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9화 (9/196)

매트릭스와 병아리 프로젝트

‘고졸에 계약직인 주제에 까짓게 잘나면 얼마나 잘 났다고! 짜식이 눈치 없게 떠들 어서 선배들을 병신 만들어. 이 새끼 어디 한번 두고 보자!’

오석진 과장이 제지하지 않았다면 사무실로 돌아가는 내내 윤재를 갈궜을 차명수.

차명수는 운전하는 동안 그런 생각을 하며 윤재에 대한 미움을 키우고 있었다.

한편 윤재는 창밖을 보며 앞으로의 계획을 구상했다.

‘선배들 몇 명에게 당분간 미움을 받더라도, 우선 양상무님께 잘 보이는 게 중요하다.’

자신의 정규직 전환의 키(key)를 쥐고 있는 사람이 바로 양광수 상무였다.

‘미안하지만 상무님! 정규직 될 때까지는 일단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아직은 내 힘이 부족하니까! 양광수 상무는 전생에서 한번, 그리고 이번 생에 다시 한 번 나를 정규직을 만들어 줄 사람이다.’

생각이 양상무에 이르자, 자연스럽게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회사의 미래를 함께할 아군과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을 구분해 아군을 늘리고 적군을 줄여 나가야 한다. 말하자면 살생부가 필요해!’

오너 3세의 잇따른 삽질로 20년 뒤 폭망에 가깝게 몰락해 버릴 오대양 푸드!

회사를 그 모양으로 만든 원흉 중에 양광수 상무가 차지하는 몫도 적지 않았다.

‘가만 나둬도 몇 년 뒤면 양상무는 전무를 달지 못하고 옷을 벗는다. 살생부에 올릴 필요도 없는 인물이긴 하지.’

윤재가 생각하기에 양광수 상무의 가장 큰 잘못은 다른 게 아녔다. 회사에 도움이 될 장동석이나 최희갑 같은 팀장들을 내치고 간신들을 키웠다는 것이었다.

특히, 장동석을 건강문제로 내친 건 양광수의 가장 큰 패악질에 속했다.

‘세상엔 3가지 부류의 임원이 있다!’

첫 번째는 회사에 반드시 필요한 임원.

구성원과 오너, 주주들에게 비전을 제시하면서 자신이 맡은 부문의 경쟁력을 높여주는 사람.

나아가 5년~10년 뒤의 먹거리를 찾아낼 능력이 있는 임원이 첫 번째에 해당된다.

두 번째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임원.

이 부류의 사람들은 적당히 잘한다.

일도 적당히 잘하고, 술도 적당히 잘 마시고, 의전도 적당히 잘 한다.

특히 이런 사람들이 승진을 잘한다.

하지만 영속기업을 지향하는 회사의 미래를 생각하면 조금 아쉬운 스타일이 바로 이런 부류의 임원들이다.

‘냉철하게 생각하면, 전생에서 나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사이에 있었다고 봐야 맞다. 소위 말하는 점오(1.5)!’

냉철한 자신에 대한 평가였다.

마지막 세 번째가 회사에 해악이 되는 임원.

양상무는 전형적인 세 번째 부류에 해당하는 임원이었다.

부하들을 쥐어짜 단기 실적만 올리면 되는 임원.

말은 합리적으로 윤기 나게 하지만 행동은 정반대인 임원.

아부에 능통한 전형적인 의전형 임원.

결정적으로 자기 관리가 전혀 안 되는 임원!

양상무의 실체였다.

전생에서 그는 사생활이 아주 문란했다.

말은 성인군자처럼 하는데, 실제 모습은 소인배는커녕 양아치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능선들이 차량을 휙휙 지나갔다. 그리고 윤재의 생각은 계속됐다.

‘2020년에도 제조업으로는 특이하게 10% 넘는 영업이익률을 보였던 회사가 바로 오대양이다. 그런 회사를 거의 사망 직전으로 만들다니!’

윤재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회사의 중역으로 최대한 빠르게 성장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있으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소위 사내정치 같은 투쟁도 피해서는 안 된다.’

