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1화 고인물엔딩.
육왕의 결투장의 난이도를 따지자면 칠왕의 지하신전과 비교해서 엄청나게 높은 수준은 아니었다.
중간보스들이 더 나오고 싸우다가 그 충격으로 지하가 드러나 육왕까지 가는 식이었다.
해외에서 먼저 소재가 발견되었지만, 공략을 먼저 하면 될 뿐이다.
오랜만에 잠을 포기하고 패턴 하나하나를 파악하며 진행했다.
체감한 바로는 나처럼 미리 공략을 일정부분 끝내고 올리거나 공략을 다 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히든레코드에 내가 진행한 공략을 슬쩍 풀었다
먼저 던전의 소재를 푼 이들에게서 다른 반응이 없었기에 내 예측이 맞았던 것 같다.
오 일차가 되고 드디어 육왕과 보스전을 치를 수 있었다.
육왕은 칠왕과는 결기 다른 강함이었다. 난해한 스킬과 패턴보다는 단순했고 직선적인 공격이 많았다.
문제는 말이 직선이지 공격범위가 너무 넓어서 처음 접했을 때는 식겁했다는 거다.
칠왕 때와는 달리 어설프게 거리를 조절하다가 죽기 십상이었다. 그래도 천장에서 공격이 떨어지는 피의 칼날과 같은 패턴이 없었기에 위급할 때는 공중에 올라 피할 수는 있었다.
물론 그것도 1페이즈 때의 이야기이지 2페이즈 때는 불가능했다.
육왕이 거인족이라 손을 뻗으면 그대로 몸이 터져나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거인족이라고 하더라도 아래를 파고들 수 없다.
제작사놈들이 얼마나 악랄한지 육왕이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기본적으로 충격파로 인한 범위공격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데미지는 둘째치고 거기에 맞는 순간 이동속도가 느려져서 탱커들은 아무것도 못하고 죽겠구나 싶을 정도였다.
나조차도 황금추적자로 부터 시작된 스킬조합표로 필요한 스킬들을 만들어서 계속 깨져야만 했을 정도니까.
육왕의 공략은 무려 삼일동안이나 매달리며 깨냈다. 이때는 어쩔 수 없이 칠죄종의 스킬도 써야만 했다.
히든레코드에 자세한 공략 정보는 올릴 수 없었다. 패턴만 정리해서 올린 다음에 지친 심신의 회복을 위해 본가로 내려가 쉬기로 했다.
찬바람이 불어오는 겨울이지만 옥탑방과 달리 본가는 따스했다.
길거리를 거니다 느끼는 것은 고향친구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들은 결혼을 하고 일찍 간 놈은 애도 있을 나이인데 혼자라는 것은 묘한 씁쓸함이 남을 뿐이었다.
쇼파에 늘어져 잠을 자고 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두 눈이 번쩍 뜨여졌다.
"아들. 오래 기다렸니?"
"넌 운동은 좀 하냐? 어째 살만 빠지고 배만 나온 것 같다?"
"……."
퇴근하고 돌아온 어머니는 살가운 말을 해주셨지만 아버지는 양심을 살짝 찌르며 들어 오셨다.
"오늘 너희 엄마 힘드니까 배달 좀 시키자."
"뭐 드실레요? 피자? 치킨?"
"아구찜에 소주지."
"소주 사올까요?"
"냉장고에 넉넉하다."
역시 아버지다.
키득키득 웃으며 배달어플에서 평점이 제일 높은 곳에서 시켰다.
리뷰를 쓰면 새우튀김도 준다고 하니 이건 무조건이다.
음식을 차리고 술이 몇 잔 들어가자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도 뭘 하고 있는지 말안해줄거냐?"
술김에서인지 아버지의 이번 물음에는 반드시 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요."
"…이때까지 그걸로 했다고?"
"예. 게임요. 그냥 오래했고 많이했어요."
"……."
예상 밖의 말이었던 것일까.
아버지는 입을 다무셨고 어머니는 호기심을 드러냈다.
"너도 그 프로게이머인가 그거니? 대회도 나가고?"
"아뇨. 전 그렇게 잘 하지 못해요."
프로게이머는 젊음과 재능을 누구보다 짧은 시간에 불태우는 자리였다.
MMOPRG만 하는 나로서는 감히 엄두도 내본 적이 없었다.
"게임하는 것은 좀 이상하게 보이세요?"
"나쁜 짓은 안 했으면 된 거다."
"우리는 네가 공부도 안 해서 뭐먹고 사나 걱정했잖니."
두 분이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을 보니 입맛만 다실뿐이다.
실제로 게임만 하던 집중력을 공부에도 쏟을 수 있었다면 동창회에서 자랑 좀 할 수 있는 자랑스러운 아들이 될 수 있었을 테니까.
