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11화 (11/196)

명절과 명리학

9월8일 금요일!

연휴 전날 아파트 단지 내 중대형 마트를 순회중인 오석진 과장과 장동석 팀장.

추석대목 중에서도 연휴 직전 날은 가장 바쁜 날이다.

남들은 일찍 퇴근해 고향 갈 준비나 집에 갈 준비를 하지만, 식품 맨들은 연휴 전날에는 주말도 반납하고 야근을 해야 했다.

장동석과 오과장은 사람들이 마트에 들려, 오대양 푸드의 선물 셋트를 사가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다 나오는 길이었다.

“오과장 보기에 김윤재 그 친구 어때요?”

오석진 과장은 장팀장의 질문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어제 사무실에서 펼쳐진 진풍경은 오과장에게도 충격이었으니까!

“입사 열흘 지난 신입직원의 솜씨라기엔, 정말이지 말문이 막힐 솜씨였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어디 가서 PC 좀 다룬다는 소리 들었는데, 김윤재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겠더군요.”

“저는 회사 15년 다니면서 SAP에 그런 기능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다른 팀 직원들 하는 얘기 들었죠?”

“네. 그 친구들이라고 별 수 없었을 겁니다.”

전날 양상무 보고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자 마자 윤재는 데이터 정리와 품의서 준비를 동시에 진행했었다.

사무실에 소문이 쫙 퍼져 3팀뿐만 아니라, 1~2팀 직원들과 관리팀원들, 그리고 지원팀 직원들까지 몰려 와 윤재가 작업하는 광경을 지켜봤던 것이다.

“세상에! 빌 게이트보다 잘 하네.”

“야! 빌 게이트가 문서작업 하겠냐? 안하겠냐?”

“에이 대리님도! 농담 아닙니까? 농담.”

“야. 윤재씨 작업하는 거 봐야 하니까, 터무니없는 농담 하지도 마라. 집중 안 되니까!”

“저! 손 좀 봐! 거의 손이 안 보일 지경이네!”

직원들은 그런 감탄사를 연발하며 윤재의 작업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장동석은 조용히 웃었다.

“게다가 오늘 아침 일 생각해 보세요. 그 녀석 머릿속에는 능구렁이가 백만 마리는 들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보통친구는 아닌 게 분명합니다. 신입에 그것도 계약직! 혼자 너무 잘 나가면 시기질투 받기 쉬운데, 윤재 그 친구는 왠지 밉지가 않아요.”

“아마, 공로를 선배들에게 돌리기 때문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자체도 놀라운 일이지요.”

“역시! 과장님은 내공이 있으셔서 눈치 채셨군요. 그 녀석이 일부러 그러고 있다면 무서운 놈인 것이고, 의식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라면 두려운 놈인 거죠!”

오과장은 장팀장의 얘기가 이해될 듯 말 듯 했다. 장팀장의 얘기를 곱씹던 오과장의 동공이 갈수록 커져갔다.

“그렇군요. 이제야 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습니다. 시기나 질투를 피하면서 인정받을 생각이었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런 애티튜드(Attitude)가 몸에 배어 있는 거라면 저희 생각보다 훨씬 큰 인물이란 말씀이군요!”

“하하. 역시 오과장님은 다르시군요. Attitude is everything! 이란 말이 있지요.”

거짓말처럼 추석용 스팟여신 품의를 하루 만에 결재 받은 윤재였다. 놀라운 스피드의 품의서 작성에, 미리 상무까지 구두승인을 받아 놓은 치밀함까지!

혀를 내두를 만한 일처리였다.

‘더 놀라운 건, 담보한도 범위 내 신용한도 증액은 부문장 전결이란 걸 꿰뚫고 있었다는 거야!’

장동석의 생각은 꼬리를 물었다.

‘그런데 설마? 관리부문 소속인 신팀장님이 사실은 양상무님 라인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쉽게 결재 받을 수 있다는 걸 알았을까? 나도 최근에서야 안 사실을? 아냐 우연일 거다!’

장동석은 거기까지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

오늘 아침에는 윤재가 장동석을 찾아 와 이렇게 말했다.

“팀장님! 오늘이 매장이나 대리점들 제일 바쁜 날 아닙니까?”

