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고인물은승자다.
[그레골라의 시험.]
-양봉농장의 그레골라는 전사가 되어 용맹과 긍지를 시험하고자 하는 고대오크의 정신을 지녔다. 그가 당신을 인정할 수 있게 투기장에서 승리하자.
-완료 조건 : 그레골라에게 승리.
-실패 조건 : 그레골라에게 패배.
카쿤이 투기장으로 보내기에 두 번째 전사와 붙을 줄 알았다. 설마 그레골라가 먼저일 줄은 몰랐다.
"가자."
나도 이김에 투사길드에 들러서 스킬이라도 구매해야 할 것 같다.
"그 오크는 뭐지?"
"이봐. 다음 공략 올려달라고."
"레이드 같이 뛸래요?"
투사길드에 가는 와중에 유저들이 한 번씩 말을 걸었다. 굳이 무시할 필요는 없으니 적당하게 대꾸를 하며 지나갔다.
"엘프 따위와도 친하다니."
유저들의 종족을 본 그레골라는 불편함을 감추지 않았다. 이곳 브라이크 지역의 3대 종족은 인간, 드워프, 오크다.
모두 엘프와는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실제로 엘프로 플레이하는 유저들은 NPC와의 호감도가 전체적으로 낮게 시작했다.
"오랜만이야. 대주먹. 뒤의 친구는 누구지? 우리 길드의 희망자인가?"
투사길드장 쿠세락은 그레골라에게 큰 호감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레골라는 오크 중에서도 썩 편안하지 못한 인상에 큰 체구를 보이고 있었다.
"나의 진가를 알아보는군! 난 그렉의 아들 그레골라다!"
"…아."
열의가 넘친 그레골라와 달리 쿠세락의 표정은 금방 어두워졌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 진상 새끼 이기든지 지든지 너무 난리라서 말이야. 자기한테 진 놈을 자꾸 농장에 끌고 갔다고."
쿠세락은 불평불만을 털어놨다. 어떤 식으로 그렉이 그 주옥같은 농장의 일꾼을 충원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내 잘못은 아니잖아."
노동환경의 극악함을 아는 그레골라는 내 시선을 피했다. 그래도 그렉보다는 양심이 있다.
"잘 해보라고. 오늘 A급이 왔거든. 새로운 대주먹에 잔뜩 기대하고 있었어."
"A급 투사요?"
"그렇고말고. 우리 투기장 랭킹1위야."
"아주 강하겠네요."
쿠세락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었다.
B급 투사의 조건이 2차전직이었다. 그렇다면 A급 투사는 기본적인 스펙이 독고무적이나 흑군보다 강할지도 모른다. 높은 확률로 고대오크전사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가 누구죠?"
"먼저 저 친구부터 처리하라고."
쿠세락은 내 질문을 끊었다. 불만이지만 그의 말마따나 그레골라를 먼저 정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난 이거다."
그레골라는 벽에 장식된 배틀해머를 들었다. 사람 하나 보다 더 나가는 무게를 한 손으로 들어 올리는 것을 보니 마냥 편하지가 않았다.
저 녀석의 첫 상대가 나이기 때문이다.
투기장에 들어서자 시점은 자연스럽게 시네마틱으로 바뀌었다.
* * *
투기장은 언제나처럼 수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다들 침묵을 지키고 무대를 보고 있다는 점이다.
"대주먹과 그의 아들이 싸운다는 거지?"
"맞아. 강제취직의 그렉."
"그렉의 아들이면 엄청나겠군."
"과연 누가 이길까."
"대주먹이 쥐면 취직당하는 거야?"
군중들은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강제취직의 그렉.
한때 오크펠슨 투기장의 정점이자 수많은 루키들을 강제로 끌고 농장으로 돌아간 사내.
그의 아들이면 여간내기가 아닐 것이다.
저벅. 저벅. 저벅.
무대의 중앙으로 보기 드물게 정장을 입은 오크가 올라왔다.
메인무대에만 등장하는 사회자 요허니 주니어였다.
"아직도 오크펠슨은 기억한다. 수많은 도전자들을 무너트리고 그들의 자유와 투쟁을 무너트리고 노예로 만든 자. 세월은 그를 보냈으나 새 시대는 새로운 그를 이곳에 불렀다. 강체쥐직의 그렉의 아들! 양봉꾼 그레골라아아아아!"
고블린의 두개골로 만든 확성기를 들고 소리를 쳤다. 턱뼈가 달그락거리며 생전의 비명소리와 함께 그의 목소리가 증폭되었다.
유리를 손톱으로 긁는 그 역겨운 소리는 오히려 듣는 이들을 묘하게 자극시켰다.
"우워어어어어어어!"
"오크펠슨 양봉의 자존심!"
"그레골라! 그레골라!"
그렉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레골라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투기장을 빛내던 악동은 사라졌지만, 지금 그들의 손에 잡힌 벌꿀주는 그 악동이 승리로 일군 산물이기도 했다.
