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16화 (16/196)

에스프레소

2000년 11월 23일. 오대양 푸드 본사 오션 홀!

매년 연말에 개최되는 혁신활동 경진대회 날이었다.

회사에서는 이 행사를 이노베이션 챌린지(Innovation Challenge)라고 불렀다.

2000년을 마무리하는 대회에 호남부문을 대표해 장동석이 발표자로 참석했다.

양상무는 평가자 석에, 장동석은 발표자 석에 앉아 호남의 순번을 기다렸다.

생산본부. 재무본부. 인사실. 제약본부를 대표하는 사람들의 발표가 이어졌다.

곧이어 장동석 팀장의 차례가 됐다.

“호남부문 영업3팀장 장동석입니다.”

100 명 정도 입회한 장내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수십 번도 더 리허설했다. 떨지 말자! 자신의 작품을 발표조차 하지 못한 윤재를 위해!’

찰나의 정적을 지나 장동석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울려퍼졌다.

“사람들이 눈이 두개인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라는 조물주의 뜻이라 생각합니다.”

어두컴컴한 장내에 무대만 조명을 받고 있었고, 조명 한 가운데 장동석이 서 있었다.

참석자들은 숨을 죽이고 장동석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괜찮은 오프닝이었고,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 시키기 딱 좋았다.

“그동안 영업은 손익 보다는 판매와 Market share에 집중해 왔던 게 사실입니다.”

“....”

“그래서 영업은 주먹구구식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회사 내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

“하지만 오늘 제가 소개해 드릴 매트릭스 경영을 통해, 영업은 거듭날 겁니다. 판매와 손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조직으로 말입니다.”

모든 회사의 영원한 숙제!

그것은 판매와 손익의 조화인지도 모른다.

장동석의 입에서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오자 긴장감이 더욱 고조됐다.

“영업본부 매트릭스는 본부는 물론이고, 부문단위에서 팀 단위까지, 그리고 영업사원 한 명과 특정 거래처까지 클릭 몇 번으로 판매와 손익 현황을 조회해 볼 수 있습니다.”

장동석은 매트릭스를 참석자들에게 직접 시현해 보여줬다.

‘야! 우리 본부도 저렇게 해야 하는 거 아냐?’

‘순식간에 실적을 확인할 수 있겠네!’

‘저거 완전 파워풀 하네!’

참석자들과 청중들은 소곤거리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장내를 술렁거리게 만들 정도로 ‘매트릭스’와 장동석의 발표는 임팩트가 있었다.

장동석은 매트릭스를 구현해가며, 리드미컬하게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해 나갔다.

15분 남짓한 발표가 정점을 향하는 중이었다.

“올해 호남부문에서 처음 시작한 매트릭스는 영업본부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직원들은 쉽고 빠르게 판매와 손익 실적을 확인할 수 있게 됐습니다.”

“!!”

“그리고 팀, 부문, 본부 단위에서 비슷한 일을 하던 사람들을 대폭 이동배치 시킬 수 있을 겁니다. 좀더 생산적인 업무로 말이죠! 저희 영업은 [매트릭스 경영]을 통해 생산성을 끌어 올리겠습니다.”

“!!!!”

“기필코! 기필코 말입니다.”

장내에서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엑셀 매크로 기반으로 윤재가 만든 매트릭스와, 장동석의 빼어난 프레젠테이션이 빚어낸 완벽한 작품이었다.

◈          ◈          ◈

모든 발표가 끝난 오션 홀.

발표회 장은 어느새 연회장으로 변해 있었다.

오대양 푸드&바이오의 CEO이자 오대양 그룹의 총수인 오재준 회장.

헤드 테이블에 앉아있던 그가 양광수와 장동석을 호출했다.

“술이나 마시고 옛날 영업하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영업이 이렇게 선진화 됐지?”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회장님!”

의전형 임원답게 양상무는 회장의 비위를 잘 맞췄다.

“장동석 팀장이라고 했지?”

“예. 회장님!”

“이리 와서 내 잔 한잔 받아.”

“영광입니다. 회장님!”

“백화점에 있다, 푸드 가보니 어때?”

