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은 옷을 입지 않아-76화 (76/201)

제076화 고인물은비웃었다.

뉴 알론 3구역의 광장은 분수대 하나가 있을 뿐인 초라한 공간이었다. 그 앞의 이정표가 부활하는 장소는 엘리멘탈 소울2에서 가장 많은 유동인구가 있는 곳으로 채널을 여러 개로 나눴음에도 간혹 버퍼링이 생기는 곳이었다.

그 공간에 존재하지 않았던 단상이 세워졌으며, 그 위에는 단 한 명의 사내가 있었다.

클래스 치료자의 1차전직 중 하나인 신자를 업으로 삼는 자. 또한 PK 패치 이후에 억눌린 수많은 유저들을 이끌고 개혁과 반란의 찬가를 부르는 자.

휘파람. 그는 자신을 보기 위해 모인 수천 명의 유저들 앞에서 썩이나감에 대한 성토를 하고 있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더해져 완성되는 문장마다 그 자리에 있는 이들은 탄성과 탄식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이변은 일어났다.

마치 홍해가 갈라지듯이 운집해 있던 군중들이 좌우로 비켜나기 시작한 것이다.

"왔구나. 이 더러운 세계의 주인이여!"

휘파람은 피를 토할 것만 같은 거친 음성으로 그 주인공을 가리켰다.

*       *       *

어린 나이는 아니지만 마냥 젊은 나이도 아니었다. 한때의 즐거움을 위해 기껏 쌓아 둔 모든 것을 낭비하고 버린 삶이기에 삶의 경험은 보잘 것 없고 비루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과 같은 광경을 접한 적은 없었다.

광장과 같이 오픈된 공간에서 단 한 명의 개소리로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넋을 잃고 있었다.

저건 게임캐릭터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감춰지지 않는 재능이라고만 할 수 있었다.

타고난 지도자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또한 그 마성의 재능이 저렇게 광적으로 쓰일 수 있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내가 무슨 업계 대표처럼 소개하고 있네."

휘파람은 다크게이머의 지독한 사례들을 들먹이며 그 모든 것이 내가 한 것처럼 매도를 하고 있었다. 오히려 난 업계에서 깨끗하게 논 편이었다.

성공한 피해자. 이 말도 안 되는 단어로 ZI존짱짱맨의 삶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작된 쇼를 끊어낼 수단이 없다. 휘파람이 어떻게 사람을 홀리는지 구경이나 하려고 밀집된 인파의 맨 뒤에 섰다.

잠깐 렉이 걸렸는지 불규칙한 움직임으로 고개를 돌리던 앞사람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뉴 알론에서는 연미복을 입은 상태이기에 나를 몰라보던 그는 다시 휘파람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거짓말처럼 시선을 머리 위로 올렸다.

"써, 써서서서석!"

내 닉네임을 본 그는 앞글자만 정신없에 읽었다.

"뭐가 썩었다는 거야."

"귀갱 오지네. 싸발것."

"휘파람님 말씀 안 들리잖아요."

"렉도 오지는데 씨벌."

휘파람의 목소리가 끊기자 주변의 이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

그들은 침묵했고 나 또한 그에 화답했다. 그저 만화의 한 컷처럼 안면의 모든 구멍이 확장이 된 그들을 구경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요즘 게임 참 잘 만들었다고 생각이 들 때였다.

"썩이나감이다!"

"놈이 왔다. 썩이야!"

침묵했던 이들은 먹이를 달라는 아기 새처럼 지저귀었다. 고요한 연못에 파동이 이는 것처럼 광장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내 앞에 선 이들이 좌우로 비켜섰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움직이니 마치 홍해가 갈라진 것만 같았다.

"이건 좀 부담스러운데."

수천 명이 있는 곳에서 오로지 나를 위한 길이 터졌다.

신이 내린 것처럼 혼자 떠들던 휘파람조차도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벅. 저벅.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쓸데가 없는 효과음이 울렸다.

도서관에서 재채기를 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저 새끼가 그렇게 지독하다며?"

"헬조선순례자가 피해자라며?"

"템 바가지로 판매한데."

"천하제일 길드도 억울한 거라더라."

내가 지나간 후에 뒤통수를 본 이들의 중얼거림이 자꾸만 들렸다.

[분노가 상승합니다.]

그들의 불만 덕분에 정체되어있던 칠대종 수치가 하나씩 오른 것으로 분노를 삭였다.

전보다 분노 수치의 알림이 잦아진 것은 혹시 상대방이 느끼는 분노에 내가 느끼는 분노가 촉매가 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왔구나. 이 더러운 세계의 주인이여!"

