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3화 (3/196)

신분 상승

“댄스 수신호를 하자고?”

“네, 과장님!”

일개 아르바이트생이 백화점 관리과장에게 제안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

대부분 알바들은 일주일에 한번 있는 조회시간을 교장선생 훈화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윤재는 장과장에게 댄스 수신호를 제안했던 것이다.

“주말이나 세일 때 보면 오후 5시에서 6시 출차 시간이 가장 붐비는 시간대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그때 고객 서비스 개념으로 저희가 팀을 이뤄 댄스 수신호를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재미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음.... 댄스 수신호라?”

장과장은 잠시 고민했다.

‘백화점의 품격과 고객들의 재미중에서 뭘 택하느냐의 문제인데?’

장동석 과장의 고민 포인트였다.

얼마 안 돼 장과장이 입을 열었다.

“그때가 수신호 팀도 하루 중 가장 힘들 때 같은데, 댄스를 혼자 하면 볼품없지 않을까?”

“최소한 2명 아니면 3명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쉬는 시간은 어떻게 하고?”

“어차피 퇴근 시간도 가까워질 무렵이니, 그때는 안 쉬고 다 같이 일하는 거죠!”

“???”

장과장은 수신호 팀 조장을 쳐다봤다.

쉬는 시간을 자진 반납하겠다는 알바라니!!!!

“조장? 합의된 거야?”

조장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끼리는 이미 합의를 마쳤습니다.”

윤재가 힘주어 답했다.

그러자 조장을 제외한 나머지 3명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윤재는 동료들을 한번 돌아봤다. 뭔가를 다짐받겠다는 생각인 것 같았다.

“대신 저희도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내가 그런 것도 들어줘야 하는 거냐?”

“네! 지난 조회 때 창진이 자르겠다고 했던 거 철회해 주십시오!”

“허~ 이런 당돌한 녀석을 봤나?”

“창진이도 다시는 과장님 눈 밖에 나는 짓 안할 겁니다. 그 증표로 댄스 수신호를 하겠다는 겁니다. 창진아 맞지?”

“예! 에헤헤 넵!”

말꼬리를 흐렸지만 창진이도 윤재의 얘기에 긍정을 표했다.

“호! 흥미로운 제안이긴 하군. 좋아 생각해 보지.”

“하나 더 있습니다.”

“야! 알바가 뭔 제안이 이리 까다로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장동석의 눈은 웃고 있었다.

장동석을 어려워하며, 교장 훈화 정도로 따분해 하는 애들에 비해 적극적인 윤재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저희에게 매달 10만원만 지원해 주십시오. 인당 2만원 밖에 안 됩니다.”

“10만원?”

“네. 뭐 수당이라 생각하시고 돈으로 주셔도 되고, 법인카드 주셔도 됩니다.”

“음….”

“저희는 한 달에 한번 씩 회식비용 벌고, 백화점은 서비스 개선돼 좋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 아닐까요?”

“누이 좋고 매부 좋고라!!”

당돌하다면 당돌한 제안이었다.

만약 장동석이 꼰대형 책임자였다면 윤재는 혼쭐이 났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장동석은 귀가 열린 사람이었다. 그리고 귀만큼 생각도 트인 사람이었다.

‘이 녀석이 느닷없는 댄스 수신호를 제안하더니, 다 꿍꿍이가 있었군. 그래 윤재 저 녀석 얘기처럼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장동석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번 주하고 다음 주 두 번 시험 삼아 해보고 반응 좋으면 허락하마. 니들이 잘만 해주면 10만원이 대수겠니?”

“하하하. 믿어 주십시오.”

“2주 동안 하는 것 보고, 니들이 잘하고 고객들 반응도 좋다면 10만원 주지. 그리고 창진이 자르겠다고 했던 것도 철회하마. 대신 창진이 쟤 어영부영하고 복장 똑바로 안 입고 다니면 바로 알바 채용 공고 내겠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감사합니다. 과장님!”

장동석은 당시를 회상했다.

‘그 날 윤재 저 놈이 뻣뻣한 창진이 고개를 눌러 인사하게 만들었었지. 나이에 비해 철이 든 놈이야.’

그는 한참동안 윤재 일행의 댄스 수신호를 지켜보다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난 놈은 난 놈인데…. 고졸이라니. 아까운 놈이다.’

경적소리와 고함소리가 난무하던 오후 5시대의 출차시간. 윤재가 제안한 댄스 수신호 이후 출차가 훨씬 부드러워진 것은 사실이었다.

민원 발생률이 절반가량 낮아진 게 대표적 증거였다.

장과장은 흐뭇한 표정으로 주머니 속 담배갑을 더듬었다.

◈          ◈          ◈

2000년 8월 12일. 오대양 백화점 남자 수신호 휴게실.

