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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은 옷을 입지 않아-147화 (147/201)

제147화 고인물은득템했다.

"운명의 저울?"

데스티아 여신까지 보였으니 이게 보통의 스킬이 아님은 알 수 있다.

문제는 저게 어떤 효과를 가지냐는 거다.

미크엘이나 내 UI에 생긴 저울 마크를 보니 피아를 가리지 않고 적용된다.

날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미크엘의 자세였다. 그는 이전처럼 내게 다가오거나 하지 않았다. 검을 역수로 들더니 그걸로 자신의 허벅지를 찔렀다.

푸욱!

"불사자. 너의 운명은 어떠한가."

"…뭐하는 거지?"

그 의문에 대한 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YOU DIED.]

한 박자 느리게 내가 죽었기 때문이다.

"데미지 반사? 아닌데? 뭐야 이건."

여러 게임을 겪었지만 지금처럼 당혹스러운 경우는 없었다.

미크엘은 자해를 했는데 왜 내가 죽는다는 말인가. 죽기 전의 영상을 틀어 그 장면들을 자세히 살폈다.

"데미지 반사 개념보다는 내 쪽에 넘긴 건데. 뭐야 이건."

미크엘이 자신의 몸을 찌를 때를 보면 체력의 감소는 없었다. 2초에서 3초 사이로 오히려 내 체력이 닳았다.

"데미지? 저울? 설마?"

계속 보다보니 어떤 스킬인지 짐작이 갔다.

미크엘이 자해를 할 때에 저울이 한쪽으로 치우쳤다가 다시 돌아왔다.

내가 데미지를 입은 것은 그때였다.

"데미지를 주는 거구나."

같은 효과를 받는다면 반대도 가능할 것이다. 내가 자해를 입어도 미크엘이 데미지를 입는 것!

문제라면 내가 내 데미지를 감당할 수 있냐는 거다. 의심할 것도 없이 내 데미지에 내가 그냥 죽을 테니까.

"죽지 않고 데미지를 준다면."

여신의 저울이 얼마나 지속이 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스킬은 정면에서 맞상대하지 않는 이상 깰 수 없는 패턴이었다.

내게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전에 직접 확인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여신의 저울에서 미크엘이 스킬을 쓰는지 아니면 일반공격만 쓰는 지다.

전자라면 잠깐 게임을 끄고 휴식을 취할 생각이다. 나도 사람인지라 숨은 쉬어야하니까.

두 번의 도전 끝에 다시 여신의 저울 패턴에 다다랐다.

이번에는 그에게서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다.

"불사자. 너의 운명은 어떠한가."

미크엘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도 똑같은 말과 행동을 취했다. 역수로 쥔 검이 몸뚱이를 찌르기 전에 가까이 다가가 놈의 검을 쳐 냈다.

터엉!

튕겨 내기가 성공했다.

그 말은 이 동작까지는 스킬이 아니라는 거다.

경직이 된 그에게 곧바로 공격을 가하고 싶지만, 상태이상을 돌려주는 특성 덕분에 내 몸이 멈췄다.

"쓸데없는 짓."

미크엘은 물러나며 다시 자해를 하려고 했다.

"엿같네 진짜."

피해반사 스킬을 지녀서 공격을 유도하는 경우는 있어도 더 나아가서 자해로 날 공격하려는 놈도 처음이다.

다시 그를 노리는 순간.

촤아아악!

미크엘이 바닥을 박차고 내 몸을 베었다.

[YOU DIED.]

방금 전의 공격도 일반공격이다.

지금까지라면 여신의 저울 패턴에서는 다른 스킬을 쓰지 못한다고 봐야만 할 것 같다.

이러면 이야기는 쉬워진다.

미크엘까지 딱 잡고 푹 잠을 잘 수 있겠다.

한 번 더 죽으면서 미크엘이 자해 혹은 공격을 하는 모션이나 패턴을 외워야만 한다.

지금까지는 두 번째 자해를 하려던 순간에 날 죽였다.

영상들을 돌려 분석을 한 결과 차이는 바로 미크엘의 시선이었다.

미크엘이 자해를 할 때는 시선을 올리지만, 날 공격할 때는 살짝 눈을 깔았다.

"모션 진짜 빡치게 해 뒀네."

내가 퍼즐이나 추리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고 살다살다 RPG게임에서 보스의 시선까지 보면서 게임을 해야 하나 싶다.

다른 수호자도 비슷한 수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종교에 따라 맞는 파티원을 구하든지 말든지 현 최상위 랭커들은 당분간 깰 엄두도 못 낼 것 같다.

이쯤이면 내가 한 고생 때문에라도 쉽게 공략을 판매하지 말아야 덜 억울할 것 같다.

깨지고 깨져보면 최소 백 단위로 알아서 부르겠지.

