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화 고인물은저항한다.
[강하다! 인간 강해!]
멀찍이서 관전 중인 임프가 은근히 목소리를 높였다. 꼬리끝도 살랑이는 것이 지금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했다.
[오크의 냄새도 난다. 그러나 인간이다. 너는 누구지?]
리치는 마지막 계단을 밟으며 허공에 손을 뻗었다. 계란을 쥐듯이 동그랗게 말린 손에 어둠이 모여 스태프를 완성했다.
LV65. 도망자 리치.
내 생각보다 레벨은 낮았고 앞에 붙은 수식어는 마음을 더 편하게 만들었다.
죽음의 수련소3에서 싸웠던 석림의 바위정력보다도 오히려 레벨이 낮았기 때문이다.
[죽어라. 인간.]
도망자 리치가 스태프를 크게 휘저었다. 그가 밟아왔던 계단들이 푸른색의 불꽃이 되어 놈의 몸 주변을 맴돌았다.
평범한 윌 오 더 위스프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오크들이 절망에 빠진 표정이 뚜렷하게 보였다.
탁.
도망자 리치가 스태프로 바닥을 찍자 윌 오 더 위스프들이 사방으로 퍼졌다. 놈과의 거리가 있기에 윌 오 더 위스프 사이로 뛰어가도 공격에 당하지 않았다.
탁.
도망자 리치가 다시 스태프를 찍자 뻗어나갔던 윌 오 더 위스프가 다시 바깥에서 원을 그리며 좁혀왔다.
[발버둥쳐라.]
도망자 리치가 나에게 다가오며 스태프를 휘둘렀다. 평범한 휘두르기 세 번, 그 뒤에는 스태프를 내게 뻗어 화이어 볼을 사용했다.
잔열이 바닥을 그을리는 사이에 신성부여와 역세기검의 콤보로 내 턴을 시작했다.
카가가가각!
검기는 도망자 리치의 비루한 몸뚱이에 금을 냈다. 체력은 아주 조금 닳을 뿐이었다.
스킬 사용을 위한 안전거리를 확보했기 때문에 윌 오 더 위스프가 등 뒤에 가까이 다가왔다. 사이의 간격은 내가 옆으로 몸을 틀어도 위태로울 정도로 아슬아슬했다.
바로 2단 점프를 사용해 윌 오브 위스프를 피했다.
도망자 리치가 스태프를 번쩍 들어올렸다. 윌 오브 위스프들이 그 위에 하나씩 겹쳐지며 그 크기가 집채만 해졌다.
[하나가 되어라.]
거대해진 윌 오브 위스프가 나에게 쏘아졌다.
피하지 못할 속도는 아니지만 범위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몰랐다. 아예 공간이동자의 블링크를 사용해 도망자 리치의 품에 붙었다.
콰드드드득!
로브로도 가려지지 않는 앙상한 몸뚱이에 그대로 본 브레이커를 사용했다.
도망자 리치의 허리가 직각으로 꺾였다. 경직 상태가 아니었기에 기절이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이동속도가 느려진 점은 의외로 중요하다.
내개서 멀어지기 위해 조금씩 뒤로 물러나는 것을 허락할 수 없으니까.
[스피어 마스터의 소울을 사용합니다.]
도망자 리치가 다시 발걸음을 떼는 것은 하나로 만든 월 오 더 위스프가 지면에 충돌한 뒤였다.
귓등으로 불쾌할 정도로 겹쳐진 망자들의 비명소리와 함께 빛이 터져 사라졌다.
도망자 리치의 두개골에서 사라졌던 눈빛이 돌아오며 놈은 다시 뒤로 물러났다.
그때까지 나는 모든 스태미나를 토해내듯이 공격을 가했었다.
[망자들이여, 일어나라. 네놈들의 악몽에서 다시 살아나라.]
도망자 리치의 몸이 옅어지며 물러났다. 잡몹 패턴들은 깨끗이 드러내면 드디어 보스전 2페이즈에 들어선 셈이다.
[아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
비가 내리듯이 망자의 영혼들이 떨어졌다. 지면으로 스며들어가더니 하나씩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LV65. 사망한 역병오크.
도망자 리치와 레벨이 같은 놈들이었다.
사망한 역병오크는 방어구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무기만 갖췄다. 머릿수가 다섯이라는 점이 벅차지만, 상대해서 가망이 없는 정도는 아니다.
땅에서 기어나오느라 아직 제대로 서지 못한 녀석을 상대로 공격을 시작했다.
푸욱! 촤악! 촤악!
평타캔슬을 이용한 베고 찌르기가 마지막에서 두 번 작렬했다. 그간 적적했던 건맨의 소울이 발동된 것이다.
무기밖에 없는 사망한 역병오크였기에 체력은 크게 감소했다.
[그워어어어!]
놈이 끝끝내 일어나 손에 몬스터의 뼈로 만든 몽둥이를 휘두르기 전에 죽였다.
남은 것은 네 마리였고 그중에서 제일 뒤에서 나에게 오는 사망한 역병오크에게 1인 도발을 썼다.
서로 뒤엉켜서 어지러워진 상황에서 바닥에 함정들을 설치했다.
