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21화 (21/196)

잡주를 인생주식으로!

2000년 11월30일 오후 영업3팀 회의실.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 그럼 그 날짜에 뵙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윤재가 전화를 끊었다.

점심 먹고 회의실에 모여, 믹스 커피 한잔 마시며 노가리를 까는 것은 직장생활의 소소한 재미 중 하나였다.

노가리 타임 중 걸려온 전화를 끊자, 옆에 있던 차명수 대리가 호들갑을 떨었다.

“누구야? 응? 여자 같던데?”

“아닙니다. 그냥 개인적인 일로 걸려온 전화에요.”

“에이. 이거 왜 이래? 선수끼리. 목소리가 엄청 쐐액시 하던데? 누구야. 말해 봐! 우리 사이에 말 못할게 뭐가 있냐?”

섹시를 ‘쐐액시’라고 하는 차명수 대리의 말투를 듣고 보니, 그 여자 목소리가 진짜 섹시한 것 같기도 했다.

“없는 소문 만들어 내지 않을 거라 믿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허! 얘가 나를 뭐로 보고?”

‘뭐로 보긴 뭐로 봐요? 허풍쟁이 차명수로 보지!’

실제 별 일도 아니었기에 윤재는 실체를 들려주기로 했다.

“사실, 광주 NBC 안수애 아나운서가 전화를 했네요. 자기네 프로에 출연해 달라고 하더군요. 대리님도 아실 거에요. 책과 사람이라는 코너!”

“아. 안수애? 미녀 아나운서 안수애?”

차명수의 동공이 어디까지 커지나 테스트 하는 것 마냥 커져버렸다.

“네.”

“저. 정말? 정말 안수애가 전화를 했다고?”

차대리의 호들갑에 옆에 있던 오과장을 포함한 동료들까지 난리가 났다.

안수애 인기가 높기는 높은 모양이었다.

광주 NBC 주말 아침 교양 프로그램 책과 사람!

내용도 좋지만 아나운서 때문에 인기가 하늘을 찔렀는데, 그 주인공이 안수애였다.

직원들의 호들갑이 계속됐다.

“야! 윤재야~ 안수애 사인이라도 한 장 받아 주면 안 되겠니?”

“윤재씨! 내가 너 매니저라고 하면서 따라가면 안 될까? 나도 안수애 보고 싶다.”

“부럽다! 부러워~ 젊음이 좋구나. 내가 다섯 살만 젊었어도 안수애 어떻게 해보는 건데.”

이런 얘기가 회의실 곳곳에서 쏟아져 나왔다.

언제 끝날지 모를 선배들의 얘기를 귓등으로 흘리며 윤재는 핸드폰을 열었다.

Mate on!

한국 통신사들이 서비스하는 유료 인터넷 중 하나였다.

윤재는 메이트 온에 올려놓은 관심종목 주가를 스캔하기 시작했다.

‘천신만고 끝에 종자돈 1,000만원은 만들었고! 이제 다음 스텝을 밟아야 한다!’

윤재는 2000년대 초반에 히트했던 여자 탤런트의 ‘부자 되세요!’ 광고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때 목청 큰 차명수 대리의 얘기가 표창처럼 귀에 꽂혔다.

“가만! 이거이거! 이러다가 윤재, 여자 아나운서랑 결혼하는 것 아냐?”

“?”

“왜 그 사람 있잖아요? 신동화건설 조원석 사장인가 그 사람 처럼!”

“야. 명수대리! 너는 그걸 말이라고 하냐? 그 사람은 나이 차이가 스무 살이 넘게 났어. 그리고 윤재가 안수애한테 꿀릴 게 뭐가 있냐? 솔직히 안수애가 윤재보다 나이도 많을 거고. 그런 헛소리 하지 마라!”

“에이. 과장님!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죠. 윤재 잘난 건 알지만, 일단 가진 게 별로 없잖습니까? 반면 신동화건설 조원석 사장은 재산이 수천억은 됐을 거구요!”

순간 벼락처럼 윤재의 뇌리에 꽂히는 단어!

신.동.화.건.설! 조.원.석!

만리장성과 함께 인공위성에서도 보인다는 리비아 대수로를 공사했던 신동화건설의 회장 조원석!

한국 최초로 중동에 진출해 중동신화를 일궈냈던 인물.

그리고 배우, 가수, 아나운서까지 숱한 염문으로 스포츠 신문 1면을 장식했던 사람이었다.

