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8화 고인물은공략중이다.
[칠왕의 지하신전을 탐색하라. 0%.]
시네마틱 모드가 끝나고 목표가 갱신되었다.
칠왕의 지하신전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몇 번이고 두들기고 검을 휘둘러도 흠집 하나 나지도 않았다.
귀를 문에 가까이 대면 미크엘과 칠왕의 격돌 소리가 들릴 수 있었다. 물론 시네마틱처럼 화려하고 웅장한 소리가 아니라 쇠가 부딪히는 효과음에 둘의 기합소리만 들릴 뿐이다.
"차라리 저기서 존버 탈 걸."
시네마틱 영상이 나왔으니 다른 분기점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만약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니 한 번은 시험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칠왕과 싸울 때 미크엘이 꼭 곁에 있으리라는 법은 없다.
[창공의 독수리를 사용합니다.]
실내라 한정적이지만 일단 시야를 확보해두는 것이 좋다.
독수리가 천장에 등이 닿는 시점에서 미니맵이 천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있는 곳의 양쪽 복도 끝까지가 전부였다.
천장이 높으니 땅에서 발을 뗀다고 하더라도 검은 지옥촉수 같은 것에 당할 확률도 좋다.
수호자의 날개 덕분에 이런 부분은 너무 좋다.
남들은 탐색 스킬을 가진 직업군을 대동해 함정 하나하나를 피할 때 나는 그냥 무시하고 갈 수 있으니까.
이게 주는 메리트는 엄청나다.
몬스터만 잡으면 끝나게 되니 체감상으로 던전을 공략하는 시간이 대폭 줄어들게 된다.
칠왕의 지하신전은 말라붙은 피와 시체가 즐비했다. 개중에 언데드로 부활해 습격을 하는 놈이 있을까 봐 종종 임프에게 화염구를 던지게 했다.
내 예상과 달리 시체는 불에만 탈 뿐이지 별다른 헤프닝은 없었다.
복도를 가다가 방을 하나하나를 살폈는데 역시 시체만 있을 뿐이지 특별한 것은 없었다.
퍼엉!
[이게 깨진다!]
물론 지금 임프가 화염구로 박살을 낸 거미줄이 쳐진 항아리는 예외였다.
임프는 항아리가 보이는 족족 깨부쉈다. 혹시 퀘스트에 관련된 것일까 싶어 손을 거들었지만 떨어지는 것은 동화 몇 개였다.
심지어 항아리를 박살내다가 독연기 함정을 건드려서 중독에 걸리기도 했었다. 그야말로 백해무익한 행위였다.
왼쪽 벽에만 붙어서 이동을 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점점 항아리나 관이 많아졌고 처참했던 시체의 수는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몬스터도 나타나지 않는 것도 기이하기만 했다.
그러다가 지하신전의 서북쪽 끝에 다다랐다.
이때까지 지나쳐온 곳과 달리 입구부터 거대한 곳은 벽면에 영안실이라 적혀져 있었다.
"여기는 몬스터가 있겠네."
던전에서 시체를 보관하는 영안실이 있다면 두 말할 것도 없이 언데드들이 나온다. 뼈만 달려있는지 아니면 그 위에 살점이 있는지 정도의 차이일까.
지하1,2층에서 봤던 저주받은 구울 수준의 몬스터가 나오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했다.
그그그극.
굳게 닫힌 철문에 힘을 주고 천천히 열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게 가득 찬 어둠에 임프에게 횃불을 쥐어주었다.
"앞으로 이동."
[카카카칵! 겁쟁이!]
내가 횃불을 들면 버서커의 소울의 여파로 공격력 버프가 10% 감소가 된다. 그걸 감안하면 임프를 쓰는 것이 정답이었다.
임프가 미니맵에 핑을 찍은 곳으로 쫄레쫄레 움직였다.
영안실은 벽에 낸 공간에 촘촘이 대리석으로 된 관이 있는 형태였다. 거미줄이 쳐져있었으나 그 아래를 자세히 보면 칠왕이 쓰고 있던 가면과 유사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 이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뭐 없다!]
영안실을 크게 한 바퀴를 돈 임프가 소리를 쳤다. 확실히 위협요소는 없는 것 같아 앞으로 걸어갈 때다.
카득.
머리 위로 작은 돌멩이 하나가 떨어졌다.
수호자의 날개로 생긴 내 그림자보다 더 큰 무언가가 보였다.
"화염구!"
백스탭을 사용함과 동시에 손가락은 위를 가리켰다.
임프의 화염구가 내가 지목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퍼엉!
화염구가 무언가에 맞았다.
그때 보인 문구는 LV80. 영안실의 연주자였다.
쿠웅!
커다란 피아노가 영안실의 정중앙에 떨어졌다.
