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직 허용의 예외
원래는 오성그룹 계열사였던 오대양 푸드.
세월이 흐르며 창업주 2세들 간 계열 분리를 했다.
그 과정에서 떨어져 나온 곳이 바로 오대양 푸드 그룹!
그룹 내 푸드. 사료. 제약. 극장사업. 홈쇼핑 등을 거느리고 있는 재계서열 15위 수준의 그룹이었다.
대부분의 회사가 그렇듯, 오대양 그룹은 사규로 ‘겸업’을 엄격하게 제한했다.
하지만 겸업금지 조항은 사실상 있으나 마나한 조항이었다.
경계가 모호했기 때문이었다.
겸업과 관련해 회사가 인정한 딱 하나의 예외는 임직원의 저술활동.
사내 우수사례를 책으로 엮어 낼 수도 있고, 고위직 임원이나 오너가 성공담이나 자서전을 출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종자돈 마련을 위해 윤재가 책 쓰는 것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100매 정도 작성한 원고를 3개 출판사에 이메일로 보냈었고, 드디어 출판사 직원과 약속한 날짜가 다가왔다.
윤재에게 가장 먼저 연락해준 미래 출판사가 그 당사자였다.
집에서 가까운 광남대 후문으로 찾아오겠다는 출판사 직원. 서울에서 광주까지 찾아오겠다는 것 자체가 윤재의 원고를 높이 평가한다는 의미였다.
윤재는 카페로 들어서며 핸드폰을 걸었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전화를 받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윤재는 남자와 반갑게 악수를 나눴다.
“작가님! 만나 뵙게 돼 영광입니다. 도충식입니다.”
“김윤재입니다.”
인사와 덕담을 끝내자 본격적인 출판 얘기가 시작됐다.
“그러니까 군대 계시는 동안 MS오피스 관련 집필을 구상 했단 말씀이세요?”
“네. 군대 있을 때 의외로 시간이 있더군요.”
“혹시 어떤 부대에서 근무하셨습니까?”
“그냥 흔한 보병 땅개였습니다.”
한국 최고 특전부대를 제대한 윤재. 군 생활과 소속부대에 자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군대 부심을 부리는 등의 쓸데없는 자랑을 윤재는 좋아하지 않았다.
“저도 보병출신인데, 저는 군에서 도무지 시간이 안 났는데 대단하시네요.”
“불침번 근무를 할 때나, 행정실에서 PC연습 할 때 구상하게 됐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선생님 같은 분들이 군대를 알차게 다녀오신 분들이죠.”
“그건 그렇고, 도대리님은 제 책의 시장성을 어떻게 보시나요?”
“말씀 드린 것처럼 이 분야는 백 만권 씩 팔리는 시장은 아닙니다. 하지만 김선생님 원고에서 저희는 대박의 기운을 느꼈습니다.”
호칭을 편하게 하라고 했지만, 도충식 대리는 윤재를 최대한 예우했다.
‘출판사 직원이라 그런지 협상력은 아직 약하시군! 선생님이라니!’
전생에서 20년 넘게 회사 다니며 ‘협상스킬’ 교육만 이십 번 넘게 배웠던 것 같다. 시작부터 저자세로 나가면 협상에서 우위를 뺏기는 건 교육과정의 기초였다.
그렇기 때문에 도충식의 저자세는 윤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대박 기운이요?”
“네. 네. 원고를 받아 보고 깜작 놀랐습니다. 완성도가 장난 아니었습니다.”
“그 정도입니까?”
사실 윤재는 자신의 책이 이 분야에서 먹힐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안다박사] 시리즈는 미래에서 온 책이나 다름 없었으니까! 다만 전생에서 책을 내본 적이 없어 시장규모가 궁금했던 것이다.
도충식 대리가 상기된 표정으로 얘기 했다.
“특히 [즉시 전력 예시]코너와, [MS에 바란다]는 꼭지는 무릎을 탁 치게 만들더군요.”
오대양 푸드 근무 경험을 살린 [즉시 전력 예시]와 앞으로 MS가 보완해 줬으면 하는 [MS에 바란다] 코너가 예상대로 출판사의 취향을 저격한 모양이었다.
