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3화 고인물은수호자와.
로딩이 끝난 후에도 펼쳐진 것은 좁은 땅굴이었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네 발로 기어가는 불편한 경험은 병장들이 다리를 벌리면 개소리를 짖으며 가야만 했던 그 시절을 가끔 떠오르게 했다.
쿵. 쿵.
"여긴가."
앞으로 기어가던 중에 무언가에 막혀 나아갈 수 없었다.
손으로 두들기자 나무가 아니라 석재로 된 벽 같았다. 여기가 막혀 있다면 신전 내에 들어갈 방도가 막막했다.
죽어봐야 잃을 것도 없으니 검을 들었다. 이까짓 장애물 따위 부수면 끝이다.
저벅. 저벅.
힘껏 검을 찌르려는데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모르기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드르르륵.
갑자기 앞을 막은 벽이 밀려났다.
"수호자께서 이르시길 이곳을 찾아올 이가 있다 하였으니 그게 귀하인가 봅니다."
잠깐 경계를 하는 사이에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수호자라면 미크엘이다.
여신의 선택을 받은 존재니 그런 신통력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은은한 빛이 보이는 바깥으로 나왔다.
지하밀실로 보이는 곳에는 데스티아 여신교의 사제 하나만이 등불을 들고 나를 볼 뿐이었다.
"미크엘이 보냈나?"
"수호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습니다. 이곳은 여신의 신전입니다."
"교주가 보냈다."
"전 수호자님이 보냈습니다."
데스티아 여신교의 사제는 한 치의 물러남이 없었다. 이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수호자의 위치가 이 정도다.
"미크엘에게 안내해 다오."
"수호자님께는 그런 불손한 태도를 갖추지 마십시오."
"생각해 보고."
"흥."
사제는 불편한 심사를 감추지 않았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는 들고 온 자신과 똑같은 옷을 건넸다.
"요한의 것입니다. 깨끗이 씻어도 돌려주시면 됩니다."
요한의 것이라고 하니 궁금한 마음에 상태를 확인했다.
[요한의 사제복.]
-등급 : 레어.
-방어력 : 186.
-효과 : 마나 최대치 100 상승, 상태이상 저항 20% 상승, 스킬쿨타임 10% 감소, 지능 5상승, 지혜 5상승, 신성LV3.
-설명 : 요한이 입는 여분의 사제복. 그의 기운이 남아 따스함과 자애로움이 남아 있다.
등급에 비하면 모자란 스펙이다.
중요성에 비해 활약이나 쓸모가 없는 요한을 그대로 표현한 것 같았다.
"위로 올라가면 병사들이 보일 겁니다. 그냥 조용히 따라오십시오. 물론 뒤의 종마는 이곳에 남아야합니다."
사제의 말에 임프는 심심하다가 반항을 했다. 결국 떠들어대는 입가에 와인 하나를 쥐어주는 것으로 마무리 했다.
"악마에게 술 줘도 되나?"
"악마를 사육한다고 당신이 악마입니까. 악마를 다루는 악마가 아니라 악마를 다스리는 성인이 되십시오."
"……."
비록 NPC지만 저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다.
지하를 벗어나자 곳곳에 대기 중인 경비병이 사제와 나를 흘겨보았다. 개중에는 나를 죽인 사냥개와 경비병도 있었다.
내가 진짜 코앞까지 왔었는데 죽었구나라는 안타까움과 함께 비밀통로를 찾지 않았다면 결국 대학살극을 펼치며 여기까지 왔겠구나 싶었다.
후자를 택하면 레벨은 하나라도 올리겠지만, 그렇게 레벨업을 한다고 다가 아니다.
신전의 중앙에는 데스티야 여신의 석상이 있었다. 그 머리 위의 천장에는 데스티아 여신의 일대기가 벽화로 그려져 있었고 기둥에는 그녀의 말이, 바닥에는 역대 교주와 수호자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었다.
그 앞에는 은색 갑옷을 입은 사내가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수호자 미크엘.
바로 그였다.
"미크엘 님, 손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그대는 돌아가 쉬도록."
"예."
날 인도한 사제가 물러난 뒤에 미크엘은 천천히 무릎을 폈다.
LV99. 수호자 미크엘.
지금 그의 머리 위에 새겨진 글자였다.
레벨이 표시가 된다는 것은 전투가 가능하다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난 교주에게 말했지. 불사자를 보는 것은 단 한 번뿐이라고."
퀘스트가 완료되었지만 어쩐지 상황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
미크엘이 옆구리에 찬 검을 천천히 뽑았기 때문이다. 수호자의 신성력을 받아 달빛보다 찬란한 오러는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입안이 바싹 말랐다.
이 전개는 수호자와의 전투다.