“휴가를 간다고? 야 알바가 뭔 휴가냐?”

다섯 명 남자 수신호 팀 조장을 맡고 있는 신장식.

장식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2000년 당시에 알바들에게 휴가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다.

“형! 저 사실 내일 회사 입사 면접 보기로 했어요.”

“입사면접을 본다고? 어디? 어디 보는데?”

껑중한 키에 괜찮은 용모. 20년 전 그대로인 장식의 얼굴이 다시금 윤재에게 과거로 돌아왔음을 상기시켰다.

윤재는 회귀 직전 장례식장에서 그를 만났었다.

그 때 조장의 나이 48살! 머리카락이 채 절반도 남아있지 않았던 신장식!

반면 눈앞에 서 있는 신장식은 28살의 파릇파릇한 젊은이었다. 긴 가뭄 뒤의 비를 만난 것처럼 장식이 반가웠다.

“사실 장과장님이 오대양푸드 계약직에 추천해 주셨습니다.”

“장과장님이?”

“네, 2주 정도 됐습니다.”

“장과장님 서운하네. 조장인 나는 추천 안 해주고 말이야….”

“형님은 대학생인데 계약직 추천이 말이 안 되죠. 정규직 채용이면 모를까?”

“그. 그런가? 근데 정과장님도 그렇다. 너한테도 정규직을 추천해 줘야지. 계약직이 뭐냐? 계약직이! 월급은 얼마나 준다니?”

“정확히는 몰라도 150만 원 정도 된다고 하더군요.”

“오! 그래? 그래도 여기보다 거의 따블이네.”

“그쵸? 완전 대박이지 뭐에요.”

미래의 기억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윤재.

대박이라 말했지만 피식 하고 웃을 뻔 했다.

임원 시절에 자신이 받았던 급여는 대략 월 천오백만원 수준이었으니까!

“나도 이제 곧 복학이라 너한테 조장 물려주고 수신호 관두려고 했는데.”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형!”

“아냐. 너는 조장되고도 남지. 일도 잘하고 아이디어도 좋고.”

“제가 뭐….”

“니 덕에 나도 나중에 회사 입사할 때 이력서에 쓸 만한 거 생겼잖아. 오대양백화점 댄스 수신호 팀 조장! 이런 게 면접관들 질문을 유발하기 좋은 아이템이거든….”

조장은 마치 자신이 면접의 달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면접에 대한 노하우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놨다.

졸업 직전 3~4번 면접에서 미역국 마신 장식은 도피처로 백화점 알바를 하고 있었다.

“근데 너 오대양푸드 가서 계약직으로 있을 생각 말고 더 좋은 직장 알아봐. 대학도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했잖아.”

“그건 그렇지만 일단 돈을 더 벌어야 해요. 해야 할 일도 있고….”

“그래. 니가 겨우 계약직이라니. 하여튼 뭘 해도 넌 잘 할 거다.”

“고맙습니다. 형! 면접 잘 볼게요.”

“그런데, 거기 합격하면 여기는 언제까지 나오냐?”

“합격하면 8월 28일부터 그쪽으로 출근하라고 하대요.”

“뭐야? 그럼 우리 수신호 팀 두명이 빠지는 거야? 이제 너 볼 날도 며칠 안 남았구나!”

“합격하면요.....”

“세상에 너 같은 인재를 정규직도 아니고, 계약직으로 안 뽑아주는 회사는 망해야 해. 망해도 싸고말고.”

“망하면 안 되죠! 저 월급 줄 회사인데!”

“그게 그렇게 되냐? 하하하. 나 막타임 뛰고 오마.”

신장식이 탑모자를 쓰고 휴게실을 떠났다.

조장이 말한 오대양이 망한다는 말.

그 말이 윤재에게 전생의 기억을 다시 떠 올리게 했다.

‘회귀했는데도 겨우 알바지만, 지치지 말고 걸어 나가자! 실망할 필요도 너무 낙관할 필요도 없다. 아직 시간은 충분하니까!’

현실은 여전히 월급 75만원의 백화점 알바!

그럼에도 윤재는 긍정의 에너지가 더 큰 남자였다.

◈          ◈          ◈

윤재는 백화점 제복을 갈아입으며 퇴근을 준비했다. 8월의 땡볕을 받으면서도 웃으며 일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그렇게 흘러가 있었다.

평소 같으면 일 끝나기 무섭게 휴게실로 돌아왔을 동료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 사람들이 담배라도 피우러 갔나?’

그 때 수신호 동료들이 손에 뭔가를 들고 휴게실로 들어왔다.

“형! 이게 뭐에요?”

“뭐긴 임마. 너한테 맞을까 모르겠다. 사이즈 100 맞지?”

“형!”

