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2화 고인물은진행한다.
칠왕의 그림자2는 거리를 좁히며 창을 매섭게 휘둘렀다. 휘어지는 창날은 끝까지 지켜보며 튕겨냈지만, 거리가 멀어서 역섬기검으로 반격을 가할 뿐이었다.
"…약하다?"
역섬기검에 맞은 칠왕의 그림자2의 체력이 상당한 폭으로 줄었다. 내 눈이 잘못된 것인지 다가오는 놈의 체력이 추가로 사라졌다.
미크엘이 칠왕의 그림자1에 입힌 데미지가 칠왕의 그림자2에게도 공유가 되는 것이다.
"그런 구조구나."
미크엘과 내 그림자처럼 독립된 개체인 줄 알았지만, 칠왕의 그림자가 분열된 셈이다. 이러면 확실히 머릿수가 많으면 큰 도움이 되었을 것 같다.
여러 마리로 나눠지면 데미지는 더 많이 닳을 테니까.
물론 탱커가 아니고서야 칠왕의 그림자가 뻗는 창에 스치는 순간 죽을 것이 뻔할 것이다.
그림자가 잃은 체력이 칠왕에게 어떤 효과를 줄까. 혹시나 해서 그를 봤지만 별다른 것은 없었다.
자신의 그림자를 관망하며 손에 턱을 괴며 무료하게 보고 있을 뿐이다.
"저 새끼 피 채우네!"
칠왕의 머리 위에 체력바를 보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을 뻔했다.
내가 어떻게 해서 갉아놓은 체력인데 저걸 다시 채운다는 말인가.
1초라도 빨리 칠왕의 그림자를 해치워야할 이유가 생겼다.
칠왕의 그림자2는 연속해서 창을 찔러왔다.
어둡고 붉은 알현실 내부지만 번뜩이는 창날은 눈부실 정도로 두 눈에 뚜렷하게 남았다. 오히려 그림자인 덕분에 창날이 더 잘 보이는 느낌이었다.
"아냐. 느려."
칠왕의 그림자들이 칠왕과 동등한 스펙이 아니다. 체력을 공유한다고는 하지만 급격하게 줄어드는 것을 보면 방어력과 최대체력에도 변동이 있음이 분명했다.
터어엉!
검으로 창날을 튕겨낸 후에 구르기로 거리를 좁히며 본 브레이커를 사용했다. 데미지는 물론 칠왕에게 걸리지 않았던 기절까지 들어간 것을 확인했다.
칠왕의 상태이상이 완전면역은 아닐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예상보다 약한 적이라는 생각에 움직임에 자신감이 생겼다.
추가로 공격을 가한 뒤에 거리를 벌리며 바호크의 도끼를 던졌다.
광전사의 집중력의 스택이 쌓이면서 공격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
칠왕은 원거리 투사체 공격을 반사하거나 되돌리지 못한다. 그 하나 만으로 내 손에 힘이 더 들어가기 시작했다.
공격을 허용하던 칠왕의 그림자2는 망토로 자신의 몸을 감쌌다.
망토에 새겨진 사람얼굴도 확연이 적은 상태였다. 이것조차도 절반이 된 것이 분명하다.
바호크의 도끼가 회수되는 타이밍에 시선을 돌리니 칠왕의 그림자1은 창으로 바닥을 찍었다.
천장이 무너지고 바닥에서 검은 기운이 응축되어 터진다. 그 규모가 작아서 내 위치에는 닿지 않았다.
바호크의 도끼에 맞고 있는 칠왕의 그림자2가 뿜어대는 검은 기운도 미크엘에게는 미처 닿지 않았다.
절반이라고 하더라도 미크엘의 광범위 스킬이 없던 탓에 칠왕의 그림자2에서 칠왕의 사령들이 나타났다.
LV70. 약화된 칠왕의 사령.
그림자에게서 나온 덕분인지 칠왕의 사령은 무려 10레벨이나 낮아진 상태였다.
퍼버버버벙!
칠왕의 사령은 바호크의 도끼에 한 대 맞자마자 터졌다. 폭발력만큼은 그대로인지 같이 뭉쳐있던 놈들이 연쇄폭발을 했다.
흑백사진에 찍힌 사진을 보는 것 같았다.
거기에 휘말린 칠왕의 그림자가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물론 계속해서 체력이 닳고 있었다.
칠왕에게는 크게 힘을 못 쓰던 미크엘이 그림자를 상대로는 압도적인 우세를 보여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칠왕의 그림자2와는 대치만 해두면 곧 이기겠다 싶을 정도지만, 마냥 도망치면서 시간을 벌 생각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칠왕의 체력은 차고 있으니까.
그래도 서두르지는 말자.
칠왕보다 약해도 그림자 하나하나는 나보다 월등히 강하다.
미크엘의 광범위 스킬이 터지고 칠왕의 그림자1이 망토를 둘렀다.
