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5화 고인물은버겁다.
촤아아악!
미크엘은 방금 전의 공격을 다시 시작했다. 대각선으로 길게 휘둘러지는 검을 어떻게 피할까.
날갯짓으로 느려진 이동속도를 생각하면 다른 방도가 필요하다.
먼저 택한 것은 백스탭이었다. 이걸 쓰면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공격 직전의 모션이 컸기에 공격 범위도 유독 넓었다.
검에 실린 오러도 일반적인 공격보다 더 오랫동안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서걱.
백스탭으로 물러났음에도 그 궤적에 내 몸이 그대로 남아 버린 것이다.
[YOU DIED.]
죽음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다시 미크엘이 빛의 날개를 꺼내는 패턴까지 오기 위해 무려 여덟 번을 추가로 죽었다. 그중에서 제일 까다로운 것은 맨 처음의 그 변태 같은 타이밍의 공격과 경비병이 난입한 십자검기 패턴이었다.
후웅! 후웅!
빛의 날개를 꺼낸 미크엘이 날갯짓으로 나를 압박해 왔다. 이동속도가 느려진 상황에서 놈은 떨어져 내려오며 검을 휘둘렀다.
백스탭은 이전에 써 봤으니 구르기를 사용했지만, 이 역시도 죽음에 빠졌다.
[등가교환의 방패를 사용합니다.]
내 선택은 등가교환의 방패였다. 어차피 공격은 큰 스킬이 빠진 뒤에야 한 번씩 케첩에 감자튀김을 찍듯이 하는 수준이라 몇 초간의 공격포기는 아무런 일도 아니었다.
[YOU DIED.]
"이것도 죽는다고?"
문제는 등가교환의 방패로도 그 일격을 버텨 내지 못한 것이다.
단 한 번의 검격은 내 방어력으로는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위력이었다.
레벨 99의 수호자와의 격차이니 이건 겸허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결사항전의 영역도 무리네."
등가교환의 방패를 써도 한 번에 죽는다면 결사항전의 영역을 통한 이기적인 딜교환도 성립이 안 된다는 거다.
남은 것은 어떤 방법이 있을까.
골머리가 아파 왔다.
2분 20초의 벽. 이걸 깨지 못하고 물러나기에는 너무 아쉽다.
닥사를 통해 레벨업을 하면 언젠가는 깰 수 있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힘들지만 지금 수준의 나도 분명히 깰 수 있다고 여겨져서다.
내가 죽는 순간의 영상을 틀어서 어떻게 피할까 고민을 했다.
높게 올라 사선으로 휘둘러서 내려오는 검격을 튕겨 내기로 막아 보는 것이 어떨까.
사선으로 내려오는 각도를 기억해서 다시 도전을 했다.
[YOU DIED.]
이번에도 죽었다.
미크엘의 검이 조금 더 아래로 휘둘러져 허리를 베어 냈기 때문이다.
다음에도 다시 도전을 해 튕겨 내기를 시도했지만, 이번에는 검이 가슴팍을 베고 지나갔다.
"왜지?"
미크엘의 비행고도가 달라져서일까. 예전 버릇이 도져 0.3 배속으로 천천히 일련의 동작들을 살폈다.
여러 가지로 검토한 결과, 내가 검을 뽑는 순간마다 미크엘의 손목이 조금씩 틀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튕겨 내기가 불가능해."
난 검을 예측해 휘두르지만, 미크엘은 끝까지 보고 휘두른다.
가위바위보를 할 때, 상대가 다 펼친 손가락을 보고 난 뒤에 하는 격이니 이건 이길 방도가 없었다.
죽이면 죽는 수밖에 없다.
"뭐가 있을까. 뭐가."
내가 가진 스킬들을 전부 펼쳐 놓고 고민했다. 어떤 것이 지금의 나를 살릴 수 있을까.
도대체 뭘 해야 내가 나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혼자 주저앉아 고민하던 끝에 스킬 하나가 눈에 거슬렸다.
2단 점프.
저 스킬로 인해 나는 공중에 두 번 뛸 수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 번 뛴 다음 한 번의 동작을 더 할 수 있었다.
"저거다."
2단 점프는 정확하게 말하면 공중에서 1회 행동권을 더 주는 셈이다. 또 뛰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 공중에서 백스탭이 사용 가능했었기 때문이다.
무릎을 가슴에 닿을 듯이 높게 뛰어 첫 번째 공격을 피하고 백스탭으로 아직 허공에 남아 있는 검의 궤적을 피하면 확실히 살아남을 수 있다.
이미지 트레이닝을 마친 후에 다시 미크엘과의 전투를 시작했다.
세 번을 더 죽으며 다시 빛의 날개까지 진행되었다.
높게 날아오른 놈이 날갯짓으로 압박해 옴과 동시에 검을 휘두르려는 모션을 취했다.
