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고인물은박살냈다.
오크 NPC들의 특징은 2차 전직이든지 아니든지 엄청난 방어력과 체력을 가지고 있다는 거다.
나처럼 스피어마스터의 소울을 쓰더라도 놈들을 단번에 쓰러트릴 수 없다는 거다.
특히 머슬맨인 잭칼의 체력은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그들에게 무게가 쏠리는 동안에 나머지가 쉬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독고무적과 흑군은 노련하게 전선을 방해하면서 건물에서 지원사격을 하는 유저들을 독려했다,
콰드드득!
차원침략자들은 누군가는 우리에게 덤비고 누군가는 1성벽을 뚫으려고 했기에 그야말로 오합지졸에 가까웠다.
[시장인 록부터 죽이라니까]
[썩이나감에게 복수가 먼저다. 저딴 NPC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야!]
[장난쳐? 1성벽을 뚫고 시청을 점령해야지!]
번역이 되어 똑똑히 들리는 와중에도 그들의 의견은 하나가 되지 못했다.
카가가가각!
날 목표로 삼는 것을 알았으니 이세계 이동석 옆의 3층 건물로 들어갔다.
[놈을 쫓아라.]
[1성벽 때의 복수다.]
두 명의 차원침략자가 날 쫓아왔다. 아까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6번과 19번인데 나에게 죽은 일본랭커 중에서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일본서버 침략 때 1성벽에서 나에게 처참하게 죽은 랭커들 중에 있지 않을까 생각할 뿐이다.
[죽어라아아아!]
먼저 다가온 6번이 펼치는 스킬은 순례자의 것이었다. 연달라 펼치는 스킬 순서는 언젠가 한 번 본적이 있었다.
두 번째 PvP에서 마주친 랭커가 마침 순례자였다.
"너 혼노지승려구나."
[기억하는구나!]
"기억하지. 너 레벨값 못하잖아."
[이노오오옴!]
혼노지승려는 분개하며 지면 구르기를 사용했다. 부채꼴로 퍼지는 광역스킬이지만 이걸 피하기는 쉬웠다.
지면에서 발만 떼고 있으면 된다.
제자리에 뛰어올라 창틀에 손을 뻗을 때였다.
[나도 기억해야지. 그렇지?]
혼노지승려의 뒤에 십자가가 인상적인 지팡이를 든 차원침략자가 있었다. 십자가의 끝을 내게 기울이자 한 줄기 섬광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세인트 레이.
신자의 2차 직업 중 하나인 성직자의 공격스킬 중 하나였다. 캐스팅 속도가 빠르고 쿨타임도 짧은 편이라 성직자의 딜을 책임지는 것이었다.
저걸 쓰고 나를 쫓아올 놈은 일본서버 침략 때 내게 죽은 걸어다니는포션이란 유저뿐이다.
2단 점프를 사용해 더 높게 뛰었다.
세인트 레이가 발밑을 지나 벽을 적중했다.
[벽타기를 사용합니다.]
높게 뛰어올라 옆의 벽을 평지처럼 걸어가며 역세기검을 사용했다.
카가가각!
"어딜!"
걸어다니는포션을 노린 것이지만 혼노지승려가 앞으로 튀어나와 막았다. 체력이 줄어들었지만 걸어다니는포션이 즉각 힐을 걸어 치료했다.
"귀찮은데."
둘 다 2차전직을 마친 유저들에 서로 힐과 버프가 가능한 직업군이라 나를 상대로 시간을 끌기에 최적의 조합이라고 할 만하다.
[1인 도발을 사용합니다.]
둘 다 스킬이 빠진 상태이기에 벽에서 뛰어내리며 1인 도발을 썼다.
[상대가 도발에 걸렸습니다.]
"걸어다니는포션!"
혼노지승려는 1인 도발에 걸리자마자 동료를 불렀다.
걸어다니는포션은 바로 정화스킬을 사용해 상태이상을 풀어 버렸다.
"칫."
귀찮다는 말로 부족함이 없는 조합이다.
내가 이들을 죽이려면 스킬을 죄다 빼 놓든가 아니면 결사항전의 영역을 써야 하는데 맞으면서 도망칠 확률도 높아 보였다.
"귀찮네."
상대도 두 번 당하는 멍청이들이 아니니 내 노림수 정도는 꿰고 있을 거다.
고대오크전사 셋 중에 하나가 지원을 오면 좋겠다만, 아직 다른 차원침략자들에게 발이 묶여 있었다.
독고무적이나 흑군은 나를 지나치게 믿어서 시선도 주지 않았고, 열파창은 적들을 몰아붙이는 것에만 급급했다.
"썩이나감. 이쪽이야!"
건물 위층에 있는 유저가 나를 불렀다. 나도 미련 없이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적이 하나가 아니니 나도 주변의 도움을 받는 것이 마땅했다.
혼노지승려나 걸어다니는포션은 곧바로 쫓아오지 않았다. 기습을 우려해 최대한 조심스럽게 오고 있었다.
