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23화 (23/196)

여자 복 터진 날

카페 ‘팜므파탈’을 나서던 윤재는 깜짝 놀랐다.

초대형 유리로 내부가 훤히 보이는 팜므파탈!

낯익은 두 명의 여자가 카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것도 떡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백화점 알바 동료였던 조혜진과 김선희였다.

윤재는 카페 밖으로 나왔다.

김선희가 퀵실버나 더 플래시 보다 빠르게 윤재에게 달려왔다.

“오빠! 오빠! 저 여자! 저.. 저 여자! 안수애 아냐?”

“응. 맞아. 안수애!”

“헐! 대박~”

“너희들 언제부터 보고 있었니?”

“언제부터는! 오빠가 르망 주차하고, 카페 들어갈 때부터 봤지!”

“세상에 그 오랜 시간동안, 추운데서 떨고 있었다고! 이러지 말고 어디 들어가서 얘기하자. 으~ 춥다!”

윤재는 혜진과 선희를 데리고 다른 카페로 이동했다.

한편 팜므파탈 카페 안에서는 안수애가 창밖의 광경을 목도하고 있었다.

‘저 자식이? 나는 바람 놓더니, 여자를 둘씩이나? 그것도 상태가 좋잖아?’

안수애는 커피 잔 손잡이가 깨질 정도로 손을 부르르 떨었다.

◈          ◈          ◈

“그러니까 오빠가 책을 출판했는데 베스트셀러가 됐다고?”

“응.”

“그러니까 오빠가 책 관련된 방송을 녹화했다고?”

“응.”

“그러니까 노트북 가방을 방송국에 두고 왔고, 안수애 아나운서가 가방을 찾아준 거라고?”

“찾아준 건 아니고 돌려준 거지.”

김선희는 따따부따 말이 많았고, 혜진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가만 보니, 안수애 보다 혜진이 더 예쁜 것 같기도 했다.

“진짜 오빠 대박이다. 대박이야!”

“대박까지는 아니고.”

“그런데 안수애는 왜 그렇게 똥 씹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던 거야? 꼭 바람 맞은 얼굴이던데!!”

‘바람 맞은’ 이라는 단어에 혜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몇 달 전 윤재에게 바람을 맞은 기억이 떠오른 것이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오빠가 안수애랑 커피 마셨는데, 오빠가 모르면 내가 알겠수?”

5개월 전만 해도 함께 알바했던 윤재가 책을 내고, 방송국 녹화를 하고, 여자 아나운서랑 차를 마시고....

누가 봐도 신기하고도 남을 일이긴 했다.

“특별한 말은 안했고.”

“그럼 뭐라고 했어? 뭐라고 했기에 안수애 고것이 똥 씹은 얼굴이 된 거냐고?”

“그냥. 당신은 지방 방송국 아나운서 아니냐? 그것도 계약직 아나운서 아니냐? 나는 NBC, KBN, SBC 같은 전국구 방송이 좋다. 뭐 그렇게 말했어.”

“저. 저. 저. 정말?”

껌을 맛깔나게 씹어대며 대화를 주고받던 선희가, 벙 찐 표정이 됐다.

젊은이들이 환장하는 여자 아나운서를 일개 계약직이 까버렸으니!

쇼킹할만한 얘기이긴 했다.

“물론 농담으로 얘기했지! 그런데 안수애는 진담이로 생각한 것 같더라.”

“이 오빠가 간댕이가 배 밖으로 나왔네? 그러는 오빠는 지금 뭐 하는데?”

“뭐하긴! 오대양 푸드 계약직 사원이지!”

선희는 윤재의 얘기가 재밌다며 깔깔대며 웃었다.

내내 조용하던 혜진도, 윤재가 안수애를 대차가 깠다는 대목에서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그나저나 니들은 웬일로 만났냐? 지난 번 모임에는 안 나왔으면서?”

“미안. 오빠! 그날은 사실 일정이 있었던 건 아닌데.....”

줄곧 밝기만 하던 선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맛깔나게 씹어대던 껌을 휴지에 쌌다.

뭔가 진지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모임이란 게 그럽디다. 인생 잘 풀린 사람이나, 영업이 필요한 사람이 나가는 게 모임이 아닌가 싶더라고.”

“....”

“백화점 알바 관두고, 일자리 찾는 중이라. 오빠들 보고 싶긴 한데 나가기 그렇더라고. 남친도 떠나갔고 일자리도 아직 없고. 그러다 보니 괜히 사람이 위축되네.”

