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화 고인물은투기장스타.
"퀘스트가 이어진다고?"
예상하지 못한 상대의 등장에 어안이 벙벙했다.
이 사태만 대충 수습하면 퀘스트가 끝날 줄 알았는데 왜 여기서 또 다른 상대가 난입하는 걸까.
[잭칼의 도전.]
-오크펠슨 투기장의 챔피언 잭칼. 그는 신성한 투기장이 이방인으로 인해 더럽혀진 것을 참지 못했다. 그의 인정을 받아 고대오크전사가 될 수 있는지 확인하자.
-완료 조건 : 잭칼에게 승리.
-패배 조건 : 잭칼에게 패배.
순간 카쿤이 말한 투기장에 있는 오크가 눈앞의 잭칼이지 않을까 싶었다.
잭칼의 레벨은 무려 60이다.
특별한 장비를 착용하지 않아 더 두드러진 근육질의 몸은 머슬맨이나 챔피언 같은 직업이지 않을까 싶었다.
"이 신성한 투기장을 모욕하지마라!"
"와아아아! 잭칼! 잭칼!"
"다 찢어 죽여! 잭카아아알!"
잭칼의 포효에 군중들은 더 환호했다.
투기장의 분위기는 완전히 그의 것이었다. 영웅이 된 그와 반대로 난 악역이 되었다.
"이런 약골 따위는 필요 없지!"
잭칼은 그레골라는 두 손으로 번쩍 들어 올리더니 바깥으로 던졌다.
"너의 자격을 내가 시험하겠다!"
"얼마든지."
슬쩍 옆을 보니 요허니 주니어는 귀신 같이 사라진 상태였다. 알아서 자리를 비웠기에 자연스럽게 잭칼과 나만이 남았다.
"와라! 나를 무릎 꿇릴 수 있는 일격이면 인정할 것이다!"
잭칼은 두 팔을 벌리며 버프스킬들을 써댔다.
상대의 공격력을 낮추고 자신의 방어력을 높이는 퍼포먼스. 최대체력을 상승시키는 울부짖는 근육을 사용했다.
저 스킬들은 모두 투사의 2차 전직 중 하나인 머슬맨의 것이었다.
심지어 이전 직업인 역사의 버프스킬은 차력도 사용했다. 차력은 방어력을 조금 높이고 넉백을 방지하는 효과를 지녔다.
즉, 저걸 써대는 것은 죽어도 안 무너지겠다는 거다.
"약았네."
"이게 투기장의 스타다."
잭칼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서 나에게 들어오라는 듯이 두 팔을 쩍 벌렸다.
"와아아아아! 잭칼의 그 자세다!"
"A급의 저 여유! 멋져!"
"무너지지마라. 잭칼! 네가 최고야!"
"투사의 멋짐을 보여줘!"
관중들은 엄청난 환호를 보였다.
어쩐지 이종격투기에서 레슬링으로 장르가 바뀐 것만 같았다.
실제로 머슬맨의 다음 전직이 레슬러임을 감안하면 이 흐름이 정상적일 수 있다.
"이거 록이랑 똑같은데."
"그 배신자의 이름을 논하지 말아라아아아아!"
나도 모르게 꺼낸 말에 잭칼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아무래도 그게 역린인 것 같았다. 거친 숨을 내쉬며 씨익씨익 거리는 것이 내 공격이 약하면 반격이라도 쓸 기세다.
[결사항전의 영역을 사용합니다.]
[스피어마스터의 소울을 사용합니다.]
두 개의 스킬들을 먼저 사용했다.
록 때를 생각하면 일격이 강하만 강할수록 내 평가가 좋아졌다. 그걸 생각하면 아예 한 방으로 끝내야만 한다.
[나태의 구덩이를 사용합니다.]
그 한 방을 위해 칠죄종의 스킬 중 하나를 꺼냈다.
[귀찮지 않아? 숨 쉬는 거.]
나태의 슬로스의 중얼거림과 함께 시전영역은 바로 잭칼의 발 아래였다.
[상대가 탈진에 걸렸습니다.]
"허억!"
잭칼의 안색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 얼굴의 반은 가린 문신이 일그러질 정도로 스킬은 정확하게 걸렸다. 그걸 만끽하며 역세기검의 차징게이지를 최대한으로 모았다.
촤하아아아악!
"크하아아악!"
검은 수평선을 그리듯이 길게 휘둘러졌다. 그 궤적을 따라 쏘아지는 검기는 그대로 잭칼의 복부에 처박혔다.
잭칼은 레벨60의 머슬맨이라는 직업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괴성과 함께 뒤로 나가떨어졌다.
"……."
장내는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모든 이들의 함성을 등에 업은 영웅이 악당 한 명에게 무너졌으니 당연한 일이다.
진행요원들은 눈치를 보더니 잭칼에게 다가갔다. 그가 정신을 잃었음을 확인하고 작게 고개를 저었다.