“[MS에 바란다] 는 부분을 읽다 깜작 놀랐습니다. 저도 오피스 이용자지만, 이런 건 좀 개선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거든요. 어쩜 그리 이용자들의 가려운 부분만 쏙쏙 긁어 주는지!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습니다.”
“정말요?”
“파워포인트 도형 간 간격을 일정하게 맞추게 했으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나, 붙여 넣은 사진을 쉽게 자르게 하자는 의견도 좋았고, 엑셀 차트나 표를 온라인으로 연동해 PPT나 워드에서 동시에 변경되도록 하자는 아이디어는 정말 신박했습니다."
도충식 대리는 거의 10분 가까이 [MS에 바란다] 코너의 아이디어를 극찬했다.
이쯤 되면 윤재의 열성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사용하다 보면 그런 불편들 호소하죠. 그런 내용을 담아 본 것입니다.”
“네. 그렇긴 하죠. 그런데 선생님 원고는 마치 미래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와서 책을 쓴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죠.”
“극찬을 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작가님 원고는 분명 훌륭합니다. 빌 게이트가 읽었다면 깜짝 놀라 마시던 커피를 뿜었을 겁니다.”
도충식 대리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성공가능성이 보였다. 나름 목돈이 눈앞에 와 있는 것만 같았다.
업계 전문가의 얘기인 만큼 [안다박사]시리즈의 히트는 어느 정도 보장된 셈이었다.
“도대리님. 그럼 몇 권이나 팔릴 거 같으세요? 대박향기가 난다면서요?”
“네. 이 쪽에서는 초대박 작품들이 보통 십쇄 정도 찍습니다.”
“십쇄라 발음이 참 애매 하군요. 하하하하."
“아하하. 그런가요?”
도충식이 어색한 웃음을 짓더니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어감이 좀 이상하긴 하군요. 10 Prints라고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하하하. 농담입니다. 그냥 하던 대로 하셔도 됩니다. 미래출판사는 보통 1쇄에 몇 부 정도 찍나요?”
“저희가 이쪽에서는 나름 메이저입니다. 1쇄에 2천부 정도 찍습니다.”
“그럼 10쇄면 2만부네요!”
“맞습니다. 맞습니다. 만약 2만부를 찍고 권당 1,200원식 인세 받는 다고 가정하면, 2,400 만원 정도 인세가 나오는 거죠.”
“이천사백만원이요?”
“그럼요. 그럼요. 게다가 이게 끝이 아니죠.”
비슷한 말을 되풀이해 얘기하는 것이 도대리의 습관인 것 같았다.
“뭐가 또 있나요?”
“엑셀. 파워포인트. 워드 세 가지 모두 출판하시면 이천사백 곱하기 3이 되겠죠?”
“칠천만원이 넘겠군요.”
윤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진짜 초대박이 나면 더 팔릴 수도 있고 그만큼 작가님 수입이 늘어날 겁니다.”
전생에서는 재테크로 망테크를 탔지만, 이번 생은 돈을 벌 자신이 있었다. 칠천만원이면 종자돈으로 딱 좋은 금액이었다.
게다가 작업 스피드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니, 종자돈 마련을 앞당길 수 있었다.
“계약금은 어떻게 지급해 드릴까요?”
“관례대로 해 주십시오.”
“저희 관례대로면, 삼백만원 정도가 적당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게 조건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실 수 있나요?”
윤재는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입을 축이며 뜸을 들였다.
‘조건’이라는 말에 도충식도 급 긴장한 얼굴이 돼 윤재의 눈치를 살폈다.
“미래 출판사에서 영어 출판도 해주실 수 있을까요?”
“영어 출판이요?”
도충식은 깜작 놀랐다.
“네. 한정된 국내 시장을 넘어 미국 시장에도 책을 내보고 싶습니다. 미국 사람들도 오피스 관련 책은 읽을 거 아닙니까?”
도대리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영어 출판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자신은 그런 일을 해 본 경험도 없었다.