"게임에서 얻은 아이템 팔았어요."
"그걸로 먹고 살았다고?"
"네가 그래서……."
이어진 답변에는 표정이 좋지 않으셨다.
내 건강상태가 그만큼 나빠보인 탓이다.
"얼마 전까지 레이드 뛰어서 그래요. 좀 큰 건수가 있어서요."
엘리멘탈 소울2의 이야기를 해도 잘 모르시니 꺼낼 수 없지만, 지금 나는 어깨를 당당하게 펴고 다닐 수 있을 정도의 위치기는 했다.
게임으로 먹고 사는 인생에서 내 삶의 대부분에 부끄러워할 수 없었다.
"전에 뉴스 보니까 짱짱인가 뭐시긴가가 몇 억 벌었다던데. 네가 그 일에 만족하면 그거라도 열심히 해라."
"언제까지 게임만 할 수 없겠지만, 우리 가게도 있으니까 하고 싶은 만큼 해보렴."
"……."
예전의 우려가 거짓말처럼 두 분은 오히려 나를 걱정해주고 계셨다. 내심 그딴 것 왜 하냐. 지금이라도 기술을 배우라고 하실 줄 알았기에 절로 숙연해졌다.
"…저기 제가 전에 어떤 일이 있었나 말씀드린다고 했잖아요."
지금이라면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서울로 올라가 연락이 끊겼던 지난날들에 대해 조금씩 끄집어냈다.
천운이 내린 그 이후부터 악몽과 같은 나날들을 지나 다시 돌아온 지금까지 이야기는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고 듬성듬성 구멍이 비어져있었지만 두 분은 아무말 없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혼자서 힘들었겠구나. 아들."
"수고 많았다. 고생했어. 지금이라도 말해주니까 고맙구나."
"……."
어쩌면 별 것도 아닌 말이 내 가슴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나도 모르게 넘쳐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고 물었다.
"실망하지 않으셨어요? 혼내고 싶으셨을 텐데."
"내 아들인데 왜 욕을 해. 그렇게 했으면 너 스스로 가장 후회하고 있을 텐데."
"앞으로 더 잘하면 되잖니. 괜찮단다. 오랫동안 혼자 참느라 너무 힘들었겠구나."
두 분의 말에 가슴에 남은 응어리가 녹는 느낌이었다.
이 뒤에는 긴장의 끈이 풀려서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숙취에 어지러운 속을 풀어내는 북어국이 끓여져있음에 감사했다.
"…벌 수 있을 때 벌자."
내가 금수저인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환경을 바꿔보려고 남들처럼 치열하게 살아본 것도 아니다.
잠깐 주어진 기회를 악몽으로 바꿀 정도로 바보 같은 선택만 했었다.
이번이 인생의 마지막 기회다.
지금 주어진 것을 놓칠 수 없다.
"너 그럼 모아둔 돈은 있냐? 용돈이라도 줄까?"
"아들. 힘들면 내려와서 살아."
문제라면 내 사정을 털어놓은 후에 늘어난 부모님의 걱정 정도다.
"돈은 많아요. 한 달에 제법 들어와서요."
내 수익과 통장에 대한 것을 말하니 부모님은 놀랐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셨다.
게임으로 인생이 망가진다는 뉴스만 들었지 얼마만큼의 수익을 벌 수 있는지는 잘 모르셨나보다.
"그러니까 돈은 걱정마세요. 오히려 필요하시면 보태드릴 수 있어요."
가맹점은 꽤나 잘 되고 있지만 최근에 자신의 이름으로 된 가게에 대한 것을 내고 싶다는 말도 지나가듯이 하셨다.
부모님이 필요하시면 통장에 있는 돈은 탈탈 털어놓을 자신도 있었다.
"너 써라. 네 돈은 아껴써."
"그럼그럼."
물론 그때마다 부모님은 손사래를 치셨다. 그게 참 두 분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저런 분들 밑에서 나처럼 멍청하게 산 놈이 나왔을까 싶을 정도다.
며칠이나 본가에 머물러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내 직업도 신경은 써야만 했다.
다시 돌아온 옥탑방은 유난히 춥고 좁아보였다.
인테리어라도 신경을 써야할까. 작은 옷장과 매트리스 위의 이불, VR게임기계와 컴퓨터가 전부였으니까.
이번에도 두 손 무겁게 싸온 어머니의 반찬에 햇반을 먹으며 한끼를 넘겼다.
본가에 있는 동안에는 아예 스마트폰도 건드리지 않았으니 뒤늦게나마 게임소식들을 살폈다.
그간의 패치가 제법 활발해졌다.