항상 강할 것만 같았던 김선희.

그녀가 보인 심각한 표정은 윤재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너도, 혜진이도 아직 한창 젊고 예쁘니까 좋은 기회가 많을 거다. 너무 그러지 마! 선희 너답지 않잖아.”

“그래서 말인데. 오빠! 내가 고민거리도 좀 있거든.”

“고민거리?”

“나는 영화 일을 해보고 싶었는데, 내 얼굴에 배우는 무리인 것 같고. 누가 카지노 딜러 해 보라고 권유해 줘서 갈까 말까 고민 중이야. 그래서 울 이쁜 혜진이도 만나고, 고민상담도 좀 받아볼까 해서 만난 건데, 팜프파탈에서 오빠를 본 거지!”

‘카지노 딜러’ 라는 얘기에 윤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사이 선희는 다시 속사포처럼 얘길 했다.

“그런데 오빠는 어떻게 생각해? 카지노 딜러 말이야!”

“카지노 딜러라?”

한숨 섞인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응. 연봉도 많이 주고 5년 정도 다니다 퇴직하면 퇴직금도 2~3억 받을 수 있다고 하던데.”

“나는 반대다.”

생각을 정리한 윤재가 단호하게 답했다.

“왜? 왜 반대야?”

윤재는 자신이 생각하는 카지노 딜러의 문제점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기숙사 생활을 한다고 들었다. 그러다 보면 시야가 좁아진다.”

“....”

“그리고 그 곳에 오는 사람들이 죄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 아니냐? 돈에 대한 관념이 나빠질 가능성이 높아! Easy come Easy Go! 라고 했어. 그렇게 돈 1~2억 벌어 봤자, 명품사고 뭐 하느라 쉽게 써 버리고 말 거다.”

선희도 혜진도 진지한 얼굴로 윤재의 얘길 경청하고 있었다.

“카지노 딜러 5년 해 봤자 남는 게 없어. 딜러 기술 배워서 사회에 나와 봤자 써 먹을 곳이 없다. 남는 건 없고 돈을 쉽게 생각하게 되고, 씀씀이만 커지면 결과가 어떻게 되겠냐?”

선희는 조용히 윤재의 말을 들었다.

듣고 보니 묘한 설득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도 내년이면 스물다섯이야!”

“음....”

선희의 고민을 들으며, 생각해 둔 대안을 얘기해 줬다.

“너! 오대양 푸드 CS팀 한번 해 보는 거 어떠냐?”

백화점, 마트, 할인점 등에 판촉행사를 다니는 여직원들을 오대양에서는 CS팀이라 불렀다.

“말 주변 좋고, 백화점 수신호 해 봐서 서비스 마인드도 있고, 준비된 CS팀 직원이 될 수 있어. 몇 년 열심히 해서 교육팀장 되면 현장에 나가보지 않아도 되고.”

“교육팀장?”

“그래. 오대양 서비스 계약직으로 시작하겠지만, 잘 하면 정규직인 교육 팀장도 할 수 있다고.”

“정말?”

“그래. 내 생각에 너한테는 그게 딱이다. 고향 떠나 강원도랜드 가서 기숙사 생활하는 것 보다 그게 훨씬 나을 것 같아!”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김선희.

“오빠! 고마워! 한 번 도전해 볼게!”

그런 선희에게 윤재는 희망을 주입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연기 하는 사람들 중에 생업을 하면서, 연기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는 사람들 많다고 들었다.”

“연기?”

“그래. 배우가 꿈이라며! 혹시 CS팀 합격하면 일 하면서 주말에 소극장 같은 곳 나가봐도 되잖아. 연극판에 그런 사람들 많다더라. 연극만으로는 생계가 안 되니까 편의점 알바 하면서 시간 날 때 연극하고... 그런 사람들 많대!”

“그것 좋은 생각이네. 왠지 먹구름이 걷히는 기분인걸? 역시 오빠는 현명한 사람이야!”

한결 기분이 좋아졌는지, 어느새 선희는 새 껌을 꺼내 짝짝 씹고 있었다.

‘껌 씹는 연기는 선희가 대한민국에서 최고일 텐데!’

윤재는 선희의 껌 씹는 얼굴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작은 입으로 껌을 질겅질겅 씹으면, 어딘가 모르게 천박한 것 같지만, 보고 있으면 왠지 웃음이 나왔다.

한 참 껌을 맛있게 씹던 선희가 혜진에게 물었다.

“맹추야! 너는 꿈이 뭐니?”