“솔직히 저는 국내 출판만 해 봐서, 그런 일은 잘 모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영어도 잘 하시나요?”
“그냥 책을 쓸 수준은 된다고 자부합니다.”
도대리의 눈동자가 커졌다.
오대양 푸드의 임원이 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산 중의 하나가 바로 영어.
전생에서 윤재는 영어가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고졸출신이라는 설움과 출세에 대한 욕망 때문에 윤재는 어학에 남다르게 집착했었다.
학원이 문을 닫는 국경일과 부모님 제사를 제외하면 윤재는 단 하루도 어학학원에 다니는 것을 거른 적이 없었다.
덕분에 윤재는 영어, 일어, 중국어, 이태리어 4가지의 외국어를 쉽게 구사했다.
“그런데 굳이 영어로까지 출판을 하시고자 하는 이유가?”
“한국은 기껏해야 오천만명 시장이고, 영미권은 수억명 시장이니까요. 그리고 영어 공부도 계속해야 합니다. 이미 나온 책 영어로 편집 하면서 공부도 하고 일석이조 아니겠어요?”
“아. 네 그러셨군요! 정말 대단하시네요. 아직 젊으신데 영어공부는 언제 그렇게 하셨어요?”
“뭐. 대단한건 아닙니다만, 군대에서 불침번 근무서고 행정실에서 PC연습할 때 영어공부도 했습니다.”
“군대에서?”
“네. 군대에서...”
“혹시 카투사?”
“아닙니다. 그냥 보병 땅개였습니다. 그런데 해외 출판이 어려우신가요? 한국에서 대박향기가 나면 미국에서 중박은 가능할 것 같은데?”
“물론이죠. 물론이죠. 그런데 제 권한 밖이라. 팀장님이나 국장님께 여쭤 보고 결정해야 할 사안입니다.”
윤재는 영문 출판을 위한 승부수를 띄웠다.
“국내 인세를 6%에서 5%로 낮춰 드릴 용의가 있다고 말씀해 주세요.”
“5..... 5%요?”
“네. 권당 1,200원이 아니라 1,000원만 받겠습니다. 대신 영어로도 출판해 주십시오.”
“서울 올라가서 꼭 여쭤 보겠습니다.”
“미래출판과 잘 됐으면 합니다. 오피스 3총사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책은 계속 쓸 생각이니까요.”
“아. 예! 말씀만 들어도 힘이 나네요.”
“미래출판이 거절하시면 다른 출판사 알아볼 생각입니다. 국장님 설득해서 꼭 관철해 주십시오!”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도충식! 순한 사슴처럼 생긴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 안다 박사 ]시리즈는 분명히 대박이 날 작품. 자칫 경쟁사에 뺏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꼭 되는 방향으로 추진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오케이 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높은 분들 설득하겠습니다.”
“그럼 국내판 3권 계약부터 하실까요?”
“지금 당장이요?”
“네! 쇠뿔도 단김에 뽑아야죠.”
“좋습니다.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윤재는 안다박사 시리즈 세권에 대한 계약을 마쳤다.
“선생님과 계약하게 돼 영광입니다. 저녁시간인데 식사 함께 하실까요?”
“그러시죠. 계약 기념으로 제가 사겠습니다.”
“아닙니다. 저희랑 계약해 주셨는데 제가 사겠습니다.”
“이 동네 인심이 그런 게 아닙니다. 먼 길 오셨는데 제가 사겠습니다."
◈ ◈ ◈
도충식 대리가 택시를 타고 터미널로 떠났다.
출판계약 일을 마치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
곧 있으면 오피스 3총사 계약금 9백만원이 입금될 것이었다.
‘계약금으로 일단 노트북부터 사야겠어.’
노트북은 본격적인 집필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
‘차도 한 대 사야 하는데.....’
차가 있었으면 도충식을 터미널까지 배웅해 줄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자동차라!'
자동차 생각을 하자 며칠 전 차명수대리의 헛소리가 떠올랐다.
신규개발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있는 차명수.
사무실로 돌아온 그가 스트레스를 엉뚱하게 풀었던 것이다.