휘파람의 모습이 보다 선명하게 들어올 때, 놈은 철천지 원수를 본 것처럼 나를 손가락질했다.

"……."

군중의 눈길은 화살이 되어 나를 찌르고 창살이 되어 나를 옥죄었다.

그 모든 것을 느끼며 앞으로 나아갔다.

주변의 모든 것이 나를 깎아내려도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었다.

"썩이나가아아암!"

한번 숨을 크게 들이쉰 후, 그보다 더 많은 것을 휘파람은 토해냈다.

이때는 휘파람보다는 절규라는 단어가 어울릴 것 같았다.

"왜."

"네놈의 죄를 알렸다!"

"뻔하다."

저딴 고리타분한 말에 잘도 알겠다고 대답을 하겠다. 고개를 살짝 숙여서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감췄다.

한 호흡을 쉰 후에 다시 본 휘파람은 아까 전과 달리 결의에 가득찬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왔구나. 이 더러운 세계의 주인이여!"

"어느 게임 대사에요? 좀 낯간지러운데 다른 것 외우면 안 되요?"

"너는 더 이상 이 세계를 유희할 이들을 방해할 수 없다!"

"네다씹."

커뮤니티를 보다가 발견한 마법의 단어를 시전했다.

"봐라! 저 자는 우리의 진심을! 우리의 세계를! 그저 조롱거리로 삼고 있다!"

"……."

열의에 찬 저 연설을 하는 휘파람이나 그걸 진지하게 듣는 대중들이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게임 속에서 이런 상황을 즐기는 걸까.

"다 말했어? 귀 아픈데."

"네놈에게 누구도 말을 허락하지 않았다. 시대의 죄인이여. 입을 다물라!"

"그건 너지. 너잖아. 누가 요즘 시대에 약 파는 사이비처럼 행세하지?"

"물질만능주의라는 마약에 찌든 놈! 무구한 이들의 고혈을 짜내어 배를 채우겠다는 것이냐!"

지금 시대가 21세기인데 저 말을 들으면 타임워프를 한 것만 같았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휘파람의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안 됩니다. 휘파람 님!"

"휘파람 님을 지켜라!"

"사수하라! 보호하라!"

나와 눈이 마주친 한 명이 소리치자 확 트여졌던 길이 휘파람의 추종자들로 닫혀버렸다. 아직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는데 쓸데없이 예민한 놈들이다.

"우리의 이상을 지킬 것이다. 한 푼의 눈에 먼 네놈들과 달리 우리의 낭만은 무엇으로도 환산할 수 없으니까!"

휘파람은 팔십 년도에도 듣지 못할 열정에 찬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저 놈도 문제지만 듣는 것만으로도 손발이 오글거리는 말에 동조하는 이들을 보니 소름이 돋았다.

"너로 인해 수많은 게이머가 피해를 입었다. 그걸 어떻게 할 셈이냐!"

막무가내지만 이미 놈은 모든 게임에 대한 불합리함을 다크게이머로 몰아갔고, 그 대표로 나를 세워버렸다.

사전작업이 훌륭했는지 나를 보는 이들의 눈빛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흉흉했다.

"나는 참지 못한다. 모든 이들이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너와 같은 더러운 어른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다니!"

휘파람은 가늘어진 내 두 눈을 보며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적당하게 신경을 끌려고 해도 놈은 멈출 줄은 몰랐다. 일단 신고버튼을 눌렀지만 워낙 한쪽으로 기울어진 상황이라 효력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하."

소매가 걷혀진 그의 손목을 보자마자 두 눈이 번뜩였다.

업계 사람이라면 놓칠 수 없는 것이 눈앞에 있었다.

휘파람이 착용한 악세서리. 이틀 전에 새로 나온 유니크 아이템으로 주요한 옵션은 전무했다.

저건 그냥 예쁜 쓰레기일 뿐이었다. 다만, 예뻐도 너무 예뻐서 꽤나 고가에 책정되었다.

오픈된 시장에서 나온 적이 없고, 업계의 마켓에서만 단 한 번 올라왔을 뿐이다.

즉, 저건 업계 사람들만 존재여부를 안다는 거다.

"1채널에서 그 말을 지껄이려고 이 사람들을 모은 거야?"

"누구도 모으지 않았다. 그저 그릇된 현실에서 진실된 이야기를 듣기 위한 이들일 뿐!"

"그래? 너가 산 템값이 지금은 많이 올랐겠더라. 그 아이템 업계사람끼리만 거래하잖아."

"뭣……!"

휘파람은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누가 봐도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던 그가 소리쳤다.

"스샷 띄워줄까?"

"그저 선물을 받은 것일 뿐이다! 템값이 올랐다면 내 유명세를 이용한 네놈의 짓이겠지!"