"스, 스스스승자. 썩이나감!"
요허니 주니어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 떨림을 전하는 고블린 두개골 확성기도 생전의 죽음을 기억하듯이 요란하게 달그락 거렸다.
* * *
[퀘스트를 달성하였습니다.]
그 외침과 함께 퀘스트가 끝나고 자연스럽게 투사길드로 이동이 완료되었다.
퀘스트 보상으로는 50금화와 함께 미확인 스킬북이 주어졌다.
색깔은 무려 초록색이었다.
그 말은 매직등급 중에서도 가치가 높다는 뜻이다.
"아. 제발."
다른 알림은 젖혀 두고 미확인 스킬북의 감정을 받았다.
[타고난 강골의 스킬북.]
-종류 : 매직.
-효과 : 스킬 습득.
-설명 : 타고난 강골을 배울 수 있는 스킬북이다.
"…애매하네."
스킬을 본 순간 웃어야 할지 울어야할지 모르겠다.
타고난 강골은 역사가 익히는 패시브 스킬 중 하나였다.
[스킬, 타고난 강골을 배우셨습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타고난 강골은 분명 약점을 조금이나마 보완해 주는 거니까.
[타고난 강골LV1.]
-스킬 : 패시브 스킬.
-효과 : 물리방어력을 30 상승시킵니다.
물리방어력만을 보자면 강철피부가 1을 상승시켜 주지만, 타고난 강골은 무려 30을 상승시켜준다.
문제는 31은 너무 애매한 수치라는 거다.
눈먼 화살에 죽지는 않고 딱 죽기 직전까지는 갈 것 같기는 하다.
"그러면 보자."
강철피부와 타고난 강골은 유사한 스킬이다. 이걸 합성하면 어떻게 될까.
스킬합성을 열어서 두 개의 스킬과 마석을 넣었다.
[강철피부와 타고난 강골의 스킬합성을 진행하시겠습니까? Y/N.]
역세기검도 성공했으니 이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확신했다.
[강철뼈를 생성하였습니다.]
"좋아!"
기대대로 스킬이 합성이 되었다.
[강철뼈LV1.]
-종류 : 패시브 스킬.
-효과 : 물리방어력을 40 상승시켜줍니다.
방어력은 확실히 더 올라갔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저레벨의 몬스터에게 맞거나 비루한 함정에 한 번에 죽을 일은 사라진 것이다.
[도전과제, '위대한 하극상'을 달성하였습니다.]
[도전과제, '무대를 뒤집어 놓으셨다'를 달성하였습니다.]
[도전과제, '원소드맨'을 달성하였습니다.]
[도전과제, '위대한 쇼맨'을 달성하였습니다.]
그 뒤의 도전과제 알림들은 대충 넘겼다.
보상으로 얻은 것은 금화 3개와 솔직히 쓸 일이 별로 없는 체력과 마력 포션 10개, 무기강화석, 새로운 칭호인 자이언트 킬러였다.
"멋진 마무리였다. 너 정말 대단하잖아. 얼른 B등급이 되라고!"
대충 다 마무리하자 쿠세락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전보다 확실히 체력 손실이 적었다.
방어력이 이렇게 소중한 것이었구나 새삼 깨달았다.
"지금 가능해요?"
"…어어. 아직 모자라네. 왜지? 이렇게 강한데?"
쿠세락이 의문에 그저 말없이 웃었다. 아직 레벨이 모자라니 아쉬울 뿐이다.
"그보다 그 A등급이 잭칼 맞죠?"
"아. 맞아. 뒤에 휴게실에 두 놈 누워있으니까 가봐."
"알겠어요."
쿠세락이 놓아주자 얼른 휴게실로 갔다. 거기에는 코를 골며 자고 있는 그레골라와 팔짱을 끼고 뚱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잭칼이 있었다.
"저 새끼 왜 이렇게 시끄럽게 자냐."
"맞은 데는 괜찮아요?"
"흥! 배가 아파서 쓰러진 거야!"
"또 아파 보시게?"
"……."
잭칼은 입을 꾹 다물었다. 툭 튀어나온 송곳니가 코에 닿을 것처럼 올라왔다.
"이거 보고 어떤 생각 들어요?"
인벤토리에서 역시나 빛나고 있는 완성된 고대오크전사의 증표를 꺼냈다.
역시나 잭칼 또한 황홀한 눈으로 그걸 봤다.
"멋지군. 내 선물인가?"
"고대오크전사를 선별해야 하거든요. 딱 잭칼이 어울리는데."
"난 전사보다는 투기장의 투사인데……."
"진짜 스타면 원정경기도 가야죠. 뉴 알론은 어때요?"
망설이는 잭칼을 흔들 키워드는 이미 충분하게 확보했다.
"흠? 거긴 록이……."
"싸울 수 있겠네요?"
"가자."
