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85화 고인물은또봤다.
[도전과제, 삼대길드원을 달성하였습니다.]
[도전과제, C급투사를 달성하였습니다.]
용병길드에서는 한 번의 의뢰 후에 곧바로 C급으로 올려주겠다고 했었다.
반면에 투사길드는 곧바로 C급으로 날 배정했다.
"금일의 대전이니 참고하라고."
쿠세락은 길드 반대편의 투기장에 걸린 간판을 가리켰다. 큼지막하게 글자가 새겨진 탓에 창문에 고개만 내밀어도 모든 것이 보였다.
[거대 칼날어금니 멧돼지 레이드.]
[황야의 늑대무리 레이드.]
[피에 젖은 거대정령 레이드.]
[C급 오크투사 1vs3 대결.]
[B급 오크투사 1vs1 대결.]
내가 참여할 수 있게 활성이 된 대결은 다섯 개였다.
[C급 투사 1vs1 대결.]
"저걸로 하지."
뭘 고를까 고민을 하던 중에 간판의 맨 아래 글자가 바뀌었다.
다른 것과 달리 이건 같은 급과 일대일의 대결이었다. 그나마 부담이 없이 할 수 있다.
[퀘스트가 등록되었습니다.]
"좋아. 바로 투기장으로 가라고."
쿠세락이 투기장을 가리켰다. 방금 전까지 닫혀있던 정문도 천천히 열리며 오크들의 환호성이 은은하게 들려왔다.
[처음을 승리로 장식하라.]
-대주먹인 당신은 오크펠슨의 주목받는 투사다. 기대에 어울리는 활약으로 승리하자.
-완료 조건 : 대결 1회 승리.
-실패 조건 : 퀘스트 포기.
퀘스트 내용도 적당한 수준이었다.
오크펠슨의 첫 투기장 사용이니 어설프게 자존심을 세우지 않아 다행이다 싶었다.
"대주먹이다!"
"썩! 썩! 썩! 썩!"
투기장에 가까워질수록 희미했던 함성은 점차 뚜렷하게 들려왔다.
한 도시를 들끓는 축제가 온전히 나만을 주목하고 있었다.
"대주먹이 나를 보셨어!"
"날 조직으로 데려가 주실 거야!"
투기장에 들어서며 관중들을 살폈다. 개중에 팔대조직에 속한 조직원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쿠구구구궁.
내가 도망갈 수 없게 입구가 닫혔다. 그런데도 아직 상대가 나타나지 않았다.
[매칭을 조율 중입니다.]
"어?"
시야를 가린 알림에 순간 눈을 의심했다. 어쩐지 C급 투사라고만 적혀있구나 싶었다.
투기장에 PvP는 빠질 수 없다. 오크펠슨에는 나밖에 없으니 뉴 알론에서 적당한 상대가 걸릴 것 같았다.
[상대를 결정지었습니다. 진행하시겠습니까? Y/N]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가벼운 마음에 매칭을 돌렸다가 날 마주할 상대가 불쌍할 뿐이다.
[JP. 오니기리 Lv58.]
잠깐의 로딩과 함께 눈앞에 뜬 상대의 간략한 정보를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설마 이런 형태로 다시 다른 서버의 유저를 볼 줄은 몰랐다.
왜 Emagician과 달리 중국의 기린아와 일본의 오니기리가 한글로 번역이 된 줄 알겠다. 와중에 오니기리가 삼각김밥으로 번역이 안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한자어와 카나카나의 차이 정도일까.
역시 세심하지 못함은 소울리스 답다.
"네가 왜?"
"네놈. 그때의 사용자인가."
오니기리도 나를 알아봤다.
저번 1구역 시가전이 끝나고 잠깐 마주쳤던 그는 전과 장비가 사뭇 달라져 있었다. 특히 눈에 띈 것은 뼈로 된 갑옷이었는데 디자인이 오크펠슨의 것처럼 투박한 편이었다.
입과 목소리의 싱크가 맞지 않았는데, 이는 렉이나 핑 차이보다는 번역기를 통한 싱크의 문제였다.
실제 목소리라기보다는 인위적인 음성에서 나오는 위화감이 더 커졌다.
상대에게도 내가 그렇게 보이겠지.
"오크펠슨인가?"
"오크펠슨이다."
일본서버도 록 진영이 이긴 걸로 알고 있었다. 여기서 오니기리가 나타날 줄은 몰랐다.
오니기리는 나를 아래위로 흘겨봤다. 그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나와 황금추적자에 대해 조사를 했을 것이다.
해외 커뮤니티라고 하더라도 국내의 게임사정을 빠르게 피드백하는 경우가 드물었기에 상당수의 해외유저들에게 아직도 나는 팬티만 입고 사냥하는 변태검사 정도에 머무를 것이다.
"조선인 서버의 변태. 시간이 아깝다."
모래시계는 뒤집어져 금색의 모래알이 빠르게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성격이 급하네."
"모욕하지마라!"
일갈하며 오니기리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발목에 스킬 임팩트가 감돌았는데 밟고 지나간 바닥에 미세한 빛이 남아 반짝거렸다.
