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화 고인물은욕을한다.
[YOU DIED.]
"씨바아아아알!"
죽음은 항상 나의 가까이에 있다.
회색으로 변한 시야 속에서 제작자 놈들을 탓할 수밖에 없는 괴성을 지르는 것이 현시점의 최선이었다.
이번에도 그 지랄맞은 사망한 고대오크전사에게 죽었다.
도망자 리치가 보스치고 약한 것을 생각하면 너무 부아가 치밀었다.
2페이즈에서 2번째로 몬스터들이 소환이 되는 타이밍에서 사망한 고대오크전사가 나타난다. 그들은 높은 확률이 아닌 확정적으로 전사계열의 2차전직에서 하나씩 나왔다.
여섯 번 중에 여섯 번이 그랬으니 그 어떤 억까가 오더라도 아닌데 이건 그냥 우연인데라는 개소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다섯 직업군의 처치순서를 아무리 고려해도 먼저 죽여야만 하는 것은 무조건 쉴드 익스퍼드였다.
이 희대의 1티어 중의 1티어 탱커가 방어태세를 갖추기만 하면 나머지 놈들에게는 감히 상처조차 입힐 수 없었다.
나 홀로 방어태세를 쓰면 도발에 걸리지 않아도 나의 공격은 진공청소기에 끌려가는 방구석 먼지 마냥 그곳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이 어처구니가 없는 판정은 당해봐야만 안다.
아직 전세계적으로 피해자의 증언이 나오지 않는 것은 극단적인 탱커가 레벨을 올리기 힘든 구조라 2차 전직을 한 유저가 드물기 때문이다.
내 장담하건데 며칠만 지나면 쉴드 익스퍼드라는 희대의 개깡패새끼 때문에 PK나 단체PvP에서 적을 한 대도 때리지 못하고 다 뒤지는 상황이 나올 것이 분명했다.
그때 되서야 긴급패치를 해야 겨우 이 고난을 넘길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걸 기다리느니 이 퀘스트를 과감하게 포기하고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내가 놈들을 어떻게 죽이지? 이게 방도가 있나?"
내가 플레이를 한 영상을 비교분석을 해 봐도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혼자서 감당할 수 없다.
불가능하다.
이걸 알았지만 포기라는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이건 자존심의 영역이었다.
"빌어먹을 스킬망겜 같으니."
언데드 몬스터임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어처럼 다수의 스킬을 보유하고 써 대는 탓에 다른 언데드처럼 대열을 망가트리는 요행도 통하지 않았다.
함정을 도배해도 잠깐일 뿐, 궁극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았다.
그 이유를 꼽자면 바로 결사항전의 영역이 무력해진 거다.
쉴드 익스퍼드를 죽이고 시작해도 나머지 네 직업군들이 쓰는 공격스킬에 의한 상태이상에 옴짝달싹 못하고 죽는다.
왜? 결사항전의 영역은 내가 상대보다 강력한 피해를 줄 경우에만 체력의 손실보다 회복이 더 많아져서 생존하는 구조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기적적으로 스킬들 사이에서 딜을 넣는다고 해도 해머나 도끼 익스퍼드가 가지게 되는 기본적인 넉백효과로 인해 결사항전의 영역 바깥으로 자연스럽게 밀려나 버렸다.
열 번의 죽음 이후에 계산을 포기한 죽음 속에서 셀 수 없는 잡몹들을 사냥해 레벨 59를 찍게 된 것은 훌륭한 소식이지만, 내 인내심과 집중력도 결국 바닥을 보였다.
이건 휴식이 필요하다.
잠깐 게임을 대기 상태로 두고 밖으로 나왔다.
중천에 떠있던 해는 저물고 그 자리를 달이 떠올랐다. 그래도 희뿌연 하늘은 변하지 않았다.
들숨에 씨, 날숨에 발을 내뱉으며 가슴속에 차오른 울화를 덜어냈다.
"칠죄종 스킬을 써야하나. 그거 한번 쓰고 충전하려면 결국 던전 바깥으로 나가야만 하는데."
던전 바깥으로 나가라면 결국 퀘스트를 포기해야만 해서 문제다.
"궁신의 도움이라도 빌려야만 하나?"
고사리 손이라도 빌려야만 하나 싶어서 궁신을 떠올렸지만, 놈을 신뢰할 수 없었다.
내가 다 차린 밥상에 그놈을 데리고 온다면 이득을 나눠 가지는 것을 떠나 이 업계에서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이 된다.
"임프부터 조져야겠어."
명색이 놈도 악마족이다.
언데드보다 같은 값이면 더 능력치가 좋으니 어딘가에 쓸모가 있을 것이다.
전작의 경우 장난기를 좋아한다는 컨셉 때문에 갖은 상태이상 스킬들로 무장해 유저들이 극혐하는 악마이기도 했다.