눈빛에서 시작된 불꽃이 어느새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내 기필코 0과 1사이의 임원이 되겠다! 오너와 임원 사이는 될 수 있어야 한다. 그 정도는 돼야 수많은 동료들을 구할 수 있다.’

윤재는 머릿속으로 자신만의 살생부(殺生簿)를 그렸다.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최대한 고치면 된다. 하지만 불가피한 사람은.....’

이 대목에서 윤재는 차대리를 한번 바라봤다.

‘그런데 차대리 같은 양반들이 애매하단 말이야. 저 사람 살려? 말아?’

◈          ◈          ◈

윤재가 오대양 푸드 계약직이 된지도 벌써 4주가 흘렀다. 그는 여전히 1등으로 출근했고, 월급의 몇 배가 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윤재는 장팀장의 방을 찾았다.

“팀장님! 어제까지 실적 자료 출력해 왔습니다.”

“어디 보자. 어제까지 우리가 본부 중간을 가고 있었지?”

“네. 36개 팀/지사 중에서 딱 12위입니다.”

“내가 오기 전에는 36개 팀 중에서 정확히 36등 아녔던가?”

“하하. 그렇긴 했죠.”

“그런데 이게 뭐야?”

보고서를 훑어보던 장동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장동석의 눈앞에는 본부실적. 부문별 실적. 부문 내 팀/지사별 실적이 요약된 장표가 칼라로 출력돼 있었다.

“이걸 니가 만들었니?”

“네. 누가 대신 안 해주니까요.”

“이 막대그래프 밑에 숫자는 뭐야?”

“그건 조직별 공헌이익을 백만원 단위로 표시한 겁니다.”

“손익자료가 함께 있다고?”

장팀장이 놀라는 이유가 있었다.

2000년 당시 극히 일부의 얼리어댑터를 제외한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IT에 서툴렀다.

호남부문만 해도 직원들 절반이상이 독수리 타법을 구사해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또한 절반에 가까운 직원들이 품의서를 계약직 여직원들에게 워드 등으로 대필케 하고 있었다.

영업3팀도 불과 2~3주 전만 해도 OHP를 이용해 회의를 하는 수준이었다.

“진짜 니가 만들었다고?”

“그럼요.”

“이 숫자들은 다 맞는 거지?”

“네. 전부 SAP에서 내려 받은 겁니다.”

독일의 솔루션 기업 SAP가 만든 오대양 푸드의 ERP(전사적자원관리) 시스템. 사람들은 쉽게 SAP이라 불렀다.

장동석은 너무 놀라, 영업3팀의 실적은 보지도 않고 장표의 완성도만 보고 또 봤다.

“팀장님! 저는 이걸 매트릭스(Matrix)라 부릅니다.”

“매트릭스?”

“네. 가로축과 세로축이 교차하는 행렬을 매트릭스라고 하잖습니까. 판매실적과 손익 실적을 한눈에 볼 수 있으니까요.”

“매트릭스라….”

“제가 한달 정도 일해 보니까 선배님들이 대부분 판매만 신경 쓰시더군요. 손익이 더 중요할 수도 있는데.”

그 말은 맞는 말이었다.

영업팀 특성상 손익은 안중에 없고 오로지 누가 판매 1등이고, 누가 꼴등인지만 신경 쓰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런 영업조직에 손익의 중요성을 환기시킬 수 있는 게 바로 윤재가 만든 매트릭스였다.

실제 전생에서 윤재는 엑신(엑셀의 신)이라 불렸고, 2005년 매트릭스 경영의 TF멤버로 활약 했었다.

5년 뒤 자신이 주축멤버로 활약하며 만들었던 매트릭스의 상용화를 5년 앞당긴 것이었다.

“팀장님! 기존에는 손익은 손익대로 다시 작업해야 했습니다. 타 부문 실적 보려면 추가 작업이 필요해 손도 많이 가고 시간도 많이 걸립니다. 그런데 매트릭스 돌리면 20분이면 업데이트 해 볼 수 있습니다.”

“2, 20분이라고? 2시간도 아니고 20분?”

“네. 그 뿐만 아닙니다. 팀별로 부문별로, 본사는 본사대로 실적 확인하는 양식이 전부 제각각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그런데 이 매트릭스는 전국에서 한 사람만 돌려도, 전국이 통일된 보고서를 신속하게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세상에!!!!”

