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화 고인물은진행한다.
"답답하네. 피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기는 한데……."
불사자의 영혼함에서 부활한 뒤에 곧바로 게임을 진행하지는 않았다.
나도 사람인지라 휴식이 필요하다.
메뉴창을 켜 놓고 거의 이틀 만에 잠을 청했다. 한참 수면에 빠져있는데 머리맡에 둔 스마트폰이 정신 사납게 울려 댔다.
퉁퉁 부은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아 어디서 온 전화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무시하고 싶지만 너무 시끄러워서 빨리 받고 끊어야겠다.
"…누구세요."
[아들. 오늘 침대 왔는데 너 이름으로 되어 있더라.]
"그거 벌써 왔어요?"
익숙하고 그립지만 낯선 음성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추석이 지나고 도착한다던 돌침대가 도착했던 것 같다.
[고맙다. 잘 쓸께. 엄마가 좋아하더라.]
"곧 들릴게요. 드릴 말씀도 많아서요."
[기다릴테니 언제든 오렴.]
아버지는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으셨다. 그만큼의 무게감이 느껴져 가슴이 먹먹할 뿐이었다.
"날짜가 벌써 그렇게 바뀌었나."
추석 패키지가 나온 것은 기억하는데 그 사이에 며칠은 지난 모양이다.
어쩐지 게임 진행이 빠르게 된다 싶었다.
시간 개념이 박살났으니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지.
다시 몰아치는 수면욕구에 못 이겨 눈을 감았다 떴다.
"묘지기의 무덤 공략했네. 와. 이 사람들이 다 모였다고?"
일어나 라면으로 끼니를 떼우며 그간 놓쳤던 소식들을 확인했다.
묘지기의 무덤을 향한 대장정이 드디어 마무리가 되었다.
랭커들 중에서도 랭커가 모인 정예파티가 드디어 끝을 낸 것이다.
"흐음. 묘지기의 목소리라."
묘지기의 무덤에서 나온 아이템은 악마술사와 타락신관 전용 아이템이었다.
해당 직업군들에게는 새로운 1티어 아이템이 나타난 셈이다. 이런 아이템이 나오면 소유권에 대한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직업군이 정해져있으니 그 직업에 주는 것이 매너지만, 며칠 동안 고생한 결과물을 맨입으로 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특히 첫 공략까지 투자한 시간과 자본을 생각하면 어림도 없다.
별다른 친분도 없는 경우라면 사건사고게시판에서 물고 뜯을 거리가 생기기 쉽지만 그쪽으로는 닳고 닳은 랭커들이 있다. 아마 몇 번 더 공략하면서 서로에게 아이템 혹은 그에 맞는 재화를 분배할 것 같다.
평균값을 내야 서로 별 말이 없이 분배할 수 있으니까.
"이래서 솔로가 편하다니까."
파티공략이 불편한 점은 저런 아이템의 분배다.
뭐든지 단체생활은 힘들다.
혼자서 잘하면 혼자서 다 해먹을 수 있다. 문제는 혼자서 잘 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 정도일까.
솔직히 나도 불사자가 아니라면 이렇게까지는 못 했을 거다.
"그보다 경매에 나오면 얼마일까."
묘지기의 목소리의 가격에 따라 내가 인벤토리에 고이 모셔둔 울부짖는 망령의 배틀엑스의 가격에도 영향이 갈 것이다.
"공략도 좀 볼까."
일반 커뮤니티에도 공략이 있지만 그건 짧고 허술했다.
랭커들 중에 히든레코드와 공략 정보를 거래하는 사람이 없으니 너튜브 영상과 그걸 참고하며 볼 수밖에 없었다.
"졸라 많네?"
먼저 쏟아지는 물량이 가차 없었다. 족히 백은 넘는데 그마저도 죽으면 스켈레톤과 유령으로 나눠진다.
그 속에서 보스가 나타나서 날뛰니 물량공세 때문에 랭커들이라도 밀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난 다르겠지만."
음욕의 목소리로 한 뭉텅이를 지우고 결사항전의 영역을 펼치면 보스랑도 맞상대가 가능해 보였다.
악마와 계약한 묘지기가 지금 날 곤궁에 빠트린 칠왕의 기사 바호크보다는 스킬이나 공격모션 등이 상대하기 편했기 때문이다.
"아아. 저거 먼저 할 걸 그랬나."
나도 랭커파티처럼 고생한 시간이면 진즉 클리어하고도 남았을 거다.
"아니야. 칠왕의 신전이 더 값져."
어려운 던전에는 그만큼의 보상이 따른다.
저 랭커파티가 칠왕의 신전에 온다면 더 고생을 할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묘지기의 무덤을 보고 할 만하다고 생각을 하는 내가 비정상적으로 강할 뿐이다.
"저 정도에 고생하면 끝났네."
정상의 자리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걸 생각하니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칠왕의 신전을 클리어하고 부모님을 뵈러 가면 딱일 거다.
