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수애 아나운서
벌써 12월 중반이 됐다!
윤재는 세월이 쏜살같이 빠르다는 말을 실감하며, 약속장소를 찾아갔다.
2주일 전의 일이었다.
“저는 광주 NBC 황경하 PD 라고 합니다. 김윤재 작가님 맞으시죠?”
지방 방송국 중에서 지역민들에 나름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책과 사람’의 책임 PD였다.
매 회 화제의 책과 작가를 소개하는 교양 프로그램이었다.
황PD와 통화 후 진행자인 안수애를 바꿔줬고, 안수애와 통화한 걸 차명수 대리가 알게 돼 한바탕 소동이 일었던 기억이 났다.
덕분에 보물선 테마주 신동화건설을 몽땅 샀고, 신동화건설은 어제까지 9일 연속 상한가를 찍는 기염을 토하고 있었다.
‘상한가 제한폭이 15%인 게 아쉽구나! 그래 지금 중요한 건 종자돈을 키우는 것! 너무 욕심내지도 말고, 자제력을 잃지도 말자!’
이번 보물선 잡주를 시작으로, 좀 더 체계적인 재산증식에 나설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됐다.
‘방송국 다녀오면 연도 별 사건, 사고 일지를 좀 만들어 봐야겠다.’
회사와 가족, 친구들 그리고 사회 전반에 있었던 일들을 최대한 정리해 볼 필요가 있었다.
‘유비무환. 만사 불여튼튼이니까!’
어느새 약속장소인 광주 NBC에 도착했다.
윤재는 담당 PD에게 전화를 걸었다.
황PD가 1층 로비로 마중 나왔다.
“저 때문에 토요일에 출근하신 것 아니신가요?”
“작가님께서 평일은 안 된다고 하시니, 어쩔 수 없는 일이죠. 하하.”
중간중간 흰 수염이 몇 개 섞인 중년의 사내였다.
40대 초중반이나 됐을까?
황경하는 나이에 비해 굉장히 다부지고 강인한 인상이었다.
황PD를 따라 6층에 있는 스튜디오로 이동했다.
스튜디오에 올라가니, 안수애 아나운서와 작가, 촬영감독 세 명이 윤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 모두를 오징어로 만들어 버리는 화려함!
방송국 아나운서가 아니라 수퍼모델 같은 섹시미!
안수애에 대한 윤재의 첫인상이었다.
사실 첫인상이라는 얘기는 어폐가 있었다.
전생에서도 그녀는 아주 인기 있는 아나운서였으니까!
안수애는 지방 방송국을 넘어, 전국구 스타 아나운서로 이름을 떨쳤었다.
‘차대리님이 얘기한 쐐액시라는 말이 걸맞는 구나!’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압도적 존재감이었다.
“촬영 전에 아이스 브레이킹 좀 하고 시작하시죠.”
황경하 PD가 윤재에게 의자를 권했다.
◈ ◈ ◈
“호홋! 컴퓨터 관련 서적 쓰신 분이라고 해서 선입견이 있었는데.”
안수애가 웃으며 말했다.
치명적인 뇌쇄미가 담겨있는 미소였다.
“네?”
“뿔테 안경 쓰고 왜소한 분 일거라 생각했었죠.”
안수애가 한 말이었다.
안수애의 말을 듣고 있자니, 자연스레 전생의 기억이 살아났다.
방송국 동료, 연예인, 스포츠 선수 등과 숱한 염문을 뿌리다 재벌3세 건설회사 사장과 결혼했던 안수애.
결혼한 지 2년 만에 이혼해 결혼만큼 화제가 됐었던 그녀!
미모도 유명했지만, 스캔들로 더 유명했던 여자가 안수애였다.
“그런데 이렇게 훈남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안수애의 눈빛에서 입맛을 다시는 포식자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 여자는 독이 가득한 꽃이다!’
현 시점에서 안수애의 이후 10년의 삶을 짐작하는 사람은 윤재밖에 없을 것이다.
뭘 모르는 요즘 젊은이들은 안수애에 푹 빠져 있었지만, 윤재는 전생의 기억 덕분에 그녀의 미래를 훤히 알고 있다.
‘자신의 타고난 미모와 아나운서라는 배경을 이용해, 부자집 마나님으로 살고자 했던 여자!’
윤재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안수애에 대한 경계태세를 강화했다.
그렇다고 인터뷰를 파탄 낼 생각은 없었다.
파탄이라는 것은 전생에서 안수애가 결혼 2년 만에 해낸 것이 파탄이었다.
