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75화 고인물은당당하다.
"우리는……."
휘파람 친위대 중 누구도 내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다들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돌리기 바빴다.
내 눈은 그들의 상태를 훑었다.
먼저 랭커가 있을 리가 만무하기에 장비도 저레벨에서 착용하는 것들이다. 그나마도 저렴하고 적당한 성능과 효율을 자랑하는 수준이었다.
게임에 목숨을 걸고 할 필요는 없다. 그저 즐기는 수준에 그친다면 저 정도도 나쁘지 않는 정도다.
문제는 게임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해서 사기꾼의 얼토당토 않는 말에 휘둘려 다닌다는 거다.
나도 휘파람이 어떻게 유저들을 집결시켰는가를 지켜봤다.
모든 사냥터를 공유하고 질서정연하게 레이드 타임을 정한다. 아이템 가격도 모두 확정지어서 유저 간에 손해가 없도록 하자 등등 그가 지껄이는 말들은 무작정 달콤하기만 했다.
PK 대란과 맞물려서 수많은 유저들이 눈이 돌아가게 만들었다.
하지만 결국 놈은 궁극적으로 고렙들의 성장을 박탈하고 저렙들의 경쟁을 제거하려고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 게임은 망할 수밖에 없다.
휘파람은 작업장을 갖추지 못한 나 같은 개인사업자에게 독약과 같은 존재였다.
"꺼질래. 아니면 뒤질래."
"……."
다시 휘파람에 대해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상냥한 제의에 놈들은 말이 없었다.
그들은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아예 도망치지도 못하고 그저 서있을 뿐이었다.
"병신들."
굳이 대화를 나눌 필요성도 못 느낀다.
이들을 무시하고 가자 2구역의 성문 앞에서 나머지 휘파람 친위대가 있었다.
"이것들은 또 뭐야."
아무도 못 지나가게 성문을 막은 모습을 보니 짜증이 확 치밀었다.
"휘파람 님께 사과해라."
"그때까지는 못 지나간다."
"……."
이번에는 내가 할 말을 잃었다.
아까 전에 마주친 놈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보이는 놈들이 무려 이십 명이나 있었다.
도대체 무슨 강단으로 저러는 것일까.
"휘파람 애들한테 찍혔네."
"썩이 재네들 다 PK하려나?"
"휘파람도 요즘 맛이 갔던데."
주변의 유저들은 남의 일이니 편하기 구경만하고 있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뉴 알론에서 PK를 저지르지는 않는다. 이곳은 카오가 된 유저를 전문으로 사냥하는 집단이 있었으니까.
"내가 뭘?"
"네가 유언비어를 퍼트렸잖아!"
"감히 그분을 네놈과 같은 수준으로 몰아?"
"사과해라! 그분은 너와 달라!"
아까 전에 있던 놈들보다는 목청이 크다.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고개를 꼿꼿하게 들어올린 모습은 나름 위풍당당하지만, 저렙들이 몇 명 더 늘어나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비켜."
내 눈에는 그저 자동문일 뿐이다.
"이이이익! 무슨 힘이…!"
"우리가 다 밀려난다고!"
앞에 선 두 덩치들의 어깨를 잡고 그대로 쭈욱 밀었다. 그 당혹스러움은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였다.
뒤늦게 두 놈의 등을 밀고 나를 잡아당겼지만, 내 움직임에는 조금의 느려짐이 없었다.
이 멍청이들은 천하제일 길드원들과 마찬가지로 힘겨루기라는 간단한 시스템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무 명의 유저가 나 한 사람에 의해 질질 밀려나고 있다. 직접 목도한 광경에 주변에서는 탄성과 감탄이 줄을 지었다.
"너희들은 못 들어온다."
"비켜라. 길 막지 말고."
2구역을 지키는 NPC들은 내가 성문에 가까이 다가가자 들어올 자격이 없는 이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네들 다 쪼랩이야?"
설마 스무 명 중에서 단 한 명도 2구역에 들어갈 수 없는 줄은 몰랐다.
"우리는 네놈과 같은 적폐가 아니다!"
"게임을 돈으로 보는 버러지!"
"휘파람 님을 모욕한 죄를 치룰 것이다!"
성문이 닫히며 내 모습이 사라지자 고래고래 소리를 치는 것들을 보니 한시름 놓았다.
휘파람은 생각보다도 별 것 없는 놈이 아닐까 싶었다.
1구역에 방문한 목적은 시가전을 위해서였다. 예상보다 많은 유저들이 보였지만, 그들 중에서 골드캐시를 찾을 수 없었다.
"썩 님이죠? 처음 뵙겠습니다."
"진짜 사신이네. 30초 잘 봤습니다."
"다음에 PvP 뜰래요?"
"좋은 템 나오면 우리 쪽에 팔아 줘요."
