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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은 옷을 입지 않아-97화 (97/201)

제097화 고인물은날뛴다.

"내 의견은 이번 결정에 들어가지 않아."

말없는 신경전을 깬 것은 독고무적이었다.

그가 말하기 전에 흑군이 손가락을 꼬물락거리는 것을 봤었는데, 남들 몰래 귓속말이라도 보낸 것 같다.

[빨간약파란약 : 지금 랭커들이 증발했습니다. 썩이나감님도 거기에 있습니까?]

나도 돈냄새를 맡은 귓속말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썩이나감 : 이따가 말할게요. 지금 바빠서요.]

[빨간약파란약 : 정보 파악 후에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썩이나감 : 팔 수 있을 정보가 남아있으면요.]

랭커들은 떠들기 좋아하는 이들이 많아서 히든레코드에 팔기도 전에 커뮤니티에 이번 일에 대한 것이 다 퍼질 거다.

"엠페러 길드장은 자기 생각이 없습니까?"

"내 독단을 주의하는 거지."

"책임감이 없는 것은 아니고요?"

"패배의 책임을 지도록 하지."

독고무적이 굳이 저 말을 하지 않아도 누가 제일 욕을 먹을 것인지는 뻔하다.

"누가 감히 대 엠페러 길드장에게 그러겠어요. 힘없는 우리가 욕을 먹겠죠. 저번처럼."

열파창은 슬쩍 나를 바라봤다.

그가 말하는 저번이 내가 엮인 통제해방전쟁임을 모를 수 없었다.

그때 핵심은 휘파람과 그 추종자들이었지만, 결국 나로 인해 부서지는 모양새가 되었다.

적폐세력을 몰아내고 싶어 하던 열파창으로서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썩이나감 : 열파창님. 저 싫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귓속말을 보냈지만, 상대는 귓속말을 차단한 상태였다.

"말하지 않겠나?"

"저야 뉴 알론으로 가야죠."

"이유는?"

"전 적폐가 아니라서."

열파창은 내분을 딱 일으키기 좋은 말로 선을 그었다.

독고무적과 흑군을 비롯한 올드 게이머들은 그다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의견이 잘 맞고 머릿수가 많아서 적폐라면, 너도 같겠지. 반갑네. 적폐끼리 잘 맞을 거야."

독고무적은 여유롭게 다름 사람으로 넘어가니 그 태도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저런 모습 때문에 저 사람이 전작에서 정치로 유명한 거다.

열파창과 같은 경우가 없이 다른 이들은 빨리빨리 대답을 했다. 물론 이유는 무척 간단해서 다들 몸이 달아올랐구나 싶었다.

마지막 차례에서 독고무적은 쓸데없이 긴 말로 나를 포장했다.

"썩이나감. 랭커가 된 것을 축하한다. 랭커 이전에 일본 유저를 이긴 것은 네가 유일하지."

"감사합니다. 상대가 변태라고 방심하더라고요."

"아니. 그렇지 않던데. 자네를 이길려고 준비를 제대로 했었어."

"그 말은……."

"충분히 강하더군. 이중에 몇이나 자네를 이길 수 있을까. 적어도 변태라고 비웃었던 이들은 아닐 거야."

독고무적은 슬쩍 열파창 방향으로 시선을 보냈다. 자신이 신경전을 벌이는 것에 왜 나를 도구로 쓰려는 것인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 놓고 낙오된 화전민의 마을처럼 버거운 일을 맡겨둘 것이 뻔하다.

"그 대단한 분의 고견도 궁금하네요."

열파창은 의외로 속이 좁은지 저런 도발에 곧바로 반응했다. 또한 그와 연관이 있는 자들도 내게 무언의 압박을 보냈다.

다른 쪽을 보니 독고무적과 흑군을 비롯한 이들도 날 뚫어지게 쳐다봤다.

지금 가만히 생각하니 32명의 유저 중에서 뉴 알론이 16명이고 오크펠슨이 15명이었다.

내가 어디에 선택을 하냐에 따라 뉴 알론으로 확정일지 오크펠슨이 절반의 의견을 갈 지가 정해진다.

"고민이 조금 되네요."

팔짱을 끼고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뉴 알론과 오크펠슨.

이 두 가지는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먼저 오크펠슨은 유저가 작은 편이고 그곳의 랭커들은 이쪽에 한 번씩은 진 사람들이기는 하다.

하지만 한국의 오크펠슨 vs 일본의 오크펠슨의 구도가 아니다.

독고무적까지 총 서른셋이서 과연 일본랭커들이 밀집한 오크펠슨에서 이길 수 있을까?

이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었다.

반면에 뉴 알론은 머릿수가 엄청나게 많지만, 그들 중에 이쪽의 전력을 감당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쪽이 더 매력적인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제가 오크펠슨을 말하면 결론이 안 나네요."

