. 알았죠?”

“이만 하면 잘 하는 것 아니냐?”

“하하하. 그건 또 그렇긴 하네. 인정합니다. 인정!”

작년 골프 라운드 이후 차명수는 윤재의 완전한 골수팬이 돼 있었다. 이제 오과장과 경쟁을 다투듯 윤재에게 잘 하려 애쓰고 있긴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존경의 빛마저 감도는 얼굴로 윤재를 바라보던 차대리가 말했다.

“그나저나 그 영감님 말씀 참 많으시대! 그 양반 대리점 개점 하기는 하겠지?”

“네. 제 감에는 할 것 같아요.”

이동시간이 가까워 전북 정읍까지 영업3팀이 관리했고, 오후 늦게 신규개점 관련 상담 차 정읍을 방문했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아니 눈이 많이 올 것 같으니 빨리 가라고 하면서, 2시간 넘게 끌면 어떡하자는 거냐? 퇴근 시간 벌써 다 지났네. 에잉. 쯧쯧!”

차명수는 투덜거리며 혀를 찼다.

차대리의 혀 차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방금 헤어진 영감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아이고 팔다리야. 허리도 이렇게 쑤시는 걸 보니 눈이 많이 내릴 모양이네. 오대양 조건 잘 알았으니 어서 광주로 넘어가 보슈. 큰 눈이 올 모양이야!”

불연 듯 기시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세상에! 오늘이 그날 이었구나!’

전생에서 정읍에 할아버지 의뢰인을 찾아갔었고, 그 할아버지가 허리 쑤시다는 얘길 했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윤재가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리님! 제 덕에 신동화건설 잘 파셨잖아요? 그 은혜 좀 갚으셔야 겠어요.”

“왜? 무슨 일 있냐?”

“하여튼, 저 믿고 따라오실 거죠?”

“그. 그럼. 내가 너를 믿지 누굴 믿겠냐?”

윤재는 자신이 운전하던 차명수의 그랜저를 급히 꺾었다.

“야! 집에 안 가고 어딜 가는 거야? 왜 백양사IC로 나가는 건데?”

20년 전의 오늘.

정읍에서 할아버지 말씀 더 듣느라, 10분 늦게 출발했다 거의 9시간을 고속도로에 갇혀있었던 악몽이 떠오른 것이다.

◈          ◈          ◈

백양사IC를 빠져나왔을 땐 어느새 함박눈이 강풍과 함께 쏟아지고 있었다.

톨게이트 근처 식당에서 대충 저녁을 하면서, 윤재는 부리나케 전화를 돌렸다.

“사장님! 빨리 트럭에 체인 감을 준비해서, 간편식과 즉석식품 몽땅 싣고 백양사 쪽으로 오세요. 빨리요!”

“윤재씨! 이 밤중에 무슨 도깨비 같은 소리냐?”

“사장님. 사회공헌이나 좋은 일 많이 하시잖아요. 오늘도 그런 일 하실 수 있는 찬스입니다.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오십시오. 꼭 체인 챙기시고, 회사에서 나온 두꺼운 잠바 닥치는 대로 챙겨 오십시오.”

윤재는 다른 거래처 세 곳에도 전화를 걸어 비슷한 주문을 했다.

“사장님! 그리고 오실 때 주유소에 들려서 휘발유하고, 경유 말통으로 각각 다섯 통씩 사오세요. 돈은 제가 드릴게요. 회사에서 나온 겨울용 잠바 있는 대로 끌어 오시는 것 잊지 마시구요.”

“아. 알았다. 근데 윤재씨! 대체 뭔 일이야? 전쟁이라도 났냐?”

믿을 만한 거래처 4개소의 확답을 받은 윤재!

이번에는 안수애 아나운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방송국에 연락처를 아는 사람이 없는데, 안수애 번호는 저장돼 있었다.

“잘난 계약직 신사님께서 어쩐 일로 제게 전화를 다 주셨을까나?”