쉬는 시간에 비서에게서 장동석의 프로필을 받아 본, 오재준 회장은 장동석의 기본적인 인적사항을 알고 있었다.

“모두 오대양 그룹 산하기업 아니겠습니까? 어딜 가든 제 몫 이상을 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허허허. 애티튜드가 좋구만. 그런데 매트릭스라는 건 자네 작품인가? 아니면 실무자가 따로 있었나?”

“사실은 저희 팀 신입사원 작품입니다.”

누구든 자신의 공을 돋보이게 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장동석은 거짓으로 자신의 공을 높이고 싶지 않았다.

“오호. 신입사원이라고?”

장동석과 오회장이 얘길 주고받는 사이 양상무가 끼어 들었다.

“김윤재라고, 이번에 제가 뽑은 계약직인데 보통내기가 아닙니다.”

“계약직이라고?”

“네. 계약직인데 어지간한 정규직 2~3명 몫은 해내는 것 같습니다. 면접 볼 때부터 물건이란 걸 제가 알아 봤습니다.”

양상무는 윤재를 추켜세우면서, 인재를 알아 본 자신의 안목도 어필하고 있었다.

“양상무가 칭찬에 인색한 편인데, 이 정도 칭찬하는 거 보니 보통 친구는 아닌 모양이군.”

“인물입니다.”

“인물입니다.”

장동석과 양상무가 동시에 윤재를 일컬어 ‘인물입니다!’라고 답했다.

그 바람에 오재준 회장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껄껄껄! 오늘 영업 본부 때문에 내가 여러 모로 즐겁구만! 껄껄껄. 그래 축하하는 의미로 우리 건배 한번 할까?”

“넵 회장님! 제가 건배사 한 번 하겠습니다.”

양광수는 득의양양한 얼굴로 건배사를 선창했다.

“매트릭스 경영을 통해, 영업이 거듭나는 것을 위하여!”

“위하여!”

허공에서 오재준 회장의 잔과, 양광수, 장동석의 잔이 부딪혔다.

오재준 회장의 잔이 가장 위에 있었다!

◈          ◈          ◈

같은 날 저녁 광주역 앞.

영업3팀 전원은 대합실에서 장동석을 기다렸다.

서울이 집인 양광수 상무는 본사 방문 길에 집에 들렀다가, 다음날 내려 올 계획이라 했다.

“왜? 안 오시지? 도착하실 때 됐는데?”

“오시겠죠? 기차가 조금 연착되나 보죠!”

팀원들이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장동석을 기다리는 동안, 윤재는 구석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김윤재입니다.”

“네. 김선생님! 저 미래출판사 도충식입니다.”

지난 주말의 일이었다.

예상보다 2주일 정도 빠르게 윤재의 처녀작 [ 안다박사의 엑셀 무작정 따라하기]가 정식 출간된 것이었다.

윤재의 스피드와 심야 작업의 결과였다.

“김선생님! 축하드립니다. 선생님 책이 드디어 교본문고 IT분야 베스트에 등극했습니다.”

“정말요?”

“네. 교본문고 전시 1주일 만에 카테고리 판매 1위의 기염을 토하셨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대리님 말씀대로 정말 대박이었군요.”

“선생님! 이 정도면 대박이 아니라 초대박입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미래 출판과 도대리님 덕입니다.”

“저희가 감사드려야죠. 그건 그렇고 영어 원고는 어떻게 돼 가고 있습니까?”

“절반 정도 마무리했습니다. 다음 달 정도면 탈고 가능할 전망입니다.”

“벌써요?”

“네. 밤 낮 없이 작업하고 있습니다. 미래 출판에서 해외 출판을 적극 추진해 주신 덕이죠.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그 때 차명수가 윤재를 불렀다. 장동석이 플랫폼으로 빠져 나오고 있었다.

“도대리님! 내일 다시 통화해요. 회사 일 때문에.....”

◈          ◈          ◈

그날 밤 광주 남구의 남도가든 귀빈실!

“오늘 같이 기쁜 날! 제가 건배사 한번 하겠습니다.”

신은 장동석에게 리더십을 선사했지만, 주량을 주지는 않았다.

