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1화 고인물은순회중이다.
벽을 질주하며 연기 속을 빠져나왔다.
2층의 적들은 모두 미다스의 방패와 창 소속이었다. 천장을 밟는 속도는 느리지 않았으나 거리가 가까워 몸을 두드렸다.
콰아아앙!
그걸 무시하고 천장에 발을 떼자마자 지면강타를 사용했다.
2층의 절반에 퍼진 충격파에 적의 삼분의 이가 사라졌다.
"이 괴물 같은 놈!"
"시, 시간이라도 벌어!"
방금 전가지 나름 호기롭던 적들의 기세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누구나 그렇지만 직접 맞아 보기 전에는 얼마나 아픈지 모른다.
아니. 아파할 틈도 없다.
랭커들도 어지간해서 한 번에 죽는 내 공격을 겨우 이런 놈들이 감당할 수 없으니까.
놈들에게 다가가는 동안 공격을 맞아도 상관이 없었다. 그보다 더 강한 충격을 주어 더 많은 쉴드를 채우게 되니까.
"1층부터 부술 것을 그랬나."
미다스의 왼손 길드건물은 1층에 대장간이 있다. 거기에 있는 도구들은 모두 최상급이었다. 그것들을 박살 냈으면 생산에 큰 차질을 입을 터였다.
"함정 다 바닥에 깔고 저쪽의 물건들 다 주워."
[키키킥! 알겠다!]
1층에 적들이 새로 들어왔지만 수가 부족한지 단번에 덤벼들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2층에 쌓인 것들을 가리켰다.
황금추적자가 생산하는 제작아이템으로 70레벨대의 유저들에게 유용한 장비들이였다.
[다 찼어!]
"이제 내놔."
임프가 배낭에 넣을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다. 그걸 다시 내 인벤토리에 털어놓을 때였다.
"다 모였지? 지금 가면 되는 거야?"
"3층에는 보내지마!"
"…고마운 말인데."
밑에서 자기들끼리 떠드는 소리에 귀가 번뜩였다.
[이면의 그림자를 사용합니다.]
[결사항전의 영역을 사용합니다.]
"대기해서 올라오면 죽여."
3층을 창고로 쓰는 것 같으니 절대 넘겨들을 수 없었다.
이면의 그림자들을 2층에 배치했으니 곧바로 3층으로 올라갔다.
3층은 이때까지와 달리 철문으로 굳게 닫혀 있었다. 자물쇠 따위가 없이 검으로 두들겨서 억지로 열어 버렸다.
콰아아아앙!
[플레이어가 상태이상 기절에 걸렸습니다.]
순간 강한 충격과 함께 몸에 벽에 처박혔다. 하필이면 기절 때문에 몸도 움직여지지도 않았다.
먼지구름 속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옥귀.
랭커 51위로 78레벨의 대마법사였다.
대마법사들이 가진 여러 마법 중에서도 유독 한 방의 파괴력을 중시하는 편이었다.
놈이 소속된 길드는 마계.
내가 알기로는 황금추적자와 결탁한 길드는 아니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놈이 움직였다면 마계 길드도 함께한다는 거다.
설마 마계 길드가 나타날 줄은 몰랐다.
다른 길드처럼 커뮤니티 여론에 흔들리지도 않고 특히 손익을 더 따지는 이들이니 황금추적자가 제대로 찔러준 것 같다.
"잘 가라. 벌거숭이."
지옥귀의 뒤로 투귀가 나타났다.
마계의 길드장인 그는 머슬맨이라는 직업답게 거대한 육신을 자랑하고 있었다.
꽈아아악!
"이대로 죽어라."
투귀가 내 몸을 끌어안았다. 머슬맨의 주요 스킬 중 하나인 데스허그로 상대에게 강력한 충격을 줌과 동시에 마비도 준다.
즉, 이 스킬에 잡히면 끝난다고 봐야만 한다.
[상대가 공포에 걸렸습니다.]
"가, 갑자기 이게 뭐야!"
강자의 오오라가 여기서 발동을 했다.
행운의 여신이 나를 원했는지 그 많은 상태이상 중에서 공포가 걸렸다.
투귀가 날 놓치고 허우적거렸다. 놈의 몸뚱이에 그대로 본 브레이커를 박았다.
"커허억!"
"역시 단단한 놈이네."
머슬러는 방어력은 몰라도 체력이 가장 높은 직업군이다. 그 명성답게 체력의 40%나 남아 있었다.
하지만 물러나는 몸뚱이를 찌르고 베니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 공격해!"
"…까다롭게."
근거리에서 지옥귀의 스킬을 뚫고 지나갈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계단으로 물러났다.
콰앙! 쾅!
내 뒤로 지옥귀의 스킬이 작렬했다.
3층에 대기 중이던 다른 마계 길드원들이 황급히 나를 쫓았다.