"내가 오크의 전사다아아아!"
기다란 산양의 뿔의 인상적인 투구, 사슬갑옷에 중갑옷을 겹쳐입은 그레골라의 손에는 오크조차도 두 손으로 쥐어야만 하는 거대한 망치가 쥐어져 있었다.
그렉의 이야기만 듣고 처음 들어온 투기장에서 자신의 이름이 외쳐지고 있다.
그레골라는 거기에 취해 있었다.
뒤이어 요허니 주니어가 손을 들었다. 그렉과 그레골라의 이름을 외치던 투기장은 다시 고요하게 변했다.
"누가 감히 그와 맞설 것인가. 오크펠슨의 새로운 대주먹! 뉴 알론에서 온 살인마! 그 어떤 방어구도 필요가 없이 한 장의 속옷으로 적을 유린하는 자!"
다시 말을 잇던 요허니 주니어는 고블린 두개골 확성기를 내려놓고 아직 닫혀있는 다른 철문을 보았다.
드르르르르륵!
녹이 슨 쇠사슬이 요란하게 당겨지며 철문이 열렸다.
거기에서 걸어 나오는 이방인은 뉴 알른을 넘어 오크펠슨까지 떠들썩하게 만드는 주인공이었다.
"고대의 의지를 잇는 고대오크전사의 선별자. 썩이나가아아아암!"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이때까지 참고 억눌려 있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야생의 모습과 거의 흡사하게 자신의 치부를 가린 속옷 하나와 검을 쥔 사내는 무표정하게 앞으로 걸어 나왔다.
* * *
"요란하네."
인게임 모드로 바뀐 것은 철문이 열리고 걸음을 옮길 때부터였다.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어깨너머로 보던 격투기 대회해설 같은 멘트가 들릴 줄은 생각도 못했다.
대주먹 호칭을 얻은 퀘스트 라인에서 뒷골목의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느낀 것으로도 좋아하는 유저들이 많았는데, 이런 분위기도 호평이 있을 것 같다.
이번 공략은 빠른 것도 좋지만 조금 더 현장의 분위기를 살리는 쪽이 괜찮으리라.
"쟤는 왜 나랑 레벨이 같냐."
먼저 관중의 함성을 만끽하는 그레골라의 레벨은 나와 같은 56이었다.
난이도를 조정해주는 것은 알겠지만, 명색이 고대오크전사로 선별할 대상인데 저런 레벨이면 곤란하다.
"와라! 썩이나감!"
먼저 무대에 선 그레골라가 나를 재촉했다. 관중들도 그의 편을 들며 호응했다.
"올라가라. 대주먹!"
"미적거리지 말라고!"
"쫄았냐? 쫄았어?"
"우우우우! 싸워라!"
그 속에 야유도 섞였지만 사실 대수롭지 않았다.
그보다는 그레골라는 어떻게 공략할 것인지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이 중요했다.
[명성이 소폭 감소합니다.]
물론 이러면 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다.
"양쪽 선수들의 간략한 검사 후에 경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요허니 주니어가 고개를 까닥이자 대기하고 있던 진행요원들이 나와 그레골라에게 다가갔다.
진행요원들은 보고된 무기 이외에 다른 것이 있나 형식적으로 살폈다. 물론 나는 살펴볼 것이 없어서 긴 머리를 한 번 훑어보거나 손톱 아래, 입 안을 살펴보는 것이 전부였다.
반대로 그레골라는 장비가 두터워서 형식상의 점검도 오래 걸렸다.
"그레골라 선수. 준비 되었습니까?"
"물론이다!"
"썩이나감 선수도 존비 되었습니까?"
"가시죠."
나보다 높은 레벨도 아니고 동레벨이라면 절대 질 자신이 없다.
"시자아아아악 하겠습니다아아아!"
요허니 주니어는 뒤로 물러나면서도 거리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목청을 자랑했다.
"우오오오오!"
그레골라는 먼저 귀가 찢어질 정도로 괴성을 질렀다. 상태를 보니 버프가 하나씩 생겼다.
해머 유저의 중요한 스킬로 두들기는 심장소리였다. 체력과 스태미나 재생에 버프가 붙어서 서브탱커도 가능하게 해 주는 핵심이기도 했다.
해머 유저의 특징은 일격의 파괴력이 엄청나고 둔기의 특성상 공격속도는 느리지만 중대형 몬스터에게 특히 강해서 레이드의 핵심이기도 했다.
문제점이라면 이동기가 다른 직업에 비해 적지만, 일종의 무적판정을 받는 스킬로 무장했다.
쿠구구구궁!
그레골라는 전사 때 배우는 전력질주를 사용했다.
내 헤이스트보다는 훨씬 좋지만 이동속도를 올려주는 것이지 돌진기나 회피기와 같은 성능을 보이지는 않았다.