그 사이에 나는 옥상가지 올라갔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유저는 여섯 이었다.
"재들 강하지? 너도 못 이기는 거야?"
"우리도 죽겠네. 별 수 없나."
다들 내가 쉽게 덤비지 못한 것을 눈여겨본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별다른 불만이 없어 보이는 것은 이미 자신들의 역할을 다했다는 것도 알기 때문이었다.
"같이 싸울 수 있어요?"
그런데도 나는 그들이 필요했다.
"싸우기는 하겠는데 우리가 도움이 되겠어?"
"랭커 둘 어떻게 감당하냐."
"맞아. 스킬 한 번이면 다 뒤지는데."
"다른 애들 다 죽었어. 필드 보스 레이드 갔다더라."
다들 전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길드도 없는 것을 보니 일본서버에서 침략을 한다니까 엉겁결에 지휘에 따른 이들이 분명했다.
"저거 깰 테니까 도와줘요."
바로 아래층까지 혼노지승려와 걸어다니는포션이 왔으니 다른 방도는 없었다.
"방법이 뭔데?"
"옷 벗어요."
"응?"
"팬티 하나만 입으라고요. 나처럼."
"……."
내 제안에 다들 입을 꾹 다물고 엄격하고 근엄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 * *
[오니기리다. 어서 이곳으로 모여라. 적이 하나씩 무너지고 있단 말이다.]
이세계 이동석에서 오니기리의 음성은 격앙되어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적들에게 포위를 당하는 격이었다.
한국서버의 최상단의 랭커 셋이 나타나 위험에 빠지는 것 같았지만, 결국 그들도 죽어도 살아나는 차원침략자의 공세에 하나씩 무너졌다.
록 시장은 물론 정체를 알 수 없는 오크 둘이 죽었고 그 뒤에는 실컷 날뛰던 열파창이었다.
랭커 중에 남은 것은 고작 둘 뿐이었다.
썩이나감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도 않았지만, 단 한 명이 전황을 바꾸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보다는 후속으로 나타난 한국서버 랭커들에 대한 다급함이 앞서기도 했다.
[모두가 모이면 이길 수 있다. 우리 일본이 한국의 심장에 칼을 꽂을 기회란 말이다!]
만약 자신이 나섰다면 진즉 1성벽까지 점령했을 것이다.
오니기리는 차마 그 말을 입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그저 계속 독려해고 재촉해 전장에 모이게 할 뿐이었다.
[갈 건가요?]
[코앞이다. 절대 못 가.]
걸어다니는포션과 혼노지승려는 오니기리의 말을 귓등으로 넘겼다. 그보다는 머리 위에 있는 숙적 썩이나감이 더 먹음직스러웠다.
옥상에 있는 몇 명의 잔챙이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목표는 오로지 썩이나감이다.
놈을 죽여서 형편없이 망가진 자존심의 복수를 해 줄 테다.
걸어다니는포션은 먼저 모든 버프용 스킬을 혼노지승려에게 걸었다.
그 뒤에 혼노지승려가 자신 있게 위로 올라갈 때였다.
퍼엉! 펑!
머리를 들이미는 순간부터 마주친 썩이나감이 섬광탄을 던져댔다.
혼노지승려는 노련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아래를 살피며 누가 썩이나감인지 살폈다.
필시 그라면 맨발일 것이다.
[……다 맨발이라고?]
절대 그럴 일이 없다.
잘못 본 것인가 싶어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맨발인 것도 모자라 누구도 하의를 입지 않았다.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회색의 속옷 하나만을 입었을 뿐이었다.
"설랬어?"
예외가 있다면 단 하나였다.
홀로 장화를 신었기에 주의 깊게 보지 않았었다.
장화의 주인은 시야의 사각으로 돌아갔고 고막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전에도 익히 들었던 것이다.
푸욱! 촤악!
[썩이…나감!]
"정답."
등판을 찌른 검이 가슴팍으로 튀어 나왔다.
무방비로 뒤에서 맞은 공격은 확정적으로 치명타가 터진다. 방어력을 포기하고 오로지 공격력만을 택한 괴랄한 썩이나감의 공격이 두 번이나 적중했다.
[커허억!]
혼노지승려는 피를 토하고야 말았다. 진즉 레벨 60을 넘겨 한층 강해진 스펙에 성직자인 움직이는 포션의 버프 덕분에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거꾸로 돌린 모래시계처럼 체력이 차올랐지만, 그의 시야는 다시 색감을 찾지 못했다.
[YOU DIED.]
썩이나감의 검이 숨통을 끊어 버렸다.
[이 변태놈들이!]
섬광탄으로 인해 뒤늦게 올라온 걸어다니는포션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썩이나감은 장화만을 신고 있었고 다른 잔챙이들은 신발과 하의를 아예 탈의한 상태였다.
"너 혼자서 가능하겠어?"