“언니는? 나는 소박해. 취집이 꿈이야.”

“뭐? 취집? 그게 뭔데.”

“뭐긴 뭐야? 좋은 남편 만나서 내조하고, 애들 키우면서 사는 거지.”

혜진은 그 얘기를 하며 윤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허걱!’

◈          ◈          ◈

오랜만에 만난 김에 두 명의 여자 후배들과 저녁까지 먹었다.

4~5개월 동안 있었던 경험담 얘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간만에 듣는 백화점 소식도 재밌었다.

윤재는 르망으로 후배들을 배웅해 줬고, 선희가 먼저 내렸다.

“오빠! 오늘 너무 재밌었네.”

“그래! 선희야! 나도 덕분에 즐거웠다.”

“나. 내일 친구들 만나서 안수애 얘기해줄 생각에 벌써 설렌다. 깔깔깔.”

“굳이 그럴 것까지야!”

“하여튼 고마워! 다음에는 남자 수신호팀이랑 같이 만납시다. 저번 모임에 못가서 미안하네.”

“그래!”

선희가 행복한 표정으로 멀어져갔다.

이젠 혜진을 에스코트 해 줄 차례였다.

줄곧 말이 없었던 혜진은, 선희가 내리고 나자 말문이 터지기 시작했다.

눈치 볼 선희가 없어서인지 참아왔던 얘기들을 쏟아냈다.

“오빠! 3억 버는 건 잘 돼가고 있어?”

“안타깝게도 아직 3억의 길은 요원하다.”

“그래도 책도 내고. 아나운서도 만나고!”

혜진이 한 숨을 내쉬었다.

“아까 선희 언니가 카지노 딜러 퇴직금 얘기할 때 뜨끔 하더라.”

“왜?”

“퇴직금 3억이란 얘길 했을 때, 갑자기 오빠 얘기가 생각이 나서!”

윤재는 적잖이 놀랐다.

혜진의 고백을 물리쳤던 그날.

윤재는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서점을 되찾기 위해 3억을 버는 일에 집중하겠단 얘기를 했었고, 지금 혜진이 그 얘기를 상기시킨 것이다.

‘장식이 형 말이 사실인가? 혜진이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고 했었는데!’

윤재의 눈을 똑바로 보지 않은 채 혜진이 말했다.

“선희 언니랑 팜므파탈 카페 가다가, 르망에서 내리는 오빠를 우연히 봤을 때 엄청 반갑더라. 심장이 콩닥거렸는데, 그 소리를 선희 언니가 들으면 어떡하나 싶어 걱정이 되더라고!”

“?”

“그런데 오빠가 카페에서 안수애를 만나는 거야. 그 모습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더라. 둘이 제법 잘 어울려 보였거든.”

“!”

“그런데 오빠가 안수애를 대차게 깠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또 주책없이 안도가 되는 것 있지!”

혜진의 마음 상태가 고스란히 전달돼 왔다.

“그런데 오빠 얘기를 듣다 보니, 갈수록 오빠가 닿기 힘든 존재가 돼 간다는 생각이 들어서....”

“혜진아!”

“복학해서 죽어라 공부했어. 그러면 언젠가는 오빠에게 괜찮은 여자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넌 충분히 예쁘고 착해. 생활력도 강하고!”

“위로해 주지 않아도 돼! 넘사벽 오빠!”

“넘사벽까지 되기야 하겠어?”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냈기 때문일까?

혜진은 왠지 후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느새 그녀 특유의 명랑함을 조금씩 되찾아 가고 있었다.

“오빠는 운전도 잘 하네. 벌써 집 근처야. 칫! 다른 때는 길도 잘만 막히더니. 오빠 나 간다. 선희 언니도 나온다고 하니까, 그럼 계모임 때 만나자!”

혜진은 르망에서 내리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다.

왠지 혜진의 눈물이 밤하늘에 날리는 것 같았다.

‘전생에서 나라를 구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여자 복이라도 터졌나?’

윤재는 멀어져 가는 혜진을 보며 생각했다.

오늘 하루 동안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여신으로 불리는 안수애의 추파를 대차게 깠다.

이어서 연예인 뺨치게 생긴 혜진이가, 여전히 자신을 사모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모태솔로. 총각귀신. 홀애비. 연애고자 등등.

전생에서 윤재를 따라다녔던 수많은 별명들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연애는 젬병이었는데, 뭐가 좀 달라지려나?’

회귀 이후 일이 술술 풀리더니, 이젠 여자복도 터질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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