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19화 (19/196)

회원권 형님

후반전에도 윤재의 활약은 계속됐다.

“장팀장님은 좋으시겠습니다.”

“헉.헉. 뭐. 뭐가요?”

골프 초보인 장동석은 전반에 이어 후반전에도 이리저리 뛰어 다니느라 헉헉대고 있었다.

방금 트러블 샷을 하고 카트로 달려온 장동석에게 사장님이 말했다.

“저기 손사장과 나란히 걷고 있는 윤재씨를 봐 보세요. 나도 골프 10년 넘게 쳤는데, 나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요.”

“정말이십니까?”

“방금 손사장이 티샷을 잘 못 쳤거든. 그랬더니 저 친구가 일부러 손사장 방향으로 볼을 보내더군.”

“진짜요?”

“내가 보기엔 그래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손사장과 함께 다니며 볼도 찾아주고 그러는 거지. 혼자 볼 찾으러 다니면 짜증나고 힘은 더 들게 마련이거든. 장팀장은 잘 알거 아니요?”

“하하하. 그러게요. 헉. 헉. 그렇지 않아도 뛰어 다니기 정말 힘 드네요. 그런데 저 녀석 팀장은 안 챙기고 고객만 챙기네. 역시 가르친 보람이 있어요.”

“예끼. 이 사람. 지금 직원 잘 가르쳤다고 자랑 하는 거요?”

“하하하. 그렇게 되나요?”

“윤재라는 저 친구 분명 크게 될 친구요. 내가 주문 전화 받는 태도 보고 알아 봤다고.”

“확실히 남다른 친구는 맞습니다.”

“자 이제 세컨 샷 해 봅시다. 이번 홀에는 잘 붙여서 버디 한방 해 볼까나?”

바람 하나. 구름 한 점 없는 만추의 골프.

단풍을 곱게 물들인 풍광마저 아름다웠던, 골프 행사가 그렇게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          ◈

운동을 즐겁게 마친 8명의 골퍼들이 클럽하우스에 모였다. 샤워까지 모두 마친 그들의 얼굴은 적당히 상기 돼 있었다.

5시간 가까이 진행되는 골프는 피곤한 운동이다. 그렇지만 누구 하나 지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자. 음식이 익어가는 동안 오늘의 하이라이트 시상식을 한 번 해 볼까 합니다.”

좌중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골프 자체도 즐거운 운동인데, 빵빵한 상품을 곁들인 시상식을 하면 재미는 더욱 커진다.

회사에서 100만원을 찬조했고, 사장단 4명이 100만원을 추가해 200만원어치 상품을 준비했다.

사회와 진행을 맡은 사장님이 단상에 올라가 마이크를 잡았다.

“먼저 최장타 시상을 하겠습니다. 수상자에게는 골프벨트가 주어집니다. 상품 전달은 양광수 상무께서 해 주실 겁니다.”

연말 시상식처럼 뜸을 들이던 사장님이 장타자를 발표했다.

“이거 뭐야? 장타자는 양광수 상무님! 셀프로 시상도 하시고, 상품도 받는 겁니까?”

좌중에 박수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니어리스트. 최다 보기 플레이어. 제일 못 친 사람에게 주는 노력 상 시상이 이어졌다.

안타깝게도 제일 못 친 사람은 장동석 팀장이었다.

“장팀장님은 입문하신지 얼마 안됐으니, 앞으로 좀 더 갈고 닦으셔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노력 상 주셨으니 더 정진해 앞으로는 잘 하겠습니다.”

시상이 이어지는 동안 차명수는 여유 있게 행사를 즐겼다.

박수를 치는 동작마저 여유가 넘쳐흘렀다.

‘후후후. 하수들 같으니라고. 싸구려 상품 많이들 받으시라고. 어차피 우승은 나 차명수가 될 테니까. 후후후.’

실제로도 상당한 실력자이면서 골프 부심이 넘쳤던 차명수.

실력자 위주로 구성된 1조에서 자신이 84타로 1등을 했다.

하수 위주로 구성된 2조는 보고 말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1등은 신형 드라이버와 퍼터의 조합으로, 시가 100만원 상당의 상품이 준비돼 있었다.

차명수는 욕심 가득한 눈빛으로 단상 옆에 세워놓은 드라이버를 쳐다봤다.

‘후후후. 그렇지 않아도 드라이버 바꿀까 생각했는데. 이제 신무기까지 장착하면 다 죽었다. 다 죽었어! 기존 채는 중고로 팔면 15만원 정도 생길 테고! 왜이리 좋노? 왜이리! 후후후.’

차명수는 입을 틀어막고 웃음을 흘렸다.

“끝으로 오늘의 주인공. 메달리스트 즉 최저타 우승자를 발표하겠습니다.”

사회자가 연말 시상식처럼 긴장을 끌어 올렸다.