NPC라고는 하지만 그 스킬들을 감춘다는 것은 나를 상대로 적극적으로 쏟아 붇겠다는 뜻이리라.
[1인 도발을 사용합니다.]
"그어어어어!"
오크 NPC들의 특징은 엄청난 신체적 능력에 상대적으로 모자란 상태저항력이다.
도발을 걸면 확정적으로 당한다고 보면 된다.
그레골라는 나에게 가까이 오자마자 힘껏 해머를 휘둘렀다. 그 느리고 큰 일반공격에 당해 줄 정도로 나는 자비롭지 않다.
터엉!
검을 빼들어 해머를 튕겨냈다. 어찌나 묵직한지 순간 몸이 흔들릴 정도였다.
근력은 나에 준할 정도라고 보면 될 것 같다.
푸욱! 촤아악!
"커허억!"
찌르고 베어내자 그레골라는 피를 토하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동레벨이라 불안했지만 그래도 체력이 높은 직업에 장비빨도 있으니 바로 쓰러지지는 않았다.
"크으으으! 이 노오오옴!"
다시 일어난 그레골라는 망치를 높게 들어 올렸다. 일반공격이 아니라 스킬이라 임펙트부터 다르다.
심판의 망치.
머리 위에 들어 올린 망치로 땅을 치면 반경 3M의 모든 적에게 충격파를 준다.
중요한 점은 그 스킬의 판정범위가 넓지만 공중까지는 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콰아아앙!
땅을 박차고 올라서는 순간에 그레골라의 망치가 바닥을 가격했다. 이대로 바닥에 발이 닿으면 충격파에 휩쓸려서 죽겠지만, 2단 점프로 공중에 더 높게 뛰어 올랐다.
"오오오! 한 번 더 뛴다!"
"저 몸놀림은 뭐지?"
"강제취업마 그렉의 장기잖아!"
공격을 피한 나를 보며 관중들은 환호했다.
미안하지만 하나가 더 남았다.
역세기검을 그레골라의 정수리에 꽂아 넣었다,
카가가가각!
"크허억!"
그레골라의 투구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너덜너덜해졌다. 곧이어 그는 서있지 못하고 땅에 고개를 처박았다.
[퀘스트를 달성하였습니다.]
[명성이 소폭 상승합니다.]
"와아아아아아아!"
다소 싱겁게 끝났지만 군중들은 환호를 멈추지 않았다.
퀘스트 성공보상은 명성 이외는 없었다. 그 흔한 은화 하나도 주지 않는 것이 아쉽지만, 상대가 너무 쉬우니 손가락만 빨 뿐이다.
"죽여! 죽여! 죽여!"
"끝내라아아아아!"
일부는 그레골라의 죽음을 원했다. 애써 찾은 고대오크전사인데 그럴 생각은 없다.
"노예로 삼아! 그 새끼처럼!"
"복수를 하라고!"
또 일부는 그렉이 했다는 짓과 똑같은 걸 원한 것 같다.
퀘스트의 분기점이라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 전작에서도 NPC를 가디언이라는 개념으로 동료로 쓰지 않았던가.
"그래도 너무 약해."
개인적으로는 어그로를 확실하게 끌어 줄 1티어 탱커나 내게 버프를 걸어 줄 직업군이었으면 한다.
해머 유저인 그레골라는 그런 면에서 탈락일 뿐더러 레벨이 너무 낮았다.
"썩이나감! 강제취업마의 아들을 꺽고 대주먹의 위엄을 발휘했습니다. 소감은 어떠십니까. 이 패배자를 어떻게 처리할 생각입니까!"
요허니 주니어가 다시 올라와 신명나게 고블린 두개골 확성기를 흔들어댔다.
"죽입니까? 노예로 씁니까?"
"살립니다."
"아아! 살리는 선택을 합니다아!"
요허니 주니어는 안타까움을 금하지 못했다.
"우우우우우우!"
관중들은 쓰레기를 던지며 야유를 해댔지만, 나로서는 이런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거 내려놓고 말 좀 해줘요. 이때까지 투기장에서 죽이느니 마느니 그런 말 없었는데."
요허니 주니어의 귀에 조용히 속삭이자 그는 아차 싶었는지 말했다.
"투사가 아니라 전사로서 나온 거라서 그렇습니다만, 이방인이라 모르셨군요."
"저 불만만 잠재우면 되는 거죠?"
"뭐, 그래주신다면야 감사하죠."
요허니 주니어는 입맛을 다시며 내 행동을 기다렸다.
"꼬우면 너네가 덤벼."
난 관중들을 가리켰고, 투기장은 순간 겨울처럼 차가워졌다.
[퀘스트가 등록되었습니다.]
"감히 이 신성한 투기장을 어지럽혀어어어어!"
관객 중 하나가 무대로 내려왔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거대한 덩치에 온몸을 감싼 알 수 없는 문양을 가진 오크의 등장에 투기장의 모든 이들이 환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