현재는 IMF풍파를 겪은 뒤, 망하기 일보직전에 처해 있었다.

‘유레카! 장자 선생이 무용지용이라 했는데! 차대리님 덕에 떼돈을 벌게 되는구나! 신동화건설이라니!’

윤재는 믹스커피를 원샷 때리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급해서 그러는데 먼저 일어설게요. 혹시 사인 받게 되면 꼭 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점심시간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윤재는 용변이 급한 사람처럼 부리나케 화장실로 달려갔다.

윤재가 문을 열고 나가는데 오석진 과장이 한마디 했다.

“윤재 너도 신동화건설 조원식 사장 되지 말란 법 없어! 아나운서 잘 꼬셔 봐!”

◈          ◈          ◈

‘주당 340원? 대박이다. 대박!’

윤재는 좌변기에 앉아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불이 나게 ARS로 주식매수를 시작했다.

‘시장가로 매입하는 한이 있더라도, 탈탈 털어서 사야한다!’

신동화 건설을 시장가로 주문해 29,500주를 매수했다.

주당 350원이 조금 안 되는 단가였다.

[ 종목코드 107*** 신동화건설. 29,500주 전량매수. 매입평균단가 347원! ]

윤재의 핸드폰에 거래체결 문자가 찍혔다.

‘우와!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인생종목 한번 투자했구나!’

윤재는 좌변기에서 일어나며 무의식적으로 바지춤을 끌어 올렸다.

‘이런 미친. ㅋㅋㅋ!’

용변을 보려고 앉아있는 게 아니었는데, 너무 집중한 탓에 큰일을 치루고 있었다고 착각한 것이었다.

‘하기야 이보다 더 큰일이 있으려고?’

윤재는 다시 한 번 체결알림 문자를 쳐다봤다.

그리고 핸드폰을 쥔 채 두 손을 힘차게 흔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만세!’ 라도 외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          ◈          ◈

12월 5일 드디어 초대형 뉴스가 터졌다.

[ 동해 앞바다에서 러일 전쟁 때 침몰한 러시아 보물선 발견! ]

[ 해양 연구소! 보물선을 발견한 것은 아니지만 러시아 돈보스코호일 가능성이 농후한 물체를 발견했다고 밝혀! ]

하루 종일 뉴스와 신문에서 러시아 보물선 소식이 터져 나왔다.

개장과 함께 주가가 치솟더니 어느새 상한가를 찍었고, 상한가 매수잔량만 2,000만주에 육박할 정도로 주문이 집중되고 있었다.

영업3팀 점심시간 토크 주제도 단연코, 러시아 보물선 얘기였다.

“명수대리! 그 얘기 들었어? 울릉도 앞바다에 러시아 보물선이 침몰돼 있는데 신동화 건설이 그걸 끌어 올렸대!”

“뭘 끌어 올려요. 끌어 올린 건 아니고 발견만 했다던데!”

“아냐. 이미 인양 준비 하고 있다더라. 금괴만 200톤이 넘고, 중국 청화백자부터, 서태후가 애지중지하던 보물까지 실려 있대. 현재가치로 150조원이 넘든다던데?”

“과장님! 인양은 아니고, 발굴사업에 신동화건설이 함께 하는데 지분이 5% 정도 있대요. 그 가치만 해도 7조가 넘으니까 엄청난 돈이긴 하죠.”

오전 내내 인터넷 검색만 했는지 차명수 대리도, 오석진 과장도 보물선 전문가가 다 돼 있었다.

다른 직원들도 보물선 얘기와 신동화건설 얘기에 열을 올리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마이너스 통장이라도 내서, 신동화건설 주식 사야하는 것 아니냐?”

“이미 상한가 가버렸으니까, 사고 싶어도 못 사죠. 어쨌든 7조만 반영되면 신동화건설 가치가 주당 10만원 찍는다니까, 거래 가능할 때 달라들어도 수 십 배는 먹을 겁니다.”

“야! 차대리 너! 은근히 아는 것 많다? 지금 신동화건설이 얼마 가는데?”

“밥 먹기 전에 잠깐 조회해 보니까, 360원으로 상한가 진입해 버렸더군요. 이러면 매도물량이 없어 사고 싶어도 못 사요. 아깝네. 쩝!”

“360원? 그러면 10만원이면 몇 배를 먹는 거야?”

