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8화 고인물은자랑한다.
운영자 메시지가 뜬 순간부터 내게 다시 귓속말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걸 무시하고 아웃사이더 시티로 귀환하니 온갖 랭커들이 내게 달라붙었다.
"귀찮은 짓을 했네."
한 둘도 아니고 나를 빙 둘러싸니 일단 로그아웃을 해버렸다.
누구인지 정확하게 말하지 않아도 모두 나인 것을 알기에 일어난 촌극이다.
모두 그간의 활약으로 인한 유명세 덕분이니 나쁘지만은 않았다.
내 몸값은 더 오르고 있다.
업계의 고객들은 물론 일반 유저들도 더 득달같이 달라붙을 거다.
VIP들도 눈과 귀가 있으니 다른 물주들의 접근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분일 수밖에 없다.
지금의 상승폭이면 레벨마저도 곧 독고무적이나 흑군을 따라잡을 것이니까.
"좀 어지럽네."
VR게임기에서 나오니 온몸은 땀으로 젖어있었다. 그곳에서 자유를 찾은 순간에 살짝 현기증마저 느꼈다.
며칠이나 시간을 쏟아 부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방학의 끝자락에 서있는 것처럼 긴 시간이 조금도 가치 없게 흐른 느낌마저도 들었다.
아득한 먼 옛날의 꿈을 더듬어 드디어 해냈다는 묘한 성취감이 함께했다.
"오랜만에 소주나 깔까."
뭔가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쁘던 그때가 드리워졌다. 술을 마신 뒤에는 조작이 둔해져서 게임을 다시 한 뒤에는 참았었지만, 오늘 같은 날은 이게 없으면 잠들지 못할 것 같았다.
냉장고에 있는 술은 소주 반 병과 맥주 한 캔 뿐이었다.
안주라고 할 것도 초콜렛 과자 여러 개와 라면 정도였다.
라면을 부서 스프를 뿌리고 그대로 남은 소맥을 말아서 마셨다.
술잔은 비워지고 취기는 차오르니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잠을 청했다.
오랜만에 마신 술 때문인지 아니면 그간 긴장이 풀려 12시간을 넘게 잠을 잔 덕분인지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흐아아암."
일단 늘어지게 기지개를 편 후에 목욕을 했다.
몸은 여전히 늘어졌지만 정신이라도 조금은 차려졌다.
일어났으니 첫 끼로 어제 남은 생라면에 대충 햇반 하나를 넣고 끓여먹었다. 대충 계란 하나 넣고 김가루를 넣으니 인터넷에서 흔히 말하는 꿀꿀이죽이라 불리기 부족함이 없는 비쥬얼이었다.
부모님한테 받은 반찬에 그걸로 대충 끼니를 때우자 제법 밥은 든든했다.
"역시 인생은 탄수화물이지."
식곤증이라도 도진 것인지 몸이 더 나른해졌다.
게임에 다시 들어가기보다는 먼저 커뮤니티를 살폈다.
밸런스는 많은 부분이 바뀌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부분 다른 직업군에 관한 것이라 나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것 투성이었다. 그래도 꼼꼼히 읽어봐야만 한다.
새로 주목받는 직업군이 있다면 그쪽에 관련된 아이템의 주가가 올라가기 때문이다.
탱커와 근접딜러는 미세한 너프를 받았다. 반대로 지원군 계열로 취급받는 성직자 계열이나 테이머 쪽이 버프를 받았다.
전자에 비해 후자의 유저 수가 적었기에 나에게는 썩 좋지는 않다.
지금 칠왕의 지하신전에서 나오는 아이템들이 주로 전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뭐, 그래도 워낙 템이 좋으니 문제는 없겠지."
칠왕의 지하신전의 아이템들은 그 희귀성 때문에라도 가격방어 그 이상은 될 것이다.
하지만 내 시선을 뺏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이거 새 아바타 템임?]
[갤주 새끼가 진짜 신규 던전 공략한 거야?]
[썩이나감 날개 뭔데?]
[저 새끼 전직했냐? 뭔 직업이야?]
[썩이나감 레벨업 실화냐?]
[갤주는 여전히 빤스만 입네.]
[전 세계 최초 공략. 우리 갤주 실화냐. 가슴이 웅장해진다.]
당장 자유게시판의 상단에 차치한 글 목록들이다.
신규 던전 공략에 대한 것이야 사실 운영자 때문에라도 알려질 걸로 예상했다.
실제로 아웃사이더 시티에 등장하자마자 날 둘러싼 랭커들이 그걸 증명하지 않았는가. 나야 귀찮아서 로그아웃한 것이지만 그들은 내가 끝까지 숨기기 위해 도망쳤다는 것으로 인식을 한 것 같다.
"근데 내가 왜 갤주냐."
보통 AC갤러리 쪽에서 쓰던 단어인데 저게 아웃벤에서도 썼던 단어였던가 순간 의아하기도 했다.
