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26화 (26/196)

시무식장의 주인공 (2)

“you speak english very well.”

오회장 입에서 터져 나온 첫마디였다.

“아주 고급진 영어야! 훌륭하네!”

오재준 회장은 연달아 윤재의 영어실력을 칭찬했다.

‘영어로 발표한 것도 아닌데, 웬 영어 잘 한다는 칭찬?’

윤재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오재준 회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영어로 질문을 이어갔다. 스탠포드 학위를 자랑스러워하는 오재준 다운 행동이었다.

“정말 잘 만든 C.I 라는 생각을 했네. 영업3팀의 김윤재라고 했던가?”

“Yes. President!”

“그런데 저 C.I는 어느 업체에 발주했나?”

“제가 만들었습니다.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했습니다.”

좌중에서 탄성과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외주를 준 게 아니라 저걸 직접 만들었다고?’

‘신입인 것 같은데 대단하군!’

‘기죽지 않고 회장님과 대화하는 당당함은 대체 뭐지?’

윤재와 오회장의 영어대화를 알아들은 사람들이 수근거렸다.

“혹시 상표권을 등록했나?”

“Absolutely Not!”

오회장은 윤재의 C.I 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윤재의 C.I가 회사의 제품과 구성원. 고객과 비전까지 잘 담아 냈다고 생각한 것이다.

오회장은 윤재가 상표권을 무기로 회사에 금전적 요구를 할 까 봐 걱정인 모양이었다.

“혹시 제 제안이 채택되더라도 그건 회사의 몫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회사의 월급을 받는 직원이니까요. 상표권 등록 같은 건 그래서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 번 좌중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몇몇 임원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Very Good Presentation. Excellent! Yun Jae!”

“Thank you! Doctor!”

스탠포드 경영학 박사학위를 보유한 오재준은 회장, 대표, CEO 등의 호칭보다 닥터라는 호칭을 가장 선호했다.

전생에서 이미 오회장을 겪어 본 윤재.

그의 취향을 잘 알고 있기에 가능한 호칭이었다.

닥터라는 호칭에 오재준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빙긋 웃었다.

윤재는 꾸벅 인사를 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의 모습이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박수는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한편 대기석에서 자신의 발표를 기다리고 있던 나머지 발표자들.

모두 멘탈이 나간 표정으로 윤재만 쳐다볼 뿐이었다.

◈          ◈          ◈

전생에서도 O2그룹이라는 네이밍 역시 윤재의 머릿속에서 나오긴 했다.

다만 지금과 두 가지 차이가 있었다.

하나는 오대양 푸드가 O2 F&B로 사명을 변경하게 된 시점이 무려 3년이나 앞당겨 졌다는 것이다.

사명 검토를 했지만 오대양 푸드보다 괜찮다는 확신이 없어 진행이 더뎠다.

두 번째는 사명 변경에 대한 발표를 윤재가 아닌 다른 사람이 했었다는 점이다.

전생에서도 “O2” 아이디어는 윤재 머리에서 나왔지만,

그걸 MC(Marketing Communication)팀장이 가로 채 자신의 공으로 포장해 버린 것이다.

그것도 팀장이라는 직책을 이용해서!

MC팀장 신재영! 전생에서 윤재와 함께 근무하기도 했었던 인물.

이날 오픈 이노베이션에도 참석했는데, 모두가 환호하는 사이 신재영만 침울해 있었다.

“신팀장! 이 정도 퀄리티라면 차라리 익숙한, 오대양 푸드가 나은 것 아냐?”

몇 달 가까이 새로운 C.I에 대해 검토만 했지 마땅한 대안이 없어, 소속 임원에게 수시로 깨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윤재의 [ O2 ]에 회장이 만족해 버렸으니, 자신은 닭 쫒던 개 신세가 돼버린 것이었다.

‘니미랄. 신입사원도 해 내는 걸, 몇 달 동안 그 많은 리소스를 가지고 대체 뭐 했냐고 난리겠구만!’

신재영은 며칠 동안 갈굼 당할 생각에 정신이 아뜩했다.

제 4회 오픈 이노베이션은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윤재는 참석자들과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귀향길에 올랐다.

기차 안에서 윤재는 생각에 잠겼다.