다시 게임에 접속해 바호크의 앞에 섰다.
놈은 내가 걸음을 떼자마자 도끼투척 패턴으로 반갑게 맞이 해줬다.
후우웅!
팔을 휘두르는 모션을 보자마자 속도를 높였다. 섬뜩한 소리가 날 스쳤고 그때마다 벽이 부서질 것만 같은 굉음이 들렸다.
도끼를 두 번 던지고 남는 시간은 천천히 걸으며 숨을 골랐다.
그러다 다시 도끼를 투척하면 빠르게 뛰는 식이었다.
사이드암처럼 던지면 달리던 그대로 뛰어올라 피하거나 날아올라 피했다.
그르릉.
거리가 가까워지자 바호크는 손도끼 대신에 대검을 들었다. 검집에서 뽑히는 소리는 날카롭기보다는 거칠어 더 청각을 자극했다.
콰아아앙!
바호크가 높게 들어 올린 대검을 그대로 내리쳤다.
옆으로 구르기를 써 피한 다음에 다가가자 놈은 검을 추슬러 길게 휘둘렀다.
날아올라 피한 뒤에 곧바로 지면강타를 사용했다.
"크윽!"
아슬아슬하게 사정거리에 든 바호크가 이를 악물었다. 충격 뒤에 다시 내리찍는 검은 상체를 틀어 백스탭을 써 피했다.
다시 대지가 울리고 빠르게 달려가며 옆구리를 베며 지나갔다.
"함정 설치해."
그와 함께 미니맵의 몇 군대에 핑을 찍었다.
이번에는 죽지 않고 대기하던 임프가 빨리 다가와 함정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내 목표는 그때까지 바호크를 잡아두는 거다.
공격을 힘겹게 피하며 어쩌다 한 번씩 반격을 가하던 차에 바호크가 땅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거꾸로 쥐는 검은 내 머리를 노린다.
드디어 낙하공격을 시작하는 거다. 거기에 맞추어 하늘 높이 날았다.
콰아아앙!
폭탄이 떨어진 것만 같은 굉음. 피어오르는 먼지구름 사이에서 대검에 박힌 바위를 바호크는 내게 휘둘렀다.
비행고도를 낮추어 바위를 피하며 그대로 바호크에게 날아가 검을 휘둘렀다.
바호크도 이때는 반응을 하지 못했다. 이대로 더 피해를 주고 싶지만 그렇게 욕심을 낼 정도로 쉬운 상대는 아니다.
손도끼를 던지지 못하는 거리를 유지하며 피하고 있을 때.
촤아아악! 촤아아악!
바호크가 검을 횡과 종으로 한 번씩 베었다.
십자베기. 그 스킬로 뻗어지는 검기가 무서운 기세로 나를 향해 날아왔다.
물론 보고 있었으니 피하지 못할 것은 없다.
[카카칵! 다 했다!]
"좋아."
그 사이에 임프가 함정을 모두 설치했다.
함정 종류는 일일이 지정해주지 못했지만, 덫이나 폭탄류가 골고루 설치가 되어 있었다.
바호크의 공격을 피하며 천천히 그쪽으로 유도했다.
콰득!
성큼성큼 다가오던 바호크가 곰덫을 밟았다.
"…통한다?"
거기서 알게 된 것은 넉백은 무시하던 바호크가 걸음을 멈췄다는 거다.
바호크에게 함정은 통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어떤 함정들이 더 효과적인가를 확인하는 거다.
"으아아아!"
곰덫의 효과가 끝나자마자 바호크가 괴성을 질렀다. 설마 듀라한처럼 피어를 쓰는 것인가 싶었다.
나에게는 다행히 피어 종류는 아니었다.
다만, 바호크의 모든 능력치가 상승되었다는 거다. 한 걸음씩 내딛는 걸음은 내 가벼운 달리기와 같았고 휘두르는 대검은 확연히 더 빨라졌다.
그 공격조차도 미크엘에 비하면 느리다.
계속 피하면서 몇 번이고 눈에 담아왔던 내리치기 모션은 더 이상 변수가 없어졌다.
터어엉!
"하지만."
확신을 가진 수호자의 미크엘의 장검은 정확하게 대검을 쳐냈다. 근력이 얼마나 강한지 발목이 바닥에 박힐 정도의 효과도 보였다.
하지만 게임은 게임일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피해를 입었거나 상태이상에 빠지지도 않았다.
콰드드득!
활짝 열린 가슴팍에 본 브레이커를 박았다.
본 브레이커의 효과는 경직이 된 상대라면 이동속도 감소만이 아니라 기절효과까지 준다는 거다.
"떴다."
압도적인 스펙의 보스들은 레벨이 높아질수록 상태이상에 높은 저항을 가지거나 혹은 면역을 가지는 경우가 있었다.