“두두두두두!”

“역시 젊음이 좋군요. 저도 10살만 젊었다면 메달리스트가 됐을 텐데 말입니다.”

사회를 맡은 사장님이 뜸들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당연히 젊은이가 우승하지. 이 늙은이들아. 후후후.‘

승리를 확신하는 차명수!

“80대 초반 스코어가 오늘 행사 최종 1등입니다.”

다시 한 번 사장님이 뜸을 들였다.

‘나 빼고 84타 칠 사람이 어디 있어야 말이지. 후후후.’

차명수는 80대 초반이란 소리에 완벽하게 확신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단상으로 올라갔다.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자. 진짜 발표합니다. 오대양 배 골프대회 메달리스트. 영업3팀.....”

여기까지 얘길 했는데 차명수가 두 손을 머리 위에 겹쳐 잡고 흔들어 댔다.

승리의 세리머니를 하는 것이었다.

US오픈에서 우승한 프로골퍼 못지않은 표정이었다.

그런 차명수를 흘깃 보더니 사회자가 한참을 웃었다.

그러더니 사회자가 청천벽력 같은 발표를 하는 것이었다.

“오대양 배 골프대회! 메달리스트. 영업3팀 김.윤.재! 모두 축하해 주십시오.”

좌중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엥? 사장님 뭐라 구요? 차명수가 아니라 김윤재 라구요?”

차명수가 대추처럼 달아오른 얼굴로 대리점 사장에게 다가갔다.

“그래. 여기 봐. 82타. 맞잖아.”

2조 스코어카드에 윤재의 스코어가 찍혀 있었다.

전반 47타! 후반 35타! 합계 스코어 82타!

“그럴 리가. 그럴 리 없어요. 이건 말도 안 돼.”

“야. 차명수. 뭐하는 거야. 얼른 연단에서 안 내려와!”

장동석이 차대리를 나무랬다.

그때 서야 수치심으로 얼굴이 달아오른 차명수가 고개를 떨구고 자리로 돌아왔다.

“모두들 오늘의 우승자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장내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하지만 차명수는 얼굴이 빨개진 채 얼빠진 표정으로 허공을 주시할 뿐이었다.

‘이럴 수가! 이건 말도 안 돼! 사기야 사기!’

◈          ◈          ◈

광주시내에서 술자리를 갖기로 한 일행들.

광주로 이동할 때는 양상무와 장팀장, 윤재와 차명수가 한조로 이동하기로 했다.

양상무의 자동차 안에서 대화꽃이 만발해 있었다.

“윤재 그 친구 진짜 난 놈일세. 난 놈이야.”

“상무님. 저도 진짜 깜작 놀랐습니다.”

“근데 그 녀석이 정말 후반에 그렇게 잘 쳤어? 그냥 무조건 오케이 주고 그런 거 아냐?”

“아닙니다. 저는 윤재 그 녀석이 사장님들만 챙기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 맞아. 매너가 좋다고 사장들이 그랬잖아.”

“그런데 어느 순간 보니까 언더파를 하고 있더라 구요. 정말 깜작 놀랐습니다. 나중에 보니 쳤다하면 레귤러 온을 시키고, 2퍼팅으로 파 세이브를 하더군요. 신들린 것처럼 공이 그린에 올라갔습니다.”

“세상에 26살 계약직이 후반 언더파라니!!!!”

“그렇게 티 나지 않은 것 같았는데.... 어느새 언더파여서 저도 정말 놀랐습니다.”

“허허. 회사 생활 28년 동안 김윤재 같은 괴물은 처음 본다. 처음 봐! 윤재 그 친구 일도 잘 하는데 골프도 잘 치고 대단해!”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장동석은 조용히 웃었다.

평소 차명수에게는 ‘일은 안 하고 골프만 치러 다녔냐?’ 라며 핀잔을 주곤 했던 양광수였다.

◈          ◈          ◈

같은 시각. 윤재가 운전하는 르망 자동차 안.

“대리님! 아 맞다. 대리님이라니. 회원권 형님!”

“회원권 형이라니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대리님 아까 저랑 내기하셨잖아요. 손가락까지 걸고!”

그때서야 차명수는 윤재와 내길 했던 악몽이 떠올랐다.

당연히 자신이 1등 할 줄 알고 세리머니 까지 했다가 망신당한 뒤, 수치심에 아직까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윤재가 내기를 환기시키자 비로소 정신이 돌아 왔다.

“제가 90타 깨면 평생 그린피 내주겠다고 하셨으니까, 제 회원권이죠. 좋네. 회원권 형님! 앞으로 회원권 형님으로 모실게요.”

“끄응.”

“제가 남아일언중천금이라고 했던 것도 기억나시죠.”

“끄응.”