그걸 보자마자 제자리에서 크게 뛰었다.
촤아악!
길게 공간을 베어 가는 궤적이 아래를 채웠다. 이대로 떨어지면 죽는다.
상체를 틀어 방향전환을 하며 백스탭을 했다.
"좋아!"
드디어 이 괴랄맞은 일격을 피했다.
2분10초. 마의 2분을 드디어 깰 지도 모른다. 잠깐의 성공에 흔들릴 필요도 없이 똑같은 패턴의 공격을 한 차례 더 피했다.
미크엘에게 고마운 점은 광역범위기를 제외하면 두 번 이상으로 같은 공격을 해 준다는 거다.
"칠죄종의 힘을 보이란 말이다."
미크엘은 요리조리 피하는 나를 보며 분개했다. 놈의 체력게이지 밑의 아이콘들을 보니 이동속도와 공력력 상승 버프가 생겨 버렸다.
"미치겠네."
지금보다 더 빨라진다.
이걸 생각하면 치가 떨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건 다음 페이즈를 위한 시그널일 수 있다. 이때까지 하지 않았던 칠죄종의 힘을 언급한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미크엘은 처음부터 불사자로서의 힘을 볼 것을 원했으니까.
불사자만이 가지는 칠죄종의 스킬. 나도 그걸 꺼내고 싶지만 NPC들 상대로 강력한 상태이상 스킬은 써 봤자 나에게 돌아온다. 그나마 식탐의 미련함은 체력과 마력을 높여 주는 것이라 지금 상황에서는 쓸모가 없다.
10초 동안 불사로 만들어 주는 분노의 전투도 있지만, 이건 그 뒤에 죽어 버리니 패스.
상대의 스킬을 1회 복사하는 시기의 거울 뿐이다.
"…해 보자."
어차피 나만이 진행하고 있는 스토리다. 어쩌면 나만이 진행하는 스토리일 수 있다.
[시기의 거울을 사용합니다.]
"원하면 해 줘야지."
미크엘에게 버티면서 가장 까다로웠던 것을 꼽자면 압도적인 스펙이었다. 거기서 나오는 가벼운 동작은 잠깐이라도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으면 곧바로 죽음에 다다른다.
몇 번이나 같은 패턴에 죽으면서 그걸 하나하나 파악해야만 한다.
[창조의 어머니는 모방이라지? 너의 것. 내가 기꺼이 써 주겠다.]
시기의 엔비. 그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미크엘이 가진 여러 스킬 중 하나가 나에게 들어왔다.
[수호자의 날개.]
-종류 : 패시브 스킬.
-효과 : 사용자에게 비행 능력을 부여합니다. 물리방어력, 마법방어력 300 상승. 근력, 민첩, 지구력 50 상승. 신성LV10. 비행LV7.
"미친."
그야말로 억 소리가 나오는 스킬이었다.
비행 하나만 붙어도 매력적인 스킬일 것인데 추가 옵션들 하나하나만 따져도 지금의 나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 할 것이었다.
미크엘의 것처럼 내 등에도 날개가 돋아났다.
같은 스킬이라도 NPC와 유저를 비교하자면 압도적으로 후자가 유리하다.
스킬을 쓰는 타이밍과 연계 자체가 달리지기 때문이다.
물론 문제도 있다.
내가 불사자라는 점이다.
보정수치가 없는 나는 인생에 써 본 적도 없는 날개를 조정해야만 한다.
쿵! 쿵!
"큭!"
미크엘처럼 찬란한 빛이 아닌 날개를 어떻게 해서라도 움직이려고 했지만, 내 두 발은 땅에서 떨어지기는커녕 자꾸 앞과 뒤로 흔들렸다.
촤아아악!
"놀라운 힘이었다만 그걸로는 무리다."
그 추태를 보던 미크엘이 검을 그었다.
[YOU DIED.]
물리방어력이 추가가 되었어도 일검에 죽는 것은 다름이 없었다.
다시 살아난 나는 미크엘에게 가자는 사제의 재촉을 씹었다.
칠죄종 스킬을 하나 사용함으로서 능력치 상승효과는 30%에서 20%로 감소했다.
스태미나야 둘째치고 민첩이 느려진 것은 치명적이다.
이 차이로 인해 첫 번째 공격은 물론 날개 패턴에서의 난이도가 또 오르기 때문이다.
"뭔 특별한 이벤트라도 나오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첫 번째 공격만 넘기면 다르다.
경비병들이 나오는 패턴에서 칠죄종의 추종자를 먼저 죽인다면 다시 능력치 버프를 30%로 돌려놓을 수 있다.
"날 납득시켜라. 불사자. 시련을 견뎌 낼 수 없다면, 여신의 명으로 널 소멸시키겠다."
다시 마주한 미크엘은 귀에 딱지가 앉아서 다 외워 버린 저 말을 내뱉었다.
