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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은 옷을 입지 않아-112화 (112/201)

제112화 고인물은부숴버린다.

내가 차원침략자일 때는 어둡게 물든 3구역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런데 침략을 받는 입장에서 보니 참 도시가 더럽게 변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3채널에 이동하면서 느낀 점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입장이 확실히 다른 것은 그냥 말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벌써 뚫렸네. 지원해 봤자인데 다시 돌아가자."

같이 3채널로 따라온 열파창이 투덜거렸지만 귓등으로 넘겼다. 막상 여기에 왔더니 록을 포함한 고대오크전사들이 전투의 흔적에 굉장히 흥분했기 때문이다.

"쟤들 보고 그 말할 수 있어요?"

"저건 좀……."

열파창도 그건 좋은 선택이 아님을 알았다.

방금 전의 발언 때문에 오크 NPC들이 그를 죽일 듯이 쳐다봤기 때문이다.

미니맵을 여니 멀지 않은 곳에서 독고무적과 흑군이 20번대의 차원침략자들과 싸우고 있었다.

두 명이서 열 명을 상대하는 것이 벅찬 것도 있지만, 전투가 너무나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

죽을 때의 망신살은 둘째고 3채널에 다시 들어올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아냐. 다크존에서 적의 구분이 힘들어서다."

열파창은 한 눈에 알아차린 것 같지만, 나는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구분이 힘들다고요?"

"적들의 허리 밑으로 제대로 안 보이잖아. 저게 얼마나 차이가 큰데."

"다 보이잖아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다크존이 어둡기는 하지만 차원침략자의 어둠은 그것과는 감히 비교가 되지 않았다.

옅은 회색와 완전무결한 검은색이 어찌 같을 수 있을까.

"너 그게 무슨 소리야. 색적 스킬이라도 가지고 있는 거냐?"

내가 구분을 해내자 열파창은 신기해했다. 특별한 스킬이 없어도 구분이 가능한 이유는 따로 있다.

"전 던전 자주 들어가서 그래픽 옵션 밝기 최대인데요."

죽음의 수련소 퀘스트가 대부분 동굴이었다.

횃불을 들고 싸우면 버서커의 소울이 가진 공격력 상승효과를 방해한다.

주변에 설치하고 싸워도 가시거리가 좁아서 그래픽 설정에 손을 댈 수밖에 없었다.

"뭐야. 너 제대로 즐기잖아."

"FPS 즐겼다면서요. 그쪽이 옵션 잘 만지지 않아요?"

FPS는 상대방을 더 잘 파악하기 위해서 일부러 게임내의 그래픽 옵션을 낮추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면 수풀과 같은 장애물의 묘사가 굉장히 허술해져서 숨은 적이 잘 보이는 식이다.

"여기까지 와서 그 짓은 너무 귀찮아서 안 했지."

열파창도 옵션을 만진 후에 나에게도 조언을 했다.

"감마 내가 말한 걸로 바꿔 봐. 이쪽이 더 나아."

"오. 그렇네요."

과연 FPS 게임을 잘 즐긴 사람답게 세밀하게 그래픽 옵션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마따나 내가 한 것보다 다크존에서 적이 더 뚜렷하게 보였다.

"소풍 온 거냐. 너희 둘 다!"

"안 도우면 화낸다?"

독고무적과 흑군은 보기 드물게 목소리를 높였다. 아차 싶어서 두 사람의 전투에 합류를 했다.

[비상! 초비사아아아아아앙!]

비교적 후방에 있던 차원침략자 29번이 목소리를 높였다.

갑작스런 외침에 다른 20번대도 나와 열파창에게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랭킹 3위. 열파창이다.]

[놈이 문제가 아니다. 저놈은 그 변태검사다!]

[검은혜성! 랭커 학살자!]

[안 된다. 우린 이길 수 없어!]

놀랍게도 열파창이 아닌 내 등장에 적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기분 나쁜데."

"우리가 더 역해 보였어?"

거기에 자존심이 상한 것은 독고무적과 흑군이었다.

방금 전과 달리 둘이 전력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나만을 주시했던 적들이 하나씩 무너졌다.

열파창도 자존심이 상했는지 그대로 뛰어들어 적들을 공격해나갔다.

"30번대가 없네."

오니기리가 이세계 파편석을 많이 소지하고 있어서라고 보기에는 독고무적과 흑군 두 사람이서 쌓은 승수도 만만치가 않았다.

[빈틈이다!]

차원침략자 중 하나가 다크존에 웅크렸다가 뛰어 올랐다. 자신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겠지만, 그래픽 설정을 고친 나에게는 너무나 훤히 보였다.

[커허억!]

백스텝으로 피한 뒤에 역세기검으로 놈의 허리를 베었다. 어둠을 토하며 물러나는 그에게 다시 검을 뻗자 이동스킬을 쓰며 물러났다.