“팀장님 이것도 한번 보십시오.”

윤재는 장팀장의 PC화면에서 미리 보내놓은 매트릭스를 열었다. 클릭 몇 번에 영업3팀의 손익저조 거래처들이 주루룩 나타났다.

“이게 클릭 몇 번에 나온다고?”

“보시다시피요... 우리 것만 아니라 전사 데이터도 맘만 먹으면 다 볼 수 있습니다.”

“엄청 파워풀 하네.”

“하하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36개의 영업팀. 지역부문과 본사의 스탭부서들.

전국에서 대략 40명의 사람이 비슷한 일을 매일 되풀이하고 있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각기 다른 포맷으로!

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일이란 말인가?

장동석도 푸드와 백화점을 전전하며 나름 얼리어댑터로 통했다. 어디 가서 전산 실력으로 꿀리지 않는 사람.

하지만 윤재가 가져온 매트릭스는 장팀장이 보기에 이세상의 것이 아녔다.

윤재는 매크로를 어떻게 돌리면 되는지, 엑셀의 명령어 체계와 프로그래밍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물론 장팀장은 반 정도 밖에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장동석은 매트릭스가 작품이란 걸 알아챌 수준은 됐다.

“생산성 향상에다 인력효율화까지 엄청난 작품이 되겠어.”

“제가 의도한 바도 바로 그것입니다.”

“윤재야. 당장 보고서 만들어라.”

“보고서요?”

“그래. 보고서. 작품을 만들었으면 광을 팔아 야지.”

장동석은 일처리도 빼어났지만, 그것을 포장하는 방법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가만 보고서 제목을 어떻게 하지?”

“팀장님! 이건 어떻습니까? 영업본부 매트릭스 경영을 통한 생산성 향상!”

“그. 그거 좋네. 딱이다. 딱이야!”

장동석이 연속해서 엄지와 중지손가락을 튕겨내며 말했다.

이미 생각해 뒀던 보고서 제목이었지만, 윤재는 마치 방금 생각난 것처럼 얘기했다.

장팀장의 입 꼬리가 갈수록 귀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윤재 이 귀여운 놈. 맘 같아선 업어주고 싶다야.”

“팀장님 돌아보세요. 한번 업히게요.”

“하하. 이 귀여운 놈. 요놈이 어디서 굴러 왔을꼬?”

“어디서 굴러 오긴요. 오대양 백화점에서 왔죠. 팀장님 따라서요!”

“하하. 하하.와하하하하하”

장동석은 업무의 궁상각치우를 아는 사람이었다.

작품은 광을 팔아 작가를 빛내주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었다.

장팀장은 보고 주체를 양상무로 하자고 제안했다.

윗사람을 빛냄으로서 자신도 빛나게 된다는 평범한 진리도 아는 사람이었다.

‘장팀장님은 회사를 위해서 반드시 생육신이 돼야 할 사람이다!’

윤재는 싱글벙글 웃고 있는 장동석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전생에서 장동석은 결국 임원이 되지 못했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는 핸디캡이 있었고, 막판에는 건강 문제가 불거졌었다.

‘하지만 이번 생에는 다를 것이다. 왜냐면 각성한 내가 있으니까.’

윤재는 팀장실을 나오며 빙그레 웃었다.

직장인이 승진하는 제일 확실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자신이 모시는 상사를 더욱 승진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승진은 따라 오는 것이다.

윤재는 전생에서 그 진리를 장동석 팀장에게 배웠었다.

‘회귀의 목표에 중요한 목록을 추가한다. 장동석 팀장 임원 만들기!’

◈          ◈          ◈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난 영업3팀 사무실.

윤재는 자신의 자리에서 뭔가를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마우스를 움직이고, 자판을 두들기는 윤재의 손이 아주 빠르게 움직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양이의 축복 덕분이었다.

“집에 안가냐?”

“네. 팀장님 할 일이 있어서요.”

“어떡할래? 안 바쁘면 한잔 할래?”