거대 쥐덫과 같이 상대의 발을 묶어서 이동을 제한시키는 것들이었다.
사망한 역병오크 1과 3이 덫을 밟아서 멈췄고, 2와 4가 나에게 덤볐다.
터엉!
사망한 역병오크 4의 공격을 튕겨냈지만 경직 상태가 된 놈을 공격하지 않았다.
백스탭으로 뒤로 물러나 사망한 역병오크 2의 공격을 피한 뒤에 그 등판을 깊게 찌르고 베었다.
남은 체력은 절반이었고 반격을 하기 위해 사망한 역병오크2가 몸을 틀 때, 다시 평캔으로 두 번의 공격을 터트려 숨을 끊었다.
모두 언데드 특유의 느린 몸놀림 덕분이었다.
[그워어어어!]
덫을 밟아 잠깐 느려졌었던 사망한 역병오크 1과 3이 동시에 몽둥이를 크게 휘두르며 달려왔다.
놈들이 가진 두 번째 공격패턴이었는데 스킬로 보이는 효과가 보여서 구르기로 거리를 유지했다.
신성부여는 쿨타임이 남아 있어 성능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는 하급성수를 검에 바른 뒤에 돌아온 역섬기검을 사용했다.
카가가가각!
성수를 머금은 검기가 사망한 역병오크 1과 3에게 적중했다. 그 공격으로 죽었으면 좋겠지만, 아직 체력이 20%와 30%대로 남아있었다.
[그아아아!]
사망한 역병오크 4가 내가 다가와 몽둥이를 내려찍었다.
터엉!
그걸 튕겨낸 뒤에 경직이 된 놈의 몸에 본 브레이커를 사용했다.
콰드드드득!
뼈가 완전히 박살남과 동시에 스킬의 효과가 완전히 발동했다.
상태이상 기절이 들어가며 이동속도고 느려졌다.
절반 이하로 남은 체력은 왼쪽 허벅지를 찌르고 우측으로 베어내어 우측 골반을 베어 죽였다.
그 뒤의 사망한 역병오크 1과 3은 방금 전처럼 튕겨내기를 쓴 후에 하나씩 정리했다.
[여간 놈이 아니구나아아아!]
도망자 리치는 다시 나타났다. 스태프를 흔들어 윌 오 더 위스프를 소환한 그는 1페이즈 때 보였던 식으로 공격을 했다.
방사형으로 윌 오 더 위스프가 뻗으면 그 틈에 들어가 공격을 가했다.
이번에도 2단 점프를 사용해 등을 노리는 윌 오 더 위스프를 노렸다.
다시 한 번 도망자 리치가 윌 오 더 위스프를 하나로 모아 던졌다.
이때는 판정을 파악했기에 헤이스트를 쓰고 전력으로 달렸다.
1페이즈 때와 달리 도망자 리치의 몸은 붉은 오오라가 맴돌아 있었다.
위화감이 느껴져 놈을 지목해 체력바 밑에 뜬 작은 아이콘을 확인했다.
[피해반사.]
"제기랄."
2페이즈에 생긴 것은 내게 가장 궁합이 좋지 않은 스킬이었다.
패시브 스킬 강철뼈로 방어력이 생겼다지만, 막 1차 전직한 원거리 직업군보다도 방어력이 없는 수준이다.
내 공격력의 10%만 반사해도 무조건 죽는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콰아아아앙!
도망자 리치가 쓴 거대한 윌 오 더 위스프가 바닥을 작렬하는 동안에 그 피해반사가 유지가 되었다.
[죽어라. 나의 유희거리가 되어라!]
다시 도망자 리치가 공격을 시작하면서 그 피해반사가 사라졌다.
나로서는 천만다행일 수밖에 없었다.
터엉!
이미 파악한 스태프를 휘드르는 일반적인 공격을 튕겨낸 후, 드러난 경직에 본 브레이커를 사용했다.
보스 몬스터라서 설마했지만 기절에는 면역이 아니었다.
찌르고 베는 평타로 치명타를 터트리자 도망자 리치가 느린 속도로 사라졌다.
아까 전처럼 사망한 역병오크일 것이라 예상했지만, 지면을 뚫고 나타나는 몬스터들은 내 예상을 벗어났다.
LV68. 사망한 고대오크전사.
보스인 도망자 리치보다 더 강한 몬스터가 나타났다.
"이게 말이 되는 거야?"
보스가 자신보다 더 강한 몬스터를 소환할 줄은 예상도 못했다.
사망한 고대오크전사는 다섯이었고 그중에는 임프가 나를 속이려고 속임수를 썼던 휴프카 또한 있었다.
각자 생전에 쓰던 무기를 들고 있었는데 서로 겹치는 것이 없었다. 전사 직업군의 2차 직업군이 다섯이 모두 하나씩 다 있는 셈이다.
사망한 역병오크 때와 달리 놈들은 조약하지만 몬스터의 뼈와 껍질로 된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다.
놈들이 다 일어나기 전에 나는 쉴드 익스퍼드부터 노렸다.