스킬모션과 장비를 보니 은신자였던 것 같다.

"바보야? 암기를 먼저 던지거나 암살로 뒤를 노렸어야지."

[닥쳐라!]

차원침략자 26번은 갑자기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스킬 그림자숨기.

저녁 시간대 이후거나 주변이 어두우면 판정이 더 후해지는 은신자의 중요한 스킬 중 하나다.

처음부터 저걸 쓰고 공격을 했다면 내가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인벤토리에 손을 뻗어 막무가내로 화염의 구슬과 빙결의 구슬을 집어던졌다.

재고는 넉넉하기에 하나만 걸리라는 식이다.

화르르륵!

[칫!]

우측면에서 바닥에 깔린 불길이 무언가에 밟혀서 사라졌다. 거기에 차원침략자 26번이 있음이 분명했다.

놈의 위치를 파악했어도 공격을 할 수 없었다.

29번, 날 처음에 알아차린 놈이 긴 총열을 이쪽으로 계속 조준했기 때문이다.

엘리멘탈 소울2의 수많은 직업군 중에서 유일하게 총기를 다루는 직업군이 있다.

권총, 소총 샷건, 저격총 등에서 역활군이 달라지는데 그중에서 가장 까다로운 상대를 고르라면 당연히 저격수다.

29번이면 2차 전직인 마크스맨은 아닐 것이니 저격의 정확도와 명중도가 대폭 떨어진다.

타앙!

그런데도 쏘아지는 총알은 섬뜩함을 느꼈다. 일반공격이면 백스탭으로 간단하게 피했을 것이지만, 공격모션에 보이던 스킬 임펙트는 감출 수 없었다.

계속 나를 조준하고 있던 것을 보면 차징형 스킬임이 분명하다.

예측하자면 헤드샷임이 분명하다.

콰아앙!

상체를 틀면서 백스탭을 했다. 측면으로 몸이 피해지며 내 머리가 있던 곳을 마력을 실은 총알이 훑고 지나쳤다.

스킬이 된 이상 저 총알 하나는 사람 머리만 한 공격범위를 가진다.

백스탭으로 피하지 않았다면 금방 죽었을 것이다.

[빈틈이다.]

그사이에 26번 차원침략자가 등뒤로 나타났다. 한 손으로 목을 끌어당기며 차가운 칼날을 들이밀려고 했다.

나 또한 다급하게 등가교환의 방패를 쓰려고 할 때였다.

꽈아아악!

"그놈은 못 건드린다."

[그, 그만둬!]

주변에서 적을 찾아 배회하던 잭칼이 26번을 잡아당기고는 그대로 바닥에 내리찍었다.

체력이 바닥이던 26번은 그대로 죽었다.

시체에서 어둠이 가시고 드러난 것은 유니크 아이템으로 도배를 한 은신자 캐릭터였다.

[이 오크들은 도대체 뭐야! 유저인가?]

[록이다! 뉴 알론의 시장이라고!]

[어디서부터 틀어진 거야!]

그레골라와 록도 파티원들을 도와 싸우니 일본의 유저들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시나리오를 진행하지 못한 그들의 눈에는 마치 뉴 알론이라는 도시 전체가 자신들을 반격하기 위해 모인 것 같았으니까.

*       *       *

[3구역 록 시장 등장! 우리를 공격 중입니다.]

[썩이나감과 함께 왔습니다!]

[그 이외에 NPC로 보이는 오크들의 공격!]

오니기리에게 다른 차원침략자들의 보고가 연이어 들어왔다.

제2성벽을 점령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결국 썩이나감을 포함한 일곱에게 20번대 전부가 패퇴한 것이다. 고작 3분밖에 끌지 못한 것도 치명적이었다.

"원딜들은 모두 이동석을 노려!"

"게릴라다! 건물에서 응전해!"

제2구역의 시가지로 들어가자 건물들에 숨어 있던 한국유저들이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창문과 옥상에서 공격을 해 왔는데 자신들처럼 급조한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를 한 티가 났다.

차원침략자가 어차피 죽으니 모두 이동석을 노린 것이다.

콰드드드득!

이세계 이동석에 크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한국유저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제1성벽에 가기도 전에 내구도가 절반이나 사라졌다.

쿠구구궁.

오니기리는 이세계 이동석의 전진을 멈추었다.

[오니기리! 이게 무슨 짓이야!]

[왜 움직임을 멈춘 거지?]

[이제 와서 포기하는 거냐!]

앞에서 길을 뚫고 있던 10번까지의 차원침략자들이 분노했다.

[적의 저항이 만만치가 않다. 이대로는 1성벽에 가기 전에 무너진다. 먼저 여길 깨끗하게 정리하고 뒤에서 오는 그들을 감당해야만 한다.]