안수애가 비아냥 거렸다.

비아냥에도 비음 섞인 교태가 물씬 풍겼다.

그녀도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창밖으로 내리는 폭설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애씨! 광주NBC 기자들 아시죠? 지금 백양사 쪽으로 중계차 출동하라고 하세요. 곧 있으면 호남터널 중심으로 난리가 날 겁니다. 괜찮은 특종 하나 건질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기자들 빨리 현장으로 오라고 말씀 좀 해주세요.”

윤재가 급한 전화를 모두 돌리고 나자, 비로소 상황 파악이 된 차명수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것 좀 봐라! 윤재야! 이젠 함박눈 수준이 아니라 완전 폭설이다 폭설! 눈 폭탄이야!”

“오늘 호남터널 상행선, 하행선 모두 꽁꽁 막혀 난리가 날 겁니다. 추운데서 덜덜 떨면서 고생할 사람들에게 도움 한 번 주시자구요.”

“그래. 무슨 뜻인지 알겠다!”

◈          ◈          ◈

밤 9시!

호남고속도로 백양사~정읍 구간은 말 그대로 꽁꽁 얼어붙은 주차장이 돼 있었다.

영하 10도를 넘어가는 강추위에 2시간 만에 15cm가 넘게 내린 폭설 때문이었다.

잠시 주춤한 것 같던 눈발이 다시 굵어지고 있었다.

“오셨어요? 사장님!”

네 번째 사장님이 드디어 도착했다. 나머지 세 명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응. 자네 말 듣고 오긴 왔는데. 이게 진짜 무슨 난리냐? 장성에서부터 백양사IC까지 3km 정도는 꽉 막혀 있다! 어휴. 저 눈 좀 봐!”

“백양사IC부터 호남터널까지는 더 난리입니다. 차들이 오르막길을 오르지를 못해요!”

전화를 받고 달려온 사장님들은 모두 윤재의 말처럼 식품과 옷가지, 기름을 준비해 오셨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마도 정읍IC 넘어서도 꽉 막혀 있을 겁니다. 사장님들! 체인 채웠으니까 출발 하시죠.”

회사에서 대리점들에 공급되는 겨울용 점퍼를 껴입은 윤재와, 차대리가 각기 사장님들의 트럭에 옮겨 타 갓길을 서행하기 시작했다.

상행선은 윤재가, 하행선은 차명수 대리가 맡기로 했다.

어느새 밤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윤재가 트럭 창문 밖으로 머리를 꺼내고 외쳤다.

“기름 앵꼬 나게 생긴 분들 말씀 하십시오. 많이는 못 넣어드리지만 10리터 정도는 넣어 드릴 수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계속 울려퍼졌다. 제법 우렁찬 목소리였다.

“혹시 애들 차에 있으신가요? 간편식 있는데 필요하시면 드리겠습니다.”

맞은편 하행선에서는 차명수와 다른 사장님들이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미리 준비해 온 체인 덕에 비교적 수월하게 작업이 가능했다.

“아! 이분들이 진짜 산타클로스보다 고마운 분들이시네. 저 좀 먹을 것 좀 주세요. 광주 출발한지 5시간이 넘었는데, 애들이 배가 고프다고 난리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윤재는 즉석 핫도그며, 소세지, 호떡 등을 나눠줬다.

평소 같으면 생으로 먹지 않고 레인지에 데워 먹을 음식이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정말로 가뭄 속 단비네. 단비! 앵꼬날까 봐 조마조마 했는데. 보험회사도 눈길에 막혀서 못 온다는데, 이렇게 고마울 수가!”

“네. 일단 좀 보충하시고, 버텨 보시죠. 버티다 보면 길이 뚤릴지 모릅니다.”

윤재 일행은 급한 차량들에 깔대기를 이용해 반 말 정도의 기름을 보충해줬다.