[죽어랏!]
걸어다니는포션은 다시 세인트 레이를 사용했다. 빛의 광선이 썩이나감을 꿰뚫었지만, 그는 체력이 조금밖에 닳지 않았다.
[유니크 신발인가!]
걸어다니는포션은 단단히 착각을 했다. 장비라고는 검 하나만 차는 썩이나감이 신었으니 엄청난 아이템이라 생각한 것이다.
실상은 썩이나감이 자주 쓰는 결사항전의 방패였다.
[죽어라. 이 놈!]
걸어다니는포션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면서 몇 없는 공격스킬들을 사용했다.
썩이나감은 묵묵히 그걸 맞으며 다가왔다.
[이이이익!]
한 발자국 천천히 내딛는 장화 신은 포식자는 그의 멱살을 잡았고 천천히 복부에 검을 찔렀다.
* * *
"장화 잘 신었습니다."
말이 임기응변이지 사실상 도박이었지만, 내 이미지가 워낙 팬티만 입고 싸우던 탓에 성공적으로 먹혔다.
혼노지승려는 자신이 죽은 장면을 돌려 보면 억울해서 참지 못할 것이다.
그를 죽인 나나 같이 구경을 한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건 말도 안 되는 촌극이었으니까.
"썩님. 이거 올려도 되요?"
"애 박제 좀 할게요."
"그렇게 하세요."
날 도와준 이들이니 그런 것 가지고 트집을 잡을 생각이 없었다.
"애도 거물이겠지?"
"언제 랭커 몸 위에 발 얹어 보냐."
"재 이거 보고 있으려나?"
"몰라 스샷 찍어."
다들 친구인지 옹기종기 모여서 혼노지승려와 걸어다니는포션의 시체에 올라가 스샷을 찍어 댔다.
"썩님. 가기 전에 여기 가운데 좀."
옥상에서 내려가려는데 붙잡기까지 하니 딱 한 번 그들 사이에서 수줍은 브이 한 번과 함께 물러났다.
[열파창 : 너 언제 오냐. 나 레이드 먼저 간다?]
[흑군 : 기다리니 힘들다.]
[독고무적 : 나도 죽었다.]
내가 죽지 않은 것을 알고 있으니 파티원들은 파티음성이 아닌 파티채팅으로 대화를 시도했다.
[썩이나감 : 예. 죽고 갑니다.]
이세계 이동석은 새로 합류한 유저들로 인해 아직도 발이 묶였다.
내구도도 많이 떨어져서 온통 금이 간 상태였다.
"재내한테 안 죽으면 되는 것 아냐?"
문득 죽음의 형태에 대한 의문점이 생겼다.
차원침략자들에게 죽으면 해당 도시채널에는 접속이 불가능하다. 그 전에 혼자 죽으면 어떤 일이 생길까.
[헤이스트를 사용합니다.]
"해보자."
옥상을 전력으로 뛰어 이세계 이동석을 향해 뛰어 올랐다. 거리가 너무나 짧아 닿지 않을 것 같았지만, 2단 점프를 사용해 한 번 더 높이 비상했다.
[썩이나감이 나타났다!]
[공중이다. 위를 보라고!]
[이동석을 지켜!]
[놈을 죽여야만 한다!]
아래에서 그걸 본 차원침략자들이 반응을 했다.
원거리 직업군들이 공격을 해댔지만 내 검이 먼저 이동석에 박혔다.
카가가가각!
검을 박은 상태로 이동석에 발을 붙였다.
[벽타기를 사용합니다.]
이게 될까? 정말로 가능할까?
의문과 함께 이동석에서 발을 땠다.
이동석은 시설물로 판정이 되어 내 두 발은 균열이 간 이동석 위를 질주했다.
"이거 개꿀이잖아!"
검을 뽑아 이세계 이동석 꼭대기로 달려가며 연신 검을 휘둘렀다.
내구력은 급격하게 떨어져나갔고 차원침략자들은 시야에서 사라진 나를 공격하지 못해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썩이나감.]
"여기서 이렇게 보내."
이세계 이동석의 균열에서 천천히 어둠이 새어나왔고, 그 안에서 나를 노려보는 오니기리가 보였다.
그의 정수리를 노리듯이 검을 역수로 쥐어 내리 꽂았다.
쩌저저저적!
나로 인해 시작된 균열이 이동석 전체에 퍼졌다.
파아아아아앗!
이세계 이동석이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유리와 같은 그 파편에서 허우적거리며 본 것은 차원의 틈새로 다시 빨려가는 차원침략자들이었다.
[썩이나감!]
낙하하는 나와는 반대로 높이 올라가 사라지는 오니기리는 내 이름을 울부짖었다.
[YOU DIED.]
승리의 여운을 만끽하기도 전에 바닥에 떨어진 캐릭터의 목이 꺾여 죽었다.
공격이 끝난 현장을 더 살피고 싶지만 나를 기다리는 파티원들에게 돌아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