“그럴 테지! 연휴 전날이니까. 우리도 오늘 정신없을 거다. 주문에, 전화에, 배차에, 품의서에 수금, 입금 등... 휴~”

“그래서 말인데요.”

윤재의 말에 장동석의 눈빛이 빛났다. 윤재가 이런 식으로 운을 떼면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장동석은 잘 알고 있었다.

“사무실은 제가 지킬 테니, 팀장님께서는 매장 순회 하시는 거 어떠십니까?”

“무슨 소리야? 오늘 같이 바쁜 날... 그럴 수 있나?”

“매장에 오대양 CS 팀들도 좀 찾아가 격려해 주시고, 저희 팀 Big 딜러도 좀 찾아가 격려해 주시면 좋아하지 않을까요?”

리더십은 훌륭하지만 푸드 근무 경험이 부족한 장동석에게 윤재의 건의는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매장 CS 팀원들 배스킨라빈스도 좀 사다주시고, 대리점 사장들께는 사과라도 한 박스 사다주시면 좋아할 겁니다.”

“내가 미처 그 생각을 못했구나! 고맙다 윤재!”

장동석은 어제와 오늘 아침 있었던 일을 연결지어 생각했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 내가 생각한 보다 훨씬 큰 놈일 가능성이 높다!’

장동석 역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윤재의 얘기처럼, 추석 명절용 단기 여신 덕분에 거래처 사장들의 반응이 매우 좋았다. 찾아 간 곳마다 고맙다며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비싼 아이스크림을 받은 CS팀원들의 반응도 아주 좋았다.

지금까지 명절 연휴 특근을 하는 동안 그녀들에게 관심을 표해 준 팀장은 장동석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아이스크림 까지 사들고서!

장팀장 생각에 윤재는 이런 녀석이었다.

뭐랄까?

Input을 넣으면 어떤 Output이 나오는지 알고 있는 느낌이랄까?

◈          ◈          ◈

그 시각 윤재는 몇 안 되는 선배들과 내근 업무를 소화했다.

대리점 등 고객, 협력업체, 물류센터, 서울 본사까지 전화가 빗발쳤다.

핸드폰과 유선전화를 번갈아 받아가면서 이메일을 작성하는 윤재.

옆에서 일하는 몇몇 선배들이 허덕이는 것과 달리 윤재는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일처리를 해냈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코앞이었다.

그 때 양광수 상무 비서에게서 윤재에게 전화가 왔다.

“예? 상무님께서 저를 찾으신다 구요?”

윤재가 임원실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비서를 바라봤다.

여자 계약직들 사이에서 특히 인기가 높은 윤재였다.

윤재의 눈빛의 의미를 알아챈 비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쁜 일은 아니신 것 같아요. 들어가 보세요.”

윤재는 비서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 임원실로 들어갔다.

“윤재씨 어서 와. 다른 건 아니고 점심이나 하자고 불렀지.”

“??”

보통 임원들은 조직 관리 차원에서 직원들과 식사를 하기도 한다. 여직원들과, 차장들과, 계약직들과... 이런 식으로 돌아가며 현장의 의견도 듣고 구성원을 관리하는 것이 임원의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은 윤재만 부른 모양새였다.

매일 붙어 다니는 지원팀장도 보이지 않았다.

“추석도 다가오고... 그래서 지원팀장은 팀원들과 식사 하라고 했지.”

“아. 네.”

“지원팀장이 항상 나 따라 다니느라 팀원들 못 챙기니까. 이럴 때 라도 직원들 챙겨야지.”

“상무님 배려심에 놀랄 따름입니다.”

“그나저나 뭐 먹으러 갈까? 초밥 좋아하나?”

‘명절 대목 전날! 팀장들도 아니고 나를 데리고 초밥집을 간다고?’

굳이 20년 직장생활 내공이 아니더라도, 뭔가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          ◈          ◈

“사장님!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장팀장님. 오과장님. 명절 대목에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민족의 명절에 인사도 드릴 겸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직원들은 어디 가고 사장님이 이러고 계십니까?”

“말도 마요. 말도 마. 직원 놈이 급여 가불해주라고 해서 월급 당겨 주면서 추석 보너스까지 줬더니....”