그렇게 갓길을 달리며 급한 불을 끈 지도 어느새 1시간이 넘게 흘렀다.

눈발은 여전히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호남터널 인근 상하행선 10km 구간은 가관이었다.

곳곳에서 남자들이 대놓고 소변을 보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들도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인간병풍을 만들어, 장막 안에서 급한 일을 보는 등 난리가 아니었다.

그때 저 멀리서 광주NBC 중계차량이 갓길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          ◈          ◈

“오늘 호남터널 일대에 30cm 라는 기록적 폭설이 내렸습니다. 도로는 빙판이 됐고! 운전자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봉변을 당해야 했습니다.”

오리털 파카를 입은 안수애가 마이크를 잡고 멘트를 이어 나갔다.

“5시간이 넘게 고속도로에 갇혀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온정의 손길을 내민 사람들이 있어 만나봤습니다. 바로 오대양 푸드 직원들과 대리점 사장님들이 주인공입니다.”

화면에 윤재가 나타났다.

“정읍에서 광주를 넘어 오는데 보통일이 아니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거래처에 전화해 급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자고 건의를 했고, 정이 많은 사장님들께서 흔쾌히 출동해 주셨습니다.”

이어서 거래처 사장 한 명도 화면에 나타났다.

“회사에서 연락받고 출동했는데, 배고픈 사람들에게 식료품을 전달해 줄 수 있어 너무 뿌듯했습니다.”

뒤이어 윤재에게 호떡을 받아먹은 꼬마가 인터뷰를 했다.

“차에는 먹을 것도 없고, 배고파 죽겠는데 아저씨들이 호떡을 주셨습니다. 너무 꿀맛이었습니다.”

안수애와 인터뷰를 거의 마쳤을 무렵, 밤하늘에 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폭설이 멎은 것이었다.

새벽 2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          ◈          ◈

새벽 3시가 다 돼서야 차들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이 틀 때 즈음이면 정체는 완벽하게 풀릴 것 같았다.

대충 급한 일들이 정리된 후, 윤재는 갓길에서 안수애와 믹스 커피를 마셨다.

중계차에 보온병과 커피를 준비해 온 모양이었다.

“기자들이 안 오고, 왜 수애씨가 오게 됐습니까?”

“퇴근 시간 넘은데다, 시내도 차가 막혀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제가 오게 됐네요.”

“원래 기자 출신이니까 어려움은 없었겠네요.”

“호호호. 원래 지역구 방송맨들은 이것저것 다 하니까요.”

윤재가 예전에 날렸던 멘트 ‘지역구’를 상기시킨 안수애.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강추위와 빙판길에 꽉 막혀 있는 사람들에게 온정의 손길을 내민, 윤재가 기특하게 생각된 것이다.

오늘 있었던 사건과 관련된 몇 가지 얘기를 더 나눈 뒤, 윤재는 안수애와 헤어질 준비를 했다.

“커피 잘 마셨습니다.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뵈시지요.”

“덕분에 저도 좋은 꼭지 하나 건졌네요. 감사합니다.”

안수애는 멀어져 가는 윤재를 보며 생각했다.

‘외모만이 아니라 마음도 예쁘네. 볼수록 매력적인 남자다!’

◈          ◈          ◈

사흘 뒤 월요일 오전. 영업3팀 사무실!

“우리가 이런 일로 좋아하는 게 그렇긴 하다만. 어쨌든 대박이다야!”

“그러게요. 팀장님! 갑자기 호떡 주문이 급증했습니다.”

“실 소비자들이 매장에서 찾으니까 들어오는 주문일 거 아냐?”

“그런 것 같습니다.”

호남터널 눈사태도 벌써 사흘 전의 얘기가 됐다.

월요일 아침 영업3팀은 밀려드는 호떡 주문에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윤재와 차대리가 폭설이 내린 호남터널에서 활약한 내용이 광주NBC뉴스에 나오면서 호떡 주문이 폭주했다.

