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77화 고인물은검을뽑다.
"나의 정의와 신념을 모독하지 말라! 내 영혼은 강철과 같으니 너라는 고난 또한 기꺼이 나를 담금질 하리라!"
손발이 오글거리는 말을 내뱉으며 휘파람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광장에 모인 이들이 모두 휘파람이라는 세 글자를 외치니 귀가 아플 정도였다.
"나는 네놈의 폭력 따위에 굴복하지 않는다."
휘파람은 그 열기에 취한 것인지 왼쪽 눈에서 한 방울의 눈물을 흘렸다. 그에 맞추어 놈의 몸에서 은은한 빛무리가 보였다. 효과를 보니 버프스킬인 것 같은데 그 동작이 엄청나게 자연스러워 나조차도 놀랄 정도였다.
통제를 피해 레벨에 맞지 않는 사냥터를 전전하는 이들을 치료해 주면서 명성을 쌓았다더니 보통은 아니다.
"아아아! 휘파람 님!"
"눈물을 흘리신다!"
"저분의 후광을 봐봐!"
내가 그럴 정도이니 나머지 이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게임 속이라는 것도 잊고 마치 기적을 일으킨 것처럼 찬양하고 있을 정도였다.
"너 이런 식으로 몇 명 접게 만들었냐."
"나를 위협하려는 것인가?"
"그런데 어떻게 하냐. 이때까지 네가 가지고 놀던 애들이랑 난 달라."
"더러운 일로 돈을 버는 이들은 누누이 말하지. 권선징악을 잊지 말아라."
몇 개나 되는 게임에서 이런 짓거리를 한 놈이라서 그런지 뻔뻔함이 하늘을 찔렀다.
"거기에 위선자도 포함되는 건 알지?"
"누군가에게 위선이라도 나를 위한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세상 모두를 도울 수 없더라도, 나를 찾아온 이들을 위해서만이라도 모든 것을 바치리라!"
휘파람은 다시금 스킬을 쓰며 마치 자신에게 후광이 미치는 것처럼 보이는 효과를 썼다.
지금의 대화가 계속될수록 유리해지는 것은 휘파람이다.
추종자를 떠나 사이비 종교라도 만들어질 판이라 가만히 둘 수 없었다.
"너의 죄가 무거워 스스로 두려움을 느끼는구나."
"끝까지 고귀한 척, 잘난 척을 하면서 사람 담구는 것 잘 하네. 역시 경력직이야."
이 무대는 휘파람을 위한 것이었다. 계속 말을 걸어 봐야 불리해지는 것도 나였다.
승리할 수 없다면 선택은 세 가지다.
첫 번째는 패배를 인정하고 두 번째는 도망을 치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내게 잘 맞는 경우다.
바로 판을 뒤엎는 거다.
"어어어엇! 저놈이 단상에 오른다!"
"내려와라! 이 개자식아!"
단상에 오르자 등 뒤에서 느껴지는 고함과 욕설은 한층 더 깊어졌다.
"감당할 수 있나? 악인이여."
휘파람은 살짝 턱을 치켜들었다.
내 행동은 놈의 선택지에서 벗어난 돌발행동임이 분명하다. 이때까지와 달리 가늘게 떨리는 음성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목이 나갈 수는 없을 테니까.
"너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을 수 있냐고 물었다."
휘파람은 조금씩 드러나는 불안함을 억누르기 위해 더 오만한 태도를 취했다.
"내가?"
그 가소로움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고작해야 사기꾼 하나와 그 추종자들 때문에 내가 흔들릴 것처럼 보이는 걸까.
스릉.
"누구도 나에게 죄를 물을 수 없다."
검집에 찬 검을 뽑았다. 검신에는 붉고 검은 피가 끝없이 흐르고 있었다.
이 임펙트는 각 서버별 단 한 명에게만 주어진다.
바로 PK랭킹 1등이다.
현재 KR 서버에서 나 이외의 누구도 가질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나와 함께 하는 수천 명이 너의 죄를 물 것이다!"
검이 목에 닿았음에도 휘파람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독고무적 : 베어 버려.]
[흑군 : 죽여도 된다.]
이때까지 잠잠하던 독고무적과 흑군이 귓말로 나를 독려했다.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처럼 이 모든 것을 구경한 것인가. 이미 결정한 것이 저들의 리모컨 짓에 머뭇거려졌다.
그 잠깐을 착각한 휘파람은 두 눈을 빛냈다.
"역시 두려운 거지? 저 수많은 사람들이 널 비난해도 과연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응. 아무렇지 않더라."
"허세 부리지 마라. 그렇게 잘난 척을 하던 놈들도 결국에는 무너졌으니까."
"이거 게임이야. 등신아."
나약한 수천 명보다 단 한 명의 강자의 입김이 강한 곳이다.
게임 바깥에서 이놈들이 아무리 악플러 짓거리를 하더라도 조금도 상관이 없다.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빚을 지고 하루하루 술로 연명하던 날들이었으니까.