휘파람은 아주 뻔뻔하게 되받아쳤다. 말과 달리 아랫입술을 크게 깨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맞아. 휘파람 님이 껴서 유명해졌겠다."

"저 템팔이는 돈밖에 못 보네."

"그분의 유명세를 이용하는 놈들이 너무나 싫어!"

추종자들은 역시나 모든 것을 휘파람 위주로 보고 있었다. 심지어 여기에 업계사람이 있는지 그 사이에 휘파람이 착용한 악세서리라며 템을 올리기도 했다.

이것이 바이럴마케팅인가 싶었다.

"저 버러지 같은 놈! 그 사이에 휘파람 님을 음해해?"

"캐삭해라. 이 더러운 놈아!"

"너 같은 놈이 말을 걸어도 되는 분이 아니야!"

그보다 난리인 것은 군중들이었다.

닉네임이나 길드명에 휘파람을 달지도 않은 이들조차도 적극적으로 욕을 퍼붓고 있었다.

빗발치는 욕설에 기계적으로 신고버튼을 누르자 빠른 시간 내에 다량의 신고접수는 불가능하다는 시스템 메시지가 뜰 정도였다.

"게임을 돈벌이로 보는 자여! 우리의 고혈을 빨아먹는 너와 같은 거머리로 인해 게임에서마저도 현실처럼 어려움을 겪을 수는 없다!"

"휘파람! 휘파람!"

"우워어어어!"

도대체 앞에서 어떤 말을 지껄였는지 이 축제의 장에서 나 혼자만이 외지인이었다.

그 거대한 군중의 위에서 오만에 찬 휘파람이 보였다.

저 자는 지금 상황을 즐기고 있다. 슬쩍 커뮤니티도 보니 내 욕이 도배가 되기 시작했다.

휘파람은 확실히 위협적이다. 불특정다수가 공격하기 시작한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나도 흔들렸다.

"꼬우면 덤벼."

모두 죽이는 쪽으로 말이다.

"……."

좌중의 소란은 잦아들었다.

이들 중에서 내 강함을 모르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숫자가 많다고 강한 것은 아니다.

게임에서는 단 한 명이 수십 명을 압도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게임 접을 때까지 죽이면 되잖아. 덤벼."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앞을 막고 있던 인의 장막에 균열이 생겼다. 나를 위협하던 눈길에 예기가 꺾여 나가며 방향을 잃기 시작했다.

"너부터 덤빌래? 닉네임 기억했는데."

"……."

닉네임 휘파람모니터. 그 여섯 글자를 눈에 담으며 물었다.

방금 전까지 욕설을 담았던 입은 자물쇠를 채운 것처럼 꾸욱 다물어졌다.

동공 또한 지진을 일으키며 나를 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래도 두 다리가 움직이지 않은 것은 기특하다고 해야만 할까.

"너는 어때."

"나, 나는……."

휘파람모니터 옆에 있던 휘파람각작렬은 그나마 입술을 바들바들 떨면서 말을 하려고 했다.

"…너 욕 안 했어."

"푸하하하하!"

힘겹게 내뱉은 말에 허리를 부여잡으며 미친 듯이 웃었다. 만약 의도한거면 이놈은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드립퍼다.

"그러면 꺼져."

휘파람각작렬의 어깨에 손을 얹고 정확히 3초 뒤에 잡아당겼다. 거대한 오크로 만든 몸뚱이가 질질 끌려왔다.

"게임이잖아. 안 그래? 머리 아프게 떠들 필요가 없어."

"뭐하는 거야! 자리를 지켜!"

"휘파람 님을 수호하라!"

내가 움직이자 기가 죽어있던 놈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처음처럼 삐약거리기 시작했다.

그 발악하는 지저귐이 감미로웠기에 인의 장막을 손수 걷어내면서 휘파람에게 한 발자국씩 다가갔다.

"게임 접을 놈이 있다면 나서라."

휘파람을 목숨처럼 여기는 이들 중 누구도 나를 PK하려고 들지 않았다. 또한 누구도 내 말에 답하지 않았다.

복사 붙여넣기를 하는 것처럼 휘파람을 지키자고 지껄이기만 할 뿐이었다.

"저 악당이 본모습을 드러냈다. 물러나지 마라. 저들에게 빼앗긴 현실을 되찾고 더 나은 미래를 쟁취하는 거다!"

휘파람은 자신의 추종자들을 독려했지만, 다들 소리만 키울 뿐 감히 나를 해하지 못했다.

"이이익!"

결국 내가 단상아래까지 오자 휘파람의 얼굴이 붉어졌다.

"무섭나? 휘파람."

나는 그를 보며 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