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고인물은기대한다.
"커허억!"
경비조장의 등에 연달아 검을 휘두르자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남은 경비병 셋은 거리를 벌려서 찌르기를 유도한 뒤에 접근해 하나씩 줄여나가는 것으로 승부를 봤다.
"놈이 지쳤다! 나서라!"
스태미나를 채우자마자 2열이 전진했다.
구성도 아까와 같았다. 거리를 눈대중하며 마나포션을 마셨다.
방금 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상대를 하면 될 것이다.
"구원자도 나타났다!"
"저놈도 죽여!"
갑자기 경비병들이 단체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외침에 뒤를 돌아보니 이때까지 잠잠히 있었던 요한이 움직인 것이다.
"썩이나감 님, 이쪽입니다!"
"어디로 가는 거야?"
"여기요! 여기!"
요한은 판잣집 하나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로브를 푹 둘러쓴 이들이 손짓을 하고 있었다.
[요한과 이동하라.]
목표도 그를 쫓는 것으로 바뀌었으니 얼른 등을 돌렸다.
투두두둥!
뒤에서는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화살이라는 것은 보지도 않아도 알 수 있다. 전력으로 판자집으로 들어갔다.
퍼버버벅!
그러자마자 지붕에 화살이 박혔다. 그래도 건물이라는 구색을 맞췄는지 화살이 뚫고 들어오지는 않았다.
"우리를 따라오십시오."
"제발 도와주십시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들은 바닥을 망치로 부쉈다. 그러자 사람 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이 보였다.
"이거 확실해?"
"지금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요한은 먼저 땅굴로 들어간 사내를 따라갔다.
잠깐 망설였지만 나머지 하나가 판자집에 불을 피웠다.
"놈들이 자살을 시도한다!"
"불을 꺼! 시체를 확보해!"
바깥에서 들리는 경비병들의 외침 때문에라도 땅굴에 들어가야만 했다.
땅굴은 무척 좁았다. 네 발로 기어가는데 머리 위로 경비병들의 부산한 움직임과 외침들이 들렸다.
짧은 로딩 후, 동굴의 끝은 지하실과 연결이 되었다.
"어서 오십시오. 구원자님. 그리고 수호자님."
지하실에서 요한과 나를 기다린 것은 늙은 노인이었다. 구부러진 등 때문에 지팡이를 짚고 서있는 그의 머리 위에는 빈민촌 촌장이라는 글자가 적혀져 있었다.
내가 나설 것도 없이 요한이 촌장과 이야기를 나눴다.
둘의 이야기를 들으니 사교도로 인해 빈민촌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아웃사이터 시티를 장악한 인간들에 대한 불만이 많고 다양한 인종이 있기에 대놓고 배척을 하지 않고는 있지만, 그들에 대한 불안감과 불안함이 가득 차 오른 상태라고 했다.
"그래서 아웃사이터 시티로 그들이 옮겨가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다른 신을 믿는다는 이유로 이단심판관들에게 시달리는 무고한 이들입니다."
노인은 말을 오래해 숨을 헐떡이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마을을 구해 준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경비들의 수가 너무 많았어요.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이단심문에 체포된 자들의 처벌이 내려지기 때문에 길목이 통제가 된 겁니다. 이방인인 여러분들은 더 이상 엮이지 말고 이곳에서 쉬십시오."
촌장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사내들의 부축을 받아 지하실을 빠져나갔다.
요한은 지하실에서 왔다갔다하면서 고민을 했다.
다음 빈민구제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눈에 선했다.
"썩이나감님."
"응. 말해."
"도와야합니다."
"그러시겠지."
예상했던 것이니 요한을 따라 지하실을 나갔다.
[이단심판의 현장에 입장하시겠습니까? Y/N.]
지금에서야 던전이 된다는 것은 의외기는 했다.
미련없이 Y를 눌렀다.
예외라면 던전의 입장조건 문구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 정도일까.
내 레벨대에 맞는 것이라면 던전 공략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지하실을 벗어나고 요한은 빈민촌의 광장으로 갔다. 광장이라고 해 봐야 그렇게 크지도 않았다. 공동으로 쓰는 우물 하나가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두운 저녁, 공포와 분노에 찬 군중. 그 속에 만들어진 단상에는 이단심문관인 이어라의 사제와 기둥에 묶인 이들이 있었다.
단상의 주변에는 기사가 10명이고 경비병이 100명은 되어 보였다.
"난이도가 급상승하네."
이건 공략법을 찾기 전까지 고생을 좀 할 것 같다.
"아웃사이더 시티에 사교도의 책과 말을 전파하는 불순한 무리들이 있다. 먼저 무고한 민초들을 현혹한 그들을 사형에 처한다!"