먼저 짚고 넘어가야만 할 것은 독고무적이 자신은 의견을 내지 않겠다고 한 거다.

결국 다시 의견을 말하겠지만, 그래봐야 시간만 지체가 될 뿐이다.

"어쩔 수 없이 가야겠군."

"그러게 말이야."

어디라도 상관이 없었던 것인지 독고무적이나 흑군은 오히려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열파창의 우려대로 욕을 먹는다면, 그게 나일 것 같다.

"욕먹으면 깽값만 줘요."

물론 내가 욕을 먹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는 있다. 특히 커뮤니티에서 키보드만 치는 놈들일수록 PvP는 커녕 오크펠슨에 오지도 못하고 게임만 수박 겉핥기로 하는 이들이다.

그들에게는 게임이 목적이 아니라 커뮤니티로 적당히 유머게시판이나 보고 적당히 친목질이나 하다가 진짜로 게임을 즐기는 사람한테 시간 갈면서 인생 버렸다면서 망겜이라는 소리만 할 테니까.

"우리가 이세계로 가면 이세계 이동석과 함께 간다. 이걸 지정된 목표까지 가져가면 점령 끝이다."

독고무적의 설명을 들으니 이세계로 가면 말이 점령이지 사실상 디펜스 게임인 것 같았다.

"물론 그 이동석이 나다. 난 전투에 참여할 수 없지. 싸우지도 못하는 내가 어디로 갈 것인지 주장할 수 없으니까."

"……."

그의 말은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이중에서 가장 강한 전력을 고르라면 당연히 독고무적일 것이다.

전력에서 그가 이탈한다는 것은 문제가 될 수박에 없었다.

"무섭다면 이동지를 옮겨도 된다만."

"싸울 수밖에 없군요."

"갑시다. 그냥 썰죠."

다들 마음을 굳힌 모양이었다.

*       *       *

일본의 뉴 알론 또한 몬스터 헌터 쪽으로 무게추가 기울어져 있었다. 콘솔게임이 부각된다지만 사실은 VR게임의 규모도 만만치 않아 게임은 항상 많은 사람으로 붐벼서 가벼운 렉은 함께 사는 가족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이세계의 문이 열립니다. 차원침략자가 등장합니다.]

갑자기 뜬 알림에 유저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서버와 랭커들의 PvP가 화제라지만, 대부분의 유저들에게는 남의 일이었다.

"차원침략자가 뭐지?"

"뭔가 이상해요. 저기 하늘을 봐요!"

"어두워졌다. 벌써 밤인가?"

"헤에? 환생 퀘스트인가?"

그래서 상황을 심각성을 깨달은 유저보다 그렇지 못한 유저들이 많았다.

맑았던 하늘이 먹구름이 끼었고 제3구역의 광장 중심의 공간이 비틀어지더니 검은 하늘을 담은 거대한 보석이 모습을 보였다.

"오! 이쁘다. 저 보석. 고스하네."

"안에 사람이 있는데?"

"뭐라 적혀 있다. 뭐지?"

몇몇 유저들이 관심을 보이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 보석에 차 있던 어둠이 바깥으로 흘러나와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차원침략자.

레벨도 직업도 없는 그들은 자신을 보며 신기하게 쳐다보는 유저들을 보며 표정이 없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       *       *

[게임 중에서 제일 재밌는 것은 다른 사람의 PC 전원을 끄고 술래잡기를 하는 겁니다. 소울리스 CEO 대니얼 올림.]

독고무적이 이동지를 결정하자마자 곧바로 로딩화면으로 진입했다.

일본서버를 침략하는 상황에 제법 어울리는 문구를 보며 앞으로 펼쳐질 상황에 잔뜩 기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로딩이 끝난 뒤에는 시네마틱 모드가 시작되었다.

빛으로 감싸인 존재가 이세계 이동석에 스며든다. 그가 있던 곳과 똑같은 세계가 머리 위에 나타나 서로 겹쳐지며 이동석은 검게 물들었다.

거기에 영향을 받은 것도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 모든 것이 검은색으로 물들어졌다. 쥐고 있던 검마저 변해 어디까지가 손잡이인지 손으로 만져 봐야 알 정도였다.

"와. 다들 검게 변했네."

"이거 뭐야. 전대물에서 보이는 졸개A잖아."

"진짜네. 우리 그냥 악역이다."

시네마틱이 끝난 후의 인게임에서 다들 자신의 모습을 보며 신기해했다.

검게 변한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없었다.

닉네임도 달랑 숫자로 바뀌어져 있었다.

내가 32인 것으로 보아 이동석이 된 독고무적을 제외하고 랭킹 순으로 매겨진 것 같다.

"1번이 흑군 님이죠? 제가 썩이나감입니다. 랭킹 순인 것 같아요."

"아아. 그런 건가."

"이해했어. 확실하네."