"성가대에 들어오고 싶어서 왔는가? 환영이다."
시체를 연상하게 만드는 새하얀 피부. 큰 키였음에도 뼈에 가죽만이 붙은 얇은 몸뚱이는 손가락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
두둑. 두둑.
가벼운 스트레칭과 함께 영안실의 연주자가 건반에 손을 얹었다.
"오. 칠왕이시여. 그분을 경배하라부터 시작하지."
영안실의 연주자가 건반에 손을 얹는 순간.
쾅! 쾅! 쾅! 쾅!
영안실에 잠들어 있던 망자들이 깨어났다. 대리석으로 된 관이 박살이 나며 나타난 그들은 두 손을 곱게 모으고 영안실의 연주자만을 바라봤다.
LV72. 영안실의 성가대.
레벨은 낮은 편이지만 영안실의 연주자가 준보스 급일 것으로 보이니 먼저 정리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연주자. 성가대. 아마 이들의 멜로디가 조화가 되어 유저를 상상도 할 수 없게 괴롭히는 패턴이 될 테니까.
내가 움직이는 것보다 먼저 영안실의 연주자가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음이 퍼지며 어둡고 회색의 공간에 붉은색의 빛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
텅 비어있던 눈동자에 핏물이 줄줄 흐르며 영안실의 성가대는 노래가 아닌 비명을 질렀다.
[플레이어의 이동속도가 10% 느려집니다.]
[플레이어의 공격속도가 10% 느려집니다.]
[플레이어의 시야가 30% 제한됩니다.]
[플레이어의 방어력이 10% 감소합니다.]
[플레어의 공격력이 10% 감소합니다.]
"와. 뭐야."
갑자기 눈앞에 몇 개의 알림들이 차올랐다. 그 하나하나가 내 능력치를 옥죄는 불쾌한 것들 뿐이었다.
영안실의 지휘자는 두 눈을 감으며 연주를 할 뿐이다. 날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패턴이 놈에게서 나오지 않으니 그 사이에 영안실의 성가대를 줄여야만 한다.
카가가각!
먼저 역섬기검을 길게 그어 검기로 영안실의 성가대 셋에게 피해를 입혔다.
그런데도 놈들은 노래를 부를 뿐이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헤이스트를 사용합니다.]
"속도전이구나."
한 곡이 끝나기 전에 얼른 영안실의 성가대를 정리해야만 한다.
영안실에 관이 모두 열린 것은 아니니 2차, 3차 성가대가 난입하면 얼마나 많은 너프가 생겨날 것인지 모른다.
반격은 커녕 방어나 도망도 치지 않고 귀가 찢어질 불쾌한 소리만 늘어놓는 적을 최대한의 속도로 죽였다.
영안실의 성가대를 죽일수록 아까 전에 생긴 너프가 하나씩 줄어지기 시작했다.
작게는 둘에서 많게는 넷에 하나가 사라지는 식이었다.
"무례한 관중이로군. 노래를 끊다니."
한 곡이 끝나기 전에 성가대를 죽였다.
영안실의 지휘자는 연주를 끝내고 나를 흘겨봤다. 그러고는 자리에 일어나 공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빠르게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또다시 영안실의 관에서 성가대가 나타났다.
[플레이어의 이동속도가 10% 느려집니다.]
[플레이어의 공격속도가 10% 느려집니다.]
[플레이어의 시야가 30% 제한됩니다.]
[플레이어의 방어력이 10% 감소합니다.]
[플레어의 공격력이 10% 감소합니다.]
"또 이거냐고."
아까 전과 똑같은 상황이 되었다. 달라진 것이라면 연주 속도가 더 빠르다는 점일까.
같은 패턴이라면 나로서도 썩 나쁠 일은 없다.
아까 전에 스킬을 썼기에 아슬아슬했지만, 이번에도 연주가 끝나기 전에 성가대를 모두 해치웠다.
"프레스티시모!"
난 전혀 모르는 용어로 다시 영안실의 지휘자가 연주를 시작했다.
처음이 동네 마실이고 두 번째가 빠른 걸음이라면 이번에는 전력질주다.
이건 나로서도 위험하다.
스태미나는 물론 마나까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달려 보자."
어느 놈을 죽여야 어떤 버프가 사라지는가. 이건 알고 있었으니 이동속도와 시야 너프를 먼저 제거했다.
이 뒤에 즉사패턴이 아니라면 최대한 오래 살아서 영안실의 연주자를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겨우 공격속도 너프까지 제거하자 연주가 끝났다.
영안실의 연주자가 건반에서 손을 뗐다. 악보를 어루만지며 다음 장을 넘기는 동안에 이때까지 잠자코 있던 영안실의 성가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으아아아!]