이어라의 사제가 고함을 치자 경비병들이 쇠사슬로 칭칭 감은 이들을 끌고 왔다.
아웃사이더 시티에서 책들을 유통하던 이들과 똑같은 생김새였다.
"시, 신을 믿으라. 두려워 말라!"
"일곱 개의 구원을 기다려라!"
죄인들은 벌벌 떨면서 소리를 쳤으나 사형집행인이 설치한 단두대에 끌려가 하나씩 목이 잘려 나갔다.
"……."
요한을 포함한 빈민촌의 모든 이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비록 게임이라지만 하늘 높이 올라간 단두대가 땅에 떨어질 때마다 가슴이 철렁일 정도였으니까.
그보다 불편한 점은 이 던전에서 내가 싸울 기사와 경비병의 레벨이 표시가 되지 않고 있다는 거다.
설마 지금까지 아무것도 없을 줄은 몰랐다.
개인적으로 놀란 것은 요한이 아직까지 잠자코 있다는 거다.
"사교도들은 같은 교도들에게 온정조차 베풀지 않는 군요."
"그래서 나서지 않은 거야?"
"그 사이한 말을 옹호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이들을 구할 수 없다면, 무고한 이들을 돕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호오."
이런 똑 부러진 면모는 의외일 수밖에 없다.
이때까지처럼 무작정 나설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칠대악룡의 추종자들은 보이지 않으십니까?"
"아직은."
나도 주변을 둘러봤지만 불사자의 눈에 걸리는 이가 없었다.
단두대의 이슬이 된 놈들은 예외다.
"또한 이단심문 끝에 사교도로 증명이 된 이들을 화형에 처한다!"
이어라의 사제는 다음 처벌을 진행했다.
기둥에 묶인 사람들의 발밑으로 장작과 짚더미가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고문에 지친 그들은 축 쳐져서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제가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운명이리라 믿습니다."
요한이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
"…구원자님이다."
"그분이 오셨어!"
몇 걸음 내딛기도 전에 요한을 알아보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소란은 곧바로 이어라의 사제까지 닿았다. 그는 못마땅한 얼굴로 요한을 삿대질했다.
"저놈도 체포해 이단심문을 하겠다!"
그 외침과 함께 기사와 경비병의 머리 위에 레벨이 표시되었다.
LV65. 아웃사이더 시티 기사.
LV63. 아웃사이더 시티 경비조장,
LV62. 아웃사이더 시티 경비병.
경비병은 나와 동레벨인 것을 감안하면 이 던전은 나에게 유리하다.
기사와 경비병들이 파도처럼 쏟아졌지만, 저것에 대응할 방도는 있었다.
[음욕의 속삭임.]
-종류 : 액티브 스킬.
-효과 : 지정된 장소의 30M 범위의 모든 NPC를 흥분시켜 피아구분 없이 싸우게 만듭니다.
-음욕 소모량 : 100.
적이 다수의 NPC라면 버그라고 칭해도 될 정도의 미친 스킬이 있으니까.
불사자의 눈으로 음욕 수치를 채우면 되니 아깔 것도 없다.
[음욕의 속삭임을 사용합니다.]
스킬의 시전범위는 우물 정중앙으로 했다.
군중은 물론 단상에 영향을 미치지 않아 적의를 드러낸 적들에게만 영향을 끼칠 수 있다.
MAX였던 음욕의 수치가 0으로 떨어졌다.
[내놔라. 너의 모든 욕망.]
음욕의 러스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개처럼 피어오른 진득한 보라색의 연기가 목표지점을 채웠다.
"다 죽여 버린다. 버러지들!"
"계급장 떼고 싸워! 씨발 놈들아!"
"뒤져! 뒤져! 뒤지라고!"
기사와 경비들은 서로 뒤엉켜서 싸우기 시작했다.
나와 상대할 때의 그 질서정연한 움직임 따위는 없었다. 광인이 되어 다리가 부러지고 팔이 베여도 죽기 전까지 멈추지 않고 싸웠다.
"좋다, 좋아."
능력이 상승 버프가 깎여도 눈앞의 적들이 서로 싸우다 죽어나가는 광경은 꽤나 마음에 들었다.
팔짱을 끼고 저 죽음들을 관망하는 것이 얼마나 편한지를 모른다. 이래서 좋은 스킬 구하기 위해 수백만 원을 쓰는 사람이 있는 거다.
기사와 경비병의 특징이 다소 낮은 공격력에 높은 방어력과 체력 때문인지 단 하나가 남을 때까지 무려 5분이나 걸렸다.
"그아아아아아!"
마지막 남은 것은 기사도 아닌 경비조장이었다.
광기에 차서 힘껏 휘두른 검을 튕겨낸 후, 가볍게 글자 그대로 쓰러졌다.