이미 본사에서 와인을 많이 마시고 온 탓에 그는 살짝 취해 있었다.

빨개진 얼굴로 장팀장이 건배구호를 외쳤다.

“이노베이션 챌린지 1등상 수상을 자축하며. 우리 모두 앞으로도 화이팅 합시다. 화이팅!”

“파이팅!”

모두가 호쾌하게 건배사를 외치며 술잔을 들이켰다.

정겨운 광경이었다.

“대상은 청주공장이 받았지만, 항상 생산본부 챙겨주는 관행이 있어서, 사실상 대상은 우리라고 하더군요.”

“와! 진짜요?”

“그래요. 이 모든 게 윤재 덕이란 걸 모두 잊지 맙시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감히 건배 한 번 외치겠습니다.”

차명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야! 차 대리 니가 웬 일이냐? 시키지도 않은 건배를 다 하겠다고 하고?”

“에이. 과장님! 오늘은 저희 팀의 경사 아닙니까? 잘 따라 하기나 하세요.”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 차명수가 건배사를 했다.

“영업3팀 복덩이 김윤재씨의 앞날을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소리가 동시에 귀빈실을 울렸다.

어느새 차명수 대리는 윤재의 앞날을 기원해 줄 정도로 마음이 풀려 있었다.

장동석이 자리에서 다시 일어났다.

“포상으로 300만원 받았습니다. 100만원은 소고기 값. 100만원은 팀 공통경비... 나머지 100만원은 제가 알아서 쓰겠습니다. 다들 이의 없죠?”

“네. 당연하죠! 팀장님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사세요!”

“하하하하!”

다들 소고기를 굽고, 술잔을 돌리며 회식을 즐겼다.

분위기가 잘 익은 안창살처럼 무르익었다.

장동석이 윤재를 불렀다.

“미안하다. 모두 니 작품인데....”

“아닙니다. 팀장님! 제가 발표했다면 1등상 받지 못했을 겁니다. 저는 우리 팀과 호남부문이 잘 된 것으로 만족합니다.”

“짜식. 고맙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고, 끝가지 웃음 잃지 않아줘서 고맙다. 그리고 남은 100만원으로는 너 골프채 사줄까 생각중이다.”

“그렇게 안 하셔도 됩니다.”

“니가 한 작품인데 그 정도는 받아야지.”

“그렇게까지 안 해 주셔도 되는데....감사합니다! 팀장님.”

“다른 팀원들도 큰 불만 없을 거다. 내 맘 같아서는 3백 다 너 주고 싶어.”

“감사합니다.”

한달 정도 전의 일이었다. 그때만 해도 아직 차명수와 윤재가 화해하기 전이었고, 골프 얘기가 나오며 차명수가 윤재를 놀렸던 일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부유한 덕에 일찍 골프를 접한 차명수는 팀에서 골프를 가장 잘 쳤고, 호남부문에서 자신을 따라올 자가 없다며 자랑하곤 했었다.

그 날 자동차에 이어, 골프자랑까지 윤재에게 해대던 차명수를 보며 장동석은 마음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혹시나 경진대회 1등 이상을 하면 골프채를 사줘야겠다고 장동석은 마음 먹었었다.

◈          ◈          ◈

오랜만에 소로 배를 채웠다.

적당히 취한 팀원들은 남도가든을 빠져나왔다.

소고기 집 남도가든 앞에 휘황찬란한 불빛이 하나 빛나고 있었다.

“스타빈스?”

오석진이 처음 보는 간판을 소리 내 읽었다.

99년도에 이화여대 앞에 처음 문을 연 글로벌 커피 업체 스타빈스.

광주 스타빈스 1호점이 봉선동에 오픈한 것이었다.

“세계로 그룹에서 운영하는 글로벌 커피 체인점입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라고 합니다.”

윤재가 아는 척 했다.

2000년 당시, 지방에서 체인점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전무하다 시피 했다.

당시만 해도 다방에서 배달해 먹는 커피가 고급 커피였고, 보통 사람들에게는 믹스 커피도 귀하던 시절이었다.

