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9화 고인물은고생한다.
"나를 상대한다라."
이건 꽤나 까다로운 일이다.
이전의 썩이나감이라는 캐릭터는 생존기는커녕 회피기도 없었던 불나방 같은 존재였으니까.
지금은 감히 그때와 비교할 수 없다.
기본적으로 비행능력을 갖췄을 뿐더러 최소한의 방어력도 갖췄다. 미크엘의 수호자의 장검으로 선공을 하면 탱커도 가능할 정도다.
특히 치명적인 것은 시공간이동자의 블링크다.
내가 몇 번이고 죽을 상황에서 살려준 두 번째 목숨이라고 볼 수 있었다.
"마주할 때 쉴드도 있었네. 이러면 등가교환의 방패도 체크해야하고."
그림자와 싸울 때의 영상을 보면서 천천히 분석했다.
지금 인정해야할 것은 그림자가 바호크의 도끼를 더 정확하게 쓴다는 거다.
선공으로 던진 거리도 나였으면 굳이 시도를 하지 않았을 거다. 그 정도의 거리면 빗나갈 확률도 있었을 테니까.
빗나가더라도 먼저 던져야만 한다.
그림자의 공격 타이밍을 어쨌든 뺏지 못하면 똑같은 패턴으로 죽을 수 있다. 그런 부분에서 본다면 서로 수호자의 날개가 없는 것이 다행인 것 같다.
"아니면 차라리 결사항전의 영역을 펼쳐버릴까."
이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여러 방도를 생각한 뒤에 다시 칠왕의 지하신전에 도전했다.
이번 중간보스들은 모두 꽝이었다는 점이 문제였지만, 지금은 거기에 일회일비할 때가 아니었다.
칠왕의 기사단장 파엘, 칠왕의 망령기사까지 똑같이 정리한 후.
미크엘의 뒤에 바짝 달라붙어서 같이 어둠 속으로 끌려갔다.
[너의 운명은 거짓되었다. 미크엘.]
[나는 불사자가 되지 말아야만 했다.]
어둠이 일렁이며 미크엘과 내 그림자가 나타났다.
"살아남아라."
미크엘이 왼쪽으로 움직인다.
미크엘의 그림자 또한 그에 맞추어 움직였다. 서로를 노려보며 둘은 쉽게 공격을 하지 않았다.
반면에 나와 그림자의 경우는 다르다.
후웅!
먼저 선공을 취한 것은 나였다.
그림자는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내게 바호크의 도기를 던졌다.
쾅!
"큭!"
내 도끼는 빗나갔지만 그림자의 도끼는 정확하게 내게 맞았다.
조작보정.
그 하나가 이런 치명적인 결과를 이끌어 낸다.
놈의 두 번째 도끼는 백스탭으로 피했다.
그림자는 그걸 보며 공격을 이어가지 않았다. 헤이스트를 자신에게 걸며 내게 질주해왔다.
"그렇다면야……."
거리를 좁혀졌지만 선공권은 나에게 있다. 비록 움직이고 있더라도 그럴수록 내 명중률은 높아진다.
그림자에게 던진 두 개의 도끼.
그림자는 구르기로 그걸 피함과 동시에 수호자 미크엘의 장검으로 무기를 바꾸고는 역섬기검을 사용했다.
"저게 가능하다고?"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구르기를 하면 관성이 생긴다. 그 이후에 공격을 이어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촤아아아악!
횡으로 길게 갈라져오는 검기는 허리를 굽혀 피했다.
그러자마자 코앞에 그림자의 발이 보였다.
시공간이동자의 블링크로 온 것이 분명했으니 그에 맞추어 뒤로 물러났다.
주무기와 보조무기의 교체는 30초가 걸린다.
아직 난 그대로 바호크의 도끼였으니 지금을 놓칠 수 없었다.
대략 8M의 거리. 여기서 던지는 도끼라면 절대 빗나가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다.
힘껏 던진 도끼에 승리를 확신할 때.
터엉!
"…뭐?"
그림자는 수호자의 미크엘의 장검으로 튕겨내기를 성공시켰다.
투척무기인지라 내게 경직이 걸린 것은 아니지만, 설마 저걸 성공시킬 줄은 생각도 못했다.
놈이 한 발자국을 내딛는 것을 본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다시 도끼를 던졌지만 그림자는 침착하게 하나하나 쳐냈다.
"괴물이냐!"
언제인지 모르지만 날 상대한 유저들에게 들었던 그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내 캐릭터의 능력치로 저게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미크엘의 공격이 더 빨랐으니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 문제는 미크엘의 공격은 패턴을 아예 외운 반복학습의 결과라면 바호크의 도끼는 엄연히 서로 다른 궤적을 그린다는 점이었다.