여러 오류들과 밸런스가 수정이 되었다. 그중에 하나가 탱커들의 이동속도와 회피율이 상향소식이 눈길을 끌었다. 이로서 칠왕의 지하신전이나 육왕의 결투장에서 랭커들이 무기력하게 죽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나에게 적용되는 것이라면 슬프게도 스피어마스터의 소울과 함께 건맨의 소울의 확률이 하향조정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보스전에서 강력한 딜량을 자랑할 수 있는 수단이 사라졌으니 나에게는 이득이라고 할 수 없었다.
"더러운 게임 같으니."
어쩐지 날 저격하는 것 같다.
밸런스 패치의 희생양이 된 것 같지만 사실 어쩔 수 없구나 싶기는 했다.
불사자라는 특별한 직업이 있다고 하더라도 현 컨텐츠의 최고 난이도의 던전을 혼자서 공략하고 다니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기는 했다.
이쪽 업계에 관련된 소식이라면 불법프로그램을 쓴 유저들의 아이디와 닉네임을 박제했다는 거다.
모두 계정정지처분을 받았는데 그 면면을 보면 꽤나 익숙한 이들이 많았다.
"골드캐시였던 애들은 전멸이네."
황금추적자는 물론 그와 함께 했었던 놈들이 모두 계정정지가 되었다. 그들만이 아니라 업계사람들이 상당수가 있었는데 커뮤니티에 나온 썰로는 황금추적자가 만든 프로그램이 시중에 풀렸다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좋은 케이스네."
대략 백 명이 넘게 날아갔다.
다른 이의 계정이라도 구매해서 게임을 할 이들이겠지만, 저렇게 한 번 모가지가 날아가야 알아서 사릴 테니까.
아이템 시세는 알아서 조정이 되겠지만 아직도 높게 책정된 상황이다.
지금 꿀을 빨 수 있을 때 배를 제대로 채워야만 한다.
다시 게임에 들어가 칠왕의 지하신전으로 몸을 풀고 육왕의 결투장을 돌았다.
하루 종일 투자해서 겨우 두 번째 공략을 끝내니 앞에는 열파창이 있었다.
"어쩐 일이죠?"
"요새 안 보여서 게임 접은 줄 알았네. 너 용케 안 짤렸더라?"
"그런 프로그램 안 쓰니까요."
"미친 놈. 진짜 세네."
열파창은 투덜거리며 같이 온 파티와 함께 육왕의 결투장에 입성했다.
"와. 재는 안 접혔네?"
"또 살아있는 거야?"
"저 새끼는 왜 강하지?"
날 알아본 유저들은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며칠 모습을 감췄으니 나도 정지당한 줄 알았던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다.
누구보다 정직하게 게임을 한 입장에서는 조금 서럽기는 하다.
"거기서 뭐해요?"
"뜨려고 왔다."
"며칠 쉬었지? 덤벼."
독고무적과 흑군. 두 사람 이외에도 최상위 랭커들이 내 앞을 가로 막고 있었다.
절반 이상이 복수가 길드 소속이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알짜배기만 모았다. 과연 독고무적과 흑군이다 싶었다.
설립초기이지만 저들에게 지금처럼 좋은 기회는 없을 것이다.
"일대일?"
"물론."
"견적 좀 내자고."
둘은 먼저 결투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하하하!"
전작보다도 더 게임에 열심히 하는 저 아저씨들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템팔이라 불리는 이 짓을 얼마나 더 할 수 있을까 우려했던 것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다. 그저 생활이 된 이 공간에서 더 재미있는 것을 추구할 뿐이다.
"다 같이 덤벼요."
그 순수한 호의에 자신감으로 부딪혔다.
솔직히 이 말을 하면 머뭇거리거나 화를 낼 줄 알았지만, 적들은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덤벼들었다.
오크펠슨 한복판에서 펼쳐진 대혈투.
주변의 유저들이 모두 모여 구경을 하는 탓에 렉이 걸려 버벅였지만 게의치 않고 싸웠다.
스무 명의 랭커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를 파훼하기 위한 공략을 철저히 준비를 한 덕분에 예상보다 많이 죽어나갔다.
쉴드가 채워지지 않아서 초반에 더 죽은 것도 있겠지만, 그냥 적들이 게임 자체를 잘한 덕분이었다.
결국 레벨이 1씩 다운되자 지금은 졌다며 그들은 아쉬움과 함께 물러났다.
저 아쉬움도 처음에 나를 상대로 우위를 점한 덕분일 것이다.
"아직 게임 재밌네."
명실공히 게임최강자의 자리에 서고 혹시 외로움이 찾아올까 싶었지만 그럴 일도 없을 것 같다.
당장에 저 네임드 유저들이 나를 이기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으니까.
부모님이 걱정하던 건강 때문에라도 이때까지처럼 미친 듯이 게임만 할 수 없겠지만, 지금 허락되는 선에서는 후회없이 즐길 것이다.
짧은 인생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 가치가 있는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