기껏 키운 캐릭터가 스토리 진행 중에 공략 문제로 막히는 스트레스는 생각보다 크니까.

다시 맞이한 여신의 저울 패턴에서 당연하게 첫 번째 자해를 튕겨 냈다.

이번에도 적정선에서 거리를 유지했는데 미크엘은 시선을 내리지 않고 자해를 시도했다.

터엉!

"이미 파악했다고."

역수로 가하는 그 느린 동작 따위 가만히 지켜볼 정도로 멍청한 사람이 아니다.

튕겨 내기로 인한 상태이상 경직이 내게 돌아왔고 미크엘은 자해를 하려는 동작과 함께 시선을 내렸다.

경직이 풀리자마자 백스탭을 쓰며 물러났다.

촤아아악!

간발의 차로 미크엘의 검이 내가 있던 공간을 베었다.

"후우."

얕은 한숨을 내쉰 이유는 내 분석이 틀리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내 분석이 헛된 이론으로 끝나지 않게 실현을 시킨 실행력에 안도할 뿐이다.

오래 게임을 하면 집중력이 흩어지기 마련인데 고생 끝에 수호자의 날개라는 스킬과 함께 공략의 끝이 보이니 피로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20초의 시간이 남았다. 남은 10초는 분노의 전투로 메울 수 있다.

어쨌든 5분만 버티면 퀘스트 완료로 뜰 테니까.

터엉!

다시 미크엘의 자해를 막아냈다.

다음에는 일반공격일 줄 알았으나 연달아 자해를 시도했다.

터엉!

그때마다 난 튕겨 내기를 시도했다.

이때까지 미크엘이 한 공격모션 중에서도 가장 느린 것이 자해시도다.

저걸 튕겨 내지 못한다면 여기까지 올 자격도 없다.

몇 번의 실랑이는 누구의 득도 실도 없었다.

앞선 지랄 맞은 패턴들이 워낙 많다 보니까 오히려 지금 상황이 너무나 편안하게 느껴졌다.

단 10초를 남겼을 때.

"균형을 찾으라."

미크엘이 바닥에 검을 긋자 여신이 들고 있는 저울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내 체력과 마력이 뒤바뀌었다. 서로의 수치가 정반대가 된 것이다. 뭔가 싶어서 확인하니 근력과 지력이, 민첩과 지혜가 바뀌었다.

천만다행으로 기력은 고정이라는 점일까.

설마 했지만 내 능력치를 임의로 바꿔 버릴 줄은 몰랐다.

쿠웅!

"제길!"

내가 쥐고 있던 미치광이 광대의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손이 잘려서가 아니다. 그저 순수한 무게를 견디지 못해서다.

무기를 들 수 있는 최소한의 근력을 충족하지 못한 셈이다.

이건 치명적인 스킬이다.

능력치를 바꿔 버린다면 모든 캐릭터의 역할군이 반대가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거기에 걸맞는 장비와 스킬을 보유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이 10초는 모든 유저들에게 죽음을 고하는 것이다.

[분노의 전투를 사용합니다.]

"미안하지만 이미 끝났어."

이 상황이 불사자인 나에게만 펼쳐지는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어떻든지 간에 지금 상황이 나에게 절망을 주지는 않는다.

분노의 전투가 주는 10초의 불사가 날 지켜 줄 테니까.

[눈앞의 개새끼들의 멱을 딸 수 있다면 죽어도 좋아. 크하하하하!]

광기 어린 목소리는 더 없이 자신에 차 있다.

온몸에 차오르는 힘을 만끽하며 힘껏 미크엘에게 검을 휘둘렀다.

미크엘은 그 공격을 기꺼이 받았다. 그의 체력이 떨어진 것도 잠시 그대로 나에게 피해가 고스란히 돌아왔다.

"…죽지 않는다고?"

"죽을 수 없다고."

벙 찐 미크엘의 표정을 보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내 체력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다. 진즉 죽어야 하지만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푸욱! 촤악!

그간에 못했던 반격을 미크엘의 몸에 새겼다. 찌르고 베어 내자 그조차도 순간 뒷걸음질을 칠 정도였다.

"칠죄종의 힘인가!"

"힘. 보이라며."

남은 것은 3초뿐이다.

터엉!

내가 다시 휘두른 검을 미크엘은 너무나 아름다운 궤적으로 튕겨 냈다. 가슴팍이 훤히 열려 빈틈이 고스란히 드러났지만 미크엘의 검은 코앞에서 멈추었다.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YOU DIED.]

이 빌어먹을 퀘스트가 끝났다. 그와 함께 죽은 나는 다시 불사자의 영혼함에서 살아났다.

[도전과제, 수호자의 시험을 완료하였습니다.]