“아닙니다. 팀장님. 말씀 하신 보고서 빨리 마무리 해야죠. 보고서 다 끝나면 제가 팀장님께 한잔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럴래? 먼저 간다.”

“네. 팀장님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아 참! 내가 그 얘길 하려고 했던 건데.”

“네. 어떤 말씀이십니까?”

“미안한데. 보고는 내가 직접 해야 할 것 같다.”

이 정도 작품이면 부사장급인 본부장이 피보고자가 된다.

계약직인 윤재에게 보고를 맡길 수 없다는 얘기였다. 윤재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는 계약직으로 2년 5개월을 근무했다.

그동안 혁신방안 제출. 프로젝트. 신제품 아이디어. 혁신활동. 봉사활동에 이르기까지.....

초인적 활동을 펼쳤음에도 절반 이상은 자신이 보고를 하지 못했다.

그는 계약직에 불과했으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윤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예의 그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자식! 안 그래도 미안한데, 그렇게 웃으니 낯 부끄럽다.”

“팀장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제 아이디어를 높이 평가해 주신 것만 해도 감사드립니다.”

“미안하다. 윤재야! 그리고 그렇게 말해 줘 고맙다. 일단 오늘은 먼저 간다.”

“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장동석은 고마움과 미안함이 교차하는 표정을 지어 보인 뒤 퇴근했다.

‘전생에서 제가 정규직이 되도록 애써주신 팀장님께 드리는 선물 2탄이라 생각하십시오! 매트릭스가 팀장님의 위치를 공고히 해 줄 것입니다. 저야 매트릭스 같은 정도의 혁신은 한 달에 하나씩 내놓을 수 있으니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윤재는 장동석의 뒷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자신의 ‘매트릭스’로 장동석이 잘 풀리고, 본부의 생산성이 높아지는 것으로 만족했다.

윤재는 다시 PC로 시선을 돌려 일에 몰두했다.

폴더명! ‘병아리 프로젝트.’

‘하하하. 이쯤 되면 포텐셜이 있는 계약직사원으로 각인됐으니, 이제 돈을 좀 벌어볼까?’

윤재는 윈도우 화면의 폴더를 클릭했다. 파일명이 나타났다.

[안다 박사의 엑셀 무작정 따라 하기! ]

윤재는 파워포인트를 능숙하게 편집해 나갔다.

며칠 전 대학에서 강간미수범들을 혼내 줄 때 윤재는 자신의 스피드가 엄청 빨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기하게도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회사 업무 처리속도 역시 빨라진단 말이지. 이거 완전 대박 아닌가? 하하하.’

윤재는 봉지커피를 마시며 화면에 집중했다.

화면에는 47/50 이라는 쪽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일단은 50페이지만 만들면 된다.’

40분 후 윤재는 컴퓨터의 엔터키를 힘차게 누른 뒤 전원을 껐다.

‘이걸로 우선 급전을 좀 만들 수 있을 거다.’

전생에서 엑신으로 통했던 윤재.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재테크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채 오로지 워커홀릭으로 살았기에 가능했던 일 중의 하나였다.

전생에서 그는 MOS(Macrosoft Office specialist) 마스터 자격 보유자였다.

그 뿐 아니었다. 맥의 키노트를 기막히게 다뤘으며, 프레지, 포토샵 등을 막힘없이 다뤘다.

‘안다 박사 시리즈로 오피스 3총사를 출시하면 최소 1~2억 정도는 벌 수 있을 것이다. 그 돈으로 차도 좀 사고, 재테크로 불려서 서점을 되찾는 거다.’

생각이 서점에 이르자 자연스럽게 조혜진이 떠올랐다.

‘그래. 무일푼에 계약직이... 무슨 연애냐. 나중에 잘 풀리고 돈도 적당히 번 뒤에 생각해도 늦지 않아. 오대양 최초의 30대 임원! 여자는 가만있어도 줄을 설 것이다. 하하하.’

누군가 얘기 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회귀라는 기연과 고양이의 선물을 잘 이용한다면, 전생보다 훨씬 멋있는 인생을 살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연애! 그건 내가 해야 할 수많은 일들 중 하나일 뿐이야.’

윤재의 손가락이 4배속 화면처럼 PC자판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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