그날 있었던 꼬맹이의 인터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윤재 그 놈은 참 대단해. 거기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냈을까?”

“정말 후배지만 존경스러울 때가 있어요.”

차명수가 당시 상황을 회상하며, 윤재의 예지력과 저돌적인 실천력을 칭송했다.

“오늘도 방금까지 2시간 넘게 전화 받다, 좀 전에 화장실 간다고 갔습니다. 소변 급할 텐데 거래처 전화 처리는 끝내고 가겠다고 하더군요.”

“하하. 진짜 복덩이야. 복덩이!”

광주 영업3팀에서 직원들이 이런 얘기를 주고받고 있을 때, 본사에서는 영업본부장이 1일 동향보고서를 받아 보는 중이었다.

“이건 뭐야?”

“네. 부사장님! 간만에 소비자 게시판에 미담이 올라와서 동향보고에 포함시켰습니다.”

“호남부문 김윤재? 이 친구 얼마 전에 CI(Corporate Identity) 바꾸자고 발표했던 친구 아냐?”

“맞습니다. 그 친구가 지난 주말에 또 미담을 제조했네요. 미담 자판기도 아니고... 게시판에 비슷한 글들이 여러 개 올라왔습니다.”

고객의 소리라는 게시판은 보통 불만 글 일색.

웬일로 비슷한 칭찬글들이 올라왔고, 모두 지난 주말 호남터널 눈사태 때 보여준 윤재의 행동을 칭찬하는 것이었다.

영업본부장 송민호 부사장은 안경을 끌어 올렸다. 노안인지라 보고서를 볼 때면, 늘 안경을 올려야 했다.

“본부장님! 비슷한 내용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을 하나 첨부했습니다.”

“그래?”

소비자 게시판에 올라온 내용 그대로 첨부된 문서.

노안의 송부장이 몸을 뒤로 저치며 눈을 내리 떴다.

[ 안녕하세요?

저는 지난 주 말 눈 폭탄이 떨어진 호남고속도로 상행선에 있었답니다.

중략.

정말 길고도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중략.

그런데 오대양 푸드의 멋진 오빠와, 대리점 사장님들이 먹을 것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추위에 떠는 사람들에게는 점퍼도 나눠주고, 어디서 가지고 왔는지 기름도 넣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중략.

저는 그래서 다짐했습니다. 앞으로 사는 동안 마트에 가서 물건을 살 때면 오대양 제품만 사겠다고!

저는 앞으로 오대양 푸드의 평생 고객이 될 생각입니다.

다시 한 번 그 추운 날 따듯한 손길일 보내준 오대양 푸드에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정읍에 사는 초등학교 5학년 이소슬 올림. ]

영업본부장은 마치 자신이 이소슬 어린이의 할아버지라도 되는 것처럼 뿌듯한 마음이 돼 있었다.

안경을 다시 내려 쓴, 본부장이 말했다.

“나상무! 이게 실화인가?”

“네. 본부장님! 지방 NBC 뉴스에도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 훈훈한 사례구만. 월례회의 때, 이 내용 회장님께 보고할 수 있게 다시 한 번 정리해 줘.”

“알겠습니다. 본부장님!”

“역시 회장님의 안목은 대단해. 인재를 알아보실 줄 안다니까!”

“네? 뭐라구요? 본부장님! 뭐라 하셨습니까?”

“아. 아닐세. 혼잣말 했네. 나가 봐!”

영업본부장은 기획조정 상무가 나간 뒤 비서에게 내선전화를 걸었다.

“호남부문 영업3팀에 김윤재 사원이라고 있는데, 그 직원 프로필 좀 가져다 줘요.”

“네. 부사장님!”

영업본부장은 손깍지를 끼고 인트라넷의 윤재 사진을 검색했다.

‘이런 것이 영업정신이지. 암! 그렇고 말고. 영업은 이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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