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은 옷을 입지 않아-129화 (129/201)

제129화 고인물은잡혔다.

다시 출입한 투기장의 맞은편에는 상대편 투사들이 먼저 대기를 하고 있었다.

클래스를 보니 쉴드 유저, 스피어 유저와 검투사였다.

각기 다른 직업들이지만 은근히 뭉쳐놓으면 상대하기가 귀찮았다.

특히 스피어 유저는 근접직업군 중에서도 가장 사거리가 긴 직업이었다.

"네가 B등급으로 가겠다고?"

"무리다. 대주먹!"

"깡패와 투사는 다르다."

투사들은 나를 보며 전의를 불태웠다.

그들은 사선으로 대형을 맞추었다. 쉴드 유저가 맨 앞이었고 다음이 검투사, 마지막은 스피어 유저였다. 그 간격에는 조금의 차이도 있었다.

쉴드 유저와 검투사가 거의 등과 어깨를 맞댄 수준이라면 스피어 유저는 다섯 걸음 정도 떨어져 있었다.

NPC의 판단이지만 솔직히 좋은 판단이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검투사는 최종직업이 버서커까지 가는 만큼 근접직업군 중에서도 폭딜을 자랑하는 편이지만 짧은 사거리와 부족한 방어력이 문제라면 스피어 마스터는 긴 사거리로 인해 안정적으로 공격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표는 잡는 다면 스피어 유저다.

시공간이동자의 블링크의 최대이동거리 딱 스피어 유저의 뒤였다.

"놈이 사라졌다!"

"어디에 있지?"

"은신을 한 것일 수 있다!"

오크투사들은 나를 놓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콰드드득!

"으아악!"

무방비인 스피어 유저의 등에 본 브레이커를 사용했다. 놈이 반격을 가하려고 하자 스킬 밀쳐내기를 썼다.

넉백 효과와 함께 평타모션이 캔슬되었고 훤히 드러난 가슴팍을 찌르고 베었다.

"커허억!"

스피어 유저가 뒤로 무너지듯이 물러나자 역섬기검으로 작별인사를 했다.

레벨이 나보다 낮은 NPC가 스킬을 그만큼 버틴 것도 양질의 장비를 갖춘 전사 직업군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이놈! 감히 동료를!"

"반드시 죽여주마!"

쉴드 유저와 검투사가 전의를 드러내며 달려왔다.

먼저 쉴드 유저는 자신에게 아군의 방어력과 체력재생 효과를 상승시키는 버프를 걸었고 검투사는 공격속도와 치명타확률을 높이는 버프를 걸었다.

스피어 유저까지 버프를 걸어줬으면 60레벨이 안 되는 npc들이라고 하더라도 까다로웠을 것 같다.

터엉! 터엉!

"덤벼라!"

쉴드 유저가 무기를 방패에 두드리며 도발을 했다. 그걸 보자마자 곧바로 등을 돌리며 도망쳤다.

게임의 초반부를 지나면서 NPC들은 자신들의 직업에 속한 스킬들을 마음껏 쓰기 시작했다.

쉴드 익스퍼드만큼은 아니지만 쉴드 유저가 가지고 있는 어그로를 끄는 스킬들은 나에게는 쥐약이었다.

타겟형 스킬이 아니라 도망을 쳐서 피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도망치지 마라아아!"

내가 등을 돌리자 검투사의 패시브 스킬은 추격자가 발동되었다. 공격속도와 이동속도가 오르기에 PvP에서는 검투사 유저를 상대로 등을 보이면 안 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검투사는 이동스킬까지 써서 금방 내 앞에 쫓아왔다. 등을 돌리자 두 자루의 검이 X를 그리며 베어왔다.

저 공격은 스킬이니 맞설 엄두를 내지 않았다.

백스탭으로 물러나며 검을 피했다.

반격을 가하기도 전에 검투사가 멈추지 않고 두 자루의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구르기로 옆으로 피해 공격을 흘렸다.

안전거리를 유지한 것처럼 보이지만 쉴드 유저가 반대쪽에서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날 구석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검투사와 쉴드 유저 중에서 선택은 검투사일 수밖에 없었다. 전사 직업군은 마나가 특히 부족하다. 스킬 중에 스태미나를 쓰는 것도 있지만, 방금 전에 쓴 것들은 마나를 소모하는 것들이었다.

반면에 스킬 쿨타임이 돈 내 공격에 반응할 수는 없다.

"놈이 위로 뛰었다!"

"날개도 없는 놈이!"

먼저 2단 점프로 높게 뛰어 올랐다.

쉴드 유저는 방패를 높게 들어 올리며 멈추었지만, 검투사는 내 낙하지점으로 다가왔다.

콰아아아앙!

"아쉽네."