투귀의 데스허그에게 바로 죽지 않았더라도 저놈들이 내 등을 헤집었을 거다.
"3층의 신호다! 올라가!"
"썩이나감을 죽여!"
1층에서 대기하고 있던 적들이 동시에 들이쳤다. 좁은 계단을 뛰어오르던 적들은 차례대로 이면의 그림자의 공격에 난도질 당했다.
1층의 적들은 비교적 저렙이라 이면의 그림자 하나가 논다. 놈에게는 곧바로 3층의 공격을 명했다.
퍼벅! 퍼벅!
이면의 그림자가 서로 등을 마주하고 1층과 3층의 적들을 공격했다.
"도대체 무슨 데미지야!"
지옥귀는 그걸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날 죽일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놓친 것은 놈도 이미 알 것이다.
이면의 그림자가 적들을 막아내다 사라질 때.
"좋아. 이제 놈은 혼자……!"
시공간이동자의 블링크로 3층에 이동했다. 코앞에서 명령을 내리던 지옥귀는 명령을 잇기도 전에 내 검에 숨통이 끊어졌다.
나머지 3층의 놈들은 준랭커수준인지라 처리하는 것에 오래 걸리지 않았다.
[등가교환의 배리어를 사용합니다.]
"여이가 노다지네."
3층은 미스릴 주괴와 마석 등의 고급 재료가 산적해 있었다. 왜 이곳이 중요한 것인지 알 것 같다.
인벤토리가 터질 정도로 그 모든 것들을 쓸어 담고 옥상으로 튀었다.
"여기에 있다!"
"놈이 나타났다!"
미다스의 왼손 길드건물로 나오자 채널은 9로 변해 있었다. 거기에서 대기 중이던 미다스의 창 길드원이 날 발견해 공격했지만 공중으로 튀어 놈들의 손에 벗어났다.
"잘 먹고 간다고 전해주라."
3층에 있던 아이템 중 10분의 1도 담지 못했지만, 그게 어디인가.
미다스의 왼손과 오른손 길드에 자신과 협력한 길드인원들을 도움을 제대로 구하지 못한 황금추적자의 잘못이다.
놈이 귀중하게 모은 것들이 내 손에 들어온 것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길드건물에 저 많은 아이템을 모두 옮기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썩이나감 : 미다스의 왼손에서 얻은 물건 목록입니다. PK 풀리는 대로 보내죠.]
[빨간약파란약 : 활약 잘 봤습니다. 가격은 톡톡히 쳐드리죠.]
빨간약파란약도 장물이라고 마다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경쟁업체의 것이니 더 환영을 할 터였다.
[빨간약파란약 : 그러면 PK가 끝날 때까지는 쉬실 겁니까?]
[썩이나감 : 예. 어차피 대기를 타면 지치는 것은 놈들이니까요.]
[빨간약파란약 : 물건을 보내주신 뒤에 적들을 브리핑해드리겠습니다.]
[썩이나감 : 좋네요.]
더 나아가 실시간으로 정보까지 준다고 하니 나 또한 마다할 수 없었다.
* * *
"빌어먹을. 여길 왜 털리냐고!"
미다스의 왼손 길드건물로 온 황금추적자는 화를 참지 못하고 벽을 후려쳤다.
마계 길드는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또한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도 않았다.
지옥귀와 투귀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실제로 썩이나감이 위기에 몰아넣었다. 다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한 번에 뒤집혀질 줄을 누가 알았을까.
"놈에게 이상한 스킬이 있다. 공격 중에 공포에 걸렸다고."
"……."
"그걸 알았다면 그렇게 처리 안 했다고."
투덜거리는 투귀의 말에 황금추적자도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몇 개의 상태이상이 걸리는 거야.'
황금추적자도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었다.
썩이나감에게 공격을 맞춘 이들 중 간혹 상태이상에 걸리는 경우가 있었다.
문제는 특정한 상태이상의 종류가 너무나 다양했다는 거다.
투귀처럼 공포에 걸리는 이도 있었고 뜬금없이 중독에 걸리거나 기절에 빠지는 이도 있었다.
'확률은 모르지만 피해를 입히는 상대에게 정해지지 않는 상태이상을 준다.'
상태이상 중에 흔히 말하는 CC기만 있는 것이 아니니 황금추적자는 거기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여기기로 했다.
문제는 썩이나감이 부리는 두 개의 분신이었다.
무슨 분신이 데미지가 그렇게 강한지 준랭커들도 한 번에 죽어 나갔다.
3분 동안 세 명의 썩이나감이 휘두르는 도끼는 치가 떨린다.
"네놈들이 이곳을 지키지 못해 입은 피해가 얼마인지 알아?"
"흥. 마땅히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 우리에게 부탁한 것이 아닌가? 네놈 따까리들 시간도 못 버니까 다 빼라고 할 때는 안 듣더니 무슨!"