반면에 칠왕의 그림자2는 창을 원형으로 휘두르며 충격파를 날렸다.
충격파 패턴 또한 범위가 좁아지고 느렸다.
이 고비를 넘기고 미크엘의 공격이 돋보여 칠왕의 그림자 패턴은 무사히 끝냈다.
"…아무것도 안 주네."
칠왕의 그림자는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혹시나 싶어 마지막 장소에 손을 뻗었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쪼잔한 놈."
칠왕의 망령기사와 칠왕의 사령은 경험치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내놓지 않았다.
"다시 시작이다. 수호자. 그리고 불사자."
칠왕은 체력을 거의 채운 상태에서 싸움을 재개했다.
이번에는 패턴이 사뭇 달라졌는데 이때까지와 다르게 미크엘에게 달려오며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칠왕은 힘껏 창을 휘둘렀다.
관성을 머금은 창이 1차로 그어져 피해를 입히고 채찍처럼 늘어난 창날이 뒤따라와 2차로 피해를 입히는 구조였다.
미크엘은 공중으로 날아서 피했고 순간 시야가 가려진 나는 시공간이동자의 블링크로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그런데도 창날이 코앞을 스쳤는데 잘못했으면 그대로 죽을 뻔했다.
"지랄 맞네 진짜."
휘두르고 찌르는 기본패턴에서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범위가 넓은 것은 물론 창대와 창날로 1,2차 피해가 나눠지는 것도 까다로웠다.
이번에 칠왕은 미크엘이 아닌 내게 달려왔다.
시공간이동자의 블링크는 이미 썼으니 나 또한 미크엘처럼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후우우웅!
먼저 1차적으로 창 공격은 피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창날이었다. 앞선 궤적을 따라가야 할 창날이 활어처럼 펄떡이며 날 노린 것이다.
"미친!"
미크엘로 인해 시야가 가려졌던 것이 이 부분이다. 시공간이동자의 블링크가 빠져 피할 수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내게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지면강타 스킬이다.
촤아아악!
지면강타 스킬로 인해 수직으로 떨어지는 몸뚱이. 그 위를 창날이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쿠우웅!
그 후에 지면에 떨어진 상태로 칠왕을 노려봤다. 놈은 스쳐지나가자 방향을 틀어서는 다시 나를 노려왔다.
"왜 나는 두 번이야!"
어그로는 필시 미크엘에게 더 쏠려있을 것인데 억울함이 울컥 튀어 나왔다.
공중에 떠올라도 창날을 피할 방도가 없다.
등가교환의 방패를 써도 과연 2차례의 공격을 모두 막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들었다.
"한 번이라면."
등가교환의 방패로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계산이 들자 나 또한 칠왕에게 달려들었다.
칠왕은 3M 정도가 되자 곧바로 창을 휘둘렀다.
터어엉!
스킬 특유의 이펙트가 없었기에 기꺼이 휘두른 검이 창대를 튕겨냈다.
앞선 것보다 더 강력한 힘이 실렸기에 검을 쥔 오른쪽 팔이 아예 조작이 먹히지도 않았다.
그래도 창대가 미처 휘둘러지지 않았음은 큰 수확이라 생각이 들었다.
쉐에에엑!
물론 그 생각은 3초도 가지 않았다.
수직으로 들어 올려진 창. 물리법칙을 무시하고 길게 늘어진 창날은 전갈의 꼬리처럼 휘어져 날 찍으려고 했다.
콰드득!
"저 창은 팔면 큰 걸로 몇 장이나 받으려나."
몸에 닿기 직전에 백스탭으로 피했다.
칠왕의 창은 보면 볼수록 매력적인 무기였다. 저게 드랍이 가능하다면 유니크인 것은 물론 현 시점의 최강무기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다른 것을 떠나서 저 궤적을 마음대로 바꾸는 기능은 사기적이었다.
정면을 공격하는 것 같으나 측면이나 후면을 찔러버리면 매번 치명타가 터지는 것이 아닌가.
촤아아악!
그때 전투에 이탈했던 미크엘이 천장에서 떨어지며 칠왕의 몸을 베었다. 또 나를 향해 달려오려던 칠왕이 충격을 입고 휘청거리자 혹시 새로운 이벤트라도 나오는가 싶어서 집중했다.
내 예상과 달리 그런 것은 없었다.
칠왕이 달리면서 공격을 하기 시작한 것처럼 미크엘도 자신의 비행능력을 십분 살리는 전투양상을 보였을 뿐이다. 굳이 따지자면 지금 상황을 2페이즈라고 보면 될 것 같다.
[플레이어가 상태이상 중독에 걸렸습니다.]
"뭐야."
저 전투에 합류하기 위해 바호크의 도끼를 바꾸자마자 뭔가에 당했다.