다시 게임에 접속해서 부활했다.
아직 휴프카로 위장하고 있는 임프에게 하급성수를 들어 올렸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너 임프잖아."
[카악! 인간! 어떻게 알았지!]
임프는 곧바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구린내가 풀풀 풍길 것 같은 흉악한 이를 드러내며 나를 위협하려는 자세를 취했다.
"리치와 싸울 때, 놈이 강력한 하수인을 불러낸다면 어떻게 해야만 하지?"
[싸워서 이겨라! 못하면 죽는다!]
"내가? 아니면 지금 네가?"
성수의 재고가 몇 개가 없었기에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신성부여를 사용했다.
[끼아악! 치워! 냄새 구려!]
임프는 팔짝팔짝 뛰며 집 뒤로 도망쳤다. 고개만 삐쭉 내밀고는 고양이처럼 하악질을 해 댔다.
"너 여기서 나가고 싶다며. 그러면 날 도와야겠지. 맞지?"
[그건 맞다! 맞는데! 너 정말 강햐냐!]
"너야말로 확실히 날 도울 수단이 있냐는 거다."
이때까지는 임프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거나 그냥 무시하고 언데드들을 밀었다.
이번에도 그랬다가는 무의미한 데이터를 하나 더 쌓을 뿐이다.
[네가 강하면 알려 줄게!]
"너 없어도 되겠다."
[끼아아악!]
검을 들고 성큼성큼 다가가자 임프는 줄행랑을 쳤다. 그러나 이 공간은 던전이었고 도망을 칠 곳도 한정되어 있었다.
[말할게! 도와줄게! 살려 줘! 아픈 것 싫어!]
무형의 벽에 막힌 임프는 반항하는 것조차 포기하고 펑펑 울었다.
"내가 어떻게 믿지?"
[진짜다! 보면 안다!]
"날 배신하고 리치에게 붙은 거면?"
지금 상황에서야 느낀 건데 임프가 승천시킨 영혼들이 과연 이 공간을 벗어났을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다! 나 네 편이다! 못 믿겠다면 계약하자!]
"계약?"
[내가 너 소환수 한다. 그러면 된다. 나 믿어라!]
"…가능해?"
이게 퀘스트를 해결하는 방법 중의 하나라고 확신이 들었다.
문제는 소환수를 다루기 위해서는 관련된 스킬이 필요하다는 거다.
내가 악마를 소환수르 다루려면 네크로맨서 테크를 타는 직업이어야만 한다.
마법사의 1차전직인 저주술사나 2차전직인 악마술사가 아닌 이상 내가 악마를 소환할 수 없다.
[너 못 하냐!]
임프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화를 냈다.
[임프와 패밀리어 계약을 맺으시겠습니까? Y/N]
[나 너 돕는다. 너도 나 돕는다. 이거면 된다.]
임프가 자신 있는 태도로 보임과 동시에 불쾌한 알림이 떴다.
"내가 네 패밀리어라는 거냐?"
계약에는 갑과 을이 중요하다.
이건 임프가 나를 소환수로 쓰겠다는 것만 같았다.
[그거 아냐! 내가 너의 패밀리어가 된다는 거야!]
"내가 관련 마법을 모른다니까?"
[이거랑 그거랑 달라! 많이 달라!]
"……."
이건 아무래도 찍어봐야 된장인지 아닌지 알 것 같다. 어차피 죽으면 다른 방법으로 시도하면 된 일이니까.
"좋아."
아직 남아있는 알림에 Y를 눌렀다.
[펫 기능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소악마 임프가 플레이어의 펫이 되었습니다.]
"어?"
내가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알림이 떴다.
[튜토리얼.]
펫은 유저의 곁에서 지원을 해주는 존재입니다. 악마족부터 요정족, 용족 등 다양한 존재들을 펫으로 등록할 수 있습니다.
먼저 뜬 것을 보니 주먹이 힘이 들어갔다. 어쩐지 전작에서도 있던 펫이 왜 없나 싶었다.
다른 게임에서는 오픈하자마자 나오는 유료로 파는 것을 이렇게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나쁘지는 않다.
난 이 소식을 곧바로 팔아 버리면 되니까.
[튜토리얼.]
펫의 기본적인 기능은 사냥한 몬스터에게서 나오는 아이템 및 돈의 자동수집입니다. 도축이나 채집 등의 생산스킬은 해당 특성이 있는 펫을 등록하시거나 기능을 구매하셔야만 합니다.
"아하."
모두 무료로 풀 것인가 싶었는데 그건 아닌가 보다.
튜토리얼의 링크주소를 누르자 인게임 상점페이지가 떴다.
[해당 기능은 아직 지원하지 않습니다.]
물론 다른 페이지와 달리 하얀색의 배경에 검은색 글자만 써있었다. 사실상 404라는 숫자와 함께 Page not found라는 문구가 더 어울릴 것 같았다.