잭칼은 덥썩 내 손을 잡았다. 이로써 고대오크전사는 두 명이나 모았다.
남은 것은 한 명이었으니 카쿤을 찾아갔다.
"자이언트 킬러라며? 푸하하하!"
카쿤은 내 새로운 칭호를 보며 파안대소를 했다. 그건 나보다 뒤를 따라온 잭칼을 향한 거였다.
"아가리 다무쇼. 늙은 혓바닥 뽑기 전에."
"지랄하네. 네놈 짬으로 시장 되려면 백 년은 일러."
"다시 한번 싸워 봅시다."
"그게 이방인 따위에게 진 놈이 할 말이냐?"
"……."
카쿤의 비웃음에 잭칼은 입을 꾹 다물었다. 꽉 쥔 주먹을 부들거리고 있었는데 나를 금방이라도 죽일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남은 한 명은 어디에 있죠?"
"뉴 알론에 가봐."
"설마 그입니까?"
"아마도? 어차피 증표가 후보군은 다 정해주잖아."
카쿤은 내 허리춤을 가리켰다. 그의 말마따나 인벤토리에서 진동이 오면 파악 스킬을 쓸 필요가 없이 증표가 진동을 하는 상대를 찾기만 하면 된다.
실제로 투기장을 나오고 돌아다니는 동안에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러면 갈 곳은 거기뿐이지."
카쿤이 뭘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록.
남은 고대오크전사는 그다.
* * *
나도 사람인지라 게임은 거기에서 잠깐 끊었다. 방에만 처박혀서 게임만 하다가는 진짜 죽겠다 싶어서 1층에서 옥상까지 한 번 완주를 했다.
땀에 젖은 몸을 씻고 난 후에는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했다.
"곧 생신이시네."
부모님의 생신은 이주일의 차이가 난다.
무더운 여름이 끝나면 곧 추석이다. 전화라도 드릴까 싶었지만, 이때까지 연락을 못 드린 것을 생각하니 차마 그럴 용기가 없었다.
당장에 어버이날도 성인이 되어서 한 번도 챙겨드리지 못한 것이 특히 마음에 걸렸다.
이때까지 못난 아들이었지만 지금이라도 만회하고 싶다.
뭘 선물을 해 드릴까.
인터넷을 뒤져서 이것저것 살피다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은 마스크를 쓰고 들린 곳은 근처에 있는 가구매장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고객님. 체온 검사를 진행하겠습니다."
직원은 직접 내 체온을 체크했고 QR 코드도 인식한 뒤에 가게 안내를 시작했다.
"어떤 제품을 보러 오셨나요."
"곧 부모님 생신이 다가오는데 선물이라도 하나 해 드리고 싶어서요. 돌침대 좀 볼 수 있을까요?"
"효자시구나. 이쪽으로 오세요."
직원은 걸음을 옮기며 돌침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새로 나온 제품인데요. 사이즈도 크고 침대도 살짝 낮게 나와서 허리가 아픈 어르신들이 끝에 걸쳐 앉았다가 일어나시기 좋게 되어 있으세요. 양쪽에 온도조절도 있어서……."
평소라면 귓등으로 넘길 정보지만 이번에는 경청할 수밖에 없었다.
돌침대의 가격은 내 생각보다 비쌌다. 보료가 맥반석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몇 만원이 올라서 옵션까지 생각하면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사이즈는 퀸으로 하고 보료는 화이트크리스탈로 해주세요."
가격을 보니 거의 삼백만원에 육박했다. 예전이면 카드를 긁어서 할부를 쓰겠지만, 신용이 개박살이 난 상황에서 현금 말고는 답이 없었다.
"현금 뽑고 올게요."
"카드 안 쓰시겠어요?"
"안 들고 와서요."
카드를 쓸 수 없는 몸이라는 걸 차마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근처 은행에서 넉넉하게 삼백만 원을 뽑았다.
이사를 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버겁지만 이건 당연히 써야만 하는 돈이다.
하지만 손에 잡힌 돈의 무게감에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현실과 타협해서 조금 가격이 저렴한 모델로 바꾸는 것이 맞지 않았을까.
"병신새끼. 전화도 안 드리면서 이것도 못하겠다는 거야?"
매장으로 가면서 내 스스로를 다그쳤다.
부모님의 연세도 적지 않다. 또한 두 분은 살아생전 바닥에 깐 이불 위에서 밖에 주무신 적이 없었다.
벌써 육십을 넘기신 분들에게 지금이라도 선물을 하는 것에 돈을 아껴서는 안 된다.
"배송이 늦어지지 않도록 고객님이 선택한 주소로 안전하게 보내겠습니다."
직원은 오랜만에 두둑하게 쥔 현찰이 마음에 드는지 만족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손에 쥔 목돈이 사라졌지만, 이상하게 가슴은 든든해졌다.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드리는 선물에 부모님이 기뻐하셨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