“팀장님! 자영업자들 이럴 때 속상해 죽겠어요. 전화도 안 받고 미치겠습니다.”

“아니. 사모님이 거기서 왜 나와요?”

장동석이 찾아간 우량 거래처 신진유통.

사장님 내외가 명절 대목을 맞아 개고생을 하고 있었다.

사장님이 상하차 작업을 하고, 사모님이 거래처 배송을 하는 모양이었다. 장팀장이 찾아갔을 때 막 상차작업을 끝내고, 사모님이 거래처 배송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게. 이 답답한 양반아! 내가 가불해주지 말라고 했잖아. 마누라 말만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고. 에휴 답답한 양반.”

“그 놈이 그럴 놈이 아닌디. 내가 2년을 데리고 있었는디....”

그 때 1톤 탑차가 한 대 더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추석명절이라 쏟아지는 주문과 배송을 맞추느라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장팀장님. 미안 합니다. 커피라도 한잔 올려야 하는데... 지금 꼴이 이 모양이라. 저는 배달 갑니다.”

사모님이 부랴부랴 차량을 몰고 거래처로 향했다. 담당 팀장에게 과일과 커피라도 한잔 올리지 못하는 걸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장님도 창고 쪽으로 차량을 유도하고 있었다.

“팀장님! 뭐 하세요?”

자켓을 벗는 장동석을 보고 오석진이 물었다.

“저희 고객께서 저 고생을 하는데 못 본척할 수 있나요?”

장동석은 자켓을 구석에 벗어놓고 거래처 사장을 쫒아갔다. 오석진도 들고 있던 사과박스를 내려놓고 덩달아 자켓을 벗어야 했다.

“워메. 팀장님! 지금 뭐하시는 거 에요?”

“뭐하긴요? 이 쪽 세트 실으면 되는 거죠?”

“워메. 팀장님. 오과장님.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디....”

장동석은 꿋꿋이 오대양 푸드의 식품 상자들을 날랐다. 오과장도 장팀장과 사장 눈치를 보며 상자를 날랐다.

기사와 사장, 장팀장과 오과장이 함께 일을 하니 상차 작업이 금새 끝났다.

장팀장과 오과장의 와이셔츠가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와따. 내가 오대양 일 10년째 하고 있는디 명절 전에 팀장님이 저희를 찾아주신 것도 처음이고, 웃통 벗고 일 도와주신 팀장님도 처음이네요. 참말로 감사합니다.”

“뭘요. 쉬지도 못하고 저희 물건 파시느라 고생하시는데!”

“아이고. 팀장님 말씀이라도 고맙습니다.”

“대신 연휴 때는 못 나옵니다.”

“하하하. 그러지 말고 좀 도와주십시오. 일당 드릴게.”

사장님의 농담에 함께 한바탕 폭소를 터뜨렸다.

Moment of Truth!(진실의 순간)라는 말이 있다.

이런 MOT가 싸이면 쌓일수록 거래처와의 신뢰가 콘크리트처럼 굳어지는 것이다.

장동석은 그렇게 거래처와 진실의 순간들을 만들어 갔다.

2시간가량 정신없이 일했더니 상황이 정리됐다.

“사장님! 명절 잘 보내시고, 추석 끝나고 저녁이나 한번 하시죠. 저희가 사겠습니다.”

장동석은 정중하게 인사를 마치고 거래처를 나왔다. 항상 단정하던 머리칼이 헝크러져 있었다.

장팀장이 오과장과 차를 타려고 할 때였다.

“팀장님! 오과장님! 그냥 보내드리기 서운해서.....”

배달 갔다 돌아오는 길에 사장의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돌아온 사모님.

한우 선물세트 두 박스를 사와 명절 선물로 주려는 것이었다.

“사모님! 안 됩니다. 저희 짤리는 꼴 보고 싶으신 거 아니죠?”

장동석은 손 사레를 치며 한우세트를 거부했다.

“팀장님? 이거 약소해서 그러는 거에요?”

“아닙니다. 그런 거 절대 아네요. 저희 물건 팔아주시는 것도 고마운 데 저희가 선물을 드려야지 받으면 되겠습니까?”

“사과 주셨잖아요. 얼른 트렁크 열어봐요.”

“오대양 푸드는 주고 안 받기 운동 하고 있어요. 한우는 사장님하고 드시거나 직원들 챙겨 주세요.”