"공개 전의 기능인데 내가 뚫은 거구나."
역시 소울리스다.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는 완벽한 게임이면 절대 서비스를 할 리가 없지. 이쯤이면 모든 게임사의 정식서비스라는 단어는 사실상 돈 주고 하는 베타서비스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다.
[임프]
-종족 : 소악마.
-성별 : 남성.
-스킬 : 화염구LV1, 교란LV3, 함정설치LV5.
-특성 : 자동수집.
임프의 정보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자세한 스텟은 알 수 없었다. 특성은 돈을 주고 사야 하니 넘어가지만, 지금 저 스킬은 제법 쓸모가 있을 것 같았다.
"너 이거 가지고 다녀."
[이거 재밌겠다!]
난 인벤토리를 채운 함정들을 임프에게 줬다.
펫이 되고 언제 챙긴 것인지 등에 등산가방 하나를 매고 있던 임프는 거기다가 함정들을 쓸어 담았다.
물론 성수를 줄 때는 싫다며 거부하는 자율성도 보였다.
[이거 무겁다! 나 느리니까 먼저 가라!]
짊어질 수 있는 무게를 넘겼는지 임프는 뒤뚱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일단 무게가 많이 나가는 기름통은 다시 내 인벤토리로 회수했다.
[가볍다! 진즉 이랬어야지!]
"이번에는 화염구만 쓰면서 도와라."
[알겠다! 기다려 봐라!]
첫 번째 거점에서 임프는 불꽃으로 영혼을 소환했다.
이미 겪었던 패턴이라 해치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임프는 화염구 한 번을 던져서 역병벌레 하나의 이목을 끄는 것이 고작이었다.
[여기에 안전하게 보관해야지!]
이때까지와 다른 일이 벌어진 것은 그 후였다. 여태껏 마무리로 영혼을 승천시켰었는데, 지금은 그 영혼을 갈무리해서 작은 구슬로 만든 거다.
"…너 왜 승천 안 시켜."
[내가 들고 다니면 나 위험해져! 너랑 함께하니까 챙기는 거야!]
"진작 따졌어야 했는데."
임프의 말에 골치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해야만 올바른 공략법이란 뜻이다. 그것도 모르조 무식하게 앞으로만 갔으니 내 게임머리가 굳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전작에서 NPC 하나하나 붙잡아서 정보를 캐내던 습관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결국 어거지로 퀘스트를 밀 수 있었던 내 강함에 취한 탓이었다.
[이거 들면 나 아프다! 너가 나 지켜야한다!]
"어째서지?"
[리치가 이거 뺏으러 온다. 뺏기면 아프다! 날 때려!]
"예전에 맞은 적이 있어?"
[맞았다! 진짜 아프다!]
임프는 그때 맞은 부위에 피멍이 들었다고 했는데, 피부가 온통 붉은색이라 어디를 맞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리치가 약해지는 것은 확실하지?"
[내가 들고 있으면 약해진다!]
"그가 부리는 망자들도?"
[맞다! 다 약해진다!]
"착하다. 이 녀석아."
그 희소식에 인벤토리에서 쌓아두었던 칼날어금니 멧돼지 스테이크를 주었다.
[우왁! 맛난다! 고기다!]
임프는 그 커다란 고기를 숨도 쉬지 않고 해치웠다.
[임프가 플레이어에게 호감을 보입니다.]
[너 좋은 놈이다!]
체력게이지를 보니 유저와 똑같은 버프를 받는 것 같았다.
"이번에도 화염구만 써."
[알겠다! 두 번 명령하지 마!]
두 번째 지점에서도 전투방침은 같았다.
임프는 주인과 펫의 관계에도 여전히 건방진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별로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오랜만에 진한 패배감을 느끼게 해준 놈들을 드디어 이길 수 있다는 희망에 차올랐기 때문이다.
마지막 거점까지 다 밀어 버렸다.
임프는 영혼을 구슬로 만들어서 자신의 주머니에 챙겼다.
[다음에 벨트 사 줘! 구슬 많아서 내려가!]
"벨트 필요하냐?"
[나 너랑 다르게 신사다! 원래 옷 잘 입는다!]
임프가 꼬리로 바닥을 치며 항의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펫 전용 아바타가 나오면 그건 또 유료로 판매를 할 것 같다.
돈독 오른 제작사 놈들 같으니.
푸념은 거기까지 그치고 육망성의 가운데에 가기 전에 장비를 점검했다.
미치광이 광대의 검의 내구도가 제법 상했기에 숫돌을 꺼내 조금이나마 소모된 내구도를 채워야만 했다.
[이제 놈 온다! 일어나라!]
내가 여유를 부린다고 생각했는지 임프는 나를 재촉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리치가 검은태양에서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