검을 뽑아 인상을 찌푸릴 때.
[YOU DIED.]
"씨발."
백스탭을 썼음에도 죽었다.
전의 영상과 비교를 하니 내가 반응하는 속도가 느려졌다. 지금보다 더 빠르게 백스탭을 써야만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셈이다.
"와. 이게 이렇게 돌아오네."
스노우볼이 너무나 크게 작용했다.
시기의 거울을 썼다는 것이 실수라고는 생각이 되지 않았다.
수호자의 날개라는 사기적인 스킬을 1회지만 마음껏 쓸 수 있는 기회를 낭비한 실력부족이 문제였다.
"…해 봐야지. 재밌네. 아주."
미크엘의 패턴은 뒤로 갈수록 점점 더 빨라지고 일반공격의 범위도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미크엘에게 도전했다.
이번에는 첫 번째 공격을 피하는 것을 시작으로 전투를 지속했다. 처음이 어려울 뿐이지 낮아진 능력치에도 적응하자 못 피할 것은 아니었다.
갈증을 느끼는 것은 칠대악룡의 추종자였다.
경비병이 난입하고 미크엘이 십자검기 패턴. 한 차례 경비병들을 훑어 체력이 거덜 난 놈들 속에서 단 하나를 노렸다.
불사자의 눈에 아른거리는 칠대악룡의 추종자!
푸욱!
"커허억!"
날 노리는 놈들을 무시하고 억지로 검을 비집어 찔러 냈다.
[시기가 상승합니다.]
부족한 양은 채웠지만, 한 번으로 100 스택이 다 찼을 리가 없다.
[YOU DIED.]
칠대악룡의 추종자가 여럿이 나오는 것이 아니니 그대로 죽음을 받아들였다.
이 반복작업을 통해 다시 시기를 최대로 채웠다.
후우우웅!
다시 돌아온 미크엘의 첫 공격은 스스로 놀라울 정도로 완벽한 타이밍으로 피했다.
촤악!
"이게 되네."
그뿐만이 아니라 다음 공격을 피한 뒤에 어깨를 베는 것도 가능해졌다.
미크엘을 상대하는 것에 완벽한 해결책이 생긴 것은 아니지만, 답보하지 않고 한 발자국씩 나아가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어차피 나 아니면 아무도 못 깨니까!"
전 세계의 엘리멘탈 소울2 유저들을 깡그리 모은다고 하더라도 누구도 미크엘을 상대하지 못할 것이다. 거듭된 죽음에 자신감이 무너질 것이고 모두 좌절할 것이다. 나아가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다.
나는 다르다.
남들이 서로 어깨를 마주하고 하하호호 즐길 때, 똑같은 적에도 똑같은 방법으로 수백 번을 죽어도 웃을 수 있다.
[시기의 거울을 사용합니다.]
"가질 때 까지 한다."
내가 60레벨이 되어 얻은 것은 칠죄종 스택을 쉽게 얻을 수 있는 불사자의 눈만이 아니다.
불사자의 경험. 수치화가 되지 않아 얼마나 낮은 확률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적과의 싸움에서 스킬을 획득할 수 있다.
이때까지 아무것도 없었다.
경비병과 경비조장, 기사, 사제, 사교도의 끄나풀에 이어 눈앞의 미크엘까지.
난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불사자의 경험으로 스킬을 얻는다면, 이건 미크엘이어야만 한다.
레벨 99. 최강의 적이 가진 저 막대한 저력의 일부를 이미 맛보지 않았던가.
허기가 느껴졌다.
이 지독한 굶주림을 참을 때까지 죽고 또 죽을 것이다.
"수호자의 날개?"
맙소사.
시기의 거울로 얻어 낸 스킬이 또다시 수호자의 날개라는 것에 두 눈이 반짝였다.
미크엘이 보인 공격패턴을 보면 스킬이 한두 가지가 아님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수호자의 날개가 다시 생겼다.
이것도 신호일까.
아니면 운일까.
어느 것인지 모르지만 다시 날개를 움직였다.
후욱! 후욱!
두 팔은 날개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 날개뼈와 척추를 조금씩 돌리는 느낌으로 상체를 움직이자 불안전하지만 두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그마저도 균형이 맞지 않아 우측으로 쳐졌지만 이건 가시적인 성과다.
미크엘이 공격모션을 취하자 더 높이 올라갔다. 그러자 놈 또한 내가 올라간 만큼 떨어지는 각도를 조절해 공격해 왔다.
백스탭은 지면이 없으니 답이 없었다. 그래서 구르기라도 쓰려고 했지만 수평으로 몸이 기울어질 뿐 사용이 되지 않았다.
[YOU DIED.]
"…이게 안 되네."
2단 점프 때처럼 될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아예 비행능력으로 저 공격을 피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