도전과제로 주어진 것은 하나의 검이었다. 인벤토리에서 번쩍거리는 모양새가 어디에선가 많이 본 것이었다.

[수호자 미크엘의 장검]

-등급 : 유니크.

-공격력 : 742~803.

-효과 : 근력의 100%가 고정데미지 변환, 피해량 20%의 쉴드 생성, 상태이상 저항 50% 상승, 초당 체력회복 5, 초당 마력회복5, 초당스태미나회복5, 즉살LV3, 정화LV5, 신성LV5, 파괴LV3.

-설명 : 데스티아 여신교의 수호자 미크엘의 검. 수호자의 신성과 그의 기상이 머금어져 있다.

"미쳤다!"

수호자 미크엘의 장검을 든 나는 환호를 멈출 수 없었다.

여러 무기 중에서 가장 많은 직업군이 공통적으로 쓰는 것은 일단 검이다.

문제는 이 게임에서는 중량이 높을수록 기본 데미지가 높다는 거다.

한손검이고 그 길이가 짧을수록 데미지는 적어진다.

내가 이전에 들고 있던 미치광이 광대의 검이 가진 공격력 341~365이었는데 이것만 하더라도 사실 엄청난 수준이었다.

그런데 수호자 미크엘의 장검은 무려 두 배를 넘었다.

시중에 이런 유니크 아이템이 풀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가지고 있는 옵션들도 든든하다.

고정데미지는 물론 피해량 대비 쉴드가 생기는 것은 놀라울 정도다.

먼저 공격을 하면 생기는 쉴드량은 결사항전의 영역의 체력회복에 비할 정도였다. 특히 쉴드가 계속 누적이 된다면 난 30초 이후에 보스급의 탱킹도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일인군단.

이 검을 쥔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말일 것이다.

"이 엄청난 선물은 밤을 샌 보람이 있었어!"

내가 미크엘에게 매달리고 24시간은 가볍게 넘었다. 지금 이 움켜쥔 검의 가치를 생각하면 그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만약 이 퀘스트를 한 번 더 반복할 수 있다면 당장에라도 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간에 알뜰하게 썼던 미치광이 광대의 검은 인벤토리에 넣었다. 강화석으로 LV3까지만 강화를 해서 팔면 목돈이 들어올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지금 얻은 수호자의 날개를 쓰면 그간에 보지 못했던 숨겨진 장소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행복회로가 돌아가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히죽이죽 새어나오는 웃음을 억누르고 미크엘에게 갔다.

미크엘은 체력이 닳은 상태로 있었다. 수호자의 날개도 여전히 활짝 핀 그는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너의 힘. 잘 보았다."

"시험은 통과지?"

"물론이다. 몇 번을 죽었는지 모르겠다만. 충분해 보이는군."

미크엘은 내가 쥔 검과 활짝 편 날개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알짜배기만 잘 가지고 온 것 같았다.

"네가 불사자의 자격이 있다는 것은 알겠다. 최소한 도전할 자격은 있더군."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지?"

"칠대악룡의 추종자들이 이 신전에도 있다. 그들을 함께 처단하는 것이 먼저다."

"좋은 소식이네."

다른 것보다 미크엘이랑 함께 움직인다는 사실이 든든했다. 사실상 저놈만 앞세우면 내가 검 한번 휘두를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퀘스트가 등록되었습니다.]

"날이 밝고 나에게 오라. 부정한 자들을 심판하고 교주에게 가겠다."

미크엘이 합류한다면 이 퀘스트는 두고 볼 것도 없이 끝난 것이다.

[배신자 처단.]

-칠대악룡의 추종자가 데스티아 여신교에도 스며들었다. 이들을 찾아내 심판하자.

-완료 조건 : ??? 처단.

-실패 조건 : 요한의 죽음.

거슬리는 점은 바로 요한의 죽음이다.

타임어택인지 아니면 조건부인지 모르겠지만, 요한을 무조건 살리는 것에는 환영이다.

나도 사람인지라 미크엘의 앞에서 게임을 종료했다.

히든레코드와 커뮤니티에서는 새로운 던전의 소재지에 대해서 설왕설래가 있었다. 아직은 누구도 그 조건을 찾지 못한 것 같으니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고된 게임 끝에 숙면인지라 나도 모르게 12시간 이상을 잤다. 워낙 피곤해서 전혀 잠을 잔 것 같지가 않아 몸이 찌푸둥했다.

일어나기도 귀찮아 누운 상태로 늘어지게 기지개를 펴며 빈둥거렸다.

오랜만에 코인이나 할까 싶을 정도로 상한가를 친 차트들을 보며 군침을 삼키다가 라면에 계란을 푸는 호사로 간단하게 끼니를 때웠다. 그마저도 모자라 냉장고에 넣어 둔 찬밥도 꺼내 말아 먹은 뒤에야 허기가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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