나에게 두려운 것은 경쟁력을 잃고 그때로 돌아가는 거다. 또한 그 경쟁력은 이런 놈에게 휘둘려서는 절대 얻을 수 없다.
촤하아악!
내 검은 기꺼이 휘파람을 베어버렸다.
[당신이 휘파람 님을 PK하였습니다.]
[도전과제, 벌건 대낮의 뉴 알론의 살인자를 달성하셨습니다.]
두 개의 알림이 뒤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음을 알려 줬다. 머리 위의 닉네임도 붉게 물들었고, 도전과제의 보상은 무려 PK횟수를 4개나 덧셈해주는 것이었다.
3번만 더 죽이면 100회를 채우는 것이지만, 지금은 그걸 만끽할 필요는 없었다.
"휘파람 님이 살해당하셨다!"
"안 돼에에에에! 휘파람 님!"
휘파람의 죽음과 함께 그의 추종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날 바라보는 이들이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살의가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그걸 받아내자 온몸에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나를 비난하던 이들의 망가진 모습이 짜릿하다. 더 나아가 아무것도 하지 못할 무기력함을 느끼게 해 줄 생각에 짜릿했다.
"복수할 놈 올라와."
둘이 있었으나 이제 나만이 남겨진 단상 위에서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이에게 검을 겨누었다.
용광로 같던 광장에 한기가 돌았다.
누구도 먼저 나서지 않았다.
* * *
[YOU DIED.]
근래에는 익숙하지 않았던 회색화면에 뜬 붉은 문구에 휘파람은 불쾌함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아이처럼 손뼉을 치며 웃음을 흘렸다.
"저질렀겠다."
부활을 하지 않은 상태로 그는 각 커뮤니티 및 실시간 상황을 중계하는 인터넷 방송인들의 채팅창까지 수십 개를 훑었다.
모두가 썩이나감을 욕하기 바빴다.
"크크큭. 너를 비난하고 욕을 하는 수천 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 어느 커뮤니티를 가도 병신이라는 소리를 듣고 괜찮을 수 있을까?"
휘파람은 이와 같은 일을 진행하면서 여러 돌발행동을 겪어봤다.
모든 준비를 끝마친 상황에서 생긴 일은 항상 적들에게 불리한 결과만을 가져다주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썩이나감이 도망가지 않고 자신을 죽인 것은 정말로 생각도 못했지만, 그 행동은 더 많은 반항을 불러일으킬 터였다.
"왜……."
무언가가 잘못 되었다.
누구보다 대중의 분위기를 잘 읽는 휘파람은 경각심을 느꼈다.
단상 위에 선 살인자를 몰려드는 좀비떼처럼 달려들어야만 했건만, 누구도 그러지 않았다. 하물며 그가 자신에게 올 때까지 쏟아지던 비난과 욕설도 없었다.
[휘파람 : 썩이나감을 그냥 보내지 마세요. 우리를 위협할 자입니다. 지금 우리의 죽음이 미래의 평등과 평화로 이어질 거예요.]
휘파람은 타들어가는 속으로 거칠게 치는 타자와 달리 부드러운 말투로 귓속말을 보냈다. 그간 자신에게 가장 높은 충성을 받친 일종의 친위대 격인 인물들에게.
* * *
'그분께서 나를 선택하셨어!'
휘파람의 귓말을 받은 휘파람휘슬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간 그를 묵묵히 수행을 한 자신에게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다.
"이 내가 휘파람 님의 복수를 하리라!"
휘파람휘슬은 기꺼이 단상으로 올라갔다. 비록 랭커가 아니지만 휘파람을 수행하는 이들 중에서 가장 강한 것이 자신이었다.
썩이나감에게 통제를 받아 생긴 페널티가 아직 남아 있다면, 자신에게도 복수의 기회라 있으리라.
휘파람휘슬은 당차게 무기를 뽑았다.
서걱.
미처 휘두르기도 전에 붉은 궤적이 그의 목을 갈랐다.
"휘파람휘슬이……?"
"역시 PK 1등인가."
"30초의 사신."
단번에 죽어 버린 휘파람휘슬에 대해 광장의 모든 이들이 놀란 것은 아니었다.
30초의 사신, 썩이나감. 순수한 강함으로는 랭커들의 랭커인 독고무적이나 흑군을 이길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나오는 유저였다.
과연 누가 그를 이길 수 있을까.
다들 서로의 눈치를 봤다.
뉴 알론이라는 대도시에 나타난 살인마는 그들이 감당하기에 너무나 강했다. 만약에 운이 좋아 그를 죽이더라도 천하제일 길드 때처럼 역으로 죽어나가지 말란 법이 없었다.
[휘파람 : 우리의 위기를 구할 수 있는 것은 당신입니다.]
[휘파람 : 폭력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겨낼 것입니다.]