억빠와 억까가 ZI존짱짱맨과 비교하면서 덩달아 썩이나감이란 캐릭터의 이름값이 높아진 것이니 마냥 나쁠 것도 없다.
결국 저것도 영향력이라는 거니까. 굳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꼽자면 자유게시판에서 어그로를 끌면서 썰을 푸는 놈이 있다는 거다.
맨 처음에는 날 핵이나 버그로를 쓰는 악성유저에다가 관심종자라면서 온갖 조리돌림을 하더니 지금은 날 엄청나게 부풀리고 그걸 분석하는 자신이 엄청 대단하다는 멍청한 랭커 한 놈이다.
[현 랭커 300위가 분석한다. 닥치고 읽어라.]
전 서버 최초공략. 이거는 분명 갤주가 맞음.
왜?
제3의 도시에 최초로 진출한 유저도 갤주였기 때문임.
네가 직접 본 것도 아니잖냐라고 하는데 갤주는 히든레코드라는 업체랑만 거래함. 거기에서부터 처음 나오는 공략이나 정보는 모두 갤주거임.
갤주한테 빌붙고 다니는 VIP놈들 보면 레벨은 높지만 닥사만 하고 다니는 멍청한 놈들이었음.
근데 봐보셈.
개들 언제부턴가 스토리 진행에 맨 꼭대기에 있음.
언제부터? 바로 갤주랑 연락할 때부터임. 이거 반박할 사람 없을 거야.
실제로 VIP놈들이 있는 길드 애들 장비 봐봐. 랭커인 나도 처음보는 도끼랑 아뮬렛 차고 다니더라.
그거 어디서 얻었을까?
전부 갤주가 신규던전 깨면서 얻은 거야.
갑자기 아웃사이더 시티에서 엠페러랑 흑군, 빡겜 애들 어디론가 갑자기 사라지나 봐라. 개들 분명 갤주한테 들은 정보 듣고 신규던전 가는 걸 테니까.
거기다가 갤주가 존나 쩌는게 이번에 날개 달고 나타난 것 보임? 팬티만 입고 다니는 갤주가 쓸 정도면 저거 스킬일 것이 분명함. 그게 아니면 진짜 히든 클래스로 전직한 거겠지.
씨발. 그런 의미에서 파티할 랭커 모은다.
저놈이 길게 쓴 말은 결국 자유게시판에서 하나씩 흘러나온 정보에 불과하다. 그래도 제법 잘 파악하고 있다고는 할 수 있다.
내 고객인 VIP들을 싸잡아 낮게 보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정도일까.
"오늘 접속하면 귀찮겠는데."
온갖 랭커들이 아웃사이더 사티에서 날 기다릴 거다.
진출한 유저의 수가 300 명도 안 되는 것을 생각하면 칠왕의 지하신전에 가는 걸 끝까지 따라올 공산도 크다.
수호자의 날개가 있으니 따돌릴 자신도 있지만 굳이 귀찮음을 감수하고 싶지 않다.
"자료 정리를 할까."
내가 신규던전을 공략한 사실은 해외 커뮤니티에도 올라갔다.
히든레코드에도 관련된 정보를 판매하라는 게시글이 벌써 수백 개나 달렸다. 아마 히든레코드도 내가 해당 정보를 빨리 올려주기를 바랄 터다.
"근데 너무 많네."
모두가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확정과 학신은 엄연히 다르다. 썩이나감이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최대한 감춰야만 하니 편하게 올릴 동영상에도 한계가 있다.
며칠을 투자한 것이라 어느 정보가 더 좋을 것인지 머리가 아플 정도다.
"던전 소개. 몬스터 공략. 보스 공략. 이 세 가지로 나누자."
문제는 이 세 가지가 말도 안 되게 많다는 거다.
던전 소개를 위해서는 어떻게 이곳에 들어가는가. 이걸 하려면 미크엘과의 전투도 실어야만 한다.
"이걸 할 수 있나?"
판매는 할 수 있다.
누가 과연 이걸 감당할 수 있을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거 정리하지 않았나?"
혹시나 싶어서 미등록한 자료들을 살폈다.
미크엘에 대한 것은 분명 정리가 되어있었다. 다만, 지금보니 다른 유저들이 얼마나 따라할 수 있냐가 문제였다.
다른 종교의 수호자가 전부 미크엘과 같지는 않을 것이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강조해야만 할 것 같다.
해당 부분을 더 점검해 올린 뒤에 다시 칠왕의 지하신전의 정보를 정리했다.
먼저 로그라이크 성의 던전이나 각 층마다 여러 유형의 지형을 일일이 첨부했다.
내가 워낙 많이 죽었기에 살피니 대충 열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었다.
"지금 보니 지랄 맞기는 하다."
내가 이때까지 공략한 던전은 물론 다른 이들이 정리한 곳들을 보니 유독 다양한 지형이기는 했다.
"씨발. 자료 정리할 알바라도 있으면 게임이라도 돌릴 건데."
던전 소개를 위해 지형자료를 추리는 것만으로도 몇 시간은 걸렸다.