‘사명 변경 제안으로 전생에서는 인사고과 S를 받았었다. 하지만 이번엔 이게 전부가 아니다. 정규직 전환의 시계가 빨리 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재준의 스타일을 잘 알고 있는 윤재.

윤재는 오재준의 향후 반응을 대충 짐작해 봤다.

생각을 마친 윤재는 기분 좋게 기차 좌석에 몸을 맡겼다.

전생에서 프레젠테이션이라면 이력이 날 정도였던 윤재였다.

그럼에도 발표에 대한 긴장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까?

비로소 긴장이 풀리며 피로감이 몰려왔다.

윤재는 짧지만 강렬한 단잠에 빠져 들었다.

◈          ◈          ◈

윤재가 기차를 타고 광주로 내려가는 사이.

오대양 푸드의 회장실엔 회사의 고위직 임원들이 모두 앉아 있었다.

밤 7시 30분!

오회장이 이 시간에 임원들을 소집한 전례는 극히 드물었다.

본부장급 이상으로 구성된 경영위원들!

그들은 모두 흡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다른 이유는 없다.

오재준 회장의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 친구가 계약직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회장님!”

인사실장이 답했다.

인사실은 회장 직속기구인 관계로 본부장급 대우를 받는 자리.

“회장님! 작년 이노베이션 챌린지에서 호남부문이 [매트릭스 경영]에 대해 발표 했잖습니까?”

“맞아. 장동석이가 발표 했었지. 그 때 발표도 인상적이었는데. 호남부문이 여러 건 하는데?”

“그 때 양상무가 그랬습니다. [매트릭스 경영]도 김윤재의 아이디어라고 말이죠.”

“맞다. 맞아. 이제 생각나네. 어째 이름이 낯익다 했더니. 그 김윤재였어.”

오재준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자신의 무릎을 탁 치며 껄껄 웃었다.

“다른 경영위원들 생각은 어떤가? O2 F&B 말이야.”

“두말할 것도 없이 탁월했다 생각합니다.”

“회사 다니면서 발표도 많이 해 봤고, 보는 것도 수 백 번이 넘지만 오늘만큼 소름 돋았던 적이 있었나 싶습니다. 회장님!”

“저도 그렇습니다. 발표자. 장표. 태도 등 모든 게 완벽했다 생각합니다. 마치 하나의 쇼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젊은 친구가 정말 대단합니다.”

“사명부터 시작해 피라미드 구조로 내려가는 하이어라키가, 컨설팅 회사에서 만든 것이라 해도 믿을 만큼 퀄리티가 높았습니다.”

회장이 한마디 하니 사장급 임원들이 앞 다퉈 윤재에 대한 칭찬을 늘어놨다.

“그럼 경영위원 모두가 New C.I 도입에 찬성한 것으로 알아도 되겠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회장님!”

“마케팅 본부장! 홍보 본부장!”

“네. 회장님!”

“둘이서 다듬어 가지고, O2 F&B로 전환 작업 진행해!”

“알겠습니다. 회장님!”

“주주들 설득도 해야 하고 할 일 많으니까 차질 없이 준비하도록!”

“네. 회장님!”

“몇 달 주면 되겠나?”

“4~5개월 걸릴 것 같습니다.”

“3개월 안에 해 보라고!”

“네. 회장님!”

마케팅 본부장과 홍보 본부장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명색이 본부장이지만 오너 앞에서는 고양이 앞에 생쥐일 뿐이다.

고위 임원들이 마치 신입사원처럼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귀여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올라오면서 인사팀장에게 확인해 보니 김윤재 그 친구! 이제 겨우 입사 5개월 밖에 안됐다고 합니다.”

“뭐? 허실장! 정말이야?”

“네. 저도 첨엔 믿지 못했는데 사실이었습니다.”

“헐. 무슨 그런 괴물 같은 놈이 다 있지? 대학은? 대학은 어디 나왔대?”

“그게 고졸이라고 하더군요. Y대를 자퇴한 뒤 회사계열 백화점에서 일하다, 호남부문 계약직으로 취직했다고 합니다.”

“5개월 된 신삥이 마치 20년 된 임원 포스를 뿜어내다니!”