바호크는 넉백에 대한 저항은 있었지만 기절과 이동속도에 대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결사항전의 영역을 사용합니다.]
[스피어마스터의 소울을 사용합니다.]
판이 깔렸으면 마땅히 날뛰어야만 한다.
모든 스태미나를 토해 낸다는 각오로 바호크를 난도질했다. 쉴드량이 급격히 차오르는 만큼이나 바호크의 체력이 듬성듬성 빠졌다.
80%의 확률로 방어력을 무시한다는 조건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새삼 느낀다.
"크오오오오!"
기절이 끝나자마자 바호크는 다시 괴성을 질렀다.
계속 검을 휘두르려는 내 몸이 빙판 위에 선 것처럼 쭈욱 밀려났다.
"죽여 버리겠다!"
바호크가 검을 미친 듯이 내리쳤다. 대검에서 뻗어지는 검기가 사방으로 날아갔다.
검기 하나당 폭은 족히 3M는 되는 것 같다.
"미…친!"
가까이에서는 그걸 피할 엄두도 나지 않아 뒷걸음질을 치면서 위태롭게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공중에 떠오른다는 선택지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검기에 베여 버릴 테니까.
"허억. 허억."
바호크에게도 양심은 있는지 1분 동안 검기를 쏟아낸 후에 거친 숨을 내쉬었다.
카가가각!
거리를 좁혀 역섬기검으로 경각한 순간.
"어림도 없다!"
"쳇."
바호크는 다시 대검을 들어 역섬기검을 되돌려냈다. 내게 쏟아지는 검기는 어쩔 수 없이 스피어마스터의 소울로 피해냈다.
바호크의 체력은 아직 70% 정도가 남았다. 또다시 지루한 대치로 똑같은 패턴까지 이끌어 냈다.
콰드드득!
체력이 50%대에 달하자 바호크의 갑옷에 금이 가며 떨어져 내렸다.
상처투성이의 몸뚱이는 높아진 체온 탓에 아지랑이가 피어 올랐다.
"가볍게 보지 않겠다. 더 이상은!"
돌연 바호크가 뒤돌아 도망쳤다.
놈은 오래된 고목에 올라타서는 내게 도끼를 투척하기 시작했다.
"이게 2페이즈라고 봐야 되겠다!"
바호크의 도끼는 아까 전보다도 더 빠르게 날아왔다. 검붉은 기운이 머금어진 것이 이전보다도 더 강한 위력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보다 더 까다로운 것은 투척속도만이 아니라 회수속도마저 더 빨라진 것이다.
본래라면 두 번 투척 이후에 비었을 시간이 절반으로 줄었다.
내 스태미나도 아슬아슬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대치가 끝나자 놈은 대검을 쥐고 높게 뛰어 올랐다.
다시 낙하공격 패턴이라 짐작하고 날아올랐다.
콰아아앙!
대검으로 바닥을 찍은 것은 확인하고 고도를 낮출 때.
후우우웅! 후우우웅!
바호크가 던진 것은 대검에 박힌 바위 따위가 아니었다.
두 자루의 도끼를 한 번에 던진 것이다. X자의 궤적을 그리며 날아오는 도끼는 아슬아슬하게 스쳐 갔다.
쾅!
"큭!"
문제는 피한 뒤였다.
바호크의 손으로 돌아가는 도끼가 내 뒤통수를 가격했다. 다행이 투척할 때와 비교하면 보잘 것 없는 데미지였지만, 거리를 더 좁히지 못해 바호크가 다시 도끼 투척을 하기 시작했다.
비교적 가까운 거리. 공중이라 활용할 수 없는 회피기.
그때처럼 지면강타를 사용해 한 번은 공격을 피했다.
그 뒤에는 구르고 굴러 거리를 좁히자 바호크가 다시 대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콰아아앙!
스태미나 부족으로 이번에는 받아칠 생각도 못해 물러났다.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 놈과 대치했다. 시간은 이미 20분은 지났지만 체감상 5분도 되지 않은 것 같다.
부족한 스태미나와 마력을 채운 뒤.
터어엉!
다시 튕겨내기를 성공시키며 본 브레이커를 사용했다.
[결사항전의 영역을 사용합니다.]
[스피어마스터의 소울을 사용합니다.]
다시 꺼내든 두 개의 스킬.
이번에는 바호크의 체력을 비참할 정도로 깍아낼 거다. 갑옷이 부서진 만큼 데미지는 더 크게 들어가고 있었으니까.
"크아악!"
목표한 체력까지 만들자 바호크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을 쳤다.
피투성이가 된 그가 다시 일어날 때.
콰아아앙!
갑자기 들린 굉음에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굳게 닫혀있던 철문이 종이짝처럼 찢기며 칠왕이 바닥을 뒹굴며 나타났다.
그 너머에는 상처투성이가 된 미크엘이 있었다.
드디어 바라고 바랐던 새로운 국면이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