초당 데미지가 200씩 들어오는 독이기에 화들짝 놀라 인벤토리를 뒤졌다.
파엘의 강자의 오오라 때문에라도 각 상태이상용 포션들을 챙겨왔기에 곧바로 해독포션을 마셨다.
"도대체 뭐에 걸린 거지?"
주변을 둘러봐도 이상한 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저건가?"
칠왕이 다시 한 번 알현실을 질주하며 미크엘에게 창을 휘둘렀다. 그때 그가 지나간 자리에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실제로 바닥을 보니 핏방울은 30초 간격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핏방울이 정말 중독의 이유라면 이건 확인해야만 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밟았다가는 허둥대다가 죽을 염려가 있어서다.
[플레이어가 상태이상 중독에 걸렸습니다.]
"확실하네."
사라지기 직전의 핏방울을 밟자 또다시 중독에 걸렸다. 다시 해독포션을 마시며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보니 칠왕이 지나간 자리에만 튀는 것이 아니다. 달려가는 와중에는 뜬금없는 곳에 튀기도 했다.
실제로 대치 중이던 미크엘도 상태이상 중독에 걸렸다가 곧바로 해제가 되었다.
칠왕이 그렇다고 중독에 걸린 것은 아니니 일단 독에는 면역인 것으로 볼 수 있었다.
"적어도 탱커는 여기에서 씨가 마르겠구나. 힐러는 무조건 필수고."
어떤 파티가 먼저 2페이즈까지 올 것인 모르겠지만 아주 제대로 고생을 해야할 것이다.
묘지기의 무덤? 그딴 것과 감히 비교할 수 없다. 지금 상대를 하면서도 짜증이 머리 끝까지 차오를 정도니까.
칠왕과 거리를 조절하며 바호크의 도끼를 던졌다.
이번에는 몇 번을 공격하기도 전에 내게 어그로가 끌려서 곧바로 다가왔다.
무기를 바꾸고 30초도 되지 않는 상황.
바호크의 도끼로 튕겨내기를 시도해본 적도 없었으니 창이 휘둘러지는 순간에 안전하게 시공간이동자의 블링크로 피했다.
마나포션을 마시면서 힐끔힐끔 바닥을 확인하며 핏방울을 밟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하기도 했다.
칠왕은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문제는 그 속도가 점점 빨라졌기에 튕겨내기 위해서라도 수호자 미크엘의 장검을 착용해야만 했다.
터어엉!
달려오는 그대로 휘둘러지는 창을 쳐내고 정수리를 향해 찔러오는 창날을 피했다.
이때 미크엘은 다시 천장에서 떨어지며 공격했다.
같은 패턴이 세 번이나 반복되자 칠왕은 질주를 포기하고는 망토로 자신의 몸을 가렸다.
그 패턴인가 싶어서 바호크의 도끼를 착용한 순간.
"놈이 사라졌다. 불사자!"
미크엘의 말마따나 칠왕이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창공의 독수리를 사용합니다.]
일단 지금 쓸 수 있는 스킬로 알현실 전체를 살폈다.
역시나 칠왕은 은신 상태인 것인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위다!"
미크엘의 말과 함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박쥐처럼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칠왕이 떨어져 내리며 창을 찔렀다.
푸욱!
"제길!"
백스탭을 썼으나 그 빌어먹을 창날이 휘어져 날 찔러버렸다.
이때까지 쉴드를 알뜰히 채워둔 덕분에 죽음은 면했다.
[플레이어가 상태이상 중독에 걸렸습니다.]
"가지가지 한다."
문제는 그 뒤였다.
언제 피를 밟았는지 혹은 튀었는지 모르지만 또 중독에 걸려 버렸다.
인벤토리를 황급히 열었지만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또한 순간 한 눈을 판 내 몸뚱이를 칠왕의 창이 꿰뚫려 버렸다.
말이 칠왕이지 치가 떨리는 짓만 골라하고 있다.
[YOU DIED.]
허무한 죽음이었지만 드디어 2페이즈까지는 돌입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칠왕에 가기 전까지 최대한 많은 보스를 죽여서 자금을 확보할 것, 경험치를 최대한 획득해 레벨을 올릴 것.
마지막으로 이단의 연금술사를 통해 얻은 포션을 함부로 버리지 말 것 정도라고 할 수 있었다.
인벤토리를 정리하기 위해서라도 다시 아웃사이더 시티에 들렀다.
흑군이나 독고무적은 물론 황금주적자도 여기에 진출했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지금 도착하니 이곳에는 나 이외의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새벽4시가 늦은 것 같지만 사실 인생을 갈아넣은 사람들이 밤낮이 뒤바뀌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 아니던가. 어쭙잖게 만나서 던전위치를 추궁 받을 바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좋았으니 감시자가 있는지 마지막까지 확인한 뒤에 칠왕의 지하신전에 재돌입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