영안실의 성가대의 남은 숫자는 여섯이었다. 놈들에게 버프가 걸려 있는 것을 확인하니 방어력과 공격력 버프가 걸려 있었다.
내가 없애지 못한 방어력과 공격력 너프가 저들에게 간 셈이다.
만약 아무것도 모른 상태로 손만 빨고 있었다면 내가 당한 너프를 역으로 움켜쥔 성가대와 싸우게 되었을 것이다.
영안실의 성가대는 구울과 같은 형태의 공격을 보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한 놈씩 고개를 내밀고 소리를 지른다는 거다.
범위가 꽤나 넓어서 거기에 휘말리지 않게 싸우느라 제법 시간이 걸렸다.
모두 쓰러트릴 때까지 영안실의 지휘자가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이 다행일 뿐이다.
"후우. 귀찮네."
영산실의 성가대가 소리를 지르는 것만 아니면 금방 끝냈을 것이다.
"감히 내 성가대를 없애다니. 이 불쾌한 놈."
영안실의 지휘자는 그 뒤에야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방금 전의 빠르고 높은 음으로 이어지던 연주와 달리 느리고 낮은 음은 듣고 있던 나를 절로 긴장하게 만들었다.
쿵! 쿵! 쿵!
영안실의 바닥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울렸다. 벽에 금이 가며 머리 위로 먼지와 작은 돌 조각이 떨어졌다.
"이런."
이번 패턴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콰아아앙!
천장의 일부와 벽이 무너진다.
임프는 진즉에 깔려 죽었고 난 위태롭게 영안실 이곳저곳을 달렸다.
수호자의 날개가 있어서 괜찮았지만 시야가 없다면 위험한 패턴이었을 거다.
영안실의 연주자의 연주는 끝나지 않았다.
악보가 살아난 것처럼 음표들이 사방에 퍼지기 시작했다. 진짜는 이게 분명하다.
연주의 영향이 있어서인지 커다란 음표는 느렸다.
남들과 달리 공중이라는 선택지가 있는 나는 위에서 그걸 지켜봤다.
"아첼레란도."
영안실의 지휘자의 연주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음표의 크기는 작아졌으나 숫자가 더 늘어나 피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벽타기를 써서 천장과 벽을 뛰어 다니며 한 차례 위기를 넘겼다.
영안실의 지휘자의 연주가 멈출 때.
카가가각!
역섬기검으로 피해를 준 뒤에 그대로 등판에 본 브레이커를 찍었다.
스킬 두 번이나 맞은 영안실의 지휘자는 체력이 제법 닳았다.
"건방진 놈."
그러나 앉은 자리에서 일어날 기색도 없이 내게 팔을 휘저었다.
짜악!
"커허억!"
그 얇은 팔은 채찍처럼 휘둘러져 도저히 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뺨을 맞은 몸뚱이는 형편없이 뒤로 나뒹굴었다.
파리채에 맞은 파리가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었다.
이때까지 채운 쉴드가 대폭 날아갔지만 목숨을 부지한 것으로 다행으로 여겨야만 할 것 같다.
"듀라한보다는 덜 귀찮은데."
하루 종일 성가대만 잡고 음표 피하다가 겨우 공격 두 번을 했다.
이건 도저히 가성비가 나오지 않는 딜 교환이었다.
차라리 성가대 패턴에서 버프 중 일부를 각오하고 연주자를 한 번이라도 공격해 보는 식이 나을 것 같다.
음표 패턴에서는 도저히 놈을 공격할 건덕지가 안 나온다.
쿵! 쿵! 쿵!
거기에 생각이 닿자마자 영안실의 성가대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연주자의 체력을 생각하면 아직 1페이즈도 넘지 못한 덕분이다.
[플레이어의 이동속도가 10% 느려집니다.]
[플레이어의 공격속도가 10% 느려집니다.]
[플레이어의 시야가 30% 제한됩니다.]
[플레이어의 방어력이 10% 감소합니다.]
[플레어의 공격력이 10% 감소합니다.]
빼곡하게 채워진 너프 중에서 시야와 이동속도를 담당하는 성가대를 죽였다.
그 뒤에는 곧바로 영안실의 지휘자를 공격했다.
촤악! 촤악!
"크윽! 컥!"
일격에 터진 건맨의 소울로 두 번의 공격이 들어갔다.
영안실의 연주자가 피해를 입으면서 통증을 호소했다. 역시나 이때 공격을 가하는 것이 맞다.
너프를 각오하고 연달아 연주자의 등을 검으로 베어냈다.
쿠우우웅!
체력이 30%가 닳자 연주자가 건반을 두 손으로 내리쳤다.
연주가 끊겨 영안실의 성가대가 내게 달려들음과 동시에 연주자 또한 내게 손을 뻗었다.
[YOU DIED.]
그리고 나는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