블레이드 유저의 주요 이동기인 섬전보였다.
이 뒤가 어떤 것인지 뻔했다.
섬전보의 연계스킬인 섬전참으로 블레이드 유저가 가진 공격중에 제일 빠른 공격속도를 자랑하는 발검술이었다.
"무사의 검에 이슬이 되어라."
오니기리는 상체를 낮추고 검을 굳게 움켜쥐었다.
"알면 무섭지 않지."
섬전보와 섬전참으로 이어지는 연계는 훌륭하다.
원거리 딜러의 경우에는 어설프게 거리를 재고 있다가 곧바로 목숨을 잃는 경우가 허다했다.
연계스킬 특유의 딜레이가 없음에 눈부신 신속은 무엇보다 뛰어난 무기였지만, 단점이라면 일직선의 동선이라는 점이다.
백스텝으로 측면으로 피하고 연달아 구르기로 뒤로 물러났다.
촤하아악!
"빌어먹을 놈!"
오니기리의 검은 내가 있던 공간을 베었다. 야심한 선제공격이 허탕을 치자 지껄인 말은 입모양과 사뭇 달랐다.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입모양은 칙쇼라고 지껄였기 때문이다.
번역기가 맞는다면 칙쇼가 축생이라는 단어와 같나 보다.
"팔대조직은 깼어?"
"집중해라!"
"집중하게 해 봐."
"똥!"
오니기리가 쿠소라고 한 것 같은데 고막에는 다른 말이 들렸다.
어디 번역기를 쓰는지 의아할 뿐이었다.
오니기리는 계속해서 나를 압박했다. 전작 기준으로 일본서버에서 3년 동안 PvP 랭킹 1위를 지킨 것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스킬을 쓰되 시전시간이 짧고 경직도 거의 없는 것 위주였다.
그러다가 반격을 취할 태세만 보이면 즉각 물러나 거리를 유지했다.
변태검사라고는 말해도 내가 가진 공격력을 경계하는 거다.
"나한테 이길 자신이 없지?"
"너야말로 겁쟁이가 아니라면 싸워라."
"얼마든지."
상대가 상대이니 마침 좋은 것이 생각났다.
[헤이스트를 사용합니다.]
먼저 이동속도 버프를 걸었다. 한결 경쾌해진 발걸음으로 오니기리에게 다가가며 왼손을 뻗었다.
1인 도발을 거려는 순간에 오니기리가 황급히 옆으로 구르기를 사용했다.
"검사의 흉내를 하지 말아라. 통하지 않는다."
"이기고 이빨 털어."
"부모님이 주신 것이다."
역시 번역에서 조금씩 오류가 생기는 것 같다.
오니기리는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왔다. 그러면서도 눈은 내 손에 닿아있었다.
후웅! 후웅!
"나도 시작해 볼까."
이때까지 피하기만 했으니 검을 천천히 쥐고 흔들었다.
오니기리는 그걸 기회로 여겼다. 검을 내게 뻗은 채로 달려왔다.
블레이드 유저의 돌진기인 돌격일섬이었다. 이동거리도 속도도 준수하지만 나와의 거리를 생각하면 저건 절대로 나에게 닿을 수 없다.
이 다음은 무엇일까.
오니기리라는 훌륭한 경력의 유저라면 나도 모르는 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나에게 처참하게 무너진 천하제일 길드장 철홍이었다. 그는 돌진기로 거리를 좁히고는 중간에 캔슬을 해 공격을 하려고 했다.
엘리멘탈 소울2의 기술이 전작과 완전히 똑같지 않았다. 물리엔진의 변화로 인해 판정이 사뭇 달라지기도 했었다.
이번 작에서는 불사자 이외의 캐릭터를 플레이하지 못했던 내가 모르는 수도 분명히 있다.
그 점에서 오니기리가 돌격일섬으로 접근하는 판단은 합당했다.
난 평타위주의 근거리 딜러로 방어력은 마법사들보다 낮다. 저 근거리 스킬에 부딪치면 생길 피해를 감당할 수 없어 물러나는 수밖에 없다.
저걸 파훼하려면 슬링으로 견제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는 판단이지만, 저번 임시점검 때 생긴 패치로 인해 주무기와 보조무기를 교환하면 그 다음까지 10초의 시간이 걸렸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일대일의 PvP에서는 너무 치명적이다.
오니기리는 그걸 놓치지 않을 것이다.
꽈아악!
아직 3m의 거리가 남아있음에 굳게 검을 쥐었다. 마나가 떨어지며 그만큼의 기운이 손바닥을 타고 검날에 스며들었다.
카쿤에게 받은 십보섬참을 활용할 좋은 기회였다.
내 검은 힘차게 허공을 갈랐다. 횡으로 그려져 쏘아지는 무형의 검기에 오니기리는 맞고 무너질 것이다.
파가가가각!
"뭣……!"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십보섬참이 바닥에 부딪혀 깊은 검흔을 남겼지만, 그 어디에도 오니기리는 보이지 않았다.