오재준 회장이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나머지 경영위원 10명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허실장!”

“네. 회장님.”

“그 친구 정규직 전환하는 방법을 알아 봐.”

“네?”

“네는 무슨 네야. 그런 능력자가 계약직으로 박봉을 받고 있는 게 말이 되나?”

“그렇긴 합니다만....”

“합니다만... 합니다만 뭐?”

“다른 계약직들 문제도 있고, 5개월 밖에 안 된 직원을 정규직으로 하는 건 너무 파격적입니다. 계약직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는 사례도 드물지만 보통은 2년을 채워야....”

“파격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그러다 그 친구가 더 좋은 회사나 경쟁사로 이직이라도 해봐. 누구 손해야. 누구 손해? 우리 오대양... 아니 우리 O2 그룹의 손해 아냐?”

“저도 미처 거기까진 생각지 못했습니다.”

인사실장이 대역죄인처럼 머리를 조아렸다.

이번에도 나머지 본부장들이 오재준 회장에게 딸랑거렸다.

“역시 회장님은 진짜 세수 네수 앞을 내다보시는 것 같습니다.”

“저도 김윤재씨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지. 경쟁사 이적 같은 건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역시 회장님의 인재 사랑은 탁월하십니다.”

용비어천가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이어졌다.

간만에 회장실에서 웃음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오재준은 사람에 대한 욕심이 각별한 사람이었다.

예측에 기반한 행동인 것은 맞지만, 이정도로 노림수가 잘 먹혀들지는 몰랐는데 엄청난 반향이었다.

◈          ◈          ◈

이틀 뒤! 오대양 푸드 오재준 회장실!

허영호 인사실장이 인사팀장을 대동해 회장에게 보고를 하는 중이었다.

“6월1일자 입사자들과 함께 교육을 받게 하자고?”

“그렇습니다. 박팀장 회장님께 말씀 드려.”

“단순 정규직 전환보다는 6월1일자로 정규직 전환 시키고, 입사동기들을 만들어 주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음. 나쁘지 않군.”

“1안은 김윤재 사원이 계약직 경력이 있는 만큼, 필기와 1차 면접 없이 바로 2차 면접으로 가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역시 특혜라면 특혜지요.”

“그래? 2안은?”

“2안은 테스트 없이 정규직 전환하되 6월1일자로 전환하는 겁니다.”

“음...”

“1안이든 2안이든 6월1일 입사자들과 동기가 돼, 약 40일간의 입문연수를 받게 됩니다. 그러면 진정한 오대양 인이 되는 거죠.”

오재준 회장은 오대양인이란 말에 만족감을 표했다. 흡족한 표정으로 턱을 쓸던 오회장이 말했다.

“그 친구 발표 실력 봤을 텐데, 2차 면접 필요하나? 6월1일자로 정규직 전환 하자고.”

“네 알겠습니다.”

계속되는 파격의 연속이었다.

그만큼 오회장이 윤재를 높이 평가했다는 반증이었다.

몇 가지 인사 관련 보고를 마치고 인사실장과 팀장은 회장실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실장이 말했다.

“다른 계약직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철저히 보안에 부쳐라고. 알았지?”

“알겠습니다. 실장님!”

“아! 그리고 오대양인 워딩 좋았어.”

“감사합니다. 실장님!”

“그런데 말이야. 앞으로는 O2인이라고 해. 그러면 더 좋아하실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실장님!”

“우리 회사 역사에 1년도 안 돼 정규직 전환된 사례가 있었나?”

“제 기억에는 없습니다. 실장님!”

“내 기억에도 없단 말이지. 그 친구! 젊은 친구가 참 대단하군. 대단해!”

“오대양 그룹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친구 아닐까 싶습니다.”

“O2라니까!”

“아. 네. 죄송합니다. 아직 입에 익숙치가 않아서.”

“괜찮아. 앞으로 자꾸 O2를 입에 올리도록 해. 곧 회사 이름 바뀐다.”

“예. 실장님!”

“지켜보라구! 사회상황을 봤을 때 계약직의 정규직 전환은 갈수록 어려워 질 거야.”

“분위기가 그렇긴 하죠.”

“역사의 한 페이지라......”

인사실장과 인사팀장은 기분 좋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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