나를 알아보고 상당수는 먼저 말을 걸어 왔다.
그들은 흔히 적폐라 불리는 전작출신의 이들이었다. 독고무적이나 흑군과의 관계가 있었기에 몬스터 헌터와 죄수병을 가리지 않고 가까이 다가왔다.
전이라면 변태검사에게 응당 따랐을 조롱과 무시의 시선은 없었다.
이마저도 감지덕지한 수준이다.
모두 30초의 사신 덕분이다. 그 짧은 영상에 나는 아예 다른 사람으로 평가 받고 있었다.
역시 실력으로 인정을 받으면 온갖 논란에도 자유로울 수 있다.
글 올린 놈에게 진짜 치킨이라도 보내 줘야 할까 고민이다.
새로운 배달 어플이라도 나오면 거기에 가입해서 한 푼이라도 싸게 줘야겠다.
"철홍은 좀 재수 없었는데 속 시원하네요."
"나도 그래. 전작에서 얼마나 꼴통짓만 했는지를 몰라."
"괴로웠지. 이번 작도 심했고."
천하제일 길드장 철홍. 전작에서부터 쌓아온 악평답게 내 옆에 모인 이들은 한숨을 쉬었다. 거기에 몇 번이고 동의를 하고 싶었지만, 세간에 알려진 것으로는 아직 나는 엘리멘탈 소울2의 뉴비였다.
이번에 철홍과 부딪치면서 생긴 에피소드를 슬쩍 푸는 정도였다.
"근데 랭커에서 떨어질 정도면 몇 번이나 죽인 거예요?"
"맞아. 그거 진짜 궁금했는데."
통제길드에 속한 랭커들이라고 다들 PK를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런 이들은 귀하게 작은 판에는 나서지 않았다.
그들에게 나처럼 실전경험이 넘치다 못한 경우가 드물 것이다.
[PK 랭킹]
1위 썩이나감. PK횟수 : 93.
2위 보이는손. PK횟수 : 72.
3위 막피지존. PK횟수 : 51.
현 PK랭킹 1위가 나였으니까. 심저어 2위, 3위와의 차이는 엄청나다.
이것만으로도 남들은 대단하다고 말하겠지만, 나로서는 성에 차지 않는 결과였다.
내가 죽은 횟수도 저 93번보다 크게 모자라지는 않을 테니까.
"철홍의 경험치가 얼마나 쌓였는지 몰라서 모르겠어요. 저도 1레벨은 깎였어요. 경험치 99퍼까지 채웠기 때문에 사실상 2레벨 내려간 것 같은데요."
내 사망 횟수는 직접 계산하지 않는 이상 누구도 모를 것이다. 그러니 어림짐작으로 말해도 다들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직업은……."
모든 대화가 좋게 흘러갈 수 없다.
내가 적당히 받아주자 유저 한 명이 찌라시의 내용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찌라시 때문에 더 공개 안 할려고요. 사람들 반응이 재밌잖아요."
거기에 대한 내 입장은 확고했다.
내가 다크게이머라는 것은 알고 있으니 더 캐묻지도 않았다. 업계의 비법은 서로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 법이다.
"그보다 잠시만요. 확인할 것이 있어서."
관심이 지나친 것 같아서 우편함으로 자리를 옮겼다.
카오 상태를 푸는 와중에 스피릿 길드장 원샷원킬에게서 귓말이 왔었다. 다시는 나를 적대하지 않겠다며 우편함에 따로 선물 하나를 보냈다고 말이다.
[시가전 퀘스트 스크롤]
-종류 : 이벤트.
-효과 : 퀘스트 생성.
-설명 : 시가전에 참여하여 뛰어난 활약을 거두어 아군의 승리에 기여를 하자.
이건 나도 익히 들었던 아이템이다.
시가전에서 이걸 쓰면 해당 포인트를 더 높게 해당 진영에 준다고 했다.
뉴 알론 인근의 몬스터에게 무작위 확률로 드랍이 되는데 시중에 유통이 되는 것은 10개도 되지 않았다.
그걸 나에게 5개나 준 것은 무과금을 표방하는 스피릿 길드치고는 제법 무리를 한 셈이다.
[썩이나감 : 잘 받았습니다. 앞으로 서로 잘 지내보죠.]
록이 시장으로 만들어서 골드캐시 놈들에게 엿 먹일 수 있다면 더 없이 기쁜 일이다.
[시가전 퀘스트.]
-록과 자닐의 시장을 위한 경쟁이 암암리에 격렬해지고 있다. 이번 시가전을 통해 자신의 진영의 승리에 더 이바지하자.
-완료 조건 : 시가전 승리.
-실패 조건 : 시가전 패배.
1회용이니 진다면 꽤나 피해가 클 것이다. 이걸 쓰는 이상 절대 질 수 없지. 그간 시가전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뒤집을 수 있다.