[휘파람 : 어둠이 찾아오더라도 곧 빛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때마다 휘파람의 귓속말이 주저하는 이들을 한 명씩 부추겼다. 그들은 앞서나간 휘파람휘슬처럼 썩이나감에게 다가가 썰려나갈 뿐이었다.
"비켜라! 썩이나감을 잡으러 왔다!"
"통제길드의 앞잡이 죽여 주마!"
"30초도 못 쓰게 해 주지!"
휘파람의 연계세력이자 통제해방전쟁의 일선에 서는 유저와 길드들이 광장으로 난입했다.
휘파람의 추종자들과 비교하면 제대로 된 전력이라 할 수 있었다.
"포기하고 내려와라."
"그냥 죽을래 감옥까지 갈래."
머릿수만 채우던 추종자들과 달리 그들은 멀리서부터 공격할 기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그들도 누구 하나 먼저 나서지 않았다.
모두가 익히 알고 있다.
나에게 주어진 30초의 시간은 그 누구도 뺏어갈 수 없다. 잘못하면 역으로 내가 벌일 학살극의 피해자로 박제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위협만 주고 먼저 덤비는 이가 없던 것이다.
그 불편한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다.
통제해방전쟁에서 유일한 랭커인 암살자지평선도 나를 상대하려고 하지 않았으니까.
이 어색한 대치가 길어지면 유리한 것은 나다.
과연 언제까지 이렇게 둘까.
무슨 연락이라도 받는지 허공에 손짓을 하던 추종자와 그 연합세력들이 단체로 단상에 오르기 시작했다.
"…주인공병이 걸렸군."
결사항전의 영역을 사용하려고 할 때, 멀리서 두 무리의 유저들이 왔다.
두두두두!
"엠페러 길드다! 모두 물러나라!"
"흑랑 길드 또한 왔다. 길을 터라!"
엠페러 길드와 흑랑 길드가 광장으로 진입했다. 그 선두에는 늦장을 사태를 지켜보며 늦장을 부리던 독고무적과 흑군이 있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저들이 왜 끼어들지?"
"우리 일에는 개입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어?"
지금 상황이 휘파람 쪽의 이들에게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거대길드들이 침묵을 지키는 것도 그들을 건드리지 않아서였다.
통제해방을 하는 이들에게 비난이 생긴 것도 결국 가장 강한 이들이 아닌 엉뚱한 곳의 해방을 풀어서였다.
"설마 썩이나감 때문인가?"
"저 녀석을 치고 우리랑 협상하는 거면?"
"일단 비켜. 상대가 누구인데!"
당장 날 공격하려던 이들도 어영부영하다가 좌우로 비켜났다. 그러고 엠페러 길드와 흑랑 길드가 단상을 에워쌌다.
독고무적과 흑군이 내 좌우에 설 때도 광장의 모두는 그들이 어떤 입장을 내세울까 기다렸다.
"나 독고무적은 썩이나감의 요청을 받아들여 일부 통제 구역을 해방한다."
"흑군 또한 마찬가지다. 썩이나감의 요청에 따라 사냥터 일부를 모두가 출입하게 해방하지."
"……."
양옆에서 들린 말은 나에게도 놀라운지라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그 어디에도 장난기 같은 것은 없었다.
[독고무적 : 휘파람 같은 놈은 반기지 않아서 말이야.]
[흑군 : 약간의 손실보다 분탕러가 더 싫다.]
귓속말로 돌아오는 입장은 확고했다. 그 의견에는 동감하는 바였다.
엘리멘탈 소울1부터 즐긴 고인물들에게 휘파람 같은 유저는 이단아였다.
휘파람이 뛰어난 컨트롤을 보유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시간을 녹여 레벨이 높은 것도 아니고 자본으로 아이템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게임을 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았던 존재가 게임에서의 이미지와 관련 커뮤니티의 여론조작으로 게임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 봤었다.
도저히 게이머가 아닌 사기꾼이 정치가로의 모습만 보이니 오래된 유저일수록 그에게 호감을 보일 수 없었다.
플레이어를 떠나 성향을 보자면 독고무적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독고무적이나 흑군이나 절대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놈이 크지 못하게 다른 걸로 앞을 막아야만 한다.
문제는 그게 나라는 거다.
[흑군 : 쫄?]
잠깐의 고민을 하기도 전에 흑군의 장난기 가득한 댓글이 내 의욕을 이끌었다.
휘파람은 위험한 인물이다. 골드캐시와 연계된 것으로 파악된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다른 누군가에게 맡기는 것보다 내가 처리하는 것이 좋다.
높아지는 이름값만큼 난 다시 업계 최고가 될 테니까.
"휘파람의 방식은 정작 힘이 없는 길드만을 노리는 것이었으니까요. 손해를 감수하고 양해해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언제인지 가물가물한 만큼 환한 웃음으로 양옆의 두 사람의 손을 맞잡고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