황금추적자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투귀도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만약 미다스의 왼손 길드건물에 어중이떠중이들이 없었다면 썩이나감도 쉽지 않았을 터였다.
"…삼 일 동안 제대로 지켜. 그게 거래니까."
황금추적자는 투신과 더 긴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마계 길드로는 안 된다.
썩이나감을 막을 더 강한 이들이 필요하다.
[황금추적자 : 당신들이 돕지 않아서 썩이나감이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사업을 하려면 최소한 도와주는 시늉은 해야하지 않습니까?]
황금추적자의 두 손은 빠르게 자판을 두드렸다.
* * *
PK가 끝나고 다시 돌아온 뒤에 채널은 맨 끝인 18채널로 돌렸다.
마인시티에서 우편함은 총 다섯 군데에 있다.
[창공의 독수리를 사용합니다.]
"이쪽으로 해야겠다."
먼저 스킬을 써서 유저들의 분포상황을 살폈다.
미니맵에 찍힌 점들을 보니 북쪽의 상점거리가 좋아 보였다.
"오? 썩이나감이다."
"혼자서 몇 킬하는 중이냐고."
"다시 막피하는 거야?"
나를 본 유저들의 중얼거림은 가볍게 무시하고 우편함을 통해 빨간약파란약에게 물건을 보냈다.
"썩이나감이 저기에 있다!"
"놈이 물건을 보내지 못하게 막아!"
미다스 길드 및 업계의 적들은 뒤늦게 나를 찾고 달려들었다.
[이면의 그림자를 사용합니다.]
"그, 그 스킬이다!"
"3분 동안 피해! 덤비지 마!"
상대가 인사를 했으니 답장을 하는 것이 옳다.
이면의 그림자를 보고 황급히 무너지는 적들의 머리 위로 날아가 자비 없이 바호크의 손도끼를 사용했다.
"살인이다! 죄인을 잡아라!"
"절대 가만히 두지 마!"
마인시티의 경비병들에게도 어그로가 자연스럽게 끌렸다.
다른 곳과 달리 마인시트의 경비병은 창과 칼보다는 총과 활을 들고 있었다.
타앙! 탕! 타앙!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는 총알은 고도를 높여 피했다.
경비병들은 기본적으로 스탯이 높아서 저런 눈 먼 총알에 스치기만 해도 피해가 상당하다.
[빨간약파란약 : 물건 받았습니다. 어디서부터 정보를 드리면 되겠습니까.]
[썩이나감 : 현재 적이 가장 많은 곳은 어디죠.]
[빨간약파란약 : 3채널과 5채널이 가장 많습니다.]
채널을 살피면 쉬기 전보다 채널이 늘어가 23개까지 되었다. 저녁시간이 되어 로그인하는 유저들이 늘어난 탓이다. 그중에서 3채널과 5채널은 오히려 유저수가 적은 편이었다.
황금추적자가 쓸데없이 머리를 쓴 것 같다.
난 당장 채널에 못 들어간다고 다른 곳을 노릴 생각이 없다.
차라리 기다리면서 광클을 하더라도 더 많은 이들에게 나의 강함을 각인시킬 뿐이다.
[빨간약파란약 : 현재 1채널과 8채널은 아예 접속이 안 됩니다. 놈도 거기서 생각한 거겠죠.]
빨간약파란약도 나와 같은 생각이다.
[썩이나감 : 알겠습니다. 두 차례 채널순회를 한 다음에 미다스의 오른손에 들어갈 겁니다.]
[빨간약파란약 : 현재 지원을 보낸 이들이 역으로 통제를 당하는 중이니 그것도 명심해두십시오.]
어쩐지 궁신에게 별다른 연락이 없다 싶었다.
궁신에게는 미안하지만 그쪽으로 어그로가 분산된다면 나야 환영이다.
3분의 노력 끝에 채널 1에 입장했고 다시 학살을 시작했다.
"엠페러의 산하 길드도 있네? 흑군쪽도 마찬가지고."
황금추적자가 무슨 수를 쓴 것인지 마인시티에는 없던 길드쪽의 인원들도 보였다. 그래도 아직 최상위 랭커들이 직접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 그게 마지막 자존심이겠지.
"다 죽어 버리라고."
난 계속 벌집을 들쑤실 것이다. 그러다보면 자꾸 저항을 하던 일꾼들도 지쳐 쓰러지고 나아가 여왕벌이 직접 나서야만 할 테니까.
전 채널을 한 바퀴 다 돌고 잠깐 숨을 돌렸다.
[빨간약파란약 : 마인시티에 독수리의 요새에 마주쳤던 이들이 나타났습니다.]
[썩이나감 : 목적지는요?]
[빨간약파란약 : 미다스의 오른손입니다.]
[썩이나감 : 확인.]
2차전 째의 이들도 있다면 더 좋다. 랭커가 죽을수록 더 손해가 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