한참을 옥신각신 하고서야 장동석은 거래처를 떠났다. 한우 세트는 주차장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헛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시....”

사장님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러게 말이요. 다른 팀장들은 맨 손으로 찾아 와서는, 이거 저거 잘도 받아 가던디...”

“긍게 말여. 장팀장님은 오셔서 반나절 동안 일만 쌔빠지게 도와주다 가네.”

“참 마음씨가 고운 사람이네요. 저런 양반은 처음 보네. 첨 봐!”

“긍게 말여. 명절 때 쓰라고 외상한도도 1억이나 늘려주고 말여.”

“오대양이 앞으로 좋아질랑가?”

“예끼. 이사람. 회사 밥 벌어 묵음서 회사 욕하면 못 써!”

“내가 언제 욕했다고 그요?”

“그럼 방금 한 말이 칭찬이여? 칭찬?”

“들어갑시다. 오늘 출근한 애들이랑 소고기 파티나 합시다.”

“그라세! 새벽부터 일 했드만 목이 칼칼하구만!”

◈          ◈          ◈

장동석과 오석진이 거래처를 돕느라 구슬땀을 흘리던 시각!

호남본부 인근의 고급 일식집 도화(桃花)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사케와 초밥, 그리고 모듬회가 보였다. 두 명이 먹기에는 너무 과한 상차림.

서로 마주보며 윤재와 양광수가 앉아 있었다.

“윤재씨 덕분에 본부에 활력이 생겼어! 부문장으로서 고맙게 생각하네.”

“아닙니다. 상무님!”

“메기 한 마리가 미꾸라지들을 격동시키는데, 윤재씨는 메기가 아니라 이무기 수준이야. 껄껄껄.”

양광수의 칭찬은 마냥 입에 발린 소리는 아니었다.

“이번 명절용 단기 여신도 거래처 반응이 아주 좋다고 들었네. 직원들도 좋아하고.”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시내에서 비싸기로 소문난 일식집을 찾아와 계약직 칭찬이나 할 사람이 아닌데.... 에라 모르겠다. 초밥이나 맛있게 먹자.’

윤재는 초밥을 달게 먹었다.

참치부터 광어까지 모두 신선했고, 잘 뭉쳐진 밥알이 회와 조화를 이룬 맛을 뽐내고 있었다.

“그나저나 윤재씨!”

“네. 상무님!”

드디어 본론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자네 말이야. 명리학과 관상 공부했다는 게 사실인가?”

“네. 제가 어느 자리라고 거짓말 하겠습니까?”

부모님 서점에서 3천권의 책을 읽었던 윤재.

관상! 사주팔자! 명릭학 관련도 여러 권 독파한 건 사실이었다.

“지난번 신팀장 심장병 알아 본 것도 그렇고 보통 족집게가 아니다 싶거든...”

“아닙니다. 그냥 넘겨짚은 게 어쩌다 보니....”

“내 눈은 못 속여. 윤재씨는 신기가 있어. 분명해!”

‘전생에도 사주관상에 환장했었는데.... 여전 하군!’

“그래서 말인데....”

“네. 상무님!”

윤재를 진지하게 쳐다보던 양상무의 입에서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영업총수가 될 상인가?”

윤재는 초밥이 목에 걸릴 뻔 했다.

‘상무란 인간이 이 바쁜 날! 계약직 불러놓고 한다는 소리가!’

윤재는 속으로 혀를 찼다.

말만 그럴싸하게 하고 행동은 정반대로 하는 양광수. 그의 단면을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 어차피 더 높이 가기는 힘든 사람.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인심이나 쓰자. 얼른 돌아가서 일처리도 해야 하고.’

윤재는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밀려들 전화와 일처리가 걱정됐다.

사케를 단숨에 비운 윤재가 말했다.

“외람되나 상무님께서 허락해 주신 걸로 알고 감히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래그래.”

양상무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윤재의 사케잔을 채웠다.

“상무님은.....”

“?????”

“상무님은 왕이 될 상입니다.”

양광수가 놀란 듯 뒤로 몸을 뺐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더 없이 비릿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당분간 구름 위를 거니시는 것도 뭐, 나쁘진 않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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