그 뒤에는 몬스터 쪽을 살폈다.
저주받은 구울에 대해서는 별로 정리할 것도 없다. 지금 수준의 랭커들이라면 문제가 없이 정리한다.
검은 지옥촉수.
딱 이 놈이 문제였다. 아무것도 모르다가는 랭커 파티라도 절반은 죽어나갈 것이다.
특히 검은 지옥촉수가 다른 놈들에게 기생하는 것은 지독하다.
리빙 아머에게 달라붙어서 강화될 때는 적잖게 당황할 정도였으니까.
"아. 함정 패턴."
문제는 그걸 계속 정리하다가 가장 부족한 점이 떠올려졌다.
수호자의 날개로 그냥 지나가는 탓에 바닥에 어떤 패턴이 있는 것인지 잘 몰랐다.
"…대충 지나가자."
칠왕의 지하신전에 돌입할 정도면 그 정도는 알아서 하겠지. 그것도 못하면 게임은 접는 것이 맞다.
그 뒤의 가고일을 지나 듀라한까지 정리하다 머릿속에 기가 막힌 생각이 든 것이다.
"장문충은 별로지."
내가 누구 좋자고 한 번에 정보를 다 올릴 필요가 있을까. 듀라한 끊어서 1편으로 판매를 하기로 했다.
거기까지 정리해 히든레코드에 보낸 뒤에 승강기를 타고 시작하는 부분부터 영안실, 대장간을 넘어 정원에 있는 바호크까지 끊어 2편으로 정리해 넘겼다.
남은 부분은 3편인데 데스킹 패턴까지 엄청난 분량을 정리했다.
이것만 하느라 하루를 꼬박 보낼 정도였다.
아무리 해도 익숙하지 않는 사무직을 끝낸 뒤에 잠깐 눈을 붙인 뒤에 다시 게임에 접속했다.
하루 동안 잠적을 해서인지 이미 커뮤에서는 썩이나감 잠적이라는 썰도 흘러나올 정도였다.
"썩이나감이 나타났다!"
"와! 진짜잖아!"
"썩님! 잠깐만요!"
내가 나타나자마자 대기를 하고 있던 유저들이 달라붙었다. 그들을 애써 무시하며 지나가자 벌써 소문이 돌았는지 점점 많은 수의 랭커들이 주변에 모였다.
귀찮고 짜증난다.
빚 독촉을 하는 사채업자와는 다른 부담감이었다.
결국 내가 택하는 것은 비행이었다.
"오오오! 하늘을 난다!"
"아바타 템인가? 아이템이야?"
"스킬 아닌가?"
"시전 임팩트가 없잖아!"
주변을 아무리 에워싸도 위는 다르다.
공중으로 벗어나는 날 보고서도 신기해하는 유저들 덕분에 동물원 원숭이 신세를 오랜만에 경험했다.
잠깐의 자유가 생겼으니 일단 일을 시작하자.
[썩이나감 : 정보 다 넘겼고 지금 보낼 템들도 순서대로 팔아주세요.]
[빨간약파란약 : 고생 많으십니다. 지금 귓말을 하실 여유가 있으셨군요.]
[썩이나감 : 없어요.]
먼저 빨간약파란약에게 연락을 한 뒤에 우편함을 통해 칠왕의 지하신전에 얻은 아이템들을 넘겼다.
주변에 날 둘러싸고 있던 유저들이 갑자기 좌우로 갈라졌다.
"바쁘군."
"잘 지냈어?"
랭킹 1,2위. 독고무적과 흑군이 등장한 탓이다. 그들의 뒤에는 엠페러와 흑랑의 정예들이 함께했다.
어디를 봐도 큰일을 준비한 것처럼 보였다.
[독고무적님의 파티 초대를 받으시겠습니까? Y/N.]
주변의 시선 탓에 둘이서 같이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파티초대가 걸려왔다.
VIP의 것이니 굳이 거부할 이유도 없다.
"수호자를 어떻게 이긴거냐."
"공략방법은 있는 거야?"
역시나 둘은 거기에 막힌 모양이다. 혹시나 칠왕의 지하신전에 진출하나 기대를 했던 내가 어리석었다.
이해는 된다.
수호자 미크엘의 압도적인 스펙과 괴랄한 패턴은 직접 마주했던 입장에서는 숨이 턱하고 막혀올 정도였으니까.
"이겼죠."
먼저 허리에 찬 수호자 미크엘의 장검을 툭툭 쳤다. 그걸 본 두 사람의 눈이 변했다.
그 어떤 말보다 확실한 것은 이 아이템이다.
"어떤 아이템이지?"
"링크 좀 띄워줘봐."
"그거야 뭐."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다.
수호자 미크엘의 장검+4강을 띄워주자 둘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뭐냐. 이 옵션은!"
"이러면 너 무적인거잖아!"
둘은 내 직업을 이해하고 있다. 수호자 미크엘이 축적해주는 쉴드량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기에 부러움을 표하는 것도 당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