‘방송을 타면 책 판매에 도움이 된다. 그리고 안수애는 몇 년 뒤에 중앙방송에 진출한다. 방송국 직원 알아둬서 손해 볼 건 없으니까!’
윤재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안수애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이 윤재의 몸 이곳저곳을 스캔하고 있었다.
아이스브레이킹이 대략 끝나갈 무렵.
안수애가 말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인터뷰를 시작해 볼까요?”
‘자! 그럼 본격적으로 김윤재 사냥을 시작해 볼까요?’
적어도 윤재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 ◈ ◈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인터뷰는 나름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안수애는 괜히 아나운서가 아녔다.
맘에 들지 않은 그녀였지만, 목소리와 발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주변의 시선을 끌어들이는 외모도!
비록 작가가 써준 내용을 읽는 수준이었지만, 전달력만큼은 훌륭하다는 생각을 했다.
윤재 역시 기획의도에 부합하는 답변을 해냈고, 황 PD의 고개를 연속해서 끄덕거리게 만들었다.
“왜 고생해가며 영어로까지 출판할 생각을 하셨습니까?”
“넓은 세계 시장에 도전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영어 출판은 제 영어공부에도 도움이 되니까요.”
“작가님은 앞으로 시리즈를 어떻게 이어갈 생각이신가요?”
“일단 오피스 3총사를 한국과 미국에서 출판할 생각입니다. 차기작 구상도 계속 해야 하구요.”
시종일관 유쾌하면서도 진지한 인터뷰였다.
안수애의 늘씬한 몸매에 잘 어울리는 윤재의 큰 키와 탄탄한 몸매.
그리고 영화 촬영인가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윤재의 얼굴까지.
‘이번 편 방송 나가면 꽤나 반응이 좋겠어! 그림 좋네~’
황경하 PD는 윤재와 안수애가 투샷으로 잡히는 화면을 보며, 계속 OK사인을 보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방송은 방송인지라, 녹화 시간이 예상보다 훨씬 길었다.
특히 촬영 각도를 바꿔가며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반복하는 일은 힘든 일이었다.
어느새 촬영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끝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셨는데 시청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겠습니까?”
“책을 구입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한국 소프트웨어 산업이 소비국으로 그치지 않고 생산국으로 발전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외국 소프트웨어에 대한 책이 아니라 한국 소프트웨어에 대한 책을 써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의 책과 사람. 안다박사 시리즈의 김윤재 작가님을 만났습니다. 작가님의 마지막 인사말이 굉장히 인상에 남는 군요. 우리나라도 언젠가는 소프트웨어 강국이 되길! 저 안수애도 기원하겠습니다.”
30분 방송을 위해, 3시간 넘게 진행된 촬영이 모두 끝났다.
“장시간 고생하셨습니다.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책을 소개해 주셔서 오히려 제가 더 감사드립니다.”
윤재는 소정의 출연료를 받아 부랴부랴 방송국을 나왔다.
마치 그물에서 벗어난 물고기가 된 심정이었다.
◈ ◈ ◈
‘이 놈의 르망!’
최근 부쩍 말썽을 일으키는 윤재의 중고 자동차.
‘아무래도 차를 바꿔야겠어!’
윤재는 할부를 해서라도 신형 아반테를 살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신동화건설 수익실현하면 차부터 좀 바꿔야겠다!’
삐그덕 거리는 르망에 답답함을 느끼는 사이 전화가 걸려왔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저 방금 인터뷰했던 안수애 아나입니다.”
“예? 아나운서님께서 어쩐 일로?”
“무슨 급한 일 있으셨어요? 가방을 방송국에 두고 가셨습니다.”
‘아뿔싸!’
안수애의 마수를 벗어날 생각에 급급한 나머지 노트북 가방을 두고 온 것이었다.
“방송국 앞에 팜므파탈이라는 카페 있습니다. 그 곳에서 만나시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네, 금방 돌아가겠습니다.”
오늘 처음 만난 사이에 방송국도 아니고 카페에서 만난다?
윤재는 다시 한 번 안수애의 포식자 같은 눈빛을 떠올리며 차를 돌렸다.
‘팜므파탈? 카페 이름도 어쩜 그리 그녀랑 어울리는지!’
◈ ◈ ◈
“궁금한 것도 있고 해서 차 한 잔 하고 싶었습니다.”
“아. 네!”
“인터뷰이에 대한 정보가 많을수록 방송이 풍부해 지니까요.”
“아. 네!”
‘비겁한 변명입니다. 녹화는 이미 끝났는데, 더 풍부해 질 게 뭐가 있단 말입니까?’