지면강타로 대지를 두들겼다. 충격파의 범위에 들어온 검투사만이 뒤로 밀려났다.

이번에는 본 브레이커로 먼저 가슴팍을 꿰뚫고 역섬기검으로 목을 잘랐다.

검투사의 방어력은 낮은 편이었으니 체력은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안 돼!"

"돼."

쉴드 유저가 급히 지원을 왔지만, 검투사를 돕기에는 너무 느렸다.

마지막 일격을 가해 쓰러트리고 시공간이동자의 블링크로 쉴드 유저의 뒤를 점했다.

[결사항전의 영역을 사용합니다.]

[스피어 마스터의 소울을 사용합니다.]

쉴드 익스퍼드가 각광을 받지만, 그 이전인 쉴드 유저는 수많은 유저들의 기피대상인 이유가 있다. 그건 같은 레벨의 몬스터 하나도 잡기 힘들 정도로 빈약한 공격력 때문이다.

결사항전의 영역까지 펼쳐진 이상 내가 무너질 수 없었다.

소나기처럼 퍼부어진 공격이 쉴드 유저는 10초도 되지 않아 쓰러졌다.

"썩! 썩! 썩!"

"개 쩔잖아아아!"

관중들은 내 이름을 환호했고 두 번째 대결도 성황리에 마무리가 되었다.

남은 것은 다른 서버의 C등급 유저와의 대결이었다.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투기장을 나온 뒤에 마당에서 산책을 기다리고 있는 임프와 함께 투사길드로 돌아갔다.

"시원했다. 정말 잘했어!"

투사길드장은 격려와 함께 퀘스트로 5금화를 주었다. 시간대비 효율을 따지자면 재화수급에는 괜찮은 것 같다.

문제라면 경험치 획득량이 미미하다는 점이다.

"나머지 하나는 어떻게 되었죠?"

"아직 잡히지 않았어. 다들 기다리고 있다고."

투사길드장은다른 유저들을 가리키며 난색을 표했다.

"오늘 종일 안 잡혀요."

"우리 파티는 슬슬 가 볼게요. 이거 때문에 사냥도 못하겠네."

"또 서버문제일려나."

삼삼오오 모였던 유저들은 한숨을 쉬며 길드 바깥으로 나갔다.

커뮤를 확인하니 오크펠슨의 유저들이 다들 같은 문제로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차라라 이 김에 식사를 할 겸해서 게임에서 나와 VIP들에게 주었던 자료들을 다시 정리했다.

한 번 갈무리를 한 것이지만, 첨부할 자료들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을 제외하니 제법 시간이 걸렸다.

컴퓨터가 너무 오래되어서 영상을 갈무리하는 것으로도 다른 작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독고무적 : 얻었다. 고맙군.]

[흑군 : 잘 쓰겠다. 얘 제법 시끄러운데?]

[열파창 : 공략 올려라. 우리 애들도 알려 주게.]

다시 게임에 접속할 때는 VIP들의 귓속말들이 나란히 와 있었다.

"괴물들이네."

반나절도 걸리지 않아 그들도 임프를 얻었다. 옆에 동행하는 것도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인증샷도 찍어서 보내 줬다.

[썩이나감 : 펫 퀘스트 검증 끝났으니 바로 보내겠습니다.]

[빨간약파란약 : 소식 들었습니다. 신속한 검토 후에 바로 등록하겠습니다.]

빨간약파란약의 답장 이후에 확인을 하니 자료는 5분 후에 곧바로 올라갔다. 이쯤이면 한 번 스크롤하면서 쓰윽 훑어보고 등록한 수준이었다.

내가 주는 자료에 대한 신뢰성을 떠나 그만큼 다급하다는 뜻일 것이다.

[알리미17 : 펫 정보 떴다.]

[느림 : 썩 새끼 좃나 느리게 푸네.]

[출입구 : 자. 드가자잇.]

전채채팅에서도 빠르게 소식이 올라갔다.

랭커도 아니고 그렇다고 네임드도 아닌 처음보는 닉네임이었다.

저들의 채팅 뒤에 어디서 올라왔냐는 글에 귓말을 보낸다는 답을 하는 것을 보니 히든레코드의 알바일 것 같았다.

사이트 홍보야 유입을 위해서 당연히 필요하지만 저렇게 홍보를 하는 것이 맞나 모르겠다.

결투장에서 남은 대결을 진행하고 싶지만, 소울리스에서 서버문제로 이틀 동안은 다른 서버와의 대결이 불가능하다는 공지도 떠버렸다.

내 시간이 붕 떠버렸으니 무엇을 할까 고민이 되었다. 딱히 스토리 퀘스트가 없기에 새로운 장소에서 레벨업이라도 할까 고민을 할 때였다.