"아무도 안 와요?"
시가전 이벤트를 위해 시청 앞에 섰지만, 누구도 내가 있는 쪽으로 오지 않았다.
30초의 사신 영향 덕분이다.
자닐의 진영은 나와 적대해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해 물러나는 것이고, 나와 같은 록의 진영은 그 전력을 다른 곳에 투입하는 것이다.
"나야 좋지."
안정적으로 포인트를 기록하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일이다.
혼자 치룬 시가전은 지루할 정도로 쉬웠다. 저번에 통제를 당한 경험 때문인지도 몰랐다.
"다들 어땠어요?"
시가전을 끝낸 후, 아까 전에 대화를 했던 이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우린 이겼어요."
"우린 졌는데."
"우리도 졌어."
"우리도 졌네요."
들려온 소식은 1승 3패였다.
내가 이기지 않았다면 2승 3패로 끝났을 것이다.
자닐의 진영에서 선택과 집중을 잘 하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들을 하나하나 배치하고 싶지만, 내 명령을 따라줄 이들이 아니었다. 괜히 나섰다가는 사이가 나빠지고 미운털이 단단히 박힐 터였다.
록의 진영에 속한 사람들도 멍청이들은 아닐 것이니 진짜 발등에 불이 떨어지기 전에 움직일 것이다.
1구역에 있는 이들이라면 통제전쟁으로 치솟은 시세에 불만일 텐데, 자닐의 진영이 이긴다면 작정하고 시세는 작정하고 더 오를 테니까.
[독고무적 : 지금 뉴 알론 몇 채널이지?]
[썩이나감 : 1구역이라 1채널입니다.]
[독고무적 : 3구역 1채널 광장에서 휘파람이 널 규탄하는 연설을 하고 있군.]
독고무적의 말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월드챗을 확인했다.
[개봉박두근 : 휘파람 광역도발 지린다.]
[황건적 : 포스가 우리 교주 같네.]
[CyB : 쩐다. 연극 같아.]
[도마 : 저게 주인공 효과다.]
[돌쇠 : 휘파람 님 최고야. 짱짱맨 오지신다 진짜.]
월드챗은 이미 휘파람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걸 보며 혀를 차고 있을 때다.
[휘파람무새 : 속보. 속보. 썩이나감 시가전 끝남.]
[휘파람돌이 : 비상. 초비상. 썩이나감 꼬리 마는 중.]
[휘파람지킴이 : 휘파람 어셈블! 모여라! 썩이나감이 휘파람님을 노린다!]
[휘파람뿐이야 : XX새끼 죽여버린다. 휘파람님 지켜!]
월드챗은 어느새 휘파람 부대로 점거당하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주변에 있던 유저들이 나를 보며 딱하다는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내게 굳이 이 상황을 알게 한 사람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
[썩이나감 : 굳이 정확한 주소를 말해 주신 이유는 뭐죠?]
[독고무적 : 뭐일 것 같나.]
[썩이나감 : 가라는 거죠?]
[독고무적 : 네 마음이다.]
말이 좋아 내 마음이지 대놓고 등 떠밀고 있다. 알면 알수록 능구렁이 같으니 상대하기 까다롭다.
[독고무적 : 재밌을 것 같아서.]
[썩이나감 : 이번에도 나 몰라라 하시게요?]
낙오된 화전민의 마을 때처럼 혼자서 감당하는 것은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린다. 특히 상대를 무지성으로 추종하는 유저들이 너무 많았다.
상대가 부른다고 마냥 가고 싶지 않았다.
[독고무적 : 록의 진영이 완벽하게 승리하게 해주지.]
[썩이나감 : 그건 서로 좋은 것 아닙니까? 생색은 내실 필요가 없으실 텐데.]
[독고무적 : 휘파람이 왜 저렇게까지 너에게 집착하는 것 같지?]
두 말할 것도 없이 내가 황금추적자를 비롯한 골드캐시에게 눈에 거슬리기 때문이다.
업계에서 막 이름을 날린 썩이나감 한 명으로 인해 1티어 팀이 고생을 했다는 것 자체가 평판에 엄청난 흠집을 남기기 때문이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그랬으니 이를 바득바득 갈 수밖에 없다.
[썩이나감 : 휘파람이 황금추적자와 깊은 관계라는 것은 확실해지겠죠.]
1구역에서 먼저 통제를 당한 독고무적이니 찌라시가 아니라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독고무적 : 놈들에게는 제대로 복수할 거다. 보수는 톡톡히 지불할거니까 기대하도록.
[썩이나감 : 아가리 벌리고 기대하죠.]
다른 사람도 아닌 독고무적이 말할 정도라면 내 굶주린 주머니 사정을 단번에 채워 줄 건수겠지. 잔뜩 기대하는 마음으로 3구역의 1채널의 광장으로 이동했다.