[그것도 그렇지만…….]

[뒤를 막던 20번대가 앞을 막을 수 있을까?]

[머릿수가 너무 부족하다.]

오니기리가 결정을 내렸음에도 차원침략자들끼리 의견이 판이하게 갈렸다.

이곳에서 적들을 쓸어내고 나아가자. 혹은 죽어도 앞으로 밀어내자.

이 지독한 논쟁에 오니기리도 머리가 아파 왔다.

*       *       *

[아리가또사또 : 재들 GG치나본데?]

[간디 : 안 싸우고 멈췄어요.]

[청소기 : 님들님들. 정리해버립시다.]

[합법토토빠따맨 : 홈경기 승리 가자아.]

다크존을 쫓아 이동하되 너무 서두르지는 않았다. 잘못해서 숨어있던 차원침략자가 기습을 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열파창은 빨리 끝내기 위해 서두르자고 닦달했지만, 그래픽 설정은 가시적이니 은신 중의 적을 믿을 수 없는 나머지의 의견을 따라야만 했다.

"거짓말쟁이 같으니. 6분이 다 되간다고."

"다 잡아놓고 물러나면 민심 나락가요. 사사게에 아름답게 물들여 보시게요?"

툭 튀어나온 입에서 터져 나오는 그의 불만을 잡아 주는 것은 간단했다.

나야 커뮤니티에서 뭐라고 떠들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상당수의 랭커길드들은 은근히 그런 걸 신경을 썼다.

나와 다른 의미로 게임에 현생을 갈아 넣었기 때문이다.

캐릭터의 체면과 자신의 체면이 같을 수 있다는 것은 참 여러 의미를 가진다.

"뭐, 그만큼 준비를 했으니까 빨리 가고 싶은 것도 이해합니다.

무작정 몰아세우는 것이 아니니 열파창을 비롯한 두 길드장의 고생을 인정해둬야만 했다.

일본서버도 준비를 해 뒀음에도 제2구역에서 멈춘 것은 결국 랭커가 아닌 유저들이 그들의 준비에 따라 움직였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레이드에 참여 못하는 길드들에게 미리 이야기를 해 뒀지."

"우리 서버는 채널 작잖아. 길드 몇 개씩만 분포해서 지휘만 해 주면 잘 잡혀."

"어쨌든 일본에게는 게임으로라도 못 지는 거니까."

정작 세 명의 길드장들은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이쯤이면 일본유저들이 비교적 순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놀랍네요. 스파이를 심어 두다니."

일본서버의 가장 큰 패착은 우리의 움직임만을 생각해 둔 것이다.

미안하게도 이런 것에는 도가 튼 사람들이 내 옆에 있었다.

이 사람들이 얼마나 스파이를 잘 사용하냐면 상대방 길드에 사람을 심어서 공성전 때 PC방 두꺼비를 내리고 튄 시절부터 게임을 했었다고 한다.

상대국가의 커뮤니티 글을 퍼 와서 번역을 할 정도면, 게임 내에도 섞여 있다는 것이 당연하다.

"거기다가 평균을 내자면 몬스터 침공보다 필드보스를 잡으려다가 죽어서 뉴 알론에서 부활하는 유저가 더 많거든."

흑군은 저번 필드보스 레이드 때의 뉴 알론 광장 영상과 일본서버에 침략했을 때의 광장 영상을 비교한 자료를 보여 줬다.

"다른 게임에서 랜덤박스 드랍확률 따지고 있을 때, 이런 짓만 십 년이 넘게 했다는 거야?"

같이 자료를 본 열파창은 혀를 내두룰 수 없었다. 이게 MMORPG의 고인물과 고이지 못한 이의 차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이래야 이긴다. 뉴비."

"그러니 열심히 적폐들 쳐내 보라고."

독고무적과 흑군이 그걸 보여 준 이유는 간단했다. 공개한 것 말고도 따로 조사한 자료들이 수두룩하다는 거다.

지금 공개한 수준도 열파창을 포함한 뉴비들은 따라하기 급급할 거다.

"제길."

열파창은 이를 악물었다.

먼저 달려나간 그는 2구역에서 한국서버의 유저들을 죽여나가는 일본의 침략자들에게 창을 들이댔다.

"이름하여 열파창! 네놈들을 죽인 주인공이시다!"

열파창은 창을 크게 휘두르며 스킬들을 사용했다.

시가전을 벌이며 저항하던 한국유저들을 상대하던 10번대의 차원침략자들이 대응을 하지 못하고 얻어맞았다.

스피어 엑스퍼드의 스킬들은 전사 계열군에서 가장 범위가 넓었다. 한번 틈을 파고들면 그 광역기에 휩쓸려 대열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차원추적자 0번대가 앞으로 나서며 열파창을 노렸으나, 그들의 앞에 오크 NPC 삼인방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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