쉴드 익스퍼드는 그야말로 1티어 탱커 중에서도 최고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피해반사를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 아군 전체에게 쉴드 및 온갖 체력과 방어력 버프를 걸어 버리기 때문이다.
스피어마스터의 소울부터 시작해 당장 쓸 수 있는 스킬들을 모두 사용해 놈을 죽였다.
[그워어어어!]
[그아아아아!]
"씨발."
문제는 쉴드 익스퍼드만 버프 스킬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거다.
전사 직업군이 다들 탱커와 딜러의 경계선에 걸친 경우가 많아서 아군을 위한 버프 스킬은 하나씩 들고 있었고 서로 겹치지 않아 이중삼중으로 중첩이 된다는 거다.
이건 최악이다.
[결사항전의 영역을 사용합니다.]
버프가 걸린 언데드 오크들이 나를 향해 일제히 달려왔다. 저걸 감당하기 위해서는 결사항전의 영역을 쓸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더 아꼈다가는 다시 육망성의 거점을 하나하나 지워나가야만 할 터였다.
먼저 내 검은 공속이 높으나 체력이 비교적 낮은 블레이드 익스퍼드였다.
내가 겪은 블레이드 익스퍼드의 기준이 오니기리였기에 지금 처리하지 않으면 결사항전의 영역을 키고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들어서였다.
"미친!"
블레이드 익스퍼드만을 공격하는 와중에 다른 놈들이 동시에 스킬을 사용했다. 저걸 맞으면 결사항전의 영역에서도 버틸 수 없다.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
시공간이동자의 블링크고 결사항전을 벗어난 것이다.
"제기랄!"
저 공간은 나의 것이었고 거기에서는 감히 무적이라고도 생각을 했다. 그게 깨졌으니 절로 욕지거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장기전으로 가 보자."
마나포션을 섭취한 뒤에 온갖 함정들을 바닥에 깔았다.
사망한 고대오크전사들이 각자 이동기를 쓰며 거리를 좁혀 오는 것을 보자니 치가 떨렸다.
헤이스트를 쓰며 무기를 슬링으로 바꿨다. 먼저 쓴 것은 이동속도를 줄이기 위한 빙결의 구슬이었다.
오랜만에 꺼냈으나 슬링은 정확하게 사망한 고대오크전사들의 발을 느리게 했다. 그 뒤에는 화약탄과 폭탄을 집어던졌다.
장기전을 각오하고 놈들의 체력을 야금야금 깎아 나가는 거다.
내가 검을 들 때는 확실하게 사망한 고대오크전사 하나가 튀어나왔을 때다.
* * *
"내가 뭘 잘못 본 건가?"
빨간약파란약은 예상하지 못한 존재가 연락을 해 오자 적잖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얼마 전까지 다크로얄과 아주 찐득한 관계를 유지하던 다크게이머였기 때문이었다.
잠깐 게임기에서 벗어나 두 눈을 마사지하고 다시 확인했다.
[궁신 : 다크로얄에서 이적을 하고 싶습니다.]
짧지만 이 귓말이 주는 의미는 적지 않았다.
다크로얄이 골드캐시에서 쫓겨난 인물들을 홀대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건 업계의 모두가 익히 아는 바였다.
그런데도 누구도 다크로얄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고 내쳐질 때까지 버티고 버텼다.
업계에서 그만큼 상징적인 곳이라 한창 때 거기에서 얻던 금액만큼 다른 곳에서 벌기 힘듬을 알아서다.
궁신은 비교적 내쳐진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한참 그 능력에 비해 다들 기피할 일들을 할 다크게이머가 직접 접선을 해온 것은 드문 일이었다.
[빨간약파란약 : 문의를 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고객님. 괜찮으시다면 현재 다크로얄과 맺고 계신 계약의 종류와 기간을 알 수 있을까요?]
지금 업계에서 궁신의 평판이 좋지 않지만, 언제나 뺏기기만 하던 인재를 역으로 뺏어오는 것은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궁신 : 골드캐시에서 쫓겨나면 전속은 아닙니다. 또한 따로 계약금을 받은 것도 없어요.]
궁신은 자신의 계약에 대하 조금씩 흘렸고, 빨간약파란약은 그와 히든레코드의 정식계약을 위한 정보를 수집했다.
검토결과 궁신과 전속계약을 해도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이거 골드캐시에서 쫓겨난 놈들을 더 끌어들일 수 있겠는데?'
궁신만 특별하게 낮은 조건으로 했을 리가 없으니 나머지와도 접촉해도 될 것 같았다.
[빨간약파란약 : 궁신 님께서는 선호하는 의뢰가 있습니까?]
[궁신 : 썩이나감 형님 옆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빨간약파란약의 이마에 주름이 깊어졌다. 다크로얄에서 역으로 보낸 첩자가 아닌가 싶었다.
썩이나감은 히든레코드에서 가장 조심히 대하는 상대였다. 그와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누구도 그걸 이루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빨간약파란약 : 썩이나감 님의 의사에 따라 그건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궁신 : 제가 형님한테 허락 받겠습니다.]
궁신의 저 자신감에 빨간약파란약은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 썩이나감이 던전을 돌고 있는 공백시간 동안에 이루어진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