"이이익! 이게 무슨 일이냐!"
이어라의 사제는 무참한 현장을 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퀘스트의 완료 조건을 보니 빈민구제도 8/10에서 9/10으로 상승되었다. 그래도 던전이 끝나지 않는 것을 보니 아직 이벤트 씬이 남아 있는 것 같다.
"네놈이야말로 꺼져라!"
"이어라야말로 사기꾼이잖아!"
"꺼져라! 이 쓰레기야!"
기사와 경비병들이 사라지자 군중들도 고함을 질렀다. 바닥에서 돌을 주워 던지자 이어라의 사제는 머리를 부여잡고 도망을 쳤다.
"빈민을 위하여!"
"구원자가 도와주셨다!"
그걸 본 뒤에 군중들은 환호를 했고 요한은 다시 한번 영웅이 되었다.
던전이 끝난 것은 그 뒤였다.
빈민촌의 광장에는 기사와 경비병들의 시체와 피로 더럽혀 있었고 빈민들은 그걸 일일이 치우고 있었다.
"허어. 이렇게 도와주실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이때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던 촌장은 나와 요한에게 와서 감사표시를 했다.
기사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검과 갑옷, 힐링포션과 30금화였다.
"아웃사이더 시티의 이단심문이 중지가 된 것은 좋으나 마을 사람들이 너무 격앙되어 있습니다. 사교도 또한 은인을 노릴 수 있으니 부디 조심하십시오."
"걱정 마십시오. 아무런 일도 없을 겁니다."
요한은 적당한 말로 위로하고 마지막 빈민구제를 위로 걸음을 옮겼다.
그를 따라가며 느낀 것인데 조금 전의 전투 때문인지 빈민촌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팽팽한 긴장감과 중간마다 보이던 경비병들은 찾을 수 없었다.
"잠깐만. 뭐 찾았다."
그러던 와중에 골목으로 빠지는 사내가 보였다.
불사자의 눈에 보이는 기운이었기에 음욕의 수치를 채우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쫓아야만 했다.
"가, 같이 가요!"
요한은 뒤따라 왔지만 달리기 속도의 차이로 거리는 확 벌어졌다.
"잊지마시오. 우리는 뭉쳐야하오. 일곱 개의 구원이 우리를 찾아올 것이오."
목적지는 버려진 창고였다. 기척을 죽이고 귀를 가져다대니 안에서의 속삭임이 그대로 들렸다.
인원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인 것 같지만, 목소리는 하나만 들리고 있었다.
쾅!
"헉! 누구냐!"
"우리 얼굴을 가려!"
"당장 제압해!"
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안에 있던 이들은 화들짝 놀랐다.
창고 안에 있는 사교도는 여섯 명이었고 후드를 뒤집어쓰니 아웃사이더 시티에서 돌아다니던 그놈들이었다.
"구원자의 검이다!"
"도, 도망칠 수 없잖아!"
"놈도 사람이야. 죽기 전에 죽여!"
"으아아아아!"
날 알아본 그들은 하나씩 좁은 창고에서 일어나 몸을 날렸다. 손목에 숨긴 단검을 뽑아 길게 내지르는데 그때마다 쳐내고 베어 죽이는 것을 반복했다.
[교만이 상승합니다.]
[음욕이 상승합니다.]
[음욕이 상승합니다.]
[인색이 상승합니다.]
[시기가 상승합니다.]
그때마다 칠죄종 스택이 차올랐다. 물론 음욕을 제외한 것들은 다 최대치인지라 스펨메일과 다름이 없었다.
터엉!
마지막 남은 하나의 검도 쳐냈다. 곧바로 죽이지 않고 이번에는 주먹으로 후려쳤다.
콰앙! 쾅!
"커헉! 억!"
빈손이지만 높은 근력수치로 인한 데미지는 높을 수밖에 없다.
사교도는 휘청거리며 비명만 질러댔다. 몇 대를 때리지도 않았는데 체력이 절반 이하로 깎여서 곧 죽이겠구나 싶었다.
"허억! 허억! 무슨 일이십니까!"
"사교도야. 애는 살려 뒀지."
"큰 일을 하셨습니다!"
요한은 사교도라는 말에 방금까지 지쳤던 기색이 온데간데없어졌다.
"이익! 차라리 죽여라!"
사교도는 낌새를 눈치챘지만, 그는 도망가지도 못한다. 방도가 있다면 자살뿐이었다.
"넌 조금만 더 맞자."
사교도를 힘껏 두들겨 기절시킨 뒤에 요한이 그를 포박해 창고에 집어넣었다.
"교주께 급히 연락을 넣을 겁니다. 그러면 이 끄나풀에 대한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
요한은 품에서 작은 보석을 잡고 경건한 기도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