“에이 씨바. 과장님 왜 우리 회사는 국산 차만 타게 하는 거죠?”
“또 뭔 소리가 하고 싶은 거냐? 거래처 사장들이 영업사원들이 외제차 타고 다니면 퍽이나 좋아 하겠다?”
“회사에서 못 타게 하는데다, 영업용이라서 중고차 뽑았더니 오늘 또 퍼졌어요.”
“평소에 차 관리 좀 잘 하지 그랬냐? 회사에서 차량 관리 잘 하라고 유지비 30만원 주는 거 아냐?”
“몰라요. 아 짜증나! 집에 BMW 놔두고 소나타 중고 타려니 짜증난단 말에요.”
“너 진짜 집에 BMW있어?”
“그럼요. 5 시리즈 있는데 언제 한번 골프 치러 갈 때 과장님 태워 드릴까요?”
“일 없다.”
그 때 윤재가 관리팀 실무자와 협의를 하다 3팀으로 돌아왔다.
“야. 윤재!”
“네. 대리님.”
“너는 어떻게 생각해?”
“뭘요?”
차명수는 한참 동안 BMW와 국산차를 비교해 가며 독일차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국내 굴지의 증권사 부사장인 부친과, 예비역 중장으로 예편한 할아버지가 계셨다. 차대리의 부친도 조부도 모두 상당한 재력가라는 소문이었다.
‘윤재 너 이 자식! 니 약점을 드디어 찾았다! 빈털터리에 계약직. 나는 아버지, 할아버지 재산 합치면 백억이 훌쩍 넘어. 크흐흐.’
뭐가 그리 좋은지 차명수 대리는 실실 웃었다.
“내가 너한테 괜한 말을 했구나!”
“??”
“차도 없는 계약직한테... 니가 평생 BMW 타 볼 일이나 있겠어? 그러니까 나한테 잘 해! 그럼 내가 기분 전환으로 한 번 정도는 태워줄게!”
SMART 사건 이후 틈만 나면 윤재를 못살게 구는 차명수였다.
‘이런 작자를 살리겠다고 내가 이 고생을 하고 있다니! 내가 전생의 연 때문에 참는다.'
윤재의 스케줄 표 안에서 움직이는 것도 모르는 차명수는 혼자 신이 나 있었고,
심드렁한 표정의 윤재는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자는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르망 중고. 너는 그게 딱 어울린다. 아하하하.”
"왜요? 브리사나 포니를 타라고 하시지 그러십니까?"
갈굼을 당해야 갈구는 사람도 신이 나는 법인데, 윤재가 쿨하게 받아 버리자 차명수는
공허해졌다.
그럼에도 그는 한 동안 돈 자랑, 자동차 자랑을 늘어놓았고 오석진 과장에게 혼쭐나고서야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당시의 기억에다, 오늘 당장 자동차가 없어 발생한 불편을 생각하니 씁쓸하긴 했다.
씁쓸함은 아픈 기억을 동시에 소환한다.
‘전생에서 주식투자로 날린 돈이 대충 BMW7 시리즈 한 대 값은 될 것이다!'
백화점 알바 동생인 남창진은 전생에서 증권회사에 취직했었다.
그리고 윤재는 자신의 주식투자를 상당 부분 창진에 의존했던 것이다.
하지만 증권회사 직원이었던 창진도, 그에게 투자를 맡겼던 윤재도 주식으로 재미를 보지 못했었다.
'워커홀릭. 모태솔로. 사고치는 친척. 마이너스의 손 남창진 등 전생에서 재테크에 실패한 이유는 차고 넘치는 구나!'
하지만 이내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 냈다.
‘회사 일도, 재테크도 이번엔 다를 것이다. 이번 인생은 악셀 좀 제대로 밟아서 BMW가 아니라, 페라리를 마트 장보는데 이용할 정도로 돈을 한 번 벌어보겠다!'
윤재는 도충식 대리가 사라진 지점에서 시선을 거둬 들였다.
그리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안다 박사 시리즈가 인생역전의 선봉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