내 말에 소풍을 나온 아이들처럼 신기해하던 이들도 금방 이해했다.

[뉴 알론의 제3구역 광장이다. 다들 시작한다.]

하얀색 공간에 대기 중이라 바깥의 상황은 볼 수 없었다.

독고무적의 음성에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1번부터 32번까지 주변을 빠르게 정리하고 성문을 열도록.]

명령권자가 된 독고무적은 복잡한 명령 따위는 내리지 않았다.

1번부터 차례대로 모습이 신기루처럼 흩어지며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이동석 바깥으로 나오자 주변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어둠에 휩싸인 뉴 알론을 나와 같은 이들이 점령하고 있었으니까.

[도전과제, 차원침략자를 달성하였습니다.]

먼저 뜬 알림을 확인하자 새로운 보상으로 차원침략자라는 칭호가 생겼다. 어차피 번호밖에 안 떴지만 기분전환삼아 그걸라 바꿨다.

[32번. 움직여라.]

잠깐 딴 짓을 하고 있었는데 독고무적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죽어나가는 유저나 NPC들이나 뭐라고 떠들기는 했다. 다만, 너무 많은 일본어 음성에 번역말투가 겹쳐서 뭐라고 하는 지가 도저히 들리지 않았다.

[창공의 독수리를 사용합니다.]

먼저 주변에 적이 어디에 분포가 되어있는지 확인했다.

"여기여기에 적이 모여 있어요. 성문에 밀집했으니까 전 성벽으로 갈게요."

핑을 찍으며 내 동선을 말한 뒤에 먼저 움직였다.

"차원침략자. 죽어라!"

"한국 유저겠다!"

혼자 제2성문으로 움직이니 나를 향해 몇몇 일본유저들이 다가왔다.

닉네임은 처음 듣는 것일뿐더러 걸치고 있는 장비도 형편이 없었다.

선수필승으로 역섬기검을 펼쳤다.

촤아아아아악!

단 일격에 앞에 선 유저들이 추풍낙엽처럼 썰려 나갔다.

뉴 알론에 있다면 고렙이라고 해 봐야 50레벨 정도일 것이다. 내 일격을 감당할 수는 없다.

"다 뚫어. 32번한테 뒤쳐질 거야?"

카랑카랑한 음성이 전장에 퍼졌다. 그 주인공은 2번이었다.

열파창은 나에게 질세라 힘차게 창을 휘둘렀고 그를 막아선 유저들은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실제로 나와 같은 차원침략자들은 악역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중이었다. 다들 한국서버의 랭커들인지라 뉴 알론에 거주중인 저렙들로는 감히 상대조차 할 수 없었다.

[이동석의 어둠이 주변을 침식하는군. 이곳에서 싸우면 너희들에게도 버프가 있다.]

뒤에서 천천히 따라오는 이동석의 독고무적이 추가적인 정보도 주었다. 뼈가 되고 살이 될 정보겠지만, 지금은 조금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범위마법을 써라!"

"놈들도 결국은 죽을 거야!"

"우리가 수가 더 많다고!"

지금 우리가 있는 것은 14채널이다.

서버에 혼잡상태인지 여유상태인지 모르겠지만, 일본유저들은 아직 기세를 잃지 않고 있었다.

콰과과과광!

전열을 정비한 그들이 스킬과 마법을 정면에서 치고 들어오는 차원침략자들에게 난사했다.

저들의 선택은 나쁘지 않다. 솔직히 저렙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

문제는 우리 쪽의 원샷원킬을 포함안 원거리딜러들의 사정거리가 압도적으로 길다는 거다.

퍼버버버버버벅!

"벌레컷이요!"

원샷원킬이 하늘을 향해 활을 쐈다. 하나의 선이 수백개의 점으로 바뀌어 지상을 때렸다.

반격을 하려던 일본유저들은 맥없이 녹았다. 그래도 워낙 인원수가 많아서 여기서 시간이 제법 끌릴 것 같았다.

[결사항전의 방패를 사용합니다.]

"차원침략자 32호 갑니다."

그 빈틈을 파고드는 검은 궤적은 바로 나였다.

이 스킬을 쓰면 나보다 훨씬 레벨이 높은 보스의 공격에도 버틴다.

일본서브의 뉴 알론에 있는 어린 양들에게 무릎을 꿇고 싶어도 굽혀지지 않는 수준이다.

"괴, 괴물인가. 이 녀석은!"

"검은혜성이다. 몇 배는 강하고 빨라!"

"성문에 오지 못하게 막아!"

일본유저들의 패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유저가 일부 죽어나간 덕분에 서버가 넉넉해져서 저들의 번역이 제대로 들린다.

[결사항전의 영역을 사용합니다.]

"쇼타임."

성문 앞까지 도달한 나는 반경 5M를 피와 죽음으로 물들일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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