레벨이 99라면 사실상 최종보스에 준하는 급인데 어떻게 싸우라는 것일까.
[퀘스트가 등록되었습니다.]
"날 납득시켜라. 불사자. 시련을 견뎌낼 수 없다면, 여신의 명으로 널 소멸시키겠다."
미크엘은 섬뜩한 말과 함께 내게 달려들었다.
[YOU DIED.]
피하기 위해 발을 움직일 때는 이미 시야는 검게 물들어진 후였다.
* * *
[수호자의 시험.]
-데스티아 여신교의 미크엘은 당신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다. 그의 시험에 합당한 실력을 보여 수호자의 지원을 받아내자.
-완료 조건 : 미크엘과의 대련(05;00).
-실패 조건 : 퀘스트 포기.
미크엘과의 대련은 이기라는 뜻이 아니다.
결국 5분을 버티라는 것이다.
"말은 쉽지."
처음에는 그가 날 죽일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수호자는 유저가 가질 수 없는 NPC들만의 클래스였다. 기사와 성직자의 조합이라고 생각이 드 수 있지만, 이건 인간의 한계점까지 모든 능력을 끌어다쓰면 된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 전작에서의 설정은 물론 데이터베이스를 뜯어 본 해커들이 증언했었다. 유저들이 모든 장비를 유니크로 플렉스하고 치트로 모든 능력치를 최대로 찍으면 딱 수호자라고 말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불사자인 나를 제외한 유저들의 최대레벨은 100일 것이다. 그 직전에 다다른 미크엘은 62레벨짜리인 나보다 강한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었다.
"도전하자."
몇 번이나 죽었더라. 그걸 계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다시 지하실에서 요한의 사제복을 입고 신전 중앙의 기도 중인 미크엘에게 마주한다.
"난 교주에게 말했지. 불사자를 보는 것은 단 한 번뿐이라고."
돌아오는 것은 똑같은 대답이다.
"날 납득시켜라. 불사자. 시련을 견뎌낼 수 없다면, 여신의 명으로 널 소멸시키겠다."
천천히 검을 뽑고 자세를 취한다. 헬멧을 써도 가려지지 않는 부리부리한 두 눈이 나를 보며 찡그려질 때.
후우우우웅!
곧바로 백스텝을 사용했다.
어느새 미크엘의 검이 내가 있던 곳을 가른 것이다.
이 공격을 막기 위해 나는 열 번이나 도전했다. 조금이라도 빠르면 백스탭이 끝난 후에 죽고 조금이라도 느리면 백스탭을 펼치기 직전 죽기 때문이다,
1초의 짧은 시간도 쪼개야만 하는 심정을 과연 누가 알 수 있을까.
장담하건데 이걸 다른 직업의 유저가 깨려고 한다면 이를 악물고 아이템을 유니크로 도배하고 강화작업까지 다 마쳐야만 할 것이다.
방금 전의 일격이 끝나고 내가 숨을 돌리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단 3초다.
남은 시간은 4분 57초다.
"제법."
미크엘이 가볍게 검은 흔들었다. 먼지라도 털어낸 것인지 아니면 잠자리를 유인하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검이 한 바퀴 원을 그리는 순간에 다음 공격이 온다.
후우우우웅!
첫 번째 공격은 백스탭이 아니면 무조건 죽는다. 그런데 두 번째 공격 중에는 쿨타임이었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면 아주 조금 느렸기에 구르기를 사용할 시간은 남는다는 거다,
후우우웅!
구르기를 할 때도 팔과 다리를 조심해야만 한다.
옆으로 구를 때 다리를 붙이면 허벅지 부분이 잘려 죽기 때문이다.
검은 아슬아슬하게 다리 사이를 갈랐다.
"모자라."
미크엘은 덤덤하게 중얼거리며 검극을 내게 겨눈다.
이때의 해답은 없다. 백스탭이 쿨타임이 돌았지만 써서 재미를 본 적이 없었다.
등가교환의 방패도 마찬가지다.
두 팔을 벌리며 충격을 대비했다.
타앙!
총을 쏘는 것만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보다 더 빠르게 내게 다가온 미크엘의 검이 가슴팍에 구멍을 냈다.
"커허억!"
왜 이걸 맞았냐면 앞선 베기가 일반공격인 것과 달리 찌르기는 엄연히 스킬이기 때문이다. 자포자기하고서야 알았는데 이 찌르기는 모든 방어력을 무시하고 체력을 1로 만들어 버렸다.
도대체 이 무시무시한 스킬을 누가 만들었는지 유저가 사용가능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맞은 뒤에 빠른 회복이 급선무다.
"힐."
저번에 배워 두고 어디에도 써먹지 못한 힐을 이때서야 쓸 수 있었다.