그림자처럼 투척무기를 쳐낼 수 있을까? 속에서 꺼내진 의문에 긍정적인 답을 할 수 없다.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바호크의 도끼를 한 번 더 던진 다음에 나 또한 수호자 미크엘의 장검을 꺼냈다.
촤아아악!
짧게 차징한 역섬기검의 검기는 사선으로 비스듬하게 그어졌다.
터엉!
그림자는 바호크의 도끼를 쳐낸 다음에 나를 보더니 이단점프로 검기를 피했다.
내가 무기를 바꾼 것을 확인한 다음의 패턴일 셈이다.
"…유리한 것은 스태미나. 그리고 시공간이동자의 블링크."
당장에 놈보다 앞서는 무기는 그 두 가지. 부족한 것은 그 이외의 나머지다.
절망적이게도 내가 남보다 앞선다고 생각한 무기가 상대의 앞에서는 모두 한끝씩 모자라다고 여겨질 정도다.
[결사항전의 영역을 사용합니다.]
결사항전의 영역. 내 공격력과 공격속도를 대폭 올려주기에 보스들도 막을 수 없다.
쫄지 말자.
몇 번이고 부딪히고 깨져도 상관없다.
나에게도 패턴이 있듯이 그림자도 그럴 것이다. 지금 벽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림자의 행동을 짐작할 수 없어서다.
내 겉만 베꼈을 뿐이니 놈만의 패턴이 있을 것이다. 그걸 파헤친다.
지금도 그걸 위한 것일 뿐이다.
촤아악!
"쳇!"
힘껏 검을 휘두르는 순간에 그림자는 뒤로 물러났다.
PvP를 할 때, 유저들도 잘 쓰지 않던 것을 그림자는 영리할 정도로 활용을 한다.
그림자에게 무서운 것은 저 거리감각이다. 닿을 것만 같은 거리도 정확하게 파악을 하고 있었다.
"네놈도?"
그림자 또한 물러난 자리에서 결사항전의 영역을 사용했다.
처음 교집합을 배울 때처럼 두 개의 영역의 일부가 겹쳐졌다. 저 공간이 누구에게 이로울까. 그걸 생각함과 동시에 그림자가 발을 내딛었다.
자신의 영역에 발끝을 걸치고 검을 쭉 밀어내는 자세는 더없이 빠르고 정확했다.
푸욱!
올림픽에서 펜싱을 보던 것처럼 그림자의 검이 내 가슴팍을 정확하게 찍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때까지 모아둔 쉴드가 대폭 깎였다.
중간보스가 쓰는 스킬을 정통으로 맞은 것에 모자람이 없으니 내 스팩이 얼마나 사기 같은 것인지 뼈저리게 느낄 뿐이었다.
터엉!
반격을 위해 휘두른 일격을 그림자는 정확하게 막았다.
경직이 된 내 몸뚱이에는 연달아 검이 휘둘러지니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다.
[YOU DIED.]
"게임 더럽게 하네."
내가 할 수 있는 극찬과 함께 불사자의 영혼함에서 부활했다.
한 번 더 그림자와의 영상을 보면서 도드라지는 것은 반응속도였다.
뭘 하려고 하면 1초도 걸리지 않고 바로 수행한다.
반면에 나는 보고 난 뒤에 행동하기까지 생각하는 시간이 계속 보였다.
"그래도 뭔가 감이 올 것 같은데."
그림자의 공통점을 더 찾자. 놈에게 죽어도 몇 번이고 중간보스를 잡을 수 있으니 결코 손해는 아니다.
* * *
[레벨이 1 상승합니다.]
[전 능력치가 1 상승합니다.]
또다시 레벨이 올랐다.
잿더미가 된 바호크의 몸을 확인하자 특별하게 나오는 것은 없었다.
"흉작이네. 흉작이야."
기껏해야 매직 아이템 하나인데 바호크의 대검이나 도끼에 비하면 턱없이 가치가 없다.
미크엘을 쫓아 칠왕의 알현실가지 갔다. 굳이 막타를 치려고 하기보다는 누구라도 맞추기 위해 도끼를 던져댔다.
경험치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그것보다는 조금이라도 쉴드를 채우는 것이 중요하다.
"칠왕께는 갈 수 없다."
파엘이 자리에서 미크엘의 앞을 가로 막았다.
전처럼 미크엘이 전면을 막고 내가 위에서 바호크의 도끼를 던져댔다.
[플레이어가 상태이상 출혈에 걸렸습니다.]
"에라이. 진짜."
문제는 한 번씩 걸리는 강자의 오오라다.
도발이나 공포처럼 행동자체를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다행이지만, 지금 인벤토리에 해독약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문제다.
이번 중독은 1분 동안 유지가 되니 그때까지 쉴드가 깎여나가게 둘 수밖에 없다. 그나마 독이 초당 50씩 피해를 주는 경미한 것이라 다행이다.