"위!"
좌우를 살피던 도중에 내 그림자가 유독 커졌음을 깨달았다. 다급히 하늘을 보니 눈부신 태양을 등지고 경직된 자세로 날아오른 오니기리가 보였다.
먼저 떠오른 것은 허공답보라는 스킬이었다.
하지만 그건 전작 기준으로 허공답보는 최종직업 중 하나인 권신의 것이었다. 기초직업이 전사로 시작한 직업들은 익힐 수 없는 것이었다.
차기작이라고 하더라도 아예 다른 직업이 익히게 둘 정도로 소울리스가 생각을 하는 놈들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아예 전작과 다른 직업체계로 게임을 만들었을 테니까.
"칼날밟기? 칼날밟기구나!"
해답은 공중에서 경직되어 떨어져 내려오는 오니기리에게 있었다.
전작부터 블레이드 계열의 유저에게 가장 쓸모가 없는 스킬인 칼날밟기다. 이건 말 그대로 칼날을 밟고 한 차례 뛰어오르는 것이 가능한 스킬이다.
오니기리는 돌격일섬을 끝까지 유지해 만든 검기에 칼날밟기를 쓴 것이다. 스킬 캔슬로 인한 경직이 벌어졌지만, 공중에 떠오른 순간에 그마저도 다 사라졌다.
검기에 칼날밟기를 쓸 생각을 한 것도 놀랍지만, 그걸 내 상대로 쓸 줄도 몰랐다.
"바보녀석."
나에게 떨어지는 그대로 오니기리가 검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길게 내려찍는 검은 마치 벼락처럼 요동을 쳤다.
블레이드 유저가 흔히 멋 부리기 용으로 쓰는 벼락베기였다.
[등가교환의 방패를 사용합니다.]
이미 시전 중인 스킬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멍청하게도 상대를 놓쳐서 시간을 낭비한 것이 너무 컸다.
쩌어억!
"끝인가!"
벼락베기가 내 머리에서 가랑이까지 베고 지나갔다. 섬뜩한 느낌과 함께 퍼지는 저린 감각과 함께 내 체력을 살폈다.
화려한 임팩트에도 불구하고 절반도 깎이지 않았다.
"괴물자식!"
승리를 확신했던 것인지 오니기리는 적잖게 당황했다.
만약 투기장이 아니라면 위험했을 수 있다.
투기장은 레벨이 낮은 대상의 평균 능력치를 다 상승시켜주지만, 그 정확한 수치를 모르기에 오니기리도 딜 계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결사항전의 영역을 사용합니다.]
"그 말은 조금 일찍 꺼냈다."
오니기리는 아직 괴물이라고 나를 부르지 말았어야만 했다. 모든 판이 다 깔린 지금 순간부터야말로 진짜 괴물스럽기 때문이다.
반격의 시간에 모든 것을 쏟아 붓겠다. 좌측상단에서 우측하단으로 검을 힘껏 내리 찍었다.
벼락베기가 막 끝난 오니기리는 내 검을 피할 수 없었다.
타아아앙!
"커허억!"
결사항전의 영역으로 무려 20%나 상승된 내 공격속도였다. 일반적인 스킬과 감히 비교 할 수 없음에도 명성에 부족함이 없이 막아냈다.
문제는 튕겨내기와 달리 검으로 막을 경우에는 데미지를 상당부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거다.
오크펠슨에서 맞췄을 최신의 장비조차도 내 일격에는 모자라다.
"피가……."
뒷걸음질을 치는 오니기리는 다시 최대로 차 버린 내 체력을 보며 기겁을 했다. 그 소감을 더 늘어놓기 전에 나는 매섭게 검을 휘둘렀다.
후우우웅!
허리를 노리는 횡베기에 오니기리는 방어할 엄두도 내지 않았다. 백스텝 후에 구르기로 물러났다.
힐끔 뒤를 보던 그는 다시 구르기를 사용해 물러났다. 결사항전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났지만, 어차피 상대에게 디버프를 주는 스킬이 아니었다.
내가 한 발이라도 걸치고 있다면 이 스킬은 여전히 효능이 있다. 그러니 마치 펜싱처럼 다리를 길게 뻗어 검을 뻗었다.
"젠장!"
오니기리는 내게 등을 보였다.
그가 시전하려는 것은 쿨타임이 돌아온 섬전보일 것이다. 결사항전만 피하면 날 이길 수 있다는 계획이지만, 그건 틀린 선택이었다.
[오니기리 사망.]
그가 막기조차 버거워한 검은 쉽게 등판을 꿰뚫었다.
[오니기리님에게 승리하였습니다.]
알림이 뜨고 그와 나는 처음의 자리로 옮겨졌다.
오니기리는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잊지 않겠다. 변태자식."
"앞으로 종종 보자고. 재밌었어."
소울리스가 어떻게 나올 것인지 모르지만, 제2의 도시에서는 다른 국가의 유저와 PvP가 된다. 이 사실에 흥미를 가질 유저들은 꽤 많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