그 때 적당히 술에 취한 차명수가 나섰다.

평소 돈 자랑, 자동차 자랑, 시계자랑, 골프자랑 등 자랑이란 자랑은 차대리의 독차지였다.

폼생폼사! 허세왕 차명수였다.

이번에는 차명수가 커피부심과 커피자랑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팀장님! 꺼억! 우리 스타빈스 한 번 가시죠. 에스프레소가 해장으로도 좋다는 거 아닙니까? 꺼억!”

차명수가 트림을 해대며 거드름을 피웠다.

“에스프레소? 에스프레소가 뭐야?”

“오과장님은 꺽! 에스프레소도 모르십니까? 원두커피를 에스프레소라 한다는 거 아닙니까? 꺼억! 원두커피 중에서도 달고 맛있는 커피를 영어로 에스프레소라고 합니다. 꺼억!”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전생에서 커피 깨나 마셔 본 윤재.

진짜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뜨릴 뿐이었다.

“그래. 그럼 우리 2차 가지 말고 에스프레소나 한 잔 마셔 봅시다.”

술을 잘 못하고, 좋아하지도 않는 장동석에게는 좋은 제안이었다.

장동석을 따라 팀원들은 스타빈스 매장으로 들어갔다.

“에스프레소? 무슨 커피가 2,500원이나 하냐? 맥주 한 잔에 천원인데! 세상에 미친 거 아냐?”

“오과장님! 원두커피라는 거 아닙니까? 원두커피. 에스프레소! 커피 믹스하고는 차원이 다른 맛 아닙니까? 꺼억!”

뭘 시켜야 할지 몰라 멍하니 메뉴판만 쳐다보는 직원들.

윤재가 대략적인 설명을 해줬다.

“야. 윤재씨는 모르는 게 없네. 안다 박사네. 안다 박사!”

“그건 그렇고, 선배님들! 주문은 어떻게들 하실까요?”

“야. 윤재! 꺽! 주문은 물어볼 게 뭐 있어? 다 에스프레스 주문해야지. 원두커피 몰라? 원두커피! 꺼억!”

직원들은 멋모르고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그들은 진짜 에스프레소가 달고 맛있는 커피라고 믿고 있었다.

“여기! 에스프레소 8잔에 카페라테 한 잔이요.”

“고객님 정말 에스프레소 하시겠습니까?”

딱 봐도 아재삘이 넘쳐나는 사람들을 보고 여직원이 우려를 표명했다.

“네. 저기 계시는 분이 커피 전문가라고 하네요. 에스프레서 줘 보세요.”

윤재는 빙그레 웃었다.

자리를 잡고 커피가 나오길 기다렸다.

술 취한 차명수 대리는 계속 원두커피 타령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커피가 모두 준비 됐다.

“뭐야? 윤재 잔은 저렇게 큰데 우리 잔은 왜 이리 작아?”

“이게 2천원이 넘는다고?”

에스프레소를 처음 본 사람들.

저마다 툴툴 거리며 에스프레소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앗! 뜨거!”

“우웩 써!”

“뭐야 이거 완전 사약 맛 아니냐?”

“야이 씨. 술이 다 깬다. 이거 누가 시키자 그랬어?”

장동석도 팀 선배들도 모두 인상을 찌푸렸고, 어떤 사람은 깜작 놀라 커피를 흘리기도 했다.

각양각색의 불평불만이 터져 나왔다.

윤재는 혼자 여유 있게 카페라테를 마시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야! 차대리. 너! 씨바 에스프레소 한번 도 안 마셔봤지?”

“차명수. 달고 맛있는 커피라며? 이게 달다고? 이게 달아?”

다들 차명수에게 화살을 쏟아냈다.

하지만 차명수는 역시 차명수였다.

“이상하네. 내가 이탈리아에서 마신 에스프레소 맛은 이게 아닌데. 스타빈스가 에스프레소를 잘 못 하는 집일 겁니다. 분명해요.”

‘졌다. 졌어!’

윤재는 카페 라떼를 마시며 이 웃픈 광경을 지켜봤다.

장동석의 1등상에 이어 차명수의 허세까지도!

기분 좋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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