"뉴 알론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어쩐 일로 요한이 나를 찾았다. 그간 소식이 없었던 스토리 퀘스트를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에 두 눈이 번쩍 뜨였다.

[퀘스트가 등록되었습니다.]

"뤼움 주교께서 소식이 닿았다고 합니다. 교주님의 대리인이 오신다고 하니 그곳으로 가면 될 것 같습니다."

요한에 의해 퀘스트가 등록되었으니 이것저것 물어볼 필요 없이 바로 정보를 확인했다.

[교주의 대리인.]

-데스티아 여신교의 교주 알퐁스가 드디어 운명에 답했다. 그의 뜻을 전해줄 이를 맞이하자.

-완료 조건 : 대리인 조우.

-실패 조건 : 퀘스트 포기.

방금 전에 대화에서 들었던 것 이상은 없었다.

요한에게 지속적으로 말을 건 결과 알게 된 것은 인간의 도시인 아웃사이더 시티와 오크펠슨의 중간지점이라는 것이었다.

곧바로 출발하기에는 정보가 없으니 정보길드에 해당지역의 지도를 구매하려고 했다.

"큰 것 다섯 개다."

정보길드장이 손 하나를 활짝 피며 보였다. 인벤토리에서 금화 오십 개를 꺼내 건넸다.

"큰 거라니까?"

"……."

내 상상을 뛰어넘는 금액에 입을 다물었다. 지불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석림 때와 비교하면 다섯 배는 늘었다.

"용병길드 B등급인데 정가를 받는 겁니까?"

"우대해서 내려준 거다."

정보길드장은 그 이후의 어떠한 대화에도 가격을 인하할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귀찮게 하면 가격을 올리겠다는 협박을 할 정도였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금화 가격이 많이 내려갔다지만, 500금화면 현금으로 10만 상당의 거액이었다.

10만 원이면 넉넉하게 써도 이주는 쓴다. 그걸 생각하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불사자만 아니라 데스티아 여신교가 아니라 오크에게 친화적인 종교였다면 이보다 더 좋은 상황이었을 거다.

"대주먹인데도요?"

"뒷골목 주먹이 무서울 것 같나?"

정보길드장은 가볍게 말했지만 무게감은 정반대였다. 길드 내의 모든 NPC들이 나를 주목했기 때문이다. 개중에 몇은 소매에 숨긴 암기를 꺼내는 것이 보였으니 감히 험한 말을 낼 수도 없었다.

"여기요."

오랜만에 호갱이 된 느낌이니 두 손을 들 수밖에 없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된다는데 여기서는 일단 돈부터 내야만 한다.

뉴 알론에서와는 달리 오크펠슨에서는 직접 찾아다닌 것보다 돈을 주고 구매한 지도가 더 많았다.

"바로 가자."

"예. 가시죠."

이동경로는 확보했고 필요할 아이템도 보급했다.

목표인 오키먼 언덕이 있는 동북 방향의 이동은 대로를 이용했기에 따로 몬스터를 조우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저녁이 되어 시야가 제한되었지만, 언덕은 달빛을 고스란히 받아 대기하고 있는 이가 보였다.

요한은 말에서 내려 그에게 다가갔다.

"정지. 더 이상 다가오지 마라."

중후한 음성의 사내가 허리춤에 손을 뻗었다. 보이는 것은 한 자루의 검이었다.

"운명을 따르는 데스티아 여신의 종인 사제 요한이라고 합니다."

"뤼움 주교가 보낸 그의 후임인가."

"크리스 님을 모셨었습니다."

"눈이 올바르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 들였군. 나는 성기사 미크엘이다."

미크엘은 로브를 완전히 벗었다. 성기사 특유의 순백의 중갑옷에 은은하게 보이는 후광은 전에 튜토리얼 때 마주쳤던 그 성기사와는 수준이 다름을 알 수 있었다.

"그대가 불사자인가."

"맞아. 교주가 내게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

"그분을 뵈러 가자. 단."

미크엘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주변에 숨어 있던 성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이쪽의 명을 따라라."

미크엘의 고압적인 태도에 요한을 보았다.

요한은 그 어떤 의심과 반항의 기미도 없이 포박을 하기 쉽도록 아예 두 손을 내민 상태였다.

"썩이나감 님도 따르시지요."

"…믿어도 돼?"

"운명을 믿으십시오."

"……."

이 빌어먹을 운명론자는 이럴 때마다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좋아. 이쪽도 항복."

퀘스트가 이렇게 진행이 된다면 마땅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이 되는 스토리가 소울리스에게 있을 수는 없으니까.

"저항하지 마시오."

"답답해도 참으셔야 할 거요."

성기사들은 우악스런 손길로 나와 요한을 포박했고 안대를 씌우는 것도 모자라 천주머니로 아예 머리를 뒤집어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