오석진 과장은 식당 영수증에 볼펜으로 나눗셈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 씨바! 277배네! 명수야! 우리 당장 사자!”

“와하하. 과장님! 파는 물량이 있어야 살 수 있다니까요. 조금 기다리면 분명 기회 오니까. 일단 총알부터 마련해 놓으세요.”

“야. 차대리 너! 완전 주식 전문가구나! 사람이 달리 보인다야.”

어느새 차명수는 주식 전문가처럼 목에 힘을 주고 있었다.

신동화건설 보물선 이슈는 세상을 시끄럽게 할 정도의 뉴스이긴 했다.

IMF의 터널 막바지에 있던 한국 사람들은, 러시아 보물선이 한국을 구제금융에서 구원해 줄 ‘보물’선으로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 이후에도 잊을만하면 보물선 이슈는 주식시장을 달궜었다.

덕분에 윤재도 비교적 정확하게 당시의 정황을 기억할 수 있었다.

‘맞다! 차대리님은 전생에 신동화건설 막차 타서, 형수님 몰래 마이너스 통장 만들어 투자했다 2,000만원을 말아 드셨었지! 아주 깨끗하게!’

전생에서는 오과장이 흥분했고, 차대리는 사건 초반 냉정함을 유지했었다.

하지만 일단 자신의 돈이 들어가자, 차명수는 자신에게 유리한 루머들만 믿으려 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리한 소식만 듣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듯이!

차대리의 대표적인 믿음은, 보물선 지분가치 7조5천억과 주당가치 10만원이었다.

나중에 작전세력의 농간으로 밝혀지며 연속상한가 행진을 멈추고, 연속하한가 릴레이를 개시했을 때도 차명수는 주당가치 10만원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신동화건설은 화려했던 과거를 뒤로하고 상장폐지의 길을 걸었던 기억이 났다.

윤재가 취해야 할 스탠스는 명확했다.

오석진도 차명수도 살리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이었다.

생부에 올라간 사람들은 확실하게 살리자는 것은, 회귀자인 윤재의 기본 전술이었다.

“형님들! 저런 것 다 개뻥이에요. 개뻥! 작전주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뭐라고? 니가 뭘 안다고 그래?”

차명수 대리는 어느덧 277배 환상에 빠져 버린 것 같았다.

“생각해 보십시오. 동해 바다는 가뜩이나 수심도 깊어요. 예를 들어 해저 1,000미터에 보물선이 빠져 있다고 치자 구요. 제가 잘은 모르지만 그 정도 깊이면 수압이 어마어마할 겁니다. 아시죠? 10미터 내려갈 때 마다 1기압씩 높아지는 거?”

윤재의 얘기를 들은 오석진은 콩깍지가 걷히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차명수 대리는 여전히 환상속을 헤매는 표정이었다.

사람이라는 게 참 알다가도 모를 존재였다.

처음엔 오과장보고 침착하라던 차대리가, 윤재가 반대하자 청개구리 마냥 보물선의 환상에 빠져든 것이다.

“야! 무인 로봇이 내려가서 인양한다더라.”

“하하하. 대리님! 생각해 보세요. 지금 육상에서 기어 다니는 로봇도 없는데, 해저 수백, 수천 킬로미터를 내려가서 작업하는 로봇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여튼 저는 아니라고 보니까, 알아서들 하십시오. 뭐! 투자는 원래 자기 책임으로 하는 것이니까요.”

“명수대리! 듣고 보니 윤재씨 말이 맞는 것 같다. 괜한 것 손댔다가 깨박살 나지 말고, 우리 일이나 열심히 하자!”

하지만 차명수 대리는 아랑곳 하지 않고,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보물선 소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뉴스 화면이 아니라, 숫자 277과 딸라($) 표시가 보이는 것 같았다.

‘내가 할 도리는 다했으니까! 그나저나 신동화건설이 15연상이었던가? 17연상이었던가?’

신동화 건설이 최소 15연상 이상을 찍은건 확실했다.

윤재는 식탁 밑으로, Mate on에 접속해 주식시세를 조회했다.

‘360원. 수익률 3.7%. 예상수익금 38만원!’

윤재는 핸드폰 유료 인터넷을 빠져나왔다.

‘그래 확실치 않으니 14연상에서 털고 나오는 거다. 그러면 예상수익률은 650%에 이익금이 대략 6,000만 원 정도 되겠구나!’

영수증 용지에 나눗셈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괜찮은 암산실력이었다.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잡주 투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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