“대리님! 갑자기 똥이라도 마려우세요? 왜 자꾸 신음 소리만 내십니까? 대리님은 오바이트도 잘 해 설사도 잘 해, 완전 똥 형이네! 똥 형!”

신음을 토하던 차명수가 갑자기 비굴한 표정이 돼 말했다.

“윤재야. 그냥 없던 일로 하면 안 될까?”

“에이. 대리님! 대리님은 무슨 놈의 못 본 걸로 해 달라. 없던 일로 하자는 게 이리 많아요? 남자가. 치사하게.”

“끄응.”

윤재는 차명수를 실컷 놀려 먹을 계획이었다.

‘그 동안 못되게 군 것, 보너스로 좀 더 혼나 보시라고!’

윤재는 고개를 숙이고 안절부절 하고 있는 차명수를 봤다.

‘건수 잡았을 때, 기를 확 죽여 놔야 한다.’

전생에서 현재까지, 오랜 회사생활 끝에 윤재가 터득한 비법 중 하나였다.

“제가 대리님께 그린피 평생 지원받아 뭐 하겠습니까?”

“정말?”

차명수 대리 얼굴이 확 밝아졌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

“네. 남아일언중천금이니까. 월요일에 치마 입고 출근하세요. 그러면 없던 일로 해 드릴게요.”

“야. 너 진짜 너무한다. 너무 해. 내가 씨바 월요일에 치마 입고 출근해야겠니?”

차명수 대리 얼굴이 다시 다크모드가 됐다.

“싫음 관두시든가요. 평생 회원권 형님으로 살 건지 치마 한번 입고 말건지. 다리도 얇은 편이니까 치마가 잘 어울릴 것 같긴 한데....”

“끄응.”

“1억원 짜리 코스프레 한번 한다고 생각하세요.”

“끄응.”

“대리님!”

“왜?”

“없던 일로 해 드릴까요?”

“정말?”

“그럼요. 선후배 좋다는 게 뭡니까?”

“정말이지?”

“저는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사람 아닙니다.”

남아일언중천금이라 하고도 약속을 지키지 않는 차대리를 갈구는 말이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또 조건이야? 왜 치마에 브라자라도 찰까?”

“대리님은 뭔 생각이 그렇게 하드코어에요?”

“.....”

“먼저, 엑셀 교육 열심히 받으세요.”

“휴... 난 또! 그게 다냐?”

“그리고, [회원권 형님]에서 탕감해 주는 조건으로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말만 해라! 치마 입고 출근하는 것만 아니면 다 들어주마!”

“대리님! 아버님 모시고 골프 한 번 치시죠. 이제 곧 겨울이니까 다가오는 봄에! 어떻습니까?”

“우리 아빠랑? 니가 우리 아빠를 어떻게 아냐?”

“금융권의 최고 스타 부행장! 차태영 부회장을 모르면 샐러리맨이 아니죠!”

윤재가 한 달 넘게 차명수의 갈굼을 묵묵히 견뎌왔던 이유! 그건 바로 차태영 부회장의 존재였다.

윤재는 계속 말했다.

“예전부터 존경해 왔던 부회장님과 골프 한 번 치게 해 주십시오. 그린피 내달라고 안 할 테니까요!”

“아. 알았다. 아빠 만나는 길에 말씀 한 번 드리지 뭐!”

자신의 아버지를 존경하고, 칭찬해 주는데 기분 나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차명수는 괜히 어깨가 으쓱해져 있었다.

“골프 한 번에 15만원 잡고, 한 달에 4회만 쳐도 60만원, 1년이면 720만원! 30년만 쳐도 2억이 넘습니다. 제가 그걸 탕감해 드린 겁니다!”

“유구무언이네!”

“꼭 아버님과 필드에서 뵐 수 있도록 힘 좀 써 주십시오.”

“알았다. 우리 집 꼰대가 나한테는 꼼작 못하니까! 기대해도 될 거야!”

허세로 시작해 허세로 끝나는 차명수였다.

윤재의 본론은 그렇게 끝났고, 이젠 차명수의 시간이었다.

유일한 자존심이었던 골프마저 풋내기에게 비참하게 패한 상황!

어떤 핑계도 통하지 않을 완벽한 패배였다.

그도 윤재와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윤재야. 그 동안 내가 잘못했다. 정식으로 얘기한 적이 없었던 것 같구나. 진심으로 사과하마. 그리고 그동안 진짜 고마웠다!”

“?”

윤재는 조용히 차대리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하하하. 오늘 골프는 정말 100만불짜리 골프네요!”

“....”

윤재가 차명수에게 주먹을 내 밀었다.

주먹 악수를 시도한 것이다.

“대리님! 함께 영업3팀을 위해 열심히 뛰어 보시죠! 어떻습니까?”

차명수는 멋쩍게 웃으며 윤재의 주먹에 자신의 주먹을 맞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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