파엘이 죽은 후에 칠왕의 망령기사 패턴까지 지난 후, 미크엘에게 달라붙어서 그림자 패턴까지 진입했다.
후우웅!
미크엘이 자신의 그림자와 왼쪽으로 움직였다. 그걸 보자마자 바호크의 도끼를 내 그림자에게 던졌다. 그간에 바호크의 도끼에 익숙해졌기에 절대 빗나가지 않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카앙!
그걸 증명하듯이 그림자가 던진 도끼가 공중에서 부딪혔다.
카앙! 카앙!
내가 먼저 던지고 그림자가 그에 화답한다. 부딪혀 바닥에 널브러진 바호크의 도끼들은 각자의 손에 돌아가고 다서 부딪히기를 반복했다.
선공권은 여전히 내가 쥐고 있다.
바호크는 여전히 후공을 중시하면서도 한 발자국씩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서로 스태미나가 소모가 되는 지루한 소모전을 내가 노리는 것은 하나.
콰과과과광!
미크엘과 그의 그림자가 쓰는 광범위 스킬이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서로 다른 색의 벼락이 나와 내 그림자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때는 둘 다 공격을 못한다.
무작위로 떨어지는 스킬들을 그냥 피했다가는 큰일이 난다.
내 그림자는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거리가 10m 이하로 줄어들면 그림자는 바호크의 도끼가 아닌 수호자 미크엘의 장검으로 바꾼다.
나는 똑같이 바호크의 도끼를 들었다.
왜 그림자가 도끼를 튕겨낼 수 있었나. 그 이유는 지금은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도끼를 타격하기 쉬운 몸통을 노리지만, 반대로 이건 그림자가 잘 튕겨내기 쉬운 공간이기도 했다.
비교적 귀찮은 무릎 아래나 어깨 쪽이면 거리가 가까울수록 쉽게 튕겨내지 못한다.
쾅! 쾅!
내가 던진 도끼에 그림자가 튕겨내지 못하고 옆으로 물러나는 것이 증거다.
그림자의 베이스는 분명히 나다. 그래서 내가 제일 까다롭게 상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일 잘 알고 있다.
툭.
그림자가 물러난 사이에 인벤토리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함정을 바닥에 뿌리며 물러났다.
곰덫과 같은 종류야 설치가 필요하지만 모든 것이 그런 것은 아니다. 위력은 낮아도 자동적으로 발동이 되는 종류가 있다.
그림자는 착용한 아이템은 그대로 가져가지만 인벤토리까지는 아니었다. 그래서 함정을 놓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하다.
내가 물러나자 그림자는 그대로 쫓아왔다.
콰아아앙!
"큭!"
유저의 손을 떠나면 설명에 적혀진 것처럼 몇 초의 시간 뒤에 터지는 폭탄들이 발동했다.
그림자는 내게서 그대로 베껴간 쉴드를 일부 잃었다. 그것만이 아니라 화상과 중독도 걸려 추가적인 피해도 입고 있었다.
그에게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계속 바호크의 도끼를 사용했다. 그림자는 귀찮을 정도로 침착하게 도끼들을 튕겨냈다.
[상대가 공포에 걸렸습니다.]
"터졌다."
놈에게 붙은 화상이 드디어 한 건을 했다.
내가 파엘을 죽이고 얻은 스킬, 강자의 오오라. 피격 혹은 가격 대상에게 무작위 상태이상을 거는 효과가 나타났다.
썩이나감이라는 캐릭터가 특별히 상태이상에 저항이 높은 스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니 공포의 효과를 컸다.
짓밟힌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놈의 몸뚱이에 내가 당했던 것처럼 바호크의 도끼로 난도질했다.
"몇 번만에 죽인 거냐."
죽여도 아이템 하나도 주지 않는 놈이었지만, 드디어 해결했다는 것에 가슴이 후련했다.
처음에는 도저히 공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놈이 알고 보니 공략할 틈이 여기저기 잘 보였다.
"거기는 아직인가?"
반면에 미크엘은 자신의 그림자와의 싸움에 끝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파엘을 공략할 때처럼 미크엘의 뒤를 점해 공격을 했다.
미크엘은 원거리 공격을 튕겨내거나 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안정적인 딜이 가능했다.
미크엘이 자신의 그림자를 끝낸 후에 어둠이 깨지며 다시 칠왕의 앞에 나타났다.
"수호자. 그리고 불사자. 귀찮은 짓을 하는군."
칠왕이 자신의 창을 흔들기 시작했다.
갑자기 창날이 엿가락처럼 휘어지더니 미크엘과 내게 차례대로 찔러왔다.
미크엘은 그걸 방어했고 난 몸을 틀며 백스탭을 했다. 이 정도면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오산이었다.
[YOU DIED.]
칠왕의 창이 끝까지 나를 쫓아와 목을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