“야! 너 면접 본대서 우리가 4만원씩 걷어서 백화점 이벤트 코너에서 싼 걸로 하나 샀다.”

“케헤. 형! 그래도 장식이 형이 어른이라고 2만원 더 냈어!”

“창진아! 그런 얘기는 뭐 하러 하냐? 20만원 더 낸 것도 아니고. 하여튼 니가 면접 본다는데 그냥 넘어가기 그래서.”

“맞아. 윤재형! 에헷! 내일 면접 보는데 양복 하나 있어야 할 거 아네요? 으하! Vasso에서 제일~ 제일 싼 걸로 하나 골랐어요.”

“제일 싼 건 아니지? 두 번째로 쌌잖아?”

“데헷 형님은.... 업어 치나 메치나 지? 뭘 따져요?”

조장 장식과 창진이 티키타가를 했다.

20년 만에 다시 보는 그들의 정겨운 모습이었다.

창진은 윤재에게 양복이 담긴 꾸러미를 건넸다.

“닥스나 로가디스를 사줬어야 하는데....”

장식이 멋쩍은 미소로 말을 흐렸다.

“윤재형! 알죠? 에헷! 우리 맘은 이미 닥스야! 닥스라니까!”

갑작스런 과거 회귀.

그리고 옛 동료들의 양복 선물.

고마운 일이었다.

부모님의 갑작스런 죽음. 대학자퇴! 군 입대 후 제대까지.....

몇 년을 외롭게 지내야 했던 윤재.

그에게 수신호 동료들은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다들 고마워요. 이미 제겐 명품 양복이나 다름없어요.”

“케헤! 윤재형! 우리가 남이요? 형덕에 매달 맥주 얻어먹었고, 형 덕분에 신나게 근무했는데! 우리도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지.”

“창진아! 넌 양심도 없냐? 윤재 때문에 안 짤리고 매달 월급 받고 있잖아. 그 얘기를 먼저 해야지.”

“에힛. 형님은 누가 그거 고맙게 생각 안할까봐 아픈 얘길 꺼내고 그래요?”

“아이고 말다툼을 하시고 그래! 형님! 애들아! 고마워요. 고마워! 내일 꼭 면접 잘 볼게요.”

“그래. 날도 더운데 우리 다 같이 맥주나 한잔 하러 가자. 윤재 면접 보는 기념으로 내가 쏠게!”

“아닙니다. 양복 선물도 받았는데 제가 사야죠!”

◈          ◈          ◈

이튿날!

광주 금남로에 위치한 오대양푸드 호남본부!

호남본부장실이라고 적혀 있는 대기실.

6명의 사내가 번호표를 달고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윤재의 번호는 11번.

대기업이라 그런지 계약직 채용에 11명의 지원자가 몰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원 추천으로 면접장에 온 사람들이었다.

윤재는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며 며칠 전 장동석 과장이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력서 잘 썼더라. 짚어준 포인트를 잘 살렸어.”

“감사합니다. 과장님!”

“대학 중퇴한 사연이나, 알바 경험들 물어볼 가능성이 커. 대답 잘 하고.”

“네, 알겠습니다.”

“면접위원으로는 못 들어가도 응원은 하마!”

“네. 잘 해 보겠습니다.”

“너는 잘할 거라 믿는다. 자신감 잃지 말고.”

자신이 쓴 이력서 내용을 복기했다.

전생에서도 윤재는 계약직으로 입사해 임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의 경험과 20년간의 회사 생활 노하우를 중간 중간 녹여낸 자기 소개서.

이곳 면접관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할 것이었다.

‘다시 이곳에서 시작하지만, 좀 더 빨리 힘을 키워야 한다.’

윤재는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며 전생의 기억을 되짚어 봤다.

‘전생의 20여년 회사생활에 분명 성과도 있었고 한계도 있었다. 모두 극복해 회사를 건강하게 만드는 거다!’

고졸출신!

전생에서 20년을 따라 다녔던 윤재의 족쇄!

임원이 돼 고졸신화를 이루겠다는 목표를 달성했지만, 일에 미쳐 살았던 전생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윤재의 번호가 호출됐다.

“10번 지원자! 11번 지원자 들어가십시오.”

3명씩 3개조가 면접을 마쳤고, 마지막 남은 사람은 10번과 윤재. 두 명이 면접을 보게 되면 세 명이 볼 때 보다 개인 질문 시간이 늘어난다. 윤재에겐 좋은 시그널이었다.

회의실에는 다섯 명의 중년 남성들이 앉아 있었다.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들!

윤재는 그들이 누구인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다섯 명 중 2020년까지 회사에 남아 있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지만, 그들은 모두 전생에서 수년간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었다.

‘하하하. 양광수 상무가 뭘 좋아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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