윤재는 속으로 생각하며 경계태세를 데프콘 5단계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뭐가 들어 있기에 가방이 이리 묵직하죠?”
“제 노트북입니다. 현재 차기작 쓰는 중이라서, 항상 휴대하려고 노력중이죠.”
“역시 작가님은 다르시네요.”
윤재를 띄워주는 그녀의 말투와 눈빛.
너 정도는 얼마든지 요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지방 방송국 아나운서지만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와 얽히고 싶지도 않았다.
‘어떻게든 부드럽게 빠져 나와야 하는데!’
탁자 위에 올려놓은 안수애의 전화가 울렸다.
일진건설 장태풍!
그녀의 전화기에 찍힌 발신자의 정보였다.
2006년이었던가? 2007년이었던가?
전생의 기억에 안수애가 결혼했다가, 2년 만에 이혼한 상대가 바로 장태풍사장이었다.
전생에서 처녀였던 안수애는, 애 딸린 유부남 장태풍과 결혼을 했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장태풍의 돈을 보고 시집갔다며 입방아를 찌어댔었다.
버튼을 누르더니 전화기를 뒤집는 안수애.
그녀의 동작에서 어떻게든 윤재를 요리하겠다는 의지가 읽혔다.
전화를 무음 모드로 바꾼 안수애가 노골적으로 윤재에게 추파를 던졌다.
윤재는 안수애의 추파를 귓등으로 흘리며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안수애의 추파를 내가 왜 피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거다!’
윤재의 기억에 안수애는 이혼 후 자서전적 에세이를 출판했었다.
파격적인 내용 때문에 베스트셀러가 됐던 안수애의 에세이.
책에서 자신이 관계를 맺은 남자들에 대한 품평을 실명으로 까발려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기억이 났다.
‘내가 자신이 없어서 그러는 게 아냐. 앞으로 큰일을 해야 하는데 안수애의 경험상대로 세간에 오르내릴 수는 없어!’
그녀의 추파에 넘어가 잠자리를 함께 했다고 치자.
회사와 인생에서 승승장구할 자신에게 화근이 될 게 분명했고, 숱한 사람들의 안주거리가 될 것이었다.
‘졸면 죽는다! 정신 바짝 차리자!’
윤재가 경계하는 사이, 안수애는 자신의 방식대로 작업 진도를 밟아 나갔다.
“겨울인데 카페 안이 왜 이리 덥죠?”
안수애가 뇌쇄적인 표정을 지으며 자켓을 벗었다.
솔직히 굉장한 몸매였다.
“글쎄요. 저는 왠지 한기가 느껴집니다만.”
윤재는 점퍼의 지퍼를 목 끝까지 끌어올렸다.
“어휴. 덥네. 목 좀 축일까?”
안수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새빨간 혀로 자신의 윗입술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서서히 핥았다.
‘이러다 파리지옥에 빠진 파리처럼 잡아먹힐라!’
윤재는 남은 커피를 원샷 때리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자동차가 말썽이라 카센터 문 닫기 전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만나 뵙게 돼 영광이었습니다. 그리고 노트북 찾아줘 진심 감사드립니다.”
“어머! 벌써 가시게요?”
“네. 중요한 전화 왔던 것 같던데 아나운서님도 일 보십시오. 그럼 저는.....”
윤재는 안수애에게 꾸벅 절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르망은 고쳐서 뭐 하시려고?”
시종일관 고고한 척 했던 안수애.
윤재가 자신의 유혹에 넘어 오지 않자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월요일에 출근해야죠!”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지극히 평범하게 처리했다. 윤재는 묘한 쾌감을 느꼈다.
“출연료도 주셨는데 커피는 제가 사겠습니다.”
윤재는 카운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경쾌한 발걸음이었다.
머리 뒤에서 안수애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죠? 제 의도를 모르는 것 같지는 않은데! 대체 이유가 뭐에요?”
안수애는 이제 대놓고 노기를 드러냈다.
윤재는 잠시 고개를 돌려 부드럽게 응수했다.
“음.... 그냥, 저는 전국구가 좋아요. 지방 방송국 아나운서 보다는! 그것뿐 이에요.”
안수애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당신은, 당신은 얼마나 잘 났는데?”
“나요? 그냥 오대양 그룹 계약직 사원입니다만.”
윤재는 뒤 돌아 카페를 나섰다.
스스로 생각해도 꽤 쿨한 뒷모습이었다.
커피 잔을 쥐고 있는 안수애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계...계약직 따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