5초 동안 미크엘은 내게 시간을 준다. 이때 체력회복을 못하면 다음 공격에 죽는다.
"갈라져라."
미크엘이 검을 휘저었다. 검에 머금어진 오러가 검의 궤적을 따라 내게 쏘아졌다.
촤좌좌좍!
열 개의 검기가 나를 노리며 쏘아졌다. 이건 공격속도가 빠른 편은 아니라 비교적 쉬운 구간이었다.
이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적으로 20초였다.
검기는 얄궂게도 신전은 상처 입히지 않고 사라졌다.
"불사자의 힘을 보여라."
수호자는 여기까지 넘어가면 공격을 하지 않고 자신의 가슴을 두들겼다. 이건 도발스킬로 여기에서 10m는 벌려야만 한다.
방금 전에 검기를 피한 것을 보면 그만큼은 확보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플레이어가 상태이상 도발에 걸렸습니다.]
"제길."
알림은 내가 모자랐음을 알려 줬다. 통제를 잃은 두 발은 미크엘이라는 괴물에게 달려 나갔고 두 팔은 오로지 공격만을 원했다. 힘껏 휘둘러진 검은 오로지 궤적을 조절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터엉!
미크엘은 마치 우둔한 NPC들을 조소하던 나처럼 비웃었다. 또한 나로서는 따라할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한 동작으로 튕겨내기를 한 후에 무력화가 된 내 가슴팍에 검을 찔러 넣었다.
[YOU DIED.]
"죽고 다시 도전하라. 불사자."
검게 물들어진 시야에서 미크엘은 말은 승부욕을 자극했다.
검기를 뿌리는 패턴에서 익숙해진 나머지 나도 모르게 거리를 좁힌 것 같다.
다시 부활해 미크엘을 상대했다.
[YOU DIED.]
"씨발."
이번에는 첫 번째 패턴부터 삐끗했다.
타이밍을 못 맞춰서 백스탭을 쓰기도 전에 가슴팍이 갈라진 것이다.
"침착하자. 침착해."
오랜만에 이 게임의 장르 중의 하나가 로그라이크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이런 식의 게임이 참 싫으면서도 중독이 심한 것이 잠깐만 방심해도 죽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RPG요소가 있더라도 나의 강함은 남과 다르기에 오는 괴로움이 이런 부분이다.
상식을 벗어난 강함.
상식을 벗어난 약함.
두 개가 공존하고 있음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아무도 없다.
"날 납득시켜라. 불사자. 시련을 견뎌낼 수 없다면, 여신의 명으로 널 소멸시키겠다."
다시 미크엘이 눈을 찡그려짐과 동시에 백스탭을 사용했다.
첫 단추가 잘 채워진 관계로 검기 패턴과 날 도발시켰던 것도 피할 수 있었다.
"덤벼라. 그 힘을 보이란 말이다."
도발 뒤에 미크엘의 얼굴은 살짝 상기가 된다.
불사자인 내가 공격은커녕 피하기 급급한 것에 무시를 당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이때의 미크엘의 공격속도는 대폭 느려진다. 물론 느려진다는 것도 상대적이다.
막무가내로 휘두르는 검 하나하나는 암살자의 일격만큼이나 빨랐으니까.
촤아악! 촤아악!
길게 그어지는 검은 지평선에 닿을 것처럼 길다. 이걸 피하려면 패턴을 외워서 움직여야만 한다.
버피 테스트와 PT 체조라도 하는 것처럼 바닥을 뒹굴고 몸을 접고 펴야만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하더라도 남는 시간은 4분20초였다.
"씨발."
전역을 기다리는 말년병장도 아니고 1초가 1시간처럼 느껴지는 경우는 오랜만이다.
월세를 벌려도 종일 기계적으로 닥사만 하던 것도 지금보다는 시간이 잘 갈 것이다.
그래도 마냥 피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미크엘이 한 발을 땅에 떼고 검을 힘껏 내려찍을 때가 있다.
터어어엉!
이때 홈런을 치듯이 검을 휘두르면 튕겨내기가 성공한다.
4분대의 시간 중에서 내가 유일하게 발견한 반격 타이밍이다. 다만, 상대의 공격이 너무 세서 폭음 후에 필름이 끊길 것처럼 시야가 흔들렸다.
이걸 억지로 참아내며 공격을 해야만 한다.
경직된 상대이니 본 브레이커가 자연스럽게 생각이 나지만. 그랬다가는 큰일이다.
본 브레이커의 효과는 경직된 상대에게 기절효과를 확정적으로 준다는 거다. 그래서 신이 나서 썼다가 크게 후회했